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aming the Villainess RAW - Chapter (209)
EP.210)여름 # 8
210 – 차가운 여름 # 8
점심시간.
나와 미르나는 교단의 대성당에 마련된 회담장에 앉아 누군가를 기다리고 있었다. 한참 무의미한 기다림이 이어졌을 때 미르나가 흐응-하고 긴 콧소리를 낸다.
“늦으려는 모양이네요. 어쩌면 아예 안 올 수도 있고. 그럼 깔끔하게 포기하는 거에요. 아시겠나요, 태오 경?”
“알겠습니다.”
초조한 마음 때문인지 다리를 떨고 싶어진다. 물론 그런 동요를 겉으로 표현할 만큼 나는 가볍지가 않았다.
충동을 가볍게 억누른 뒤 테이블 위에 놓인 젖은 티슈로 손을 닦고 있으려니 마침내 벌컥 문이 열리고 얼굴에 검은 천을 드리운 여성이 나타났다.
“아이라 여왕님께서 입장하십니다. 모두 자리에서 일어나 예를 표하십시오.”
곧 아이라가 모습을 드러냈다.
이번에는 머리가 헝클어져 있지도 않았고, 스타킹을 벗고 있지도 않았다. 깔끔하고 완벽한, 평소 아이라의 모습이다.
그 모습을 보자 반갑기도 하면서 동시에 내가 없이도 잘 살고 있었던 것 같다는 생각에 조금 분했다. 어쩐지 더 예뻐진 것도 같고.
동시에.
정말 나를 납치하라 명령했던 것이 아이라가 맞는지 의심이 들어 긴장감도 생긴다.
“…….”
아이라는 나를 바라보지 않았다.
그저 서늘한 눈으로 주변을 슥 한 번 살펴본 후에 언제나처럼 여유를 띈 목소리로 말했다.
“드레이코 가문의 미르나. 이렇게 나를 불러낸 이유는 뭐지? 나는 여왕으로서 바쁜 몸이야. 만약 별 다른 이유가 없이 불러낸 것이라면 실망이 클지도 모르겠어.”
“그건 말이죠─.”
적당히 얼버무리려는 것처럼 운을 떼며 나를 바라보는 미르나 드레이코. 아마 나보고 할 말이 있으면 시작하라는 소리인 모양이다.
막상 생각해두었던 말은 많았는데.
비교적 태연해 보이는 아이라의 얼굴을 보자 나는 내가 준비해왔던 이야기들이 과연 그녀에게 잘 먹히긴 할까 의문을 느끼게 되었다.
그래서 잠깐 생각을 고르고 있자, 미르나 드레이코가 후-작게 한숨을 내쉬더니 멋대로 이야기를 시작했다.
“타란테라 여왕. 이렇게 부른 까닭은 어제 있었던 일 때문입니다. 당신이라면 이게 무엇인지 모른다고 발뺌하시지는 않겠죠?”
스륵.
미르나가 주머니에서 꺼낸 것은 까만 천이다.
거미의 자수가 놓인 까만 천으로, 그것은 지금 아이라의 옆을 수호하고 있는 신임 보좌관이 얼굴을 가리고 있는 것과 비슷한 모양이었다.
누가 봐도 타란테라 가문의 물건이라는 건 확실하다는 소리. 그에 아이라는 가느다란 눈을 뜬 채 그것을 붙잡았다.
“이건…, 마녀회의 두건으로 보이는데. 이걸 어째서 미르나 네가 갖고 있는 거지?”
“모르는 척을 하는 지, 발뺌을 하는지 모르겠군요? 지난밤에 무슨 일이 벌어졌던 건지 모르는 건가요?”
“…지난밤?”
“타란테라의 마녀회, 발푸르기스가 제 별장에 쳐들어와서 저와 태오 경을 위협했단 말입니다. 저와 태오 경은 거의 죽을 뻔 했어요…!”
미르나가 따박따박 선명한 목소리로 아이라를 향해 추궁했다.
거의 죽을 뻔 했다는 건 솔직히 과장이지만 아이라가 어떻게 반응할지 몰라서 살짝 긴장을 높이고 있으려니 미간을 한껏 찌푸린 아이라가 테이블을 탁-손바닥으로 쳤다.
“모함이 심하구나, 미르나. 나는 그런 명령을 내린 적이 없어.”
“그럼, 당신이 아닌 이상 누가 마녀회를 다룰 수 있다는 말이죠? 거짓말도 이쯤 되면 정말 뻔뻔스럽기까지 하네요, 아이라 폰 타란테라.”
미르나는 정말 화가 난 듯이 보였다. 그녀의 분노는 매우 합당한 것으로, 자신의 가문에 멋대로 쳐들어온 자객들을 탓할 자격과 정당함이 있었다.
다만 이 대화에서 나는 기이함을 느꼈다. 아이라가 정말 모르는 것처럼 느껴졌으니까.
그런 나의 눈이 향하는 것은 마치 아이라의 그림자처럼 이 풍경에 자연스럽게 녹아 있는 신임 보좌관이었다.
그녀의 이름도 모르고 얼굴도 모르지만, 까맣게 두 갈래로 땋은 댕기머리를 보면 예전에 내가 봤던 사람과 동일 인물인 게 분명했다.
혹시 저 녀석 짓인가?
“이건 선전포고나 마찬가지에요. 아무리 앙그마르의 왕좌에 앉은 여왕이라 하더라도, 이 교단의 도시에서 드레이코 가문을 건드리면 당신이라고 해도 무사하지 못할 겁니다.”
미르나 역시 테이블을 손바닥으로 탁 내리쳤다. 덕분에 평화로운 대성당의 회의장은 한층 무거운 분위기가 감돌기 시작했다.
“나는 하지 않았다고 말했잖아. 나는 앙그마르의 여왕 아이라 폰 타란테라야. 내가 하지 않았다고 하면, 하지 않은 거야.”
“그렇다고 있는 증거가 없어지지는 않잖아요. 왕궁에서는 그런 억지가 통했을지 몰라도. 여기선 통하지 않아요.”
두 여자가 서로를 노려봤다. 한참 이어지는 기 싸움. 마침내 아이라의 시선이 내게로 향했다.
“태오야, 너도 그렇게 생각하는 거니? 내가 네게 자객을 보냈다고…?”
“저는….”
“나는 여왕이야. 태오, 너는 내 말을 믿어야 할 의무와 권리가 있어.”
“멋대로 내칠 때는 언제고 이제 와서 여왕 행세라니. 참 뻔뻔하군요!”
내가 뭔 말을 하기 전에 다 가로 채냐. 나한테도 좀 대화의 기회를 좀 줘 봐. 이대로 있다간 한 마디도 못할 것 같아서 나는 입을 크게 벌렸다.
“잠깐. 제가 이야기를 해도 되겠습니까? 그 전에, 둘이서 얘기를 나누고 싶습니다. 저와 아이라 님. 단 둘이서만.”
“하지만 태오 경-.”
미르나가 걱정스러운 눈초리로 나를 향해 제지하듯 입을 열었다. 미르나가 이러한 반응을 보일 것이라는 걸 예상했기에 별로 놀라울 것도 없는 일이었다.
“무엄하다! 감히 하찮은 노예 출신의 요술사 주제에 타란테라 님과 독대라니!”
하지만 배경처럼 녹아있던 비서관이 커다란 소리를 내지를 줄은 생각을 못했다.
“타란테라 님, 이런 녀석의 말에 귀를 기울여선 안 됩니다. 쫓겨난 것에 앙심을 품고 드레이코 가문 따위를 등에 업어 여왕에게 누명을 씌운다니. 이런 일을-.”
“물러가라.”
“하지만….”
“물러가라고 했어.”
* * *
나와 아이라가 둘만 남게 됐다.
아이라와 둘만의 시간을 보냈던 적은 꽤 많았지만.
이렇게 보니까 그녀와 단 둘이 있었을 때 나는 무슨 이야기를 했고 또 어떤 표정에 어떤 몸짓을 하고 있었는지 새삼 궁금해졌다.
먼저 입을 열은 것은 아이라 쪽이었다.
“태오야, 내가 자객을 보내지 않았다는 것 정도는 알고 있겠지? 내가 정말 너를 없애고자 마음먹었다면, 번거로운 일 하지 않고 직접 갔을 거야.”
설득력이 상당하구만.
“또, 내가 너의 휴가를 방해할 만큼 한가한 사람이 아니라는 것. 태오 너도 잘 알고 있을 거 아니니?”
“휴가요?”
“그래.”
“제가 휴가를 보내고 있었단 말입니까?”
“그래. 내가 방을 나가라고 말했잖니.”
“그리고 다시는 모습을 보이지 말라고도 하셨잖아요.”
“…그런 말은 안 했어. 나를 거짓말쟁이로 만들지 말렴.”
확실히 그런 말은 안 했었지. 그런 뉘앙스를 풍겼을 뿐.
생각해보면 아이라는 나를 자른다거나, 해고한다거나, 그만 두라는 말은 하지 않았다. 그냥 나가라고 한 뒤에, 그 뒤에 다시는─. 하고 말끝을 흐렸을 뿐이다.
그럼 단순히 이 모든 게 나의 지레짐작 때문이었다고?
아니, 그게 아니라는 걸 나는 잘 안다. 지금 아이라는 두루뭉술하게 넘어가려고 하고 있는 거야.
아이라가 말했다.
“나는 태오, 네게 휴가를 주었던 거야. 과열되었던 것 같은 머리를 식히고. 내게 사과할 수 있는 마음의 여유를 가질 수 있게.”
그렇게 말하는 아이라는 무척 당당해보였다. 마치 자신이 아무런 잘못도 없고 내가 오롯이 나쁜 짓을 해서 사과를 해야만 한다는 듯한 태도였다.
“나는 너그러운 여왕이야. 태오, 네가 진심으로 뉘우치고 반성한다면 얼마든지 용서할 아량이 있지.”
“저를 용서해주신다는 겁니까?”
“그래. 네가 했던 일들을 뉘우치고, 그때로 돌아갈 수 있다면 그런 행동을 하지 않을 것이라 맹세하는 거야.”
“그렇지만, 저는…, 그때로 돌아가도 똑같은 행동을 할 것 같습니다. 아이라 님, 이번에 또 쓰러졌다는 말을 들었으니까요.”
스르르 주변에 냉기가 감돌았다. 아니나 다를까 테이블 위에 놓인 물컵에 쩌적 얼음이 끼는 게 보였다. 절대영도 같은 건가.
더욱 차가운 것은 아이라의 목소리였다.
“감히 내 제안을 거절하다니. 휴가 기간에 편지 한통 보내지 않은 괘씸한 녀석이지만. 넓은 아량으로 용서해주려고 했거늘─.”
아이라는 정말 화가 난 것 같았다. 다만 나는 그녀와의 대화에서 신경 쓰이는 게 있었다.
“편지? 제가 보냈던 편지들을 받지 못하셨습니까?”
“편지를 보낸 적이 있긴 하니?”
“어젯밤에도 여러 마리의 전서구를 보냈었는데요?”
“받지 못했어.”
내가 날려 보냈던 전서구가 도중에 다른 곳으로 도망쳐버렸나. 핸드폰이 있었다면 상상도 할 수 없는 일이 편지 시대에는 벌어진다.
“그렇군요.”
대강 알 것 같았다. 아이라의 옆에 있었던 신임 보좌관이 편지를 빼돌린 게 아닐까.
암살자를 보낸 것도 그 녀석이겠지. 상식적으로 나와 아이라 사이를 이간질해서 이득을 얻을 수 있는 자가 그리 많질 않다.
왜 날 노렸던 거지?
나는 침묵에 잠겼다. 짚이는 바야 많지만 나는 녀석이 누군지도 몰랐으니까. 바로 그때였다.
“태오야.”
아이라의 목소리는 예전처럼 나긋하고 어딘가 다정함마저 품고 있었다. 마치 우리 사이에 아무 일도 없었다는 것처럼.
“태오 너에게, 출신도 모르는 반요정이라 했던 거….”
“…….”
말을 흐린다. 무언가 할 말이 있는데. 용기가 나지 않는 건지 부끄러운 건지 알 수 없는 미묘한 태도였다.
“내가 사과하도록 하겠다. 말이 너무 심했었구나.”
“여왕님께서 제게 사과를 하신다는 말입니까?”
“두 번은 말하지 않겠노라. 하지만, 그래. 그렇다고 할 수 있지. 영광으로 알아도 좋아.”
슬그머니.
아이라는 시선을 옮겨 창밖을 바라봤다.
그 얼굴은 내가 본 적 없을 정도로 붉어서 마치 토마토 같았다. 새하얀 백설 공주 같은 아이라도 얼굴을 붉힐 때가 있긴 하구나.
아이라에게도 부끄러움이라는 감정이 있다는 게 신기했다. 사람이 부끄러움을 느끼는 건 당연한 일이지만. 왜인지 모르게 아이라는 그런 게 없을 것 같았으니까.
하지만 그녀는 인간으로서 당연한 부끄러움에 얼굴을 붉히면서도 꿋꿋이 말했다.
“…그때는 내가 어리석었어. 너는 과거로 돌아가도 똑같은 일을 할 거라 말했지만. 만약 과거로 돌아갈 수 있다면 나는 그런 말을 하지 않을 거야.”
“…….”
사과라는 것은, 의외로 듣는 쪽도 상당히 무안한 것이구나.
어쩐지 대답을 기다리고 있는 듯한 아이라를 향해, 나는 천천히 입술을 뗐다.
“사람이 살다 보면 실수를 할 수도 있는 법이지 않겠습니까? 저는 완벽한 아이라 여왕님께서 실수를 하셨다는 것이 신기하네요.”
“사람은 완벽하지 않아. 하지만 여왕은 완벽해야하지. 태오, 너는 나를 완벽한 여왕으로 만들어주었어. 그리고….”
스스스.
아이라가 말을 멈췄을 때 열린 창문에서 바람이 불어왔다. 여름의 열기를 식혀주는 시원한 바람이다. 그것이 내 볼을 간질이기를 멈췄을 때 그녀가 마저 말을 덧붙였다.
“…그리고, 너는 나를 완벽하지 않은 인간으로 만들어. 내가 부족하다는 걸 알게 해주는 구나.”
“그거 칭찬입니까?”
“글쎄.”
슬그머니.
아이라는 눈동자를 테이블에 내리깐 채 내 시선을 피했다. 그러다가 한기로 얼어붙은 잔을 슥슥 매만지며 이야기를 돌렸다.
“아무튼, 그래. 나는 말로만 사과하는 사람들과는 달라. 사과에는 무릇 성의가 있어야겠지. 태오야, 내게 바라는 소원이 있다면 하나만 말해보렴.”
소원이라니.
“하나 남은 타란테라의 이름에 걸고. 들어주도록 하겠어.”
무엇이든 들어주는 건가?
나는 눈앞으로 번개가 찌릿찌릿 튀는 것 같았다. 머릿속에서 아이라에게 부탁할 소원들의 목록이 주르륵 나열되다가, 이내 하나가 뽑혀 나오듯 고정된다.
“그럼….”
“그럼?”
나의 이야기에 아이라의 시선이 움직였다. 내가 무슨 이야기를 할지. 내 소원을 들어주고 그것으로 그녀 역시 잘못을 훌훌 털어버리려고 하는 것이리라.
다만 그렇게 벌려진 입술로 나의 이야기는 아이라에게 꽤나 충격적이었을 것이다.
“저 그만 두도록 하겠습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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