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aming the Villainess RAW - Chapter (217)
EP.218)# 1
218 – 대탈출 # 1
이 세상에서 그녀를 처음 만났던 때가 아직 생생히 떠오른다.
무엇에도 관심 없다는 것 같은 냉혹한 태도. 생기가 감돌지 않는 새까만 눈동자는 마치 흑암 같아서 오싹한 면이 있었다.
비유하자면 가시달린 꽃.
아니…, 그 당시 아이라를 정확하게 표현할 만한 어휘력이 아쉽게도 내게는 부족했다.
다만 한 가지 확실한 것은 그녀를 처음 본 순간 내 안에 번개라고 부를 만한 것이 튀었다는 것이다.
그것은 여러모로 복잡한 감정이었지만.
지금 와서 생각해보면 애정이라고 부르기에 적합했다.
축복인지 불행인지 아이라의 외모는 공들인 조각처럼 아름다워서 그녀를 바라보는 뭇 남성들의 마음을 빼앗기 충분했으니까.
그래도 변명 하나 해보자면 내가 그녀에게 관심을 갖게 된 것은 그러한 외모의 빼어남 때문만이 아니었다.
나의 마음을 가장 끌은 것은 그녀의 표정이었으니까.
표정. 마음속의 감정 따위가 얼굴로 드러나는 그것.
아이라는 내가 보아왔던 수많은 아이들과 비슷한 얼굴을 하고 있었다.
가족과 세상에서 버려진 채 눈과 귀를 닫고 살아가는 아이들.
거울을 들여다보면 언제나 볼 수 있었던 모습.
나는 어린 여왕 아이라에게서 나를 봤다.
당시의 나는 유희 거리에 불과한 노예.
그녀는 일국의 지배자. 상황도 처우도 나와는 정 반대였지만 아주 오래전부터, 그녀를 알고 있었던 것 같은 기분마저 느꼈다.
아무튼 나와 그녀는 한 쌍이 되었다.
요승 태오.
폭군 아이라.
사실 지금 생각해봐도 무척 잘 어울리는 한 쌍이었다고 생각한다.
너도 그렇게 생각하잖아.
“아이라. 눈을 떠.”
“이건….”
나비에 둘러싸인 아이라가 무어라 중얼거리는 게 느껴졌다.
사방에 가득한 발광나비들과 그것을 바라보는 사람들의 조잘거림이 소란스러운 이 세상에서 그녀의 목소리만이 유난히 선명하다.
“이것은….”
“네가 알려준 거야, 아이라.”
“아냐, 그런 적 없어. 나는…. 나는 너를 몰라.”
소녀 아이라의 얼굴이 천천히 일그러졌다.
어딘가 아픈 곳이라도 있는 것처럼. 그러자 우리들의 대화를 멍하니 지켜보고 있었던 릴리가 정신이 들었는지 아이라의 어깨를 붙잡는다.
“타란테라 님-. 정신 차리세요…!”
“릴리, 너의 머리가…. 어째서 분홍색…. 여기는….”
“야, 가스펠-! 대체 무슨 짓을 저질렀던 거야!? 나비는 뭐고!”
“가스펠….”
아이라의 의식은 혼란스러워보였다. 나는 테이블 아래로 내려와 자신의 머리를 감싸 쥐고 있는 소녀 시절의 아이라에게로 천천히 다가갔다.
“아이라, 떠올려 봐. 이런 건 불가능해. 너도 잘 알잖아. 네가 누구인지. 네가 지금 어디서 뭘 해야 하는지. 너는 여왕이야. 7월의 여왕이 될 거고.”
“내가, 여왕…? 하지만….”
바로 그때였다.
━그어각!
누군가의 허리가 뒤쪽으로 커다랗게 휘었다. 그는 수염을 기른 남성으로 까만 머리를 치렁하게 기른 남자였다.
그가 바닥에 허물어졌을 때, 그 옆에 서 있던 단발머리의 여성이 피를 울컥 뿜어냈다. 그리고는 가슴을 부여잡으며 바닥에 몸을 웅크렸다.
━사, 살려줘…. 아직 죽고 싶지 않아….
━숨이, 숨이….
차례, 차례, 다양한 모습으로 쓰러져간다. 그 광경이 너무나도 생생해서 잔혹하게 보일 정도였다. 이제 남은 것은 아이라 혼자.
그녀가 이 식장에 남은 마지막 타란테라다.
아.
그때서야 이해가 됐다.
이건 기억이구나.
아이라의 눈에 생생히 새겨진 기억.
공주를 처형장의 악녀로 만들어버린 마음의 가시들.
“안 돼, 안 돼, 안 돼-.”
아이라는 자신의 얼굴을 부여잡고 바닥에 주저앉듯이 무릎을 꿇었다.
동시에 우르르르르-. 식장에 커다란 땅울림이 일기 시작했다. 아니, 식장뿐만 아니라 이 기묘한 세상 자체가 아주 흔들리는 것이 분명하다.
형형색색에 빛나던 축제의 장은 마치 낡은 페인트가 떨어지듯 하나 둘 흩날려 발판을 잃는다. 그 충격 때문인지 나의 팔에 묶여 있는 풍선들이 팡, 팡-하고 터져서 하나만을 남겼다.
“여왕님의 정신이 무너지고 있나 봐…!”
그때 이 광경을 바라보고 있던 릴리가 다급하게 소리쳤다.
“여왕님, 여왕님! 정신 차리셔야 해요!”
하지만 아이라는 얼굴을 바닥에 묻은 채 묵묵부답이다.
와르르르르-.
주변부터 무너지기 시작한 이 정신의 세계는 이제 점점 우리를 향해 다가오고 있어서, 이대로 가만히 있다간 우리 역시 이 붕괴에 휘말릴지도 모를 노릇이다.
한참 아이라를 향해 소리치던 릴리가 이내 자신의 입술을 깨물며 나를 바라봤다.
“뭐라도 해 봐! 여왕님은 내 목소리가 들리지 않나 봐!”
녀석이 말하지 않아도 나 역시 무언가 해야만 한다 생각했다. 이대로 있다간 우리들이 서 있는 발판까지 없어져버릴지 모른다.
빡.
“겍-!”
결국 릴리는 어딘가에서 떨어지는 둔탁한 것을 머리에 맞아 비명을 내지르며 바닥에 철푸덕 쓰러졌다.
덕분에 더욱 조바심이 난 나는 목소리를 가다듬고, 지금까지 몇 번이고 불러왔던 이름을 차분히 입에 담았다.
“아이라.”
“….”
“아이라, 나를 봐.”
“…….”
그러나 아이라는 그저 자신의 얼굴을 무릎 사이에 파묻고 웅크려 있을 뿐이다. 마치 알 같았다. 단단한 껍질에 둘러싸인 알.
“이제 일어나야 해. 널 기다리는 사람들이 있어.”
“…….”
내 목소리 또한 아이라에게 닿지 않는 것 같았다. 마치 그녀와 나 사이에 보이지 않는 유리벽이라도 가로 막혀있는 기분이다.
꿈은 결국 허망한 것이라느니, 아픔을 딛고 살아가야 한다느니-같이 뻔한 이야기들이 내 입술에서 달싹이다가 계속해서 사라진다.
어떤 말을 해도 지금의 아이라에게는 닿지 않겠지. 그래서 나는 까만 허공에 두둥실 떠올라 있는 발판들을 밟고 웅크린 여왕에게로 다가갔다.
그리고는 그 고개를 들어 올렸다.
“나를 보라고. 너는 내가 누군 지 알잖아. 네가 누군지도 알고. 여기서 이러고 있을 때가 아니라는 거, 잘 알잖아.”
“네가 누군데….”
화장기 하나 없지만 눈물을 머금은 얼굴이 붉어서 생기 넘치는 모습이다. 그 중에서도 가장 붉게 빛나는 입술을 바라보던 나는 버튼이 눌린 것처럼 몸을 움직였다.
화아아-.
가장 먼저 느껴진 것은 체리 향기다. 아이라의 입술에서는 진한 체리 향이 났다.
그 뒤에 상상했던 그대로의 부드러움과 따스함을 느끼고 있을 즈음, 누군가 나의 어깨를 살포시 밀어냈다.
고개를 때어냈을 때 풋풋한 소녀의 얼굴은 온데간데없었다.
내가 아는 여왕 아이라가 나를 바라보며 가느다란 눈을 뜬다.
“이 혀놀림은, 태오로구나.”
“…….”
“하지만, 태오가 이렇게 커다란 남자일리 없지. 이상해. 이상한 일이야.”
한참 중얼거린 아이라가 주변을 둘러보더니 이내 고개를 주억거렸다.
“그런가, 아. 이건 꿈이로구나. 이제야 알겠다. 이건 꿈이었어. 그러니 반요정 태오가 이렇게 커다란 남자가 될 수 있는 것이로구나.”
스스로 무언가를 중얼거리며 납득하는 것이 정신이 온전해 보이지는 않았다. 하지만 아이라가 이 상황을 꿈이라 파악한 건 나쁘지 않은 일이었다.
“꿈인가. 어렴풋이 눈치는 채고 있었지만…. 그런가, 모두 꿈이었나.”
“그렇습니다.”
“그보다, 태오야, 네가 나의 꿈엔 어쩐 일로 온 거니? 나는 너를 초대한 기억이 없다만.”
“그게…, 아이라 님. 이게 어떻게 된 일이냐면….”
내가 무언가를 설명하려 할 때, 아이라가 나의 입에 손바닥을 슥 가져다 댔다.
“보나마나 내게 모종의 문제가 생겼고, 너는 드레이코 자매의 도움을 받아 내 정신에 개입한 것이겠지. 그들 자매나, 성녀 프리가 정도는 되어야 나의 정신방호를 뚫을 수 있거든.”
“…….”
기가 막히군.
내가 설명하지 않아도 아이라는 스스로의 상태를 척척 진단했다.
일찍이 아이라가 ‘자신의 몸에 대해서는 자신이 가장 잘 안다.’라고 말했던 적이 있는데. 여왕으로서의 단순한 오만이 아닌 진실이었던 모양이다.
“그럼에도 나의 깊은 심층의식까지 들어오기가 쉽지 않았을 텐데. 대단하구나. 혹시 그 풍선 덕분이니?”
“그럴 겁니다. 그럼 이곳에서 어서 빠져 나가야 해요.”
나는 아이라에게 내 팔목에 휘감긴 풍선을 보여주었다. 이제 딱 하나 남은 풍선. 이게 다 터지기 전에 이야기가 잘 풀려서 다행이구만.
“이걸 타고 빠져나가면 되겠구나. 높은 곳으로.”
아이라의 말에 나는 바닥에 쓰러져 있는 릴리와 아이라의 허리를 한 손으로 끌어안았다. 그러자 내게 안긴 아이라가 후후-웃는다.
“아무리 꿈이라지만, 팔이 길어서 다행이야. 당최 이 모습은 어떻게 된 거니?”
“이건…, 뭐, 꿈이니까요. 꿈에서 만큼은 좀 커도 되잖아요.”
“그래, 꿈속에서는 무엇이든 될 수가 있고, 무엇이든, 누구든 만날 수가 있지. 그래, 아무튼 출발해보도록 하거라.”
“출발요?”
“풍선을 타고 하늘로 떠오르는 상상을 해본 적 없니? 그것처럼 하면 되는 거야.”
“아.”
아이라의 이야기에 나는 에라 모르겠다는 심정으로 허공을 향해 가볍게 도약했다. 이것은 일종의 자각몽 속이니까 어찌되든 되겠지.
슈슉.
곧 내가 디디고 있던 마지막 발판이 바스슥 무너지며 세상 모든 것이 깜깜한 허공에 잠겼다.
다만 내 몸은 팔목에 묶인 풍선을 타고 두둥실 떠오를 수가 있었다.
까맣게 반짝이는 별들 사이를 풍선타고 날아가는 경험을 다 하다니.
현실감이 느껴지질 않는구만.
그래도 나름의 낭만은 있구나, 그런 생각을 할 때였다.
━그어어어으, 아이라아아아….
스륵.
나의 목덜미에 솜털이 곤두서는 것 같은 오싹함이 나의 발끝부터 머리끝을 지릿지릿 울렸다. 무언가 좋지 않은 일이 일어날 것이라는 직감이라고 해도 좋다.
━아이라아아아아아-.
그런 상황에 바닥으로 고개를 내린 것은 본능이었다. 곧, 나는 바닥 아래에서 빛나고 있는 무수한 수의 까만 눈동자를 발견할 수 있었다.
저것이 무엇인지는 알 수 없었지만.
저것에 붙잡혔다간 분명 좋지 못한 일을 겪게 되리라는 것이 확실했다.
그때서야 나는 내가 크나큰 착각을 하고 있다는 걸 깨달았다. 아이라의 마음을 좀먹고 있는 가시는, 가족들의 죽음이 아닌 바로 저것이다.
“아이라 님, 저건 대체-.”
스륵.
그때 아이라가 나의 턱을 붙잡았다.
“내려다보지 말거라.”
“그렇지만, 저건…, 저건, 대체 뭐죠?”
“아무것도 없어. 이곳에는 오직 우리들만 존재하고 있는 거야.”
“그렇지만─.”
무어라 말하고 싶었으나, 나의 몸은 곧 환한 빛무리에 감싸여서 아무것도 생각할 수 없어지고 말았다.
* * *
눈을 떴을 때, 나는 푹신한 침대 위에 혼자 누워있었다.
이불이 너무나도 푹신하고 몸은 젖은 솜처럼 무거워서 별로 일어나고 싶지 않은 기분이었다.
“대체 언제까지 자나 싶었는데. 이제 눈 떴냐?”
“…….”
마냥 누워 있을 수만도 없었던 것은 나를 바라보고 있는 시선을 느꼈기 때문이었다.
까만 복면이 가장 먼저 보여서 순간 혼란스러웠는데. 엄청 웃기게 생긴 분홍색 머리칼이 좌우로 삐죽 묶여 있는 걸 보니 그 정체를 알 수가 있었다.
“뭐야, 릴리잖아. 어떻게 됐어. 잘 끝난 거야? 아직 꿈 속?”
릴리의 머리가 분홍색인 것을 보며 나는 이곳이 아직 꿈이 아닐까 생각했다. 다만 녀석은 복면 사이에 유난히 도드라지게 보이는 눈가를 와락 찌푸린다.
“뭐라는 거야? 그래도 정신은 멀쩡해 보이네. 이제 일어났으면 일어나서 세수라도 해. 정말이지, 내가 뭐가 예뻐서 너 같은 놈 간병을─.”
시끄럽구만.
덕분에 잠이 확 달아났다.
스르륵.
이불 바깥으로 팔과 다리를 뺀 나는 곧 나의 몸이 생각보다 짧고 힘이 들어가지 않는다는 걸 눈치 챌 수 있었다. 바닥에 땅을 딛고 서자 천장이 유난히 높다.
세상이 커진 건가.
아니, 세수하기 위해 욕실에서 거울을 본 순간 익숙한 눈 흉터를 발견해버렸다. 소년과 청년 그 사이에 아슬아슬하게 걸쳐진 얼굴.
전체적으로 미소년에 가까운 미형이지만 흉터 덕분에 어딘가 긴장감을 머금고 있는 그 얼굴이란 잊을 수가 없는 것이다.
나름 잘생기긴 했다만, 방금까지 커다란 키의 세상을 만끽하고 있었는데 다시 이것저것 짧아져서 무척 아쉽다.
아무튼.
꿈에서 깨어났구나.
그렇다는 말은-.
주변을 둘러봤다. 이제야 깨닫는 바지만 이곳은 아이라의 방이었다. 그러나 침대 위에 누워 있었던 것은 나 혼자였고 릴리는 나를 간호했다는 투로 말했었지.
“야, 릴리. 오늘 며칠이냐?”
“21일.”
어쩐지 지끈거리는 머리를 잘 굴려본다. 내가 아이라의 꿈속으로 다이브 했던 날이 19일이었으니 적어도 이틀이 지났다고 보면 되는 건가?
“내가 이틀을 내리 잤다고?”
“그래! 하여간, 잠이 그렇게 많아서-. 그보다, 언제 이런 말 했던 것 같은 기분이 드는데. 뭐지….”
릴리는 이해할 수 없다는 것처럼 고개를 주억거렸다. 그러다 무언가 생각난 것이라도 있는 것처럼 복면의 뒤로 내게 은근히 묻는다.
“야, 너 혹시 꿈속에서 무슨 일이 있었는지 기억 나?”
“꿈속에서?”
녀석의 물음에 나는 기억을 되짚어봤다. 무언가 많은 일이 있었던 것 같긴 한데.
꿈이라는 것이 그렇듯이 막상 떠올려보려고 하니 흐릿흐릿한 와중에 몇몇의 장면만이 선명하게 빛나고 있을 뿐이다.
내가 기억하는 것은 며칠 마녀 숲을 헤맨 것과 결혼식장에 도착한 것, 그리고 붕괴되는 심상세계와 마지막에 깊은 바닥 아래에서 발견했던….
“잘 모르겠는데.”
“그래? 나만 기억 못하는 게 아니구나. 꿈이란 게 원래 그렇긴 하지. 아무튼, 네가 가장 마지막에 일어났어.”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