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aming the Villainess RAW - Chapter (210)
EP.211)# 1
211 – 예언자 # 1
사실 나는 휴식을 즐기는 편이 아니다.
막상 휴가가 주어져도 노는 법을 잘 몰라서 시간을 흐지부지 쓰고 말 테지.
어떤 일이든지 경험자가 잘 한다. 노는 것도 많이 놀아본 사람들이나 제대로 즐길 수 있을 거야.
그런 의미에서 나는 어색한 휴식보다는 차라리 일을 택하는 사람에 가까웠다.
그러나 아이라가 말했던 것처럼 인간이란 완벽하지 않은 법.
특히 기묘한 존재 반요정은 더욱 불편한 점이 많다. 구체적으로는 체력적으로.
지금까지는 당장 목에 칼이 들어올지 모르니 전력으로 버티고 있었다지만, 슬슬 나도 한 달 정도는 쉬고 싶다-라는 생각이 들었다.
예전에 아이라에게 잠깐 쉬겠다고 했는데. 바로 다음날 궁정으로 날 불렀었지.
지금 생각해보면 나는 어렸을 적부터 변변한 여행 한 번 해본 적 없었다. 해외여행 같은 것은 꿈도 못 꾸었고. 유럽, 가보고 싶었는데.
그런 와중에 이런 세상에 떨어졌을 때. 사실 아주 약간이지만 설렘에 흥분되는 마음도 있었다.
햇살이 비추는 잔디밭과 여러 동산들, 마치 요정이라도 뛰어 놀 것 같은 풍경들. 장엄한 산과 숲-. 던전과 보물 상자까지. 남자라면 누구나 모험을 꿈꾸고 싶어질 만하잖아.
그래서 아이라에게 말했다.
“그만 두겠습니다.”라고. 사실 예전부터 하고 싶었던 말이었는데. 아이라는 내가 없으면 바보처럼 스타킹 하나 잘 신지 못해서 차마 두고 갈 수가 없었다.
“이제 혼자 잘 하실 수 있으신 것 같네요.”
요 며칠. 따로 떨어져 지내보니 아이라는 내가 없이도 생각보다 잘 지냈다.
금방 새로운 사람을 구해서 자신의 시중을 들게 만들고. 내가 없어도 잘 먹고 잘 자고, 아무튼 엄청 잘 지낸 것 같다.
생각해보면 당연한 일이지.
아이라의 인생에서 나와 함께 했던 시간은 1/10 정도. 나머지 시간은 내가 없었음에도 잘 살아왔었을 테니까.
나는 왜 내가 없으면 아이라는 아무것도 못할 것이라고 오만하게 생각했던 걸까?
쾅-!
그때 아이라가 힘껏 쥔 주먹으로 테이블을 내리쳤다. 그러자 아름답게 반짝이던 크리스탈 테이블이 정확하게 반으로 쪼개진다.
쩌적.
…이거 교단 비품인데. 문제는 크리스탈보다 아주 새빨갛게 달아올라서 머리에 문자 그대로 김을 뿜어내고 있는 아이라였다.
“내가, 미안하다고 사과 했잖아…!”
“네?”
“내가, 미안하다고, 사과 했는데. 어째서 그런 말을 하는 거니?”
아이라는 무언가 오해를 한 것 같았다. 자신이 내게 했던 짓 때문에 내가 그만 둘 생각을 하게 되었다고 말이다.
진실이 뭐가 됐든 아이라가 그렇게 생각하고 또 그것으로 이렇게 흥분했다면 무언가 사건이 터질 것만 같아 나는 황급히 두 손을 펼쳤다.
“아이라 님, 그 일 때문이 아닙니다. 이건 아주 오래 전부터 생각해오고 있던 일이에요.”
“오래 전?”
“이번 일이 전부 다 끝나면, 하다못해 한 달 정도 일을 그만두고 좀 쉬고 싶습니다. 제가 하고 싶은 것들도 있구요.”
쉬는 동안 솔로몬이나, 그가 살리려고 했던 님프, 그리고 이사야 앙그마르의 행적 등에 대해 조사하고 싶었다.
그러기 위해서는 북쪽으로 가야할지도 모른다. 당연히 아이라의 옆에서 업무도 할 수가 없다. 그래서 이번 기회에 휴식을 조금 요구했던 것.
다만 아이라는 고개를 저었다.
“…안 돼. 아까도 말했잖아. 태오, 너는 날 완벽한 여왕으로 만들어 줘. 네가 없으면 난 완벽한 여왕이 될 수 없어.”
“제가 없어도, 잘 지내고 계신 것 같은데요. 시종도 새로 한 명 뽑으시고.”
“걔는 님프 화이트랑 퓨어 화이트의 색깔도 구분 못하는 바보야. 네가 맘에 들지 않는다면 당장 자르도록 하겠어.”
자른다니. 아이라가 하는 말이라서 그런가 단순히 해고를 한다는 말로는 들리지 않았다. 어딜 자를 셈이지.
“그만두지 마.”
“그런데, 이미 타란테라 이름에 걸고 약속해주신다고 했잖아요.”
“…….”
아이라는 자신이 했던 말이 떠오른 것처럼 입술을 살짝 깨물었다.
약속에 대한 맹세와 나에 대한 모종의 집착 사이에서 고민하고 있는 듯하더니 이내 아주 입을 다물어 버렸다.
사실, 그만둔다고 해도 아주 영원히 아이라의 곁을 떠나는 게 아니다.
앙그마르의 궁정 서기관 일을 그만두고 난 이후 나는, 이제 왕좌의 진정한 주인으로서 서게 될 테니까. 그럼 아이라는 내 왕비 중 하나가 될 거고.
물론 그런 이야기는 하지 않는다. 진실을 말 안 한 거뿐이지, 거짓말을 한 건 아니야.
“그럼 이 이야기는 나중에 하기로 하고. 드레이코 가문에 쳐들어왔던 타란테라 친위대에 대한 이야기를 하도록 하죠.”
“…….”
“저, 아이라 님?”
아이라는 가만히 눈을 감은 뒤에 입을 다물고 있었다. 생각에 잠겨 있는 것인가 싶었는데, 곧 새근새근하면서 일정한 콧소리가 들려오는 게 아닌가?
“아이라 님, 지금 주무시나요?”
새근, 새근….
이쯤 되면 기면증 수준 아닌가. 그러고 보면, 어째서 아이라가 이렇게 많은 잠을 필요로 하는지 물어보지 못했구나.
* * *
스르륵.
까만 천으로 얼굴을 가린 시종이 아이라를 업어 침대 위에 올려두었다.
여러 가지로 복잡한 대화가 오가고 온갖 잡다한 일이 벌어졌음에도 아이라는 깨어나질 않았다. 독사과라도 먹은 느낌.
그녀 위에 이불을 잘 덮어준 다음에 시종이 내게 말했다.
“타란테라 님에게는 안식이 필요 해. 이제 방해꾼인 너는 얼른 나가는 거야.”
나를 향한 적의를 숨기지 않는구만. 확실히 알겠다. 타란테라 가문의 개인 친위대를 움직여서 나를 노렸던 것은 아이라가 아니고 이 녀석이라는 걸 말이다.
날 왜 이렇게 싫어하지. 내가 얘한테 뭘 한 기억은 없는데.
바깥으로 나온 나는 그녀에게 물었다.
“당신은 누굽니까?”
“나는 릴리야.”
“릴리…?”
“설마, 나에 대해 아무것도 모르는 거야? 너? 거짓말이지? 타란테라 님께서 나에 대해 분명 왕창 이야기 해주셨을 거 아냐.”
“들은 적이 없는 것 같은데요.”
“거짓말하지 마!”
정서가 매우 불안해 보인다. 내가 잠깐 벙 쪄있던 사이에 시종 릴리가 검은 천의 뒤로 으르릉거렸다.
“타란테라 님에 대해서는, 내가 가장 잘 알고, 내가 가장 친해! 여왕 님께서 내게는 직접 이름까지 붙여주셨으니까…!”
그렇군. 릴리라는 이름은 아이라가 직접 지어준 이름인가? 뜻은 백합이겠지. 내가 아는 하얀 백합에는 어울리지 않는 녀석 같긴 하다만….
“타란테라 님이 나에 대해서 한 마디도 하지 않았다니. 있을 수 없는 일이야. 분명 했는데, 네가 까먹은 거야. 반요정…! 인정해…!”
“…….”
이렇게 고슴도치처럼 날 세운 태도는 맘에 들지 않는 구석이 있었다. 뭘 잘했다고 나한테 이러는 거지? 그래서 나는 천천히 나비처럼 손을 올려서-.
짝.
벌처럼 릴리의 뺨을 때렸다. 까만 천에 가려져 있는 볼살은 의외로 찰지다. 때리는 맛이 좋네.
“나, 나를 때렸어?”
내게서 맞을 것이라고는 생각도 못했는지 시종 릴리는 몹시도 당황한 것처럼 자신의 볼을 부여잡았다. 얼굴을 가린 천에 표정이 가려졌지만 보나마나 잔뜩 화가 나 있겠지.
하지만 지금 상황에서 오히려 화를 내야 할 사람은 나 아닌가? 나는 녀석에게 몇 마디 쏘아주기로 했다.
“네가 왜 맞는 지는 네가 더 잘 알거야. 다른 사람은 속일 수 있어도 나는 속일 수 없거든. 그리고 뺨 맞는 걸로 끝날 거라 생각하지 않는 게 좋아.”
“이, 이 요승…! 요괴 놈…! 두고 보자…!”
릴리는 허리춤에 위치한 파우치 같은 것에서 조그맣고 동그란 구슬을 꺼냈다. 혹시 사탕인가 싶었는데, 그걸 힘껏 바닥에 집어 던지자 퐁-하는 소리와 함께 주변이 연막에 감싸인다.
“태오 경, 괜찮나요?”
“그냥 연막탄인 것 같네요.”
그렇게 피어오른 연기가 사라졌을 때, 손수건으로 얼굴을 가린 미르나가 나의 안전을 살폈다. 연기가 매우 싸했지만 다행히 독은 없는 듯하다.
“저 아이의 짓인 모양이로군요.”
미르나가 사라진 릴리에 대해 운을 뗐다. 아무래도 미르나 역시 자신의 저택에 사람들을 침입시켰던 것이 누구의 짓인지 빠르게 파악한 듯이 보였다. 똑똑 하구만.
* * *
엘가는 침대에 앉아 발을 차가운 물 가득한 대야에 담그고 있었다.
거기에는 얼음과 꽃잎이 동동 떠다니고 있었는데. 서민들은 구경도 하기 힘든 여름철의 얼음덩어리를 저렇게 족욕에 쓰고 있다는 것이 과연 귀족 아가씨다웠다.
“릴리? 글쎄, 나는 처음 듣는 이름인데. 그런 애가 있었나.”
그 모습을 보면서 미르나가 흥 코웃음을 친다.
“역시 그럴 줄 알았다니까요. 리오네스 영애에게 물어보는 것 자체가 시간 낭비라고 그랬잖아요.”
“뭐가 어째? 내가 그렇게 싫으면 나가, 인마. 그리고 누가 멋대로 내 방에 들어오래? 나 지금 쉬고 있는 거 안 보여?”
“멋대로 들어온 건 당신도 마찬가지이지 않나요? 감히 멋대로 제 저택에 들어와서는 가고일을 박살내다니. 하마터면 당신 행동 때문에 우리가 어떤 꼴이-.”
조잘조잘.
미르나와 엘가가 서로 언성을 높이며 싸우기 시작했을 때, 나는 잠깐 잠겨 있었던 생각에서 빠져나올 수 있었다.
“엘가 님, 그럼 아이라 님의 옆에 붙어 있는 시종에 대해서는 전혀 아는 바가 없다 이것입니까?”
“글쎄. 딱히 없는 것 같네. 아무튼 그래서 뭐야, 아이라랑 서로 화해 한 거야? 역시 그럴 줄 알았다니까. 괜히 주변 사람만 힘들게 하고 말이야.”
엘가가 계속해서 말했다.
“가뜩이나 투르키의 세라자데가 시비까지 걸어오고 있는데 말이야. 같은 왕국 사람들끼리 똘똘 뭉치지는 못할망정. 싸움질이나 하고. 아무튼 이제 잘 된 거지?”
“글쎄요….”
내 두루뭉술한 대답이 맘에 들지 않는 건지 엘가는 미간을 살짝 찌푸린다.
“잘 되면 잘 된 거고, 안 되면 안 된 거지. 왜 그렇게 대답이 비실비실해?”
“리오네스 영애, 사고가 간편해서 사는 건 불편함이 없겠네요. 세상일이라는 것이 그렇게 딱딱 나눠지지 않는다는 걸 모르시는 모양이군요.”
툴툴 맞은 미르나의 대답이 다소 버릇없이 보일지도 모르겠으나. 이번에는 미르나의 말이 맞았다. 사람의 일이라는 것은 맺고 끊는 것이 의외로 확실하지 않을 때가 많으니까.
아이라와 나의 사이가 원래대로 잘 회복되었느냐. 그건 또 아닌 것 같았다.
대화를 나누는 중에 아이라가 기절하듯 잠들어버렸으니, 이야기의 마무리를 지을 수가 없었다고 해야 할까?
“내일부터 다시 함께 할 시간이 있을 테니까 잘 조율하면 되지 뭐.”라고 엘가는 늘어지게 기지개를 켰다. 나 역시 그렇게 생각했으나, 문제는 그 다음 날 발생했다.
━자, 이번 전하제의 개막식에 앞서서 아이라 폰 타란테라 여왕님의 축하 말씀이 있겠습니다. 자, 아이라 님, 아이라 님 오셨습니까?
일 주일짜리 축제가 개막하는 아침의 행사 날. 단상 위의 사회자가 주변을 둘러봤다. 하지만 아이라의 모습은 어디에도 보이질 않는다.
바로 그때 누군가 무대로 나타나 사회자의 귀에 무언가를 속삭였다.
숙덕숙덕.
━아, 여러분 아무래도 행사의 진행에 있어서 전달에 오류가 있었던 모양입니다. 자, 개막식에 앞서서 투르키의 여제, 세라자데 님께서 축도와 함께….
“이게 어떻게 된 일이야? 아이라는 왜 안 왔어?”
아이라가 진행하기로 했던 행사가 세라자데에게 인수 된 것을 보며 엘가가 미간을 찌푸렸다.
뒤에서 이것을 지켜보고 있던 나와 미르나 역시 이해할 수 없는 상황에 고개만을 두리번거릴 뿐이다.
이것뿐만 아니라 오후의 초청 행사도, 대형 석상의 완공식도 아이라는 모두 불참했다.
아무리 아이라가 제멋대로라고 하지만 세라자데를 향한 적의만큼은 진심이 아니었나? 그런 아이라가 이제 와서 멋대로 행사에 불참했다니 나로서는 이해할 수가 없었다.
그리하여 우리는 오후의 해가 뉘엿하게 저물어가고 있을 때 아이라가 머물고 있을지 모르는 그녀의 기숙사 앞을 향했다.
문을 똑똑 두드리자 안쪽에서 기척이 들렸다.
“아이라 님, 저 태오 가스펠입니다. 혹시 계십니까?”
━여왕님은 지금 휴식하고 계시거든-! 누구도 만나고 싶지 않다고 하셨으니까 얼른 물러나도록 해-!
이건 그 시종, 릴리의 목소리인가. 전에 없이 날 서 있는 것이 꼭 둥지를 지키는 어미새가 깃털을 세우는 꼴이 떠오른다.
“그래도 아이라 님과 이야기를 좀 나눠보고 싶은데. 문 좀 열어 봐.”
━아이라 님 지금, 쉬고 계신다니까?
대화가 안 통하는군. 그때 내 옆에서 이야기를 가만히 듣고 있었던 엘가가 나의 어깨를 슥 옆으로 밀쳤다.
“야, 잠깐 물러나 있어 봐.”
그리고는 문고리를 잡아 손으로 비트는데.
엘가의 강력한 악력 때문인지 고급스럽고 고풍스러웠던 금빛 문고리가 으드득 박살이 나서 바닥에 나뒹군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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