Swordmaster’s Youngest Son RAW novel - Chapter (665)
제 666화
169화. 원수의 성지로(4)
‘검……?’
얼핏 본 베라딘의 손아귀에는 검을 다루는 자들 특유의 굳은살이 보이지 않았다.
-소가주는 불가하다, 진 룬칸델.
-이유가 무엇인지 궁금하군.
-그 아이는 이제 네가 알던 베라딘 지플이 아니다. 지금은…… 거의 신생아와 같은 상태지.
-신……생아? 알아듣기 쉽게 설명해주면 좋겠는데, 망령대장.
-말 그대로다. 현재 베라딘은 언어를 비롯해 그간 쌓은 지식, 마력, 습관 등과 더불어…… 기억 모두를 잃은 상태다.
불과 얼마 전, 임시 동맹의 첫 회담 당시 옥타비아와 나눈 대화.
모두 유리아가 직접 진실이라고 검증한 내용이었다. 임시 동맹이 첫 회담을 가진 시점에 베라딘은 정말로 폐인이나 다름이 없던 것이다.
‘그 짧은 사이에…… 베라딘에게 변화가 생긴 것인가?’
신생아와 같았다는 모습은 상상조차 하기 어려울 만큼, 베라딘은 무척이나 사무적이고 안정된 태도를 보였다.
절도 있는 걸음걸이로 나아가는 뒷모습에선 어떤 예리함마저 느껴졌고 그와 더불어, 한 익숙한 기운이 포착되고 있었다.
‘오러…….’
1성조차 되지 않을 만큼 무척 희미한 수준이나, 분명히 오러였다. 오히려 마력은 오러보다도 극소량만이 느껴졌다.
마검사.
지플이 그간 저질러온 생체 골렘 실험이 어쩌면 마검사를 만들기 위함일지도 모른다는 예감은, 이미 몇 년 전부터 가져왔다.
그러나 이런 순간에 베라딘을 통해 그 결과물일지도 모르는 상태를 엿보게 될 줄은 몰랐다.
“베라딘 지플.”
“왜 부르지?”
“얼마 전까지 모든 기억이 말소된 채 아무것도 하지 못하는 상태였다고 들었는데, 갑자기 상태가 호전된 모양이군.”
“타인의 도움 없이 생활할 수 있게 된 건 일주일쯤 되었다.”
“나와 단테에 대한 기억은 아무것도 돌아오지 않은 거냐?”
베라딘이 우뚝 걸음을 멈추며 뒤를 돌아보았다.
진은 봉인된 발레리아를 두 팔에 안은 채 천천히 베라딘을 쫓고 있었다.
빠르게 걸을 수가 없었다. 닷새간 이어진 비행 동안 진은 한시도 쉴 틈 없이 발레리아의 봉인을 유지해왔으며, 지금도 마찬가지였다.
마력이 바닥난 건 아니나 정신력 소모가 너무 컸다. 진땀이 나고 있었다.
“너와 검황성주에 대해 참으로 많이들 묻더군.”
베라딘이 진과 나란히 서며 발레리아의 봉인에 손을 얹었다.
그러자 복잡한 봉인 속으로 아무렇지도 않게 마력이 스며드는 모습이 이어졌다. 진처럼 별다른 조치를 한 것도 아닌데 말이다.
“아무것도 기억나지 않는다.”
“그런가.”
봉인 유지를 베라딘이 해주기 시작한 덕에, 진은 한결 편해진 상태로 걸음을 옮길 수 있었다. 진은 베라딘의 능력에 대해 질문을 던지지 않았다.
“하나, 궁금하기는 하더군. 어째서 그토록 많은 사람들이 내 기억을 찾아주려고 할 때, 가문의 일원들이 아니라 너나 검황성주에 대한 이야기만을 했는지.”
두 사람의 보폭이 같아지고 있었다.
“뭐가 궁금했지?”
“이상한 일이지 않나. 검황성주는 몰라도, 너와 내가 속한 가문은 천 년이나 서로 숙적이었던 관계다. 최근 어쩔 수 없이 임시 동맹을 맺었다지만, 그전까진 기회만 있다면 언제든 서로를 멸망시킬 준비가 된 사이였다는 말이지.”
“뭐, 이상하긴 했지. 특히 네 성격이.”
“내가 이상했다고?”
흠칫하며 되묻는 걸 보니, 옛 모습이 조금 남았다는 생각이 들었다. 어쩌면 베라딘이 지금 장난을 치고 있는 것일지도 모른다는 생각도 함께였다.
하지만 그뿐, 굳이 유리아의 검증이 없더라도 지금의 베라딘은 자신이 알던 그 사람이 아니었다.
“그래. 처음 만났을 때부터 너는 이상했다.”
“더욱 호기심이 동하는군. 자세히 알려줄 수 있나?”
“없다.”
진이 단박에 거절하자 베라딘은 아쉬운 듯 어깨를 으쓱였다.
그러다가 몇 분을 더 걸었을 때쯤, 슬쩍 발레리아의 봉인에서 손을 떼는 모습을 보였다.
“알려주지 않겠다면 나도 굳이 호의를 베풀 필요가 없겠다는 생각이 들더군.”
“무슨 대단한 호의라고? 조금 불편해질 뿐, 네가 없어도 봉인을 유지하는 건 문제가 안 돼.”
“흠.”
“게다가 네 행동은 지플이 성지를 개방한 목적에도 부합하지 않는다. 내가 봉인 유지에 실패할 일은 없으나, 세상엔 만에 하나라는 것이 존재하지. 그 경우, 너희 가문이 어떤 반응을 보일지 궁금하군.”
“듣던 대로 꽤 짜증 나는 화법을 구사하는군…….”
다시 발레리아의 봉인에 손을 얹는 베라딘. 민망할 수도 있는 상황이나, 그는 아무런 표정 변화가 없었다.
문 너머, 성지로 향하는 길은 기묘한 풍경을 띠고 있었다.
돌과 각종 금속으로 구성된 평범한 회랑은, 안으로 깊어질수록 흐려지고 있었다.
오르갈의 흐릿한 육신처럼 말이다.
인세에서 볼 수 있는 풍경은 아니었다.
‘아공간으로 진입하는 입구는 따로 없었는데, 어느 순간부터 세상의 경계가 흐려지기 시작하는 느낌인데.’
물감이 씻겨나가듯, 공간을 이루고 있던 색과 질감들이 잔상을 남기고 있었다.
“얼마나 더 가야 하지?”
“알려줄 수 없다.”
“시간을 직접 재는 건 어렵지 않은 일인데, 그런 것도 기밀인 거냐?”
“아니. 성지로 도달하는 시간이 그때그때 다르기 때문이다. 성지가 우리 셋의 방문을 얼마나 환영하느냐에 달린 문제지.”
“거창한 이름만큼 신비한 구석이 있다는 건가.”
“내가 마지막으로 찾아왔을 땐 보름이 걸렸다고 들었다. 기억을 완전히 잃기 전이었다더군.”
“그럼 보름이 걸릴 수도 있는데 식량을 따로 준비하지 않은 것도 이유가 있겠군.”
“그래, 회랑의 잔상이 모두 사라진 뒤부터…… 성지에서는, 허기를 느끼지 못한다. 오히려 걸을수록 몸이 가뿐해지기만 하지.”
그 말처럼 진은 ‘경계’를 넘은 후부터 빠르게 체력이 회복되는 걸 느끼고 있었다. 봉인을 유지하느라 어지럽던 머릿속 역시 한껏 맑아진 상태였다.
그래도 진은 걸음을 헤아려 시간을 계산해보고 싶었으나, 이상하게 몸과 정신이 충만해질수록 ‘시간’이라는 개념은 희미해졌다.
걸음당 1초라고 뭉뚱그려 계산하는 것조차 어려워진 것이다. 몇 번만 헤아려도, 진은 다시 1초를 세고 있었다.
‘성지와 인세 사이의 시간에 괴리가 있기 때문인가, 다른 아공간처럼. 기묘한 감각이긴 하군.’
그러니 얼마나 걸었는지는 알 수 없으나, 두 사람은 곧 저 멀리 한 줄기의 녹색 빛을 발견할 수 있었다.
‘잔존 기운이다.’
오르갈의 강철문을 통해 엿본 바로 그 기운이었다. 물속처럼 어둑하고 흐릿한 풍경 속에서, 잔존 기운만이 힘차게 광휘를 드러내고 있었다.
“다 왔군.”
녹빛 기운 앞에 선 두 사람은 약속이라도 한 듯 동시에 그 기운에 손을 갖다 댔다.
그러자 난데없이 온 세상에 불이 켜진 듯, 순식간에 사방이 푸르게 물드는 모습이 이어졌다.
오르갈이 보여준 ‘몇백 년쯤 전의 성지’와 하나도 다른 점이 없었다.
녹색으로 빛나는 바다, 혹은 사막 같은 풍경.
“이제 히스터의 봉인을 풀어라. 히스터가 회복되는 즉시 성지를 빠져나갈 것이다.”
막상 성지에 도달하고 봉인을 해제하려니 불안감이 솟구쳤다.
만일 성지의 잔존 기운이 발레리아에게는 아무런 효과가 없다면? 그녀를 다시 봉인할 방법이 없다면?
그런 의문에 일순 마음이 어지러워지려는 찰나, 진은 봉인 속 발레리아가 미동한 것을 확인했다.
발레리아는 봉인을 풀기도 전에 성지의 잔존 기운에 반응하기 시작한 것이다.
창백한 봉인이 벌써 녹빛으로 물들어가고 있었다.
“여기까지 와서 별걱정을 다 하는군.”
진의 속내를 꿰뚫어 본 듯 베라딘이 말했다.
“네 말대로, 나와 네 가문은 불구대천의 원수다 보니.”
“우리가 그런 룬칸델의 적자에게 성지를 개방하면서까지 히스터를 살리려는 건 다 이유가 있다. 누구보다도 잘 알지 않나?”
“꼭 이 자리에서 히스터를 회복시킨 후 나를 처리하겠다는 의미로 들리는군.”
“그렇게 하자고 주장한 이들이 꽤 있었지.”
“옥타비아와 카둔인가?”
“아니, 주로 원로들이었다.”
진은 적지, 그것도 적의 최심부에 부상을 입은 발레리아와 단둘이 찾아왔다.
-오직 나만이 로사를 상대할 수 있다고 하니 어깨가 좀 무거워지는군. 킨젤로는 그래도 오르갈의 회복이라는 변수가 있는데, 지플엔 비장의 수가 전혀 없소?
-……있습니다.
-적이 숨겨진 전력을 갖고 있다는 게 이렇게 기쁘게 들릴 줄 몰랐군. 무엇인지 말해주시오. 이건 대답해줘야 하는 문제인 것 같군. 공공의 적을 상대하기 위함이니.
-역사 조작입니다. 그러나, 당신의 아군인 히스터의 생존자가 없이는 절대로 실현할 수 없는 수단입니다.
임시 동맹 첫 회담 당시, 로닐은 지플이 ‘역사 조작’을 통해 로사를 상대할 수 있다고 말했었다.
그러니 사실 진이 지금 이 자리에 찾아온 건 미친 짓이다. 발레리아가, 또는 동료가 아니었다면 절대로 하지 않았을 선택이었다.
이곳에선 붉은부엉이나 모트의 도움을 받아 탈출할 수도 없다.
지플이 약속을 지키지 않으면 진은 필연적으로 절체절명의 위기에 빠지게 될 수밖에 없는 것이다.
“하지만 아버지가 직접 반대하셨지. 그 이유가 궁금하지 않나?”
“로사를 상대하는 일에 나를 계속 써먹어야 하기 때문이겠지.”
지플은, 그리고 킨젤로는. 유일한 혼돈 면역자인 자신을 이 시점에 잃고 싶지 않을 터였다.
그렇기 때문에 칼드란 설원에도 각 세력 최고 수준의 인력들이 직접 지원을 나온 것이고 말이다.
진이 적지 한가운데로 들어서며 그나마 믿는 것은 바로 그 사실과 자신의 무력이었다.
“정확해, 그리고 내 생각도 같았다. 우리가 히스터를 통해 역사 조작을 완성할 수 있는 시간이, 흉신이 완전히 각성하는 시점보다 빠르기는 어려울 것 같아서 말이지. 현시점에, 넌 분명 우리 가문에게도 히스터보다 중요한 패다.”
거짓인지, 진실인지 알 수 없으나 베라딘은 이제 역사 조작에 대한 건 딱히 숨길 이유가 없다는 식으로 말하고 있었다.
“지플에 내가 가장 중요한 패라, 기분 좋게 들리지는 않는 말이로군. 안내역이 네가 아니라 다른 사람이었다면, 이 대목에 한 대쯤은 내게 맞았을 것이다.”
진이 천천히 발레리아의 봉인을 풀기 시작했다. 베라딘의 말을 모두 믿기 때문은 아니었다. 어서 계획대로 그녀를 회복시키고 떠나는 게 좋겠다고 판단했을 뿐.
“그리고, 진 룬칸델.”
“왜?”
“내가 기억을 잃기 전, 너와 약속을 한 게 하나 있더군.”
“약속?”
“언젠가 네가 우리 가문에 예고 없이 찾아오더라도 한 번은 내가 살려주겠다는 내용이었다.”
-여기가 연회장인 걸 감사히 생각해라.
-크크, 너무 박대하는 거 아니냐. 나도 알아, 네 아버지가 숙부께 자비를 베풀었다는 걸. 말이 나온 김에, 나도 한 가지 약속하지. 언젠가 네가 지플의 연회에 예고 없이 찾아와도 해하지 않겠다.
그건 진이 예비 기수가 되기 직전에 열린 외나무다리 파티에서 나눈 대화였다.
베라딘은 그 대화를 기억하는 게 아니라, 얼마 남지 않은 일기장 속의 기록을 말하는 것이었다.
“심지어 네가 우리 가문 내에서 테러를 일으켜도 반드시 한 번은 살리겠다고 적혀 있었으니, 내가 너와의 관계를 궁금해할 수밖에 없지 않았겠나?”
“아까 옛날의 너는 이상한 놈이었다고 했지? 우리가 그 얘길 나눴을 땐 딱히 친하지도 않을 때였다. 정확히는 친구조차 아니었지.”
“그럼 그때의 나만 친구로 생각한 모양이군. 어쨌거나 그 약속을 지금 지키겠다고 말하면, 경계심이 조금은 풀어지겠나?”
진은 그 말에 씁쓸한 기색을 억누르며 이렇게 답했다.
“썩 신뢰가 가지는 않지만, 듣기에 기분 나쁜 이야기는 아니로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