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wordmaster’s Youngest Son RAW novel - Chapter (863)
제 888화
215화. 신과의 재회(5)
투자드가 구체를 몸에 박자마자 아공간의 풍경이 변화하기 시작했다.
폭풍은 한층 더 거세졌고, 천둥 번개를 이룬 뇌기는 더욱 짙어졌다. 투자드의 몸에 난 상처들에서도 피가 아닌 뇌기가 흐르고 있었다.
진은 짜증이 치솟았다.
‘그람의 기운이라, 사용할 수 있는 것이었나?’
진은 그람의 기운을 사용하는 건 염두에 두지 않고 페이텔을 찾아왔다. 투자드를 상대하느라 무라칸과 페이텔의 대화를 듣지 못했으니 그람의 기운이 사용 가능한 형태로 존재한다는 것도 방금 알게 되었다.
그래서 짜증이 나는 것이다. 황금 함대와 라프라로사 해방을 위해 조금이라도 도움이 될 수 있는 요소는 다 아쉬운 상황인데, 그걸 지금 투자드가 쓰고 있으니 말이다.
카이만과 트락스, 루진과 친은 망연자실한 얼굴로 투자드를 노려보았다.
[끝장이 나려면 혼자 끝장나지, 이게 대체 무슨 짓이냐?] [그람의 기운이라도 회수해서 빠졌으면 되는 걸, 왜 일을 더 망치는 것이오, 투자드. 그대가 전권을 위임받은 건 우리 중 가장 강하기 때문이나, 그만한 판단력 또한 있다는 가정이 있었기 때문이오……!]미친개라 불리던 트락스조차 투자드의 선택을 이해할 수 없어 고래고래 소리를 질렀다.
[신의 힘을 사용하는 건 처음이로군. 그러나 이 힘을 사용한다고 하여 너를 이길 수 있으리라 생각하진 않는다. 다만 쾌락을 누릴 수 있는 시간이 더 늘어나는 것만으로도 그만한 가치가 있지.]투자드야말로 진짜 광기를 가진 인물이었다. 그는 싸움의 승패는 중요치 않고, 그저 얼마나 더 재밌게 싸울 수 있는가가 가장 중요한 인간이었다.
“저쪽에서 영생 운운하는 걸 보니 그런 약속을 받은 모양인데, 그걸 포기하면서까지 단지 쾌락을 즐기겠다? 이길 수 없다는 확신까지 있는 상태에서.”
[너는 그런 경험이 없는가? 질 줄을 알면서도, 죽을 줄 알면서도 싸우러 간 일이.]물론 진에게도 그런 경험이 여럿 있었다.
그러나 개인적인 쾌락을 위해 그런 적은 없다. 언제나 신념을 지키기 위해, 자신의 뒤에 있는 사람들을 위해 그런 선택을 했었다.
“뭐, 사람마다 생각과 가치는 다른 법이니. 하지만 아군을 궁지로 몰면서까지 본인의 즐거움을 우선하는 모습은 썩 보기 좋지 않군요. 내게 필요한 물건을 훼손한 것도 그렇고.”
진의 눈동자가 날카로워졌다. 그로부터 퍼지는 흉흉한 살기에 망령들은 피부가 아릿해지는 감각을 느꼈다.
“루나 누님, 룬티아 누님.”
“어떻게 할까?”
“최대한 빠르게 맡은 놈들 정리하고 제게 합류하세요. 이만하면 옛 검들은 충분히 감상한 것 같군요.”
루나와 룬티아가 고개를 끄덕였다. 크란텔과 도끼 검엔 오러와 더불어 마력이 함께 깃들었다.
[이봐 무라칸, 너도 나서야 하는 것 아니냐? 그람의 기운은 쉽게 볼 게 아니다. 너무 여유를 부리는 게 아닌가 싶은데.]페이텔이 걱정스럽게 내뱉은 말에 무라칸은 코웃음을 쳤다.
“그람 그 양반 본인이 여기 있었다면 그렇게 했어야겠지. 근데 겨우 잔존 기운으로 강해진 건, 아무런 의미가 없어.”
아무런 의미가 없다.
무라칸의 말처럼, 진과 기수들은 진심으로 그렇게 생각했다.
투자드가 전투 중 자신의 벽을 하나 부수며 깨달음을 얻었다면 긴장할 필요가 있었을 테지만, 그저 힘이 강화된 건 전혀 위협적이지 않았다.
그런데도 진이 기수들더러 빠르게 끝내고 합류를 하라고 말한 건, 투자드의 쾌락을 최대한 억제하려는 이유였다.
스겅-!
크란텔이 트락스의 오른팔을 베어내며 일섬을 남겼다. 카이만과 트락스는 투자드로부터 퍼지는 그람의 뇌기 때문에 더욱 위축된 상황이었다.
“트락스, 네놈에겐 조금 더 고통을 주고 싶었다. 감히 룬칸델의 아이들을 해한 죄는 이백 년이 아니라, 이천 년이 지나도 지워지지 않음이니. 그러나 영생에 들지 못하게 되었으니, 어차피 네놈은 오늘 이후 어딘가에서 계속 고통을 받을 테지.”
[젠.]장, 트락스는 그 한 글자를 이어 말하지 못하고 목이 떨어지고 말았다. 이어 루나는 남은 카이만을 끝장내고는 크란텔에 묻은 피를 털어냈다.
루진과 친 역시 룬티아에게 더는 저항할 힘이 남아 있지 않았다.
조금 전에 공방을 주고받으며 몇 번쯤, 룬티아에게 회심의 일격을 꽂기는 했으나 그조차 아무런 타격이 없던 것이다. 쿠라노의 방벽이라 불리던 격투가도, 권제라 불리던 전설도 룬티아의 강체엔 흠집조차 낼 수 없었다.
“좋은 시대에 태어나 이름을 드높이다 죽었으면 그것으로 만족할 것이지, 뭐 좋은 꼴 보겠다고 다시 살아나서 이런 수모를 겪는 건지 모르겠군. 악감정은 없으나, 처음에 우리 소가주가 기회를 줬을 때 물러나지 않은 건 룬칸델을 모욕한 일이다. 그 대가는 죽음뿐이지.”
샤를의 칼날에 루진과 친도 숨통이 끊어졌다.
남은 건 그람의 기운으로 강화된 투자드 한 사람. 진은 투신기 멸절을 펼치며 이미 투자드를 압박하고 있었다.
‘투자드는 뇌기를 전혀 사용할 줄 모른다. 그런데도 이런 파괴력이라니, 구체를 회수해서 이 기운을 살릴 수 있으면 좋겠는데.’
루나와 룬티아까지 가세하니 투자드가 원했던 그림은 망가질 수밖에 없었다.
그는 진과 일대일로 진하게 검을 주고받으며 최후를 맞이하는 걸 원했던 것이다. 시그문드와 크란텔, 샤를에 마구잡이로 난자되는 것이 아니라.
페이텔은 세 사람이 투자드를 압도하는 모습을 보며 또 한 번 충격을 받았다.
[……분명 형님의 기운이 저 벌레를 한계까지 강화시켰는데. 이럴 수가 있나?]“애초에 꼬마 녀석 혼자여도 저 투자드라는 녀석쯤은 10분이면 패 죽일 수 있어. 내가 예전에 물어 죽인 아틸라의 가주는 그래도 긍지가 있는 놈이었는데, 저놈은 유치하네. 쾌락이 어쩌고저쩌고, 하여간 맞아야 해.”
심지어 진은 명왕군림검이나 마검 비기 같은 비장의 수를 사용하지도 않고 있었다.
그런 검을 보여줄 가치가 없는 상대이기 때문이었다. 천둥 신이 강림한 듯 사납게 변한 아공간의 풍경도, 그람의 기운 때문에 마치 명왕족처럼 모습이 변한 투자드도. 진과 기수들 앞에선 한없이 초라하게만 보였다.
투자드는 즐겁게 싸우기 위해 영생마저 포기했으나.
진과 루나, 룬티아 세 사람은 무감한 얼굴로 ‘일’을 하고 있을 뿐이었다. 때문에 투자드와의 전투는 진보다 루나와 룬티아가 더 많은 지분을 차지하고 있었다.
소가주의 명을 받드는 게 기수들의 일이니 말이다.
[크허억……!]결국 루나와 룬티아는 채 5분이 지나기도 전에 투자드를 완벽하게 제압해서 진의 앞에 무릎 꿇렸다.
더 이상 투자드의 얼굴에선 쾌락에 취한 자의 광기를 찾아볼 수 없었다. 그렇다고 후회에 찬 것도 아니지만, 예상보다 훨씬 초라한 결과에 허망해하는 모습이었다.
“이제 투신이라는 이명은 내려놓고, 원하던 대로 소멸하면 되겠군.”
진이 투자드의 가슴팍에 박힌 구체로 손을 뻗자, 투자드가 그를 올려다보았다.
[……그람의 기운이 필요한 모양이지?]“그렇소.”
[이 장치는 이미 나와 완벽하게 동화되었다. 억지로 빼내면 파괴될 것이다.]“상하지 않게 빼내는 방법이 있소?”
[나와 한가지 약조를 한다면 내가 직접 동화를 해제하고 네게 넘겨주겠다.]“무엇을 원하오?”
[룬칸델 소가주의 명예를 걸고 약속해다오. 내가 이 검을 주면 일대일로, 아주 진중하게 나와 다시 싸워주겠다고. 그것이면 나는 충분하다.]“정말 머리가 어떻게 된 선배시로군.”
진으로서는 받아들여야 하는 제안이었다.
투자드를 신뢰할 수는 없지만, 그와 일대일로 붙는 게 그다지 힘든 일은 아니니 밑져야 본전이라는 마음이었다.
물론 찝찝한 마음이 들기는 했다. 투자드의 쾌락을 위해 이용당한다는 기분을 지울 수가 없었다.
그러나 진이 고개를 끄덕이려는 찰나, 페이텔이 후다닥 진의 옆으로 달려와 자리를 잡았다.
[흠흠, 진! 그 벌레의 청을 들어줄 필요 없다.]“페이텔?”
[형님의 기운이 담긴 물건은 내가 회수할 수 있어. 애초에 형님의 기운을 내가 흉내 낼 수 있기 때문에 여기 숨을 수 있던 것이니, 내가 잘 회수해서 넘겨주마.]페이텔은 진 일행이 싸우는 모습을 보며 마음을 고쳐먹고 있었다.
처음엔 인장을 사용해 진을 돕겠다고 맹세한 게 억울했으나, 다시 생각해보니 이건 호박이 넝쿨째 굴러들어온 상황이었다.
‘어차피 인장 때문에 약속은 지켜야 한다. 그러나 행여 이 녀석들 눈 밖에 나면 나는 오갈 데 없는 신세가 되겠지. 지플에게 은신처가 걸렸으니, 룬칸델과 바멀 연합에게 도움을 받지 못하면 소멸을 면치 못할 것이다.’
신으로서의 체면 따윈 이미 진이 예비 기수일 때 청새 군도에서 박살이 났다. 앞으로 진의 보호를 받기 위해선 자신이 하나라도 더 쓸모가 있다는 사실을 보여주어야 한다는 게 페이텔의 결론이었다.
[페이텔, 이 개자식이 무슨 소리를……!] [벌레 놈이 어디 소리를 질러. 네놈이 형님의 힘을 통제할 수 있다는 개소리를 내가 믿을 줄 알았더냐? 감히 우리 바멀 연합 총수를 속이려 들어?]“……우리 바멀 연합?”
[율리안과 칼토르가 바멀 연합이니 나도 자연스레 연합원이 되는 것 아니었냐? 아니라면 정식 절차를 알려다오. 성실하게 수행할 테니. 난 지금부터 너희 편이 되기로 마음을 먹었다. 그, 옛날 일은 잊고 받아만 준다면.]율리안과 칼토르는 왠지 부끄러워서 고개를 숙일 수밖에 없었다.
진은 페이텔의 속내를 알아보고 씨익 미소를 지었다.
“잘 생각했군, 페이텔. 아니, 페이텔 님. 이제부터 페이텔 님은 정식으로 연합에 소속된 신입니다. 과거는 다 묻어두도록 하죠. 그람의 기운을 어떻게 빼낼 생각입니까?”
[이 벌레를 한 시간 정도만 이렇게 제압해다오, 그러면 안전하게 꺼낼 수 있다. 찝찝한 지플의 장치도 필요 없어. 내가 지금 그릇을 하나 만들어서 거기에 넣으면 돼. 뇌궁 하르밀라 알지? 그런 무기를 만드는 것에 비하면 아주 간단한 작업이다.] [닥쳐라, 페이텔! 왜 갑자기 나서서 일을 망치는 것이냐!] [그럼 내가 방금 너희 벌레들한테 뒈질 뻔했는데 네놈 좋은 일을 할까? 날 구해준 우리 총수를 성심성의껏 돕는 게 맞지. 입 다물고 가만히 있어라, 형님의 기운을 다 빼낸 다음엔 어련히 총수께서 널 소멸시킬 테니.]진이 페이텔의 의견을 받아들이자 투자드는 결국 이성을 잃고 악을 써댔다. 그러나 자신을 붙잡고 있는 루나와 룬티아의 손아귀 때문에 미동조차 할 수 없었다.
이내 페이텔은 투자드의 앞에 앉으며 진을 향해 척, 엄지를 치켜들었다.
[대충 들어보니 권능을 실체화하는 내 능력이 필요한 모양인데, 앞으로 무엇이든 다 만들어 보마. 잘 부탁한다, 총수! 그리고 무라칸과 루나, 룬티아, 다른 벌…… 아니, 친구들.]악연 가득한 신과의 재회는 그렇게 선연으로 뒤바뀌며 마무리가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