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aming the Villainess RAW - Chapter (154)
EP.155)국면 # 8
155 – 새로운 국면 # 8
미르나는 화두를 돌리고 싶어 하는 것 같았다.
“모든 사람들이 결투재판에 대해 떠들어대겠죠. 역사에 기록될지도 몰라요. 무척 중요한 순간이 될 텐데, 누구의 이름을 올릴 건가요?”
“이름이라.”
마침 아이라도 식사를 거의 끝낸 상황이었는지 자신의 입가를 손수건 끝으로 우아하게 닦고는 가볍게 답했다.
“생각중이야. 하지만, 하고 싶어 하는 사람은 꽤 많은 것 같네. 할 말이 있으면 기다리지 말고 나오도록 해.”
“누구에게 하는 소리죠?”
미르나가 의아함을 느끼며 주변을 살펴볼 즈음.
풀썩.
무언가가 높은 천장으로부터 바닥에 사뿐히 착지했다. 그것은 갈색 가죽점퍼를 입고 표범무니 브라탑에 쫙 달라붙는 바지와 굽 높은 워커를 신은 여성이었다.
보랏빛 단발에 짧은 귀가 인상적이다. 엘프. 스텔라 교수였다.
지금 뭐 어디서 내려온 거지? 천장에 달라붙어 있었던 건가?
“타란테라 여왕.”
스텔라 벨호크가 아이라를 향해 말했다. 물론 아이라는 시선도 두지 않은 채 잔을 홀짝일 뿐.
“편지로도 말했지만 이번 일에 나나 벨호크의 사람들은 관계가 없어. 그 파티를 내가 초청해온 것은 맞지만. 이런 일을 벌일 것이라고는 전혀 몰랐어.”
스텔라 벨호크는 이번 피습사건과 자신의 무관을 주장했다. 들어보니 이미 전서구 같은 것을 통해 아이라에게 편지를 보내기도 했던 모양이다.
“내가 당신의 대전사가 되어줄게. 그것으로 내 무죄를 증명하겠어.”
“흐응, 초원의 요정이 나의 대전사가?”
아이라도 이야기에 흥미가 생긴 것처럼 되묻는다. 대가문의 영애인 스텔라가 결투에 의욕을 보이는 게 신기한 걸까.
하지만 스텔라의 입장에서는 그럴 만도 했다.
이번 여왕의 피습사건으로 가문에서 그녀의 입지가 더욱 나빠지고 있을 것은 확실한 일이었으니까. 어떻게든 자신의 무죄와 동시에 쓸모를 입증하고 싶었던 것이겠지.
대전사로서 승리하게 된다면 명성과 명예 그리고 실력에 대한 보증 또한 확실히 얻게 될 테니 스텔라에겐 여러모로 이득이다.
아주 게으르거나 머리가 안 돌아가는 사람은 또 아니었구만.
그러나 아이라의 말은 제법 가혹하다.
“하지만 굳이 그대가 아니더라도 여왕인 날 위해 싸우고자 하는 사람은 많아. 그런 사람들 중 그대를 골라야 하는 이유는 뭐지?”
실제로 아이라의 대전사가 되겠다고 나서는 자들은 많았다.
엘가도 자기가 싸우고 싶어 하는 눈치였고.
여왕피습이라는 세계적인 사건의 무대. 그곳에 서서 승리한 자가 어떤 영예와 영광을 취해갈지 모두 알고 있는 탓이겠지.
“스텔라 벨호크. 내가 그대를 택했을 때 얻을 수 있는 이득은 뭐지?”
아이라의 질문은 매우 날카로운 것이었다.
굳이 스텔라 벨호크를 선택해야만 하는 이유가 뭐냐. 말하자면 자기를 어필하여 세일즈 포인트를 뽐내보라는 말이었다.
그 질문에 당황한 것처럼 말을 멈춘 스텔라가 주변을 슥슥 바라봤다. 많은 사람들의 귀가 이곳을 향하고 있다는 걸 알고 있는 탓이겠지.
스텔라는 어딘가 불안해 보였지만 곧 그것을 떨쳐내려는 것처럼 작게 말했다.
“벨호크 가문의 지원.”
“흐응, 지원?”
아이라는 코웃음을 쳤다.
“스텔라 벨호크. 그대에 대한 것은 나 역시 알고 있노라. 벨호크의 탕아. 게으른 요정. 나태의 공녀. 그대가 벨호크에서 파문 되다시피 한 것도 알고 있지.”
“…….”
스텔라는 당황한 것처럼 나를 바라봤다. 그 표정이 꼭 “네가 말해줬냐?”라고 내게 묻는 것 같은 모습이었다.
그렇지만 방금 것에는 솔직히 나도 놀랐다.
아이라가 거기까지 알고 있었다니.
나름대로 현명한 여왕이 계속해서 말했다.
“벨호크 가문에서도 버려진 그대가 내게 벨호크 가문의 지원을 약속해줄 수 있을 것 같지는 않구나.”
“크으으….”
스텔라 벨호크는 말문이 막힌 것 같았다. 그렇지만 머릿속으로는 자신이 내밀 수 있는 패를 부지런히 생각하고 있을 게 틀림 없었다.
자신이 가진 카드 뭉치 속에서 상대방의 마음에 들 조커를 고르고 또 고르겠지.
다만 스텔라보다 아이라가 자신의 카드를 먼저 내밀었다.
“대전사라는 것은 곧 이 몸, 현명하고 지혜로운 여왕인 나 아이라를 대신하는 자. 그렇다면 그에 걸 맞는 품격이 있어야겠지. 이번 일은 내가 가장 신뢰하는 궁정 오락담당관 태오에게 일임하도록 하겠노라.”
그 말에 엘가가 미간을 찌푸린다.
“궁정 오락담당관이라니. 그런 게 있었다고? 처음 듣는 직책인데?”
“내가 방금 만들었어. 그럼 이제 있는 거지. 나는 여왕이니까.”
아이라는 권력을 남용하며 내 새로운 직책을 추가시켜주었다.
나는 이제 궁정의 서기관 및 정원사 및 오락담당관이다. 일자리가 풍년이구나. 다만 나로서는 눈앞이 아찔해질 수밖에 없었다.
대전사의 일을 내게 일임한다니.
나보고 싸우라는 소리잖아.
반쯤 예상하고 있었는데 실제로 나오니 생각보다 정신적인 타격이 컸다.
역시 아이라가 조금씩 평온하고 지혜로워지고 있다 하더라도 종잡을 수 없는 점은 변하질 않는 모양이다. 천성이겠지.
그때 미르나가 나 대신 물었다.
“태오 경을 대전사로 삼도록 하겠다는 건가요?”
“아니, 대전사의 임명권을 위임하는 것이지. 물론 태오 스스로가 원한다면 자신이 직접 나의 대전사가 되어도 좋고.”
그렇구만.
대전사를 날더러 대신 선택하라는 소리잖아.
나는 원래 아이라의 일정이나 식사 메뉴 하나하나, 심지어 신을 스타킹 색깔까지 계획하고 관리하는 매니저 같은 것이었다.
그러니 대전사를 고르는 것도 자연스럽게 나의 권한이 된 모양이다.
“스텔라 영애. 그대가 나의 대전사가 되고 싶다면. 태오를 잘 설득 해보도록 하거라. 그리고, 나는 네 여왕이니 좀 더 존경을 보이도록 하렴.”
“…….”
방약무인했던 엘프는 반박도 하지 못하고 그저 부들부들 떨 뿐이었다. 얼마 전 내게 무릎을 꿇으라고 말하며 폼을 잡더니 꼴 좋구만.
* * *
한참 고민하고 있던 아이라가 말했다.
“그럼, 나는 엘가의 영지인 사르데나를 침공하도록 하겠어. 그리고 엘가가 가진 호텔을 파괴하고 땅 문서를 빼앗을 거야.”
그러자 아이라의 입을 주시하고 있던 엘가가 탄식한다.
“아이라, 이건 영지에 여관이랑 호텔 짓는 게임이지. 다른 사람 영토를 침공하는 게임이 아니라니까?”
“그럼 이제부터 그런 룰을 추가하도록 해. 나는 여왕이야.”
“이 게임에서는 여왕이 아니라 영주라니까. 야, 태오 이래도 되는 거냐?”
막무가내와 같은 아이라의 이야기에 지친 것인지 엘가가 나를 바라봤다.
“저런 규칙을 넣어도 되냐?”
물론 나로서는 어깨를 으쓱이게 될 뿐이다. 주사위를 굴리는 레드마블 게임이 언제부터 상대 땅을 침공해서 영토를 빼앗는 땅따먹기가 됐는지 모르겠다.
“그럼 저 역시 제가 가진 병력들을 이끌고 리오네스 영토로 들어가겠어요. 곳곳에 용의 깃발을 꽂아드리도록 하죠.”
“야, 너네들 지금 나랑 같은 게임 하고 있는 거 맞아? 내가 규칙을 잘못 이해한 거냐?”
궁정의 오락담당관으로 내가 만든 첫 번째 게임은 영애들 모두 마음에 들어 했다.
한 테이블에 앉아있으니 자꾸만 싸우고 그래서 친하게 지내라고 대충 만들어낸 게임이라고 해야하나.
물론 직접 만든 게임이라고 해 봐야 그냥 21세기의 보드게임을 적당히 이 세계의 버전으로 바꾼 것뿐이지만 말이다.
사람의 취향은 비슷한 것인지 인기 있는 게임들은 여기서도 큰 호응을 불렀다.
“어떻게 이런 걸 단 몇 분 만에 뚝딱 만들어내는 거냐? 신기하네.”
엘가가 게임 화폐들을 정리하며 다시금 놀라운 것처럼 혀를 내둘렀다. 나로서는 다른 사람의 것을 가져와 내 것으로 만든 것뿐이라서 조금 양심에 찔렸지만.
이미 잔뜩 거짓말을 해온 나로서는 이제 와서 새삼스러울 감정을 느낄 것도 없었다.
그때 모든 영토를 지배하여 게임의 승리자가 된 아이라가 말했다.
“내가 선택한 궁정의 오락담당관이니 당연한 일이지. 태오야, 앞으로는 이러한 게임을 일 주일에 하나는 생각해오도록 하여라. 모두가 모여서 티타임 강의 때 하면 좋겠구나.”
일주일에 하나를 새로 생각해오라니.
좀 빡쎈데.
물론 나는 보육원에 있던 시절, 아이들과 정말 많은 보드게임을 했었다. 그것들을 전부 사용하면 적어도 몇 주 정도는 버틸 수 있겠지.
문득 내가 평범하게 이 세상에 전생을 한 사람이었다면 이런 현대적 지식을 활용해서 평범하게 부자가 되어 잘 살아갈 수 있었지 않을까-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래서 냉장고랑 컴퓨터가 대단하다는 겁니다. 에어컨도 꼭 있어야 하는 물건이죠. 하다못해 선풍기라도.
━과연 놀라운 이야기군요! 그래서 그 냉장고랑 컴퓨터, 그리고 전기라는 건 어떻게 만드는 겁니까?
━그건 저도 모릅니다.
위와 같이 이과적이고 기계공학적인 이야기라면 몰라도 보드게임 정도는 괜찮잖아.
컴퓨터가 없는 이 세상에서 현대 사회의 진보된 보드게임은 그야말로 자극적이고 재미난 게임이니 인기가 없을 수가 없다.
존나 아쉽구만.
그때 아이라가 계속해서 말했다.
“역시 오락담당관으로 태오를 선택한 내 안목은 틀림이 없구나. 그럼 태오야, 나의 대전사에 대해서도 기대에 걸맞은 선택을 해주길 바란다.”
스륵.
의자에서 일어나는 아이라.
그에 엘가가 묻는다.
“야, 어디 가냐?”
“낮잠 시간이라서 말이야.”
아이라는 먼저 자리를 비웠다. 그녀가 말한 대로 낮잠을 자려는 모양이다.
엘가는 “쟤는 뭐 저렇게 잠을 많이 자냐.”라고 의아한 듯 말했지만 그렇다고 딱히 아이라를 막거나 하진 않았다.
결국 테이블에 남은 것은 나와 미르나 그리고 엘가였다. 엘가는 아이라의 모습이 고급 식당가를 벗어나 아주 보이지 않게 됐을 때 내 옆으로 다가왔다.
“야, 우리도 슬슬 일어날까?”
그리고는 내 팔을 붙잡아 팔짱을 껴오는데. 누차 말했다시피 엘가의 가슴은 꽤 큰 편이었기 때문에 자연스럽게 내 팔은 엘가의 가슴 사이에 묻히는 꼴이 되었다.
물컹 물컹.
팔에 닿는 가슴의 감각은 생각보다 말랑말랑하고 따뜻하고 부드러워서 나는 정말 깜짝 놀라게 됐다. 그러자 미르나가 발끈해 소리친다.
“너무 가깝게 달라붙는 거 아닌가요? 파렴치하네요!”
“뭐래. 너도 하든가.”
“제가 당신 같이 절조 없는 여성과 똑같은 줄 아시면 오산이에요, 리오네스 영애.”
“흐응, 그러셔?”
슥.
그때 엘가의 입술이 내 귓가에 확 닿았다. 고개가 가까이 달라붙었기 때문에 엘가 특유의 사과향기가 물씬 풍긴다.
엘가는 나의 예민한 반요정의 귀에 대고 속닥속닥거렸다.
“야, 이번에 대전사로 누굴 뽑을 거냐? 고르기 어려우면 날 골라도 돼. 그리고, 이렇게 귓속말 하면 미르나가 화내겠지? 이제 슬슬 화 낼 거야. 오 초, 사 초-. 삼 초-.”
내가 그것에 대답하기도 전에 미르나가 먼저 빽 소리쳤다.
“두, 둘이 지금 무슨 이야기를 하는 거죠? 어서 떨어지도록 하세요! 대낮부터 귓속말이라니. 불경하기 짝이 없군요!”
미르나는 더 이상 참을 수 없어진 것처럼 반대쪽에서 나의 팔을 붙잡아 당겼다. 덕분에 나는 좌우에서 잡아당겨지는 팔에 고통을 느끼게 될 뿐.
“으이엑…!”
어렸을 적, 여동생들이 맘에 드는 인형을 갖겠다고 서로 좌우에서 잡아당기던 꼴이 떠오르는 순간이었다. 처참하게 뜯어진 솜들이 떠오를 때에 의외로 손을 먼저 놓은 쪽은 엘가였다.
스르륵.
“어엇.”
“꺅-!”
덕분에 나는 관성에 의해 미르나의 품에 안기듯 했다. 미르나의 품은 엘가보다는 아니었지만 말랑말랑하고 따뜻하고 좋은 향기가 났다.
엘가가 의도한 건가?
내가 미르나의 품에 안길 수 있도록?
“으흠, 태오 가스펠. 이제 그만 떨어지도록 하세요.”
그때 미르나가 몹시도 부끄러워진 것처럼 나를 밀어냈다. 그에 엘가는 “헹-. 꺅은 무슨. 하여간 내숭 떠는 것 좀 봐.”라며 작게 코웃음을 칠 뿐.
엘가를 한 번 흘겨본 미르나는 부채를 펼친 뒤 자신의 붉은 얼굴을 가렸다.
“그럼, 이만 다들 해산하도록 하죠. 그리고 리오네스 영애. 당신은 절 좀 보도록 하세요.”
“나랑 할 얘기라도 있냐?”
그렇게 엘가와 미르나가 저 멀리 먼저 자리를 비워 구석으로 사라지고. 자리에 혼자 남게 된 나는 오늘 있었던 일들을 정리할 겸 고급 식당의 문을 나섰다.
그러자 누군가가 곧바로 나를 향해 다가왔다.
“태오 가스펠.”
혹 나를 습격할 자객무리인가 싶어서 살짝 긴장했던 것도 잠시. 나는 곧 보랏빛 머리칼 사이로 빠져나와 있는 긴 귀를 발견할 수가 있었다.
“스텔라 교수님.”
“이번 일에 대해서 네게 할 말이 있는데-.”
그렇구만.
먼저 접촉해올 것이라고는 알고 있었는데 말이다.
“당연히 나를 대전사로 선택해줄 거지? 너랑 내 사이잖아.”
스텔라 교수는 어느덧 나와 자신의 친분을 어필하고 있었다. 내가 자신을 생각할 것이라고 ‘당연하게’ 생각하는 것이 좀 우습다.
그렇지만 내게 있어서는 좋은 기회였다.
의도치 않게 굴러 들러 들어온 갑을 역전의 기회.
이것만큼 이 망나니 같은 스텔라의 버릇을 고쳐주고 가문의 복수를 해낼 기회가 또 있을까?
그렇게 생각하니, 사냥꾼이 여왕을 공격했던 것도 내게 있어서는 호재가 따로 없었다.
“스텔라 교수님. 그럼 저 쪽으로 가서 대화를 나누도록 하죠.”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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