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wordmaster’s Youngest Son RAW novel - Chapter (977)
제 999화
242화. 엘티엇(1)
메이실에서의 전투가 끝나고 이틀이 지났다.
그간 바멀 연합은 루테로 연방의 무인도의 은신처에 황실이 남긴 각종 장치들과 청명족 시신들을 티칸으로 옮겼다.
그 과정에 붉은부엉이와 모트가 스무 번 넘는 공간 도약을 했는데, 다행히 지플에 노출은 되지 않았다.
옮길 수 없을 만큼 거대한 시설들은 모두 파괴했다. 태양신교가 아이란 비먼트를 챙겼으니, 내버려두면 그들이 유용하게 사용할 가능성이 높기 때문이었다.
“아마 루크라는 놈이 그렇게 큰 부상을 당하지 않았다면 전리품을 챙기기 쉽지 않았을 것이다.”
“제 생각도 그렇습니다, 아메리스 님. 그래도 청명족 이동 장치를 통째로 가져오지 못한 건 아쉽군요. 여러모로 도움이 될 것 같았는데.”
적명족보다는 떨어진다고 하나, 청명족의 공간 도약은 현재를 훨씬 앞지르는 기술이다.
진은 그게 어쩌면 라프라로사의 형제들을 꺼낼 수 있는 단서가 될지도 모른다는 기대를 가졌었다.
“그래도 핵심으로 추정되는 일부 부품은 챙겨왔으니, 콰울과 발레리아가 잘 분석하면 뭔가 도움이 되기는 할 것이야.”
진이 고개를 끄덕였다.
아쉽다 말하고 있으나 사실 이번 메이실 전투에서 바멀 연합은 어떤 세력보다 많은 실리를 챙겼다.
심지어 적명족이나 황실, 태양신교와는 달리 아무런 피해도 받지 않았다. 적명족은 엘로나에게 4도시와 우스를 잃은 것도 모자라 메이실에서도 함대 다수를 잃고 공중요새 2기도 일부 손상되었다.
황실은 아이란 혼자 살아남아 사실상 멸망해 태양신교에 흡수되었고, 태양신교는 루크가 치명상을 입었다.
‘루크…… 다음에 그자와 싸울 땐, 이번처럼 편할 수 없을 테지.’
명왕족 옛 투신 루크.
진은 그의 무위를 떠올리며 생각에 잠겼다. 아무런 조건 없이 그와 온전히 일대일로 싸운다면 이길 수 있을지, 얼른 가늠이 되지 않았다.
승자가 누가 됐든 그 또한 죽기 직전까지 몰릴 것이다. 진은 그를 파엘리토 이상의 강적이라 생각하고 있었다.
‘루크든, 엘로나 경이든. 창성급 존재와 일대일로 싸우는 건 언제나 되도록 피해야 한다. 일단 그자와 태양신교에 대해 더 알아봐야겠어.’
거기까지 생각한 찰나 제트가 진을 찾았다.
“나으리! 그 청명족 양반이 깨어났습니다요.”
“오. 루나 누님께 연락을 드려라, 직접 만나보고 싶다 하셨으니.”
“알겠습니다, 나리!”
지난 이틀 내내 엘티엇은 의식을 찾지 못했다. 진과 아메리스는 곧장 의료실로 찾아갔다.
엘티엇은 침대에 앉은 채 공허한 얼굴로 창밖을 바라보고 있었다.
“엘티엇, 고대 청명족 투신. 드디어 깨어났군.”
“너는…….”
엘티엇은 진을 몰라본 듯 고개를 갸웃했다.
“날 기억하지 못하는 건가? 구해줄 땐 형제라고 부르더니.”
“그리고 나는, 누구지?”
“하?”
“여긴…… 어디지?”
“엘티엇, 그게 무슨 소리냐. 아무것도 기억나지 않는 것이냐? 나를 봐라, 아메리스다. 너희가 그토록 증오하던.”
“아메리스……? 아무것도 기억나지 않는다…….”
아메리스가 헛숨을 내뱉으며 엘티엇에게 다가갔다. 그러곤 그의 얼굴을 붙잡고 맥을 짚으며 요모조모 살폈다.
“맥은 놀라울 정도로 안정적이고, 광심장에서 느껴지는 힘도 웅혼하건만, 기억에 문제가 생긴 건가.”
“우우우.”
“이런…… 한때 온 세상을 두렵게 만든 위대한 존재가, 이토록 씁쓸한 신세가 되고 말았구나.”
아메리스는 마치 망가진 옛 전우를 보는 듯 슬픈 표정을 지었다.
‘너희가 그토록 증오한’이라는 대목에서 알 수 있듯, 아메리스는 사실 청명족에게도 원수나 다름없는 존재였다. 적명족과 청명족은 모두 그녀가 펼친 대봉인으로 인해 역사의 수면 아래로 가라앉았으니 말이다.
“장난 좀 친 것이다, 큰 뱀. 설마 그런 얼굴로 나를 볼 줄은 몰랐군.”
별안간 엘티엇이 씨익 미소를 지었다.
“뭣?”
“우릴 봉인할 때는 그토록 비정했던 자가, 지금은 슬퍼하고 있으니 우스운 일이 아니더냐? 그렇게 미안하면, 지금이라도 목을 내놓아라. 그 머리로 형제들의 명복을 비는 제사를 올려주마. 작은 수인들 방식으로 콧구멍에 돈도 끼우고.”
황당해서 일순 말문이 막혔다. 이내 아메리스는 어깨를 으쓱이며 엘티엇을 노려보았다.
“네놈에게 얼빠진 구석이 있다는 걸 이 몸이 잠시 잊고 있었군. 이 판국에 일어나자마자 농담이나 한단 말이냐?”
“벗이라 믿은 불멸자는 결국 우리의 간청에도 지하 전체를 봉인했고, 힘을 잃은 채 잠든 나는 멜카족의 노리개가 되었으며, 지금은 형제 하나 없이 지상의 낯선 땅에서 눈을 떴다. 이러니 농담이라도 하지 않고는 어찌 버티겠느냐? 큰 뱀.”
엘티엇이 자리에서 일어나며 아메리스를 바라보았다.
한없이 깊고 단단한 눈동자가 이글이글 빛나고 있었다. 오랜 시간 한 세계를 지배했던 자 특유의 위엄이 쏟아졌다.
벗이라 믿은 불멸자.
청명족은 적명족과 달리 태양신의 죽음을 그대로 유지해야 한다는 입장이었으니, 그들과 아메리스는 동맹이 아닐 뿐 같은 목표를 지향했었다.
“흥, 그래. 정신을 차렸다니 다행이군. 그때 내가 지하세계를 봉인한 건 옳은 선택이었다. 이제 와서 그 일을 묻고 싶은 것이냐?”
“그랬다면 아까 내게 가까이 다가왔을 때 죽였을 것이다, 큰 뱀. 내 비록 오랜 봉인과 상처로 인해 약해졌다고는 하나, 너 또한 마찬가지지. 네놈도 나만큼이나 처량한 신세가 되었구나. 명왕들조차 쉽사리 넘볼 수 없던 그 힘은 눈을 씻고 봐도 찾아볼 수 없군.”
엘티엇이 진에게로 시선을 옮겼다.
“진 룬칸델. 아마 그런 이름이었지? 몽롱한 와중 네 누이와 적들이 너를 그렇게 부르던 게 생각나는군.”
“맞소. 기억이 다 돌아온 모양이지?”
“다는 아니다. 하나 내가 누구인지, 그간 어떤 일이 있었는지 정도는 대충 떠오르는 상태. 너는, 여러모로 기묘하구나. 분명 우리의 먼 후손인 것 같은데 생김새는 완벽한 인간이고, 광심장이 있고…… 대체 무엇이냐?”
“나는 인간으로서 명왕족의 일원이 되었소. 당신 말대로 내 형제들은 청명족의 먼 후손인 것 같더군.”
“지금 이 세상에 적명족의 후손이라 할 만한 놈들도 남아 있더냐? 붉은 뇌기를 쓰는.”
“없소.”
“그렇다면 대봉인 이전 태양전쟁의 승자는 우리 청명족인 셈이로군. 아마 형제 중 누군가가 큰 뱀의 눈을 피해 살아남았을 테지…… 그리고 그가 후손을 남겨 지금의 네 형제들을 만들었을 것이다.”
상황을 이해하고 충격을 감당하는 게 어려울 법도 한데, 엘티엇은 이미 자신의 처지를 받아들이고 있었다.
“하지만 적명족은 우리와 달리 제대로 부활한 모양이니, 2차전이 시작되었다고 할 수도 있겠어. 아마 너와 네 누이가 제때 도착하지 않았다면 나는 놈들의 양분이 되었을 것이다.”
“아메리스 님 덕분에 지하의 전투를 인지하고 찾아갈 수 있었소.”
“그래도 큰 뱀에겐 차마 고맙다는 말을 할 수가 없군. 자, 내게 궁금한 게 많을 것이다. 어쩌다 이 몸이 하찮은 멜카족의 노예가 되었는지, 그들로부터 무엇을 보고 들었는지, 지금은 어떻게 정신을 차리게 된 것인지.”
“설명해주면 고맙겠소.”
“간단한 이야기다. 나는 중간세계의 닐롯이라는, 우리 청명족의 도시에 봉인되어 있었다. 아이란 비먼트라는 멜카족은 나를 찾아내서는 끊임없이 암시를 걸었어. 자신이 우리 청명족을 구했다고.”
인간의 기준으론 ‘태초’라고 할 만한 시대부터 지금까지 이어진 봉인이었다. 엘티엇이라 할지라도 내내 형형한 정신을 유지할 수는 없었다.
“쇠약해진 나는 그 조악한 세뇌에 넘어갔다. 매번 형제들을 보여주기도 했으니…… 아, 형제들의 시신은 지금 여기에 있겠군. 이따가 내가 그들에게 제를 올릴 수 있게 해다오. 어차피 그 육신은 너희들이 쓸 수도 없다.”
“물론이오.”
“어쨌거나 그 아이란이라는 놈은 나를 일단 망가뜨린 다음 추후 특별한 장치를 사용해 세뇌를 완성하려고 했던 것 같다.”
“성수관 같은 물건을 만들고 있었다는 건가…….”
“성수관이 뭔지는 모르나, 아무튼 나와 테마르 비먼트라는 마인을 절대적으로 통제할 수 있는 물건이었다. 이제는 다 물거품이 되었을 테지, 적명족이 침입한 순간 내 귀로 똑똑히 들었거든. 우리의 원대한 계획은 실패했다. 오늘 이후 우린 전처럼 또 오랜 시간 숨어서 기회를 엿봐야 할 것이다, 라고 하더군. 그 멜카 놈이.”
“그렇다면 적명족이 침입했고, 황제는 희망을 버린 채 도망치다가 태양신교의 도움을 받은 것이군.”
“그렇다. 놈은 나를 폭주시켜 단지 시간을 버는 용도로 사용하려 했다. 그 말은 곧 내 육신이 적명족에게 넘어간다는 거고, 놈들이 그만큼 강해진다는 뜻이지. 황실은 적명족을 통제하려다 실패한 거다. 적명족이 쓰레기 같은 놈들이라곤 하나, 하찮은 멜카족이 감히 명왕족을 부리려다 제대로 대가를 치른 셈이야.”
“……테마르 비먼트. 내 선조의 육신을 사용한 그 마인에 대해선 기억나는 바가 더 있소?”
“없다. 하지만 태양신교는 그 마인을 확보했지. 공중요새가 두 기나 있는 전장까지 찾아와서. 네 선조의 육신은 분명 태양신의 부활과 깊은 관련이 있을 것이다. 그게 아니라면 태양신교가 그런 위험을 무릅쓸 이유가 없다. 놈들은 우리와 같은 시대를 살았으니, 명왕족의 힘을 잘 알 테니 말이다.”
테마르의 육신과 태양신 부활의 관계는 차차 알아가야 할 문제였다.
“그렇군. 이제 어쩔 생각이오, 엘티엇. 복수를 할 것인가?”
“적명족에게? 놈들과 싸우는 건 그냥 일상 같은 것이다. 원한 같은 감정은 필요치 않아. 날 이용한 그 미친 멜카족들에게 벌을 내리자니, 놈들은 이미 사실상 끝장이 나서 태양신교에 귀속되었군.”
“그렇다면 우리와 함께 싸우겠다는 뜻으로 들리는군.”
“목숨을 구해준 값은 치를 생각이다. 무엇보다 너는 우리의 먼 후손이기도 하니, 선조로서 도와주는 것이 도리이지 않겠더냐.”
진의 눈동자가 커졌다.
그를 구출하면서 기대한 바가 없지는 않지만, 설마 엘티엇이 이렇게 쉽게 아군이 될 줄은 몰랐다.
“다만…… 아니다, 이 얘긴 나중에 하는 게 좋겠어.”
거기까지 이야기한 찰나, 루나가 방으로 들어왔다.
“오, 엘티엇! 생각한 것보다 훨씬 멀쩡한 듯 보이는군. 내가 누군지 기억하는가? 지하에서 그대를 구해서 종일 업고 뛴 사람이다.”
루나가 오자마자 엘티엇은 또 멍한 표정을 지었다.
“당신은…… 누구? 나는…… 머리가 아프군. 나는 누구지?”
“아? 설마 기억상실이 왔다고?”
진과 아메리스는 모르는 척 어깨를 으쓱였다.
“흠, 그럼 어떻게 해야 하지? 발레리아가 도와줘야 하나? 아니, 기억상실은 좀 예상치 못한 부분인데?”
“너흰 참 잘 속는구나. 놀리는 맛이 있군.”
“아하…… 장난이란 말이지. 보아하니 막내랑 아메리스 님은 아까 당한 모양이네. 어쨌거나 반갑다, 자네 구하느라 막내랑 애 엄청 썼거든.”
엘티엇이 씨익 미소를 지으며 루나가 내민 손을 붙잡았다.
“그래, 반갑구나. 루나 룬칸델…… 그리고 너는, 내가 가르칠 게 좀 있겠어. 네 동생과 달리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