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ales of Bireido, a parody RAW novel - Chapter 28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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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겁혈신(天劫血神)
” 간만이군, 북천(北天).”
소슬한 밤이었다.
찌르르 울고 있는 풀벌레 소리가 어두운 밤을 채우고, 세상천지가 잠들어있는 것만 같았다. 하지만 그 고요함 속에는 알 수 없는 사기(死氣)가 넘실거리며 인간의 무의식을 위협하고 있었다.
너비 삼 장 반 정도의 방 한가운데에는 태사의에 몸을 길게 누이고 있는 괴인(怪人)이 있었다. 그 괴인은 난데없는 방문자에게 북천(北天)이라고 불리자 천천히 몸을 일으켰다. 자신의 정체성인 북천멸겁(北天滅劫)을 언급한 상대는 결코 만만한 상대가 아니었기 때문이다.
북천멸겁의 얼굴은 여전히 가면에 가려져서 보이지 않았다. 그러나 전신을 두툼한 흑의(黑衣)로 감싸고, 전신에서 알 수 없는 향내가 진동했다. 뜬금없는 방문자는 창문에 기대서서 웃었다.
” 하하하하!! 그래도 과연 북천이군. 설마 검신무(劍神舞)를 상대하고도 살아남다니… 유검은 그 때 널 정말 없애버릴 생각이었을텐데.”
방문자는 이미 모든 걸 파악하고 있었다.
겉으로는 북천멸겁이 멀쩡해 보이지만, 십이율과의 전투 자리에서 팔왕 유검에게 당해서 전신이 만신창이가 되어있다는 사실을. 불구까지는 아니었지만 그 날 이후로 몇 달 동안 꼼짝도 하지 못하고 영약에 몸을 절이면서 회복을 하고 있었던 것이다.
그 때문에 무림 전역에서 당장이라도 끓어오를 것 같던 천겁령의 세력은 주춤한 채 기를 펴지 못하고 있었다. 절호의 기회이긴 하지만 수장이 명령을 내리지 않는데 밑에서 제멋대로 움직일 수는 없었기 때문이다.
” … 흥.”
북천멸겁은 차갑게 말했다.
” 초월자(超越者)와 겨룬 건 처음 있는 일도 아니었다.”
” 그런가? 하긴 너는 천겁혈신(天劫血神)의 제자였지.”
지나가듯이 중얼거린 방문자는 서서히 앞으로 걸어왔다.
모습을 드러낸 것은 암왕(暗王), 권강한이었다.
사천당문의 어둠의 지배자이며 진입자(進入者). 이 세상에 존재하는 어떤 것과도 이질적인 존재. 그와 평소에 함께 다니던 연화는 종잡을 수 없이 들쑤시고 다닌다고 권강한에게 악평을 했지만 그 혼돈 자체가 권강한의 정체성일지도 모른다.
하지만 이상한 일이었다.
북천멸겁의 진실된 무공은 당금강호에서 몇몇의 초월자를 제외하고는 당해낼 자가 없는 무쌍(無雙)의 수준에 이르러 있었다. 하은천과 유검마저 사망한 지금, 강호제일인이라고 불러도 다르지 않았다. 그런 북천멸겁이 자신 앞에서 건방지게 조롱하는 암왕 권강한에게 아무런 제재를 가하지 않고 있었다.
권강한이 말했다.
” 내가 3년 전에 미리 경고했었지. 이 세상은 머지 않아서 초월자들의 싸움터가 된다고… 하지만 너는 그걸 무시하고 화산규약지회 습격과 중원침략을 강행했다. 지금의 전신부상은 그 댓가라고 생각하는 편이 좋겠지.”
” 잘난 듯이 말하는군… 진입자여.”
북천멸겁은 여유롭게 대꾸했다.
” 네놈이 어떤 도발을 하든 나는 움직이지 않는다. 이미 조직으로서의 팔왕(八王)은 끝장났고 태왕의 일은 결국 진입자들의 일이다. 이대로 기다리기만 하면 자연스럽게 천겁의 시대가 올 게 뻔하지 않은가?”
” ……”
권강한은 대답하지 않았다. 북천멸겁의 말이 사실이었기 때문이다.
팔왕 중에서 유검, 하은천, 금포염왕, 천무대제, 적멸존자가 사망함으로서 삼왕(三王)이 되어 버렸다. 그나마도 절대자인 태왕은 세상일에 관심이 없으니 분뢰수와 혈관음만 남았다고 봐도 좋았다.
혈관음은 가장 중원침략에 관심이 많았지만 분뢰수는 평소부터 말이 한 마디도 없기로 유명했으며 무공수위와 정체가 가장 불분명한 인물이었다. 이 상황에서 팔왕의 산하조직이 제대로 돌아갈 리가 없다. 팔왕이 한 순간에 붕괴했다는 북천멸겁의 말은 상황을 정확하게 꿰뚫고 있었다.
권강한이 불쑥 말했다.
” 십이율(十二律)은?”
” 후후. 그 자들이 중원 일에 신경쓸 여유나 있을 것 같은가.”
북천멸겁이 가소롭다는 듯 웃었다.
” ‘그’ 하은천이 죽었다. 하은천이 죽었다고. 크하하하…!!”
한 순간, 권강한은 북천멸겁의 진짜 미소를 보았다.
아무런 감정도 드러내지 않았던 흑막답지 않게 감정을 드러내 보일 정도로 하은천의 죽음은 북천멸겁에게 호재인 것이다.
” 나머지 문주들이 아무리 기를 써도 동방무림의 몰락은 확정되었다. 문주들의 실력이 뛰어나다고 하지만 그 뿐… 놈들은 이제 변방의 오랑캐에 지나지 않아.”
” 오랑캐라. 듣는 오랑캐 기분 나쁘게시리 말하는군.”
” 사실이지 않은가? 동이(東夷)일 뿐.”
” ……”
권강한은 슬쩍 주변을 둘러보았다.
그가 모르는 사이에 주변에 수많은 기척이 다가와 있었다. 아마 북천멸겁을 호위하는 천겁령 소속의 초절정고수들일 것이다. 적어도 십수 명은 되었는데, 이만한 숫자가 덤비면 천무삼성이라고 해도 쉽게 빠져나갈 수 없을 정도였다.
그들 하나하나의 실력이 검치 섭운명이나 도제 용경의에 크게 뒤지지 않는다는 걸 깨달은 권강한의 뒤통수에 땀줄기가 흘러내렸다. 십이율과의 대결 때 십이혈마대를 잃고도 여유로웠던 북천의 모습은 허세가 아니었던 것이다.
천겁령은 강하다!
팔왕의 견제가 없다면 현 중원무림을 집어삼키는 것 정도는 별로 어려운 일이 아닐 정도다.
” 굉장한 고수들을 모았군. 백 년의 세월이 있었다지만 천겁령의 힘이 이 정도였던가?”
이들 중에는 심지어 십이율 문주에 필적하는 고수도 몇 명 끼어 있었다. 초절정고수의 반열 중에서도 최상급이니, 결코 단순한 일이년의 수련으로 양성되는 존재들이 아니었다. 그렇다고 천겁령의 원로고수도 아니니 권강한은 황당해 미칠 노릇이었다.
” 단기간에 성장시켰지. 그 자의 도움을 받으니 별로 어려운 일도 아니었다.”
” 뭐?”
권강한이 반문하는 순간이었다.
퍼벅
권강한은 재빨리 파천벽강을 운용해서 전신에 강기를 둘렀지만 두 군데의 상처를 피할 수가 없었다. 가공할 기세로 일어나는 수백 개의 검기가 마치 물결처럼 스쳐오니 권강한의 잠재력으로는 막아내기도 버거울 정도였다.
” 누구냐?”
하지만 권강한은 이내 어둠 속에서 걸어 나오는 자의 얼굴을 확인하고 깜짝 놀랐다.
” 너, 너는…?”
” 반갑군요. 패배자 동지.”
무미건조하게 중얼거리던 사내는 새하얀 의복을 입고 있었다.
남자답게 생긴 미공자(美公子)의 나이는 서른이 넘지 않아 보였지만, 전신에서 끓어오르는 기도는 이미 천무삼성급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사내는 권강한을 물끄러미 바라보며 말했다.
” 당신은 날 몰랐던 듯 싶지만 나 또한 진입자. 뭐, 3번 세상을 구한, 당신같은 초 유명인에 비해서는 행적이 초라합니다만 어쨌든 내게도 권능(權能)이란 게 있는 편이오.”
” 그랬군… 그래서 세계의 흐름이.”
권강한은 탄식을 했다.
그는 팔왕이 몰락하고 빠르게 변화하는 힘의 균형을 맞추기 위해서 이리저리 움직였다. 진입자 때문에 뒤틀려버린 세계의 흐름이 잘못 흐르면, 무참한 비극이 일어나기 쉽기 때문이다. 어차피 태왕이 지금 움직일 생각이 없다면 그로서는 최대한 강호의 평화를 위해 노력하는 편이 나았다.
하지만 갑작스럽게 중원의 힘이 강력해지고, 덩달아 천겁령 또한 강력해지자 당황스러웠다. 각지에서 보이는 고수들의 수준이 기존에 그가 알고 있던 내용전개와 차원이 달랐기 때문이다. 정파는 물론 사파에서도 가공할 고수들이 속속 튀어나오기 시작했다.
그리고 이제서야 이유를 알 것 같았다.
진입자!
세계의 명운에서 자유로운 자가 끼어들어서 멋대로 천겁령이나 다른 세력에 힘을 빌려주는 바람에, 세계의 인과율이 무조건 최강(最强)을 향해서 작동하기 시작한 것이다. 이대로 가면 이 세상 전체가 힘 하나만을 추구하는 기괴한 분위기로 바뀌게 될 것이다.
권강한은 진입자를 노려 보았다.
” 후백재(朽白哉). 화산파 검종 장문인인 건 알고 있었지만 이딴 식으로 해야 했냐? 어차피 현실이나 도피한 주제에 민폐가 따로없군!”
그는 과거 유천영의 천무학관 시절에 그와 겨루다가 패배한 검종 장문인, 후백재였다.
삼성무제 이후 학관을 갑자기 퇴관하고 소식이 없었는데 여기에서 모습을 드러내 보인 것이다.
후백재는 학관을 나오자마자 천겁령과 접촉했고, 자신의 권능을 이용해서 초절정고수들을 대거 양성했다. 그 와중에 천겁령의 동천멸겁(東天滅劫)으로 들어간 것은 덤이었다.
” 훗, 현실도피라고요? 당신에게 듣고 싶은 말은 아니오. 영계의 지배자를 처치한 후에도 현실에 적응하지 못해서 다른 세계를 여행하는 당신은 그럼 뭐요?”
” 말이 안 통하는군.”
변명할 일이 아니고 그럴 이유도 없다.
그는 어쩔 수 없다는 듯 한숨을 쉬며 눈을 감았다. 아마도 후백재는 삼천세계를 떠돌아다니는 그저그런 한국출신 진입자 중 하나일 것이다. 힘이 너무 미약해서 그가 눈치를 못챘거나, 교묘하게 지금까지 숨겨왔을 것이다.
권강한이 푸념했다.
” 그래도 이건 너무하군. 삼성무제 유천영 따위를 상대로 졌던 놈이, 지금은 검성(劍星)급으로 강해져 있다니… 양심이 없는 거 아닌가.”
” 잔말 말고 죽어라!”
파바밧
사아 –
광류가 시야를 가린다. 보이는 것은 오로지 스쳐지나가는 흐름 뿐이다. 이윽고 권강한은 그 모든 것이 검이 되어서 자신에게로 뻗어오고 있다는 것을 알 수가 있었다.
권강한의 장력이 그 기운 중 하나와 맞닿였을 때였다.
마치 전류에라도 감전된 것처럼 장력이 요동쳤다. 만약에 권강한의 공력이 아니었다면 진작에 부숴지고 말았을 거대한 힘과 마주친 탓이다. 찰나의 시간동안 권강한은 그 기운이 한두 개가 아니란 것을 알 수 있었다.
어렴풋이 그 실체는 알고 있다. 종이 한 장 차이로 받아치면서 전력을 알아본다.
하지만 그 숫자는 230까지는 세어 보았지만, 그 후부터 점차 늘어나고 있다. 그것도 말도 안되는 속도이다. 이윽고는 권강한의 결계마저도 뚫고 거세게 밀어닥치는 기세였다.
카강 카강 카가가강
셀 수도 없이 많아지기 시작했다. 그것은 마치 벚꽃, 혹은 매화처럼 피어나면서 그 기세를 더했다. 차갑게 피어나며 세상을 피로 물들이는 꽃의 홍수였다.
카강 카강
점차 검속에 한계가 생겼다. 심검이라고, 검술의 절대영역이라고는 하지만 어디까지나 일반적인 대결에서 통용되는 것이다.
많다.
많다.
그저 그런 생각밖에 들지 않을 정도의 가공할 검기. 계속해서 늘어나는 검기를 쳐내고 있을 때였다.
우웅 –
난데없이 기운이 거두어지면서, 사방에 검의 형상이 들어찼다. 믿을 수 없는 일이지만 후백재는 자신의 의지로 [검]이라는 것을 구현시키고 있었다. 그것은 명백히 무공이라는 영역과는 상당히 동떨어져 있었다.
마치 무언가를 베어내기 위해서 만들어 진 듯한 섬경(殲景).
그 한가운데, 꽃잎이 휘날리는 한가운데에서 후백재가 말없이 일검을 내리쳤다.
” ……!!”
뻗어나간 파천벽강이 그 일격과 마주쳤다. 순식간에 아까처럼 분화해서 무시무시한 속도로 몰아치는 공격이었다. 아까는 적지 않게 낭패를 보았지만, 그 실체를 본 이상 상대하는 것은 얼마든지 가능하다.
쾅!
권강한은 마지막 초식교환을 하며 얼굴을 찡그렸다.
” 그래서 이름이 후백재였던 거군. 아니, 후목백재(朽木白哉)인가.”
” 별 걸 다 알아보시는군.”
” 하! 알 게 뭐냐. 천본앵(千本櫻)을 쓰다니 망할 놈…”
권강한은 투덜거렸다.
그리고는 흥미롭게 관전하던 북천멸겁을 쓱하고 쳐다보았다.
북천멸겁 그 자신의 무공은 권강한이나 후백재보다 훨씬 윗줄에 있어서, 마음만 먹으면 언제든 끼어들어서 권강한을 제압할 수 있었지만 그러지 않았다. 그건 하지 않았다기 보다는 [할 수 없는] 일이었다.
권강한이 만일에 자신의 ‘권능’을 발휘하면 골치아파지기 때문에.
” 좋아. 네 맘대로 하라구. 하지만 이것만은 알아 둬.”
파앗
권강한의 몸이 그 자리에서 사라졌다. 그리고 육합전성이 그 자리에 울렸다.
두 개의 축을 내가 움직이겠다.
천겁령, 꽁지 빠지게 움직여 보시지…]
북천멸겁은 전에 없이 가라앉은 눈빛으로 권강한이 사라진 자리를 쳐다 보았다.
그는 권강한이 마음만 먹으면 얼마나 무서워질 수 있는 존재인지 알고 있는 몇 안 되는 사람 중 하나였다. 겉으로 보기에는 천무삼성이나 팔왕급 고수에 비해 뒤쳐지지만, 진입자의 힘을 사용하면 말 그대로 무적(無適)이 된다. 잠재력을 따지면 태왕과 동급에 있는 신적인 존재다.
그러므로 권강한이 하는 말은 결코 헛소리가 아니다. 마음만 먹으면 얼마든지 그럴 수 있다는 사실을 알고 있었다.
잠시 생각하던 북천멸겁이 중얼거렸다.
” 내일 무신마(武神魔)를 죽이러 가야겠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