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wordmaster’s Youngest Son RAW novel - Chapter (837)
제 888화
209화. 테마르의 일곱 번째 무덤 – 케이탐의 그림(11)
전생에도, 다시 태어나서도.
진이 고른 검은 바리사다였다. 물론 선택 의식 이후로 바리사다를 만져본 적은 단 한 번도 없으나, 진은 마치 검이 늘 자신과 함께였던 듯 손에 맞는 감각을 느꼈다.
비록 그림으로 만들어진 일종의 모조품이라 할지라도 지금 바리사다는 현실의 물건과 다르지 않았다.
그리고 검은 진을 인정하고 있었다. 그가 자신의 주인이 될 자격이 있음을, 그가 자신을 휘둘러 적을 섬멸할 수 있음을.
‘문득 예비 기수 생활을 끝낸 날이 생각나는군.’
시론은 진이 기수가 되기 위해 가문으로 돌아온 날, 오의 윤회의 변형을 선보였었다.
극도로 느린 검.
그러나 피할 수 없는.
[바리사다……!]가짜가 두 눈을 부릅뜨며 암흑도래를 진에게 집중시켰다. 십대기사들과 무라칸에게 적용되고 있던 죽음의 권능이 모조리 진을 향하고 있었다.
그러나 고통은 아무리 커져도 그를 멈추게 만들 수 없다.
흐트러뜨릴 수도 없으며, 작은 방해조차 할 수 없었다. 가짜가 암흑도래를 통해 진의 죽음을 바라고 있듯이, 진은 검으로 놈을 베기를 바라고 있었다.
어느 쪽의 투쟁심이 더 깊고 강대한지는 재볼 필요조차 없을 것이다. 가짜가 확정한 죽음은 빠르게 희미해졌고, 진의 검은 점점 선명해졌다.
‘어째서 피할 수가 없는가……!’
가짜는 한 걸음씩 다가오는 진의 검을 이해할 수가 없었다. 사슬에 묶인 듯 몸이 뜻대로 움직이지 않았다.
“끝이라고 말하지 않았나, 가짜. 그러니 이해하려 애쓸 필요 없다.”
진은 놈의 심정을 훤히 알아보고 있었다. 오로지 누군가의 도움 없이 한계를 초월한 자들만이, 윤회를 마주하고도 투지를 불태울 수 있었다.
가짜에겐 해당하지 않는 이야기였다. 그 자체로 허상에 불과한 존재가 윤회에 맞설 수는 없는 것이다.
진은 한 걸음씩 천천히 가짜를 향해 나아갔다.
놈에게 닿기 전에 먼저 한 번 휘두른 검이, 암흑도래를 이루고 있는 영기를 잘라내고 있었다. 어두운 동굴 벽이 허물어지듯 암흑도래의 영역이 좁아지고 있었다. 새하얗게 빛나는 바리사다가, 길을 열고 있었다.
새하얀 검기가 원형으로 끝도 없이 펼쳐지며 암흑도래를 지워나갔다. 그 또한 느렸으나 마찬가지로 가짜는 피할 수 없었다.
조금만 더 거리가 있었다면, 가짜가 ‘무적’이라는 자아도취를 벗어나 현실을 직시했다면.
어떻게든 발버둥을 쳐서 다시 암흑도래 속에 몸을 숨길 기회가 한 번쯤은 있었을 것이다. 자신의 의지로 투쟁해 얻은 것이 아니더라도 가진 힘은 분명 창성에 닿아 있었으니까.
“이렇게 되기 전에 도망쳤어야지.”
진은 가짜가 한 말을 그대로 되돌려주며 두 번째 검을 휘둘렀다.
종으로 내리쳐진 검이 가짜의 흉부를 갈랐다. 놈은 심장을 지키기 위해 악착같이 그곳을 보호했으나 갑옷처럼 형성된 영기도, 비늘도, 뼈와 살점도 모두 덧없이 잘려 나갈 뿐이었다.
검게 번들거리는 놈의 심장이 나타났다. 이미 여기저기 깨지고 금이 간 모습이었다.
[아니…… 이럴 수는 없다. 나는 무라칸이다. 천 년 전의 무라칸이 되었단 말이다. 만물이 그토록 경외하던 존재가! 아직 창성에 이르지도 못한 네놈 따위에게 당할 수는 없어……!]“밑천이 드러나니 본색이 나오는군. 네놈이 아니라 저 녀석이었다면 이 정도는 얼마든지 쳐냈을 것이다. 진짜 창성의 격이었다면 말이지.”
[죽여주마!]가짜는 모든 걸 걸고 마지막 발악을 펼치고 있었다.
심장을 유지하고 있는 영기까지 모두 암흑도래를 강화하는 일에 사용하기 시작한 것이다. 걷혔던 어둠이 다시 채워졌고, 바리사다는 일순 빛을 잃는 듯 보였다.
포효하며 펼친 두 쌍의 날개에선 쉴 새 없이 흑쇄가 쏟아졌고, 소용돌이치는 영기는 당장이라도 진을 집어삼키고 찢어버릴 것 같았다.
“부질없는 짓을.”
하지만 진은 그조차 세 번째 검격, 단 한 번의 종 베기로 깨뜨려버렸다. 위협적으로 쏟아지던 흑쇄는 바리사다의 칼날에 흡수되어 새하얀 입자로 흩어졌고, 어둠은 오의가 처음 펼쳐진 순간보다도 더 거대한 덩어리로 베어졌다.
가짜는 여전히 거리를 벌리지 못한 채 심장으로 다가오는 바리사다를 마주해야만 했다.
“잠깐 솔깃하게 만드네, 이 새끼가. 그런데 어쩌지, 금방 네놈 죽이고 오겠다고 저 녀석에게 약속을 해서.”
[이 그림은, 이 세계는 오염으로 인해 변질되었어! 난 그 핵심이다. 나를 죽이면 세계 전체가 무너질 수도 있다……! 내가 죽으면 네놈도 영원히 이곳에 갇힐지 모른다. 변질된 세계에선 무엇이든 벌어질 수 있단 말이다.]가짜는 결국 가짜였다.
아무리 무라칸을 닮았다 한들, 놈과 진짜 그 시절의 무라칸 사이엔 결코 넘을 수 없이 아득한 격차가 존재했다. 애초에 창성은 결코, 빚어질 수 없는 존재였다. 그 어떤 신도 창성의 격을 지닌 존재를 마음대로 만들 수는 없었다.
“그건 내가 알아서 하마. 네놈을 만든 놈도 알아서 찾아 죽이도록 하지. 더 듣기도 역겨우니 이제 소멸해라.”
프차아악-!
네 번째 검격, 곧고 느린 찌르기가 가짜의 심장을 관통했다. 놈의 심장을 찌르자마자 암흑도래의 검은 풍경이 한꺼번에 지워졌다.
놈은 날개를 휘저으며 바들바들 온몸을 떨었다.
[크어…… 억…… 후회……하게…… 될, 거다…… 진…… 룬칸델! 여길…… 오지 말았어야 해, 네놈은.]가짜의 말대로.
심장이 파괴되어 영향을 받는 건 암흑도래뿐만이 아니었다. 다시 보이기 시작한 무너진 폭풍 성의 풍경도, 어느새 폭풍우가 개고 달빛이 환하게 흐르는 하늘도 불안정한 진동에 휩싸이고 있었다.
진은 망설이지 않고 검을 비틀어 놈의 심장을 완전히 파괴했다. 검은 조각이 사방으로 흩어지며 흔적도 없이 사라지는 모습이 이어졌다.
이제 가짜의 기운은 전혀 느껴지지 않았다. 놈이 가짜에 불과한 존재라는 걸 증명이라도 하듯이, 허망한 소멸이었다.
진이 오의를 거뒀다. 한 움큼 핏물을 뱉어내기는 했으나 치명적인 부상은 없었다.
‘놈이 이 세계의 핵심이라는 건 사실인가 보군. 아공간 전체가 당장이라도 꺼질 듯이 위태로워진 느낌이다.’
불안하진 않았다. 영검으로 아공간을 찢고 탈출하든, 그냥 무력으로 버티면서 수를 찾든 분명 방법이 있을 터였다. 애초에 그런 게 걱정이었다면 들어오지도 않았을 것이다.
다만 처음엔 무라칸과 함께여서 다소 대책이 없어도 괜찮다는 생각이었으나, 돌아보니 그는 여전히 괴로워하고 있었다.
오히려 가짜가 소멸하기 전보다 상태가 더 좋지 않았다.
‘가짜라는 오염이 제거된 결과로…… 무라칸이 거부하고 있던 기억이 더 밀려들고 있는 건가……?’
진은 무라칸과 십대기사들의 곁으로 돌아갔다. 무라칸이 흘린 새카만 눈물이 웅덩이를 이루고 있었다.
드라낙스와 비올로는 쓰러진 프레이를 다독이며 그녀의 의식을 붙잡고 있었다. 가짜가 소멸하며 암흑도래의 권능도 사라졌으나, 프레이가 살아남을 수 있는 방법은 없었다. 암흑도래에 타격을 받기 이전에도 그녀는 이미 치명상을 입은 상태였다.
“진…… 룬칸델…….”
프레이가 진을 올려다보았다.
“……예, 선조 님. 바멀은 가명이고, 그게 제 본명입니다. 혼란을 드릴 것 같아 감히 속일 수밖에 없었습니다.”
“뭔가 이상하다는 건…… 처음부터 느꼈어요. 다만…… 의지하고 싶더군요. 이제 보니, 우리가 거부했어도…… 당신들은 우릴 도왔을 거고요.”
“프레이, 말하지 마. 의식 붙잡고 숨을 쉬는 일에만 집중해, 우리가 곧 치유사들에게 데려…….”
“드라낙스…… 비올로. 우린 아마도, 가짜 무라칸과…… 비슷한 존재에요. 다만 가짜는 무언가를 훼손하기 위해, 우린 지키기 위해 이 자리에 있던 거죠. 다들 느끼고 있지 않나요? 친구들이여…….”
프레이는 어렴풋이 자신들이 살고 있던 세계의 진실을 알아보고 있었다. 세계가 무너지기 시작하며 본래 그림 속 존재들이 알아선 안 될 정보들이 그들의 뇌리로 흘러들어오고 있었다. 드라낙스와 비올로는 대답하지 않고 질끈 눈을 감았다.
십대기사들은 다른 동료들이 외부 임무에서 돌아오지 않던 것도, 가짜가 그토록 활개를 치는데도 지원군이 없던 것도.
이곳이 결국 천 년 전의 일부를 재현한 세계이기 때문이라는 사실을 깨닫고 있었다.
“하지만, 진 룬칸델. 우리와 달리 당신과 무라칸은…… 우릴 배신한 줄 알았던 저 바보 흑룡은. 현실을 살아가는 존재들이겠죠…… 당신을 겪어 보니 우리가 끝내 지켜낸 땅이…… 여전히 우리의 것이라는 확신이 듭니다. 천 년이라, 긴 시간이 흘렀군요…….”
“빌어먹을, 저 흑룡 놈은 왜 계속 저러는 거야. 야! 프레이나 나나 비올로나 이제 곧 다 소멸하게 생겼어. 정신 차리고 인사라도 안 할래? 우린 천 년 전에 죽었으니 다시는 못 만나, 이 자식아!”
“그래, 무라칸. 우리 둘은 몰라도 네가 프레이를 이렇게 보내는 건 안 될 말이지. 와서 프레이가 못 했던 고백이라도 들어.”
“아니…… 비올로…… 이 상황에 갑자기 무슨 개소리를 하시는…….”
프레이가 발끈한 찰나, 무라칸이 인간으로 변하며 터덜터덜 진과 십대기사들에게 다가왔다.
그는 쓰러지듯 머리를 땅에 박고는 넋이 나간 채 같은 말을 반복했다.
“미안…… 미안하다, 얘들아. 내가 너흴…… 너흴 죽였어. 가문의 기사들을, 사람들을 죽였어. 다, 내가 저지른 짓이었다…….”
그래, 무라칸.
전부 네놈이 저지른 짓이다.
그 순간, 어디선가 낮고 어두운 목소리가 들려왔다.
진도, 무라칸도, 십대기사들도 모두 들어본 적이 있는 목소리였다. 진은 솔더렛이 남긴 과거의 기록 영상들로부터, 나머지는 직접 그와 지내며 들었던 목소리.
테마르 룬칸델이었다.
널 믿었던 동료들을 그토록 무참하게 살해하고…… 이제는 나까지 처리하려는 것이냐? 그것이, 솔더렛과 너의 결정인가? 천 년의 계약자를 위한?
이어진 테마르의 말이 한층 더 선명해지며 풍경이 바뀌고 있었다.
그림이 오염되기 전, 케이탐이 담았던 천 년 전의 진실이 나타나고 있는 것이다. 무라칸은 얼굴이 새하얗게 질린 채 고개를 두리번거렸다.
테마르가 천 년 전의 자신을 노려보는 모습이 보였다. 무라칸은 그 원한에 찬 눈동자를 똑바로 바라볼 수 없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