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aming the Villainess RAW - Chapter (140)
EP.141)# 1
141 – 협공 # 1
미르나는 몹시 부끄러운 이야기를 하는 것처럼 입을 열었다.
“태오 가스펠, 당신에게 사죄하고 싶어요.”
그렇게 말하는 미르나의 빨간 눈동자는 카페의 안을 이리저리 불안하게 움직이고 있었다.
문득 미르나가 평소 누군가에게 사과를 할 일이 있었을까-생각해보게 됐다.
미르나는 귀족의 영애로 살아오며 사과를 하는 쪽보다 사과를 받는 쪽의 위치에서 항상 군림하고 있었지 않을까.
그랬기에 미르나에게 있어서는 지금 상황이 매우 어색하고 부끄럽고, 쥐구멍이라도 있으면 들어가고 싶은 심정일지도 모르겠다.
그때 미르나가 한 마디 덧붙였다.
“그치만, 저는 당신이 정말 스텔라 교수와 그런 일을 벌인 줄 알았어요…! 왜냐하면, 그런 소식을 갑작스럽게 듣게 되면 누구라도 그렇게 생각할 테니까요.”
“…….”
방금 그건 사과에서 해선 안 될 말 같은데. 말하자면 방금 그 말은 사과문에 들어가면 안 되는 말의 탑 순위를 달리는 자기변명 같은 것이었다.
지독한 악수(惡手).
그래서 내가 미간을 찌푸리자 미르나는 그때서야 자신의 잘못을 깨달은 것처럼 황급히 입술을 열었다.
“물론, 전부 오해였고. 제 의심에서 비롯된 일이지만…. 그래도 만약 사과할 기회를 주신다면 이미 깨져버린 신뢰라도 어떻게든-.”
무언가 횡설수설하는 미르나.
나는 그녀가 걷잡을 수 없이 스스로를 내던지기 전에 얼른 이 이야기를 끝내는 게 좋다고 생각했다.
“미르나 아가씨.”
“…왜 부르시죠?”
나를 바라보는 미르나의 시선이 매우 불안했다.
그녀는 두 눈동자는 나와 시선을 똑바로 마주하지 못하고 나의 입술이나 목 어깨 등을 불안하게 배회하고 있을 뿐.
나는 문득 미르나에게 “이렇게 신뢰가 없는 관계를 유지할 순 없을 거 같습니다. 정혼은 없었던 일로 하죠.”라고 말해보고 싶은 충동을 느꼈다.
그렇다면 미르나는 과연 어떻게 반응할까. 격렬하게 화를 내면서 저 부채로 나의 머리통을 후려갈기려나?
가능성 있는 이야기다.
당연히 그런 이야기를 할 만큼 나는 멍청하진 않지만.
대신이라고 해야할까. 나는 짐짓 진지한 표정을 지어보였다.
“사람은 누구나 실수하기 마련이죠. 이해합니다.”
“그, 그렇죠?”
“하지만 실수로 엎질러진 물도 다시 담기는 어려운 법입니다. 저는 미르나 아가씨께 결백을 주장하기 위해 스텔라 교수와의 신뢰를 깼습니다.”
“…….”
미르나는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나는 그녀를 향해 몇 마디 덧붙였다.
“제게는 스텔라 교수와의 약속보다 미르나 아가씨와의 관계가 중요하고. 미르나 아가씨게 제 결백을 증명하는 게 더 중요하기 때문이었습니다.”
“그, 그렇군요.”
미르나는 어쩐지 기뻐보였다. 하지만 그것도 잠시, 내 다음 말에 미르나의 금방 표정이 어두워졌다.
“덕분에 굴욕적이게 무릎을 꿇고 구두에 입을 맞춰야하겠지만요.”
“그건….”
“언젠가 결혼을 하게 될 사이라면, 지금이 서로 간에 가장 믿음이 중요한 시기일 것이라고 미르나 님께서도 알고 계시리라고 생각합니다.”
“…….”
미르나는 아무런 말도 못하고 그저 아랫입술을 살짝 깨물었다가 놓을 뿐이다. 잘못을 한 것은 미르나고, 주도권을 쥐고 있는 것은 나.
이 일방적인 갑을 관계가 신기하기까지 하다.
나는 내친 김에 공고한 목소리로 한 마디 더했다.
“서로 간에 믿음이 중요한 겁니다.”
그러자 미르나도 마지못해서 “알아요.”라고 기어가는 목소리로 답했다. 경건한 광염교도인 그녀라면 ‘믿음’이라는 말을 남들보다 더 확실하게 받아들이겠지.
신앙이란 믿음으로 이루어진다.
신이 그렇게 했다고 믿는 것. 그렇게 될 것이라고 믿는 것. 그런 믿음이 기본 바탕에 탄탄히 놓여 있을 때 비로소 신앙이라는 게 성립할 수 있는 것이니까.
그렇기에 광염교도들에게 있어서 믿음이라는 것은 가장 기본적이면서도 가장 중요한 미덕으로 손꼽히는 것이었다.
서로를 신뢰하는 것.
서로 정혼을 한 사이라면 더더욱 서로에 관한 믿음이 있어야 한다.
미르나는 그러한 기본을 깨트리고 날 의심하고 궁지로 몰아붙여 스텔라 교수로부터 매도 받게 만들었으니 여러모로 자책을 느끼고 있을 게 분명할 터.
나는 이쯤 하고 미르나에게 용서의 손을 내밀어주기로 했다.
“물론 저도 잘못이 있습니다.”
“태오 가스펠, 당신에게도 잘못이 있다는 건가요?”
미르나가 이해하지 못한다는 것처럼 물어서 나는 일발 장전해둔 말을 이때다 싶이 꺼냈다.
“미르나 님이 저를 신뢰하지 못했던 것은, 그만큼 제가 평소에 신뢰가 갈 만한 행동을 보여드리지 못했기 때문이겠죠. 앞으로는 행동거지에 좀 더 주의를 해보겠습니다.”
이 정도면 충분한 화해의 표시가 됐으려나?
그래서 미르나를 슬쩍 보니 그녀는 여러 감정들로 얼굴을 붉게 물들인 채 아직 상황을 해소시키지 못한 듯 보였다.
좀 더 화를 풀어주도록 할까.
“그래도 미르나 님께서 제 편을 들어주실 줄은 몰랐습니다.”
나는 무척 의외라는 듯이 말했다. 그에 미르나도 미끼를 문다.
“제가요?”
“스텔라 교수의 앞에서 저 대신 이것저것 항변을 해주셨잖아요.”
“그야 스텔라 교수의 뻔뻔함이 무례했으니까요. 자신이 먼저 멋대로 방을 침입했으면서 남에게 오히려 큰 소리 친다니. 이래서 엘프들이란….”
쯧 혀를 차는 미르나. 엘프에 대해서 할 말이 많아 보인다.
나는 일부러 멋쩍은 듯이 콧등을 긁었다.
“그래도 제가 약속을 깬 건 사실이죠 뭐. 스텔라 교수로부터 신용을 잃었으니 큰일이 났네요. 어쩌면 좋죠?”
내 말에 미르나는 “후-.”하고 작게 한숨을 내쉬었다.
“제 오해와 부족함으로 이런 상황이 벌어졌으니. 그것에 책임지는 것이 드레이코 가문 사람으로서의 책무겠죠. 제가 스텔라 교수를 돕도록 하겠어요.”
“돕는다면 어떤 방법으로요? 논문 작성에 대한 연구를 도울 겁니까?”
“어떤 방법이든. 이 기회에 스텔라 벨호크에게 빚을 지워두는 것도 좋을 것 같기도 하니….”
그렇군.
미르나도 나름대로 이 상황을 수습하고 벨호크 가문에게 다리를 놓을 생각인 듯했다. 위기에서 돌파구를 찾아 기회로 삼는 것은 꽤 현명한 일이다.
미르나가 다시금 말했다.
“태오 가스펠, 당신을 오해해서 미안합니다.”
아까 전보다 진정되어 있는 목소리에 진정성이 느껴지는 사과였다.
스륵.
“그럼, 여기 이쪽으로 앉아주실 수 있겠습니까?”
나는 내가 앉은 소파의 바로 옆 자리를 손으로 탁탁 쳤다. 그러자 미르나는 깜짝 놀란 것처럼 머리칼을 곤두세운다.
“누, 누가 보면 어쩌려는 거죠?”
“누가 본다는 겁니까? 여기 2층에는 저희밖에 없고-.”
나는 손가락으로 우리 자리의 주변에 쳐져 있는 병풍들을 가리켰다.
“이렇게 사방이 가려져 있는데요.”
“그렇지만….”
“그럼 제가 그쪽으로 갈까요?”
나는 자리에서 일어나 미르나의 옆 자리에 앉았다. 바로 옆에 앉은 미르나로부터 화아아-하고 뿜어지는 체향이 제법 시원하다.
애플민트 향이 나네.
샴푸 향기인가, 아니면 특별한 향수를 뿌린 걸까?
아무튼 지금 중요한 것은 그런 게 아니었다.
방금까지 나에 대한 미안함과 무안함으로 어쩔 줄 몰라하던 미르나가 이제는 다른 이유로 안절부절못한다는 게 중요하지.
“미르나 아가씨, 손을 잡아도 될까요?”
“…….”
미르나는 아무런 말도 하지 않았다. 그러다가 이내 마지못한 느낌으로 고개만을 작게 끄덕인다.
아주 작은 끄덕임이었지만 나의 예민한 반요정의 감각에는 그게 꼭 매우 커다란 허락의 몸짓처럼 느껴졌다.
슥.
나는 미르나와 같은 방향을 보고 앉아 손을 슬며시 맞잡았다.
미르나의 손은 가느다랗고 부드럽고 따뜻하고 말랑말랑하고-여러 기분 좋은 요소들을 잔뜩 합쳐서 만들어 놓은 예술품 같았다.
파르르르.
맞잡은 손에서 미르나의 몸이 작게 떨리고 있는 게 느껴졌다. 무어라 말을 나누면 좋을 텐데 서로 대화가 없어서 더 그렇게 느껴지는지 모르겠다.
─어제 교수가-.
─방학 때는 뭐하는 게 좋지.
그 고요함 때문에 카페의 1층에서 들려오는 이야기들마저 커다랗게 느껴질 정도로 왕왕 울려댄다.
따뜻한 날씨. 밝은 볕이 들어오는 2층의 카페에서 병풍을 쳐놓은 은밀한 밀실. 서로 손을 잡고 있는 두 남녀. 은은한 온기와 향기.
나른한 하품이 나올 것 같은 상황.
스르르르.
어제 새벽에 여러 일을 겪어서 잠을 잘 못 잤기 때문인지 졸음이 밀려오기 시작한다. 나는 졸음을 밀어내며 말했다.
“이렇게 앉아 있으니 그때 일이 생각나네요.”
“……!”
그러자 미르나가 기겁하는 기색이 느껴졌다. 그때 일이 언제를 말하는 건지 떠올린 것이리라.
사실 미르나는 그때 밀실에 갇혔던 날 이후 그날에 대한 언급을 일부러 피하는 듯했는데. 내가 그걸 먼저 꺼내서 몹시 당황한 것 같았다.
주변을 슥슥 둘러보더니 나를 향해 미간을 찌푸리는 미르나.
“그 날의 일은, 둘 만의 비밀이라고 했잖아요? 설마, 설마 누구에게 말한 건 아니겠죠?”
이미 엘가에게는 말을 했다.
하지만 미르나는 그걸 알지 못한다. 내가 엘가와 어떤 관계인지도 모르고.
만약 알고 있었다면 오늘 테이블에 앉은 것은 미르나와 스텔라 교수가 아닌, 미르나와 엘가였겠지. 내 몸은 반 토막 났을 것이고.
다만 나는 아무것도 모르는 척 말했다.
“아무에게도 말 안 했습니다. 그리고, 여기는 저희 둘 밖에 없잖아요.”
“후-.”
미르나는 일단 내가 아무에게도 비밀을 털어놓지 않은 것에 안심을 한 것 같았다.
하기야 미르나 드레이코가 혼례도 올리기 전에 남자와 통정했다-라는 사실이 퍼지면 경건한 드레이코 가문으로서는 여러모로 끝이니까 이해한다.
그러다가 문득 무언가 생각난 게 있는 것처럼 미르나가 미간을 좁혔다.
“정말 아무에게도 말 안 한 거 확실한가요?”
“지금 저를 또 의심하시는 건가요? 아까 전 그렇게 사과를 하셔놓고?”
“아뇨, 그게 아니고.”
미르나는 내 말에 화들짝 놀랐다. 그리고는 무언가 변명처럼 내게 중얼거리는 것이다.
“요즘 따라, 제 앞에서 리오네스 영애가 자꾸만 혼전순결을 얘기하는 게 영 이상하단 말이죠. 독실한 신자도 아니면서. 혹시 전 당신이 얘기를 했나 싶어서….”
엘가 녀석. 나중에 두고 보자.
나는 엘가에 대한 복수심을 불태우며 짐짓 아무것도 모르는 척 고개를 저었다.
“저는 아무런 말도 하지 않았습니다.”
“정말이죠? 리오네스 영애나, 그 거미 여왕에게조차도 말한 게 없는 게 맞죠? 주일 예배의 고해성사에서도 아무 말 안한 게 맞고?”
“…정말입니다. 이번에도 절 믿지 못하시겠다면 저는 뭐, 더 이상 미르나 아가씨와 할 말이 없네요.”
슥.
나는 미르나와 마주 잡은 손을 빼려고 했다. 그러자 미르나는 내 손을 꽉 붙들고 놓아주질 않는다.
“미, 믿어요. 오해한 게 아니랍니다. 그냥, 궁금했을 뿐이죠.”
미르나가 몹시도 당황한 느낌으로 횡설수설 또 변명을 한다. 이쯤 되면 귀찮은 걸 넘어서서 귀엽게 보이기도 한다.
그러다가 이내 미르나는 신세를 한탄하는 느낌으로 몸에서 힘을 뺐다.
“저도, 제가 왜 이러는지 모르겠네요. 그러고 싶지 않은데. 태오 가스펠, 자꾸만 당신에게 집착하게 돼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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