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aming the Villainess RAW - Chapter (369)
EP.370)뜯다 # 4
370 – 포장지를 뜯다 # 4
내가 “아이라.” 그녀의 이름을 불렀을 때. 그녀는 내게 와서 님이 되었다. 사람들 앞에서 이름이 불린 것에 존칭을 넣도록 정정하다니.
“아이라 님.”
“그래.”
살짝 무안한 감정에 나는 얼굴을 붉혔다.
얼굴 여기저기 붕대가 감겨있지 않았다면 빨간 토마토처럼 붉게 달아오른 내 얼굴이 드러났겠지. 어쩌면 이미 다들 눈치 챘을지도.
서로 말은 안했지만 어색한 공기가 순식간에 막사에 가득 찼다. 서로 눈치를 보느라 어쩔 줄 몰라 하는 거야.
아무튼 유익한 대화였다. 아이라가 나와 거리감을 좁히고 싶어 하지 않는다는 걸 방금 대화로 알 수가 있었다. 나에게 아이라는 “아이라 님”이었고, 그녀에게 나는 “태오야.”다.
솔직히 약간 기대하고 있었다.
왜, 나와 그녀는 서류상이나마 부부가 되었으니까. 또 여러 일을 겪으며 꽤 많은 마음 속 이야기를 나누기도 했으니까.
‘여보’나 ‘자기’같이 부끄러운 호칭은 아니더라도 어느 정도 더 친근하게 굴어도 되지 않을까 싶었는데 아이라는 마치 내게 철벽을 치듯 했다!
아이라가 말했다.
“앉도록 해. 마침 중요한 이야기 중이었으니까. 경우에 따라서는 두 사람의 지혜가 필요할 수도 있겠지. 에르가네스는 야전의 사령관이고. 태오는 궁정 마법사니까.”
궁정 마법사인가.
그래, 나는 공적인 자리에서 궁정 마법사 직책을 겸하고 있었다.
낙하산처럼 꽂아진 게 아니냐 불만을 토로하는 자들도 꽤 있었던 것 같은데. 지금에 와서는 그런 내 직책에 누구하나 의견을 달지 않았다.
내가 실력을 보여주었기 때문이겠지.
비록 요행들이 섞이긴 했다만 나는 그 아이라를 이긴 적 있는 몸. 이제 와서 내 자격을 운운할 수 있는 자들은 아무도 없는 듯하다.
슥.
나는 의자를 하나 꺼내 앉으며 주변을 둘러봤다.
아이라의 막사 안에는 꽤 많은 사람들이 동그란 원형 책상에 앉아 있었다. 그 수는 총 열 정도 됐는데 각각 군사적인 지식을 지닌 전문가들이 분명 했다.
낯선 사람들이었지만 그 중에는 내가 아는 얼굴도 있었다. 이를테면 저기 지금 왼쪽 귀퉁이에 앉아 팔짱을 낀 채 불만 가득한 표정을 지은 금발의 여성이 그렇다.
“에르가네스.”
“아슬란.”
서로 닮은꼴의 두 여성이 가볍게 눈을 마주친다. 무언가 파지직-하고 스파크가 튀는 것 같이 보이는 것은 단순히 착각만이 아니리라.
잘은 모르겠지만.
친척인 두 여성 사이에서 우리가 알지 못하는 무언가가 있었다는 것 정도는 유추할 수 있었다. 그때 먼저 여유를 보인 건 엘가 쪽이었다.
“그래서, 무슨 이야기들 하고 있었나?”
그에 서부도시 오를레앙에서 ‘공주기사’라 불린다는 아슬란이 흥 코웃음 쳤다.
“보면 몰라? 내일 있을 가르가타 공략에 대해 이야기하고 있었잖아. 지도에 펼쳐져 있는 병력들 배치를 보면 그 정도는 척 알아야지.”
아슬란은 제법 밉살맞은 여성이었다. 저번에 만났을 때도 이랬나? 아니, 정의와 대의를 외치는 기사의 표본 같은 여자애라고 생각했는데.
“전선에서 물러나 왕도나 아크에서 쉬다보니 감이 무뎌진 게 아닌지 몰라, 에르가네스.”
아마 엘가를 향한 대항의식 같은 게 불타고 있는 게 아닐까.
물론 엘가는 가볍게 응수했다.
“너무 형편없는 배치라 설마 공략 이야기를 하고 있을 거라고는 생각도 못했지. 뭔데 이렇게 기병만 잔뜩 있어? 기병돌진만 생각하는 누가 짰을 법한 배치네.”
“기, 기병 무시하지 마!”
“무시하는 게 아니고. 나무랑 덩쿨 가득한 이 지형에서 과연 그만큼 효과가 나오냐 이 말이지. 나라면 여기, 이런 지형에 익숙한 모험가들을 전방 배치해서 척후로 삼고….”
슥슥.
엘가가 손을 뻗어 책상 위에 얹은 지도 위의 말판들을 움직였다. 마치 체스라도 하는 것 같은 모습이었는데 표정이 꽤 재미있어 하는 것 같았다.
오랜만에 온 전장의 냄새가 마음에 들은 것이겠지. 그 뒤로 사람들은 한 동안 이런저런 병법이나 진법에 대해서 논의했다.
물론 이런 일에 있어서 전혀 문외한인 나는 마치 현장체험 학습을 온 어린아이처럼 그저 멀뚱멀뚱 눈을 뜨고 이 대화와 광경을 바라볼 뿐.
그때 누군가 운을 뗐다.
“태오 경의 생각은 어떻소? 궁정의 마법사로서 의견을 좀 내주셨으면 좋겠소만.”
누가 말을 걸어온 건지는 모르겠다. 하지만 누구라도 이상하지 않았다. 궁정 마법사라는 것은 본디 왕의 조언자임과 동시에 전시에는 전술 병기처럼 사용되는 자들이니까.
다만 방금까지 대화를 따라가지 못하고 있었던 나로서는 “음….”하고 가볍게 침음 할 뿐. 그에 아슬란이 이야기를 받아 말을 걸어왔다.
“당신, 굉장하던데. 이러니저러니 해도 여왕에게서 승리를 따냈잖아. 그리고 솔로몬의 손자라며? 그럼 가르가타 성문을 뚫을 마법도 하나 정도는 있을 거 아냐.”
“그건….”
내가 답하기 전에 엘가가 먼저 입을 열었다.
“그야 성채 문 정도는 부술 수 있겠지. 하지만 지금 태오는 안 돼. 몸 상태가 좋지 않아. 괜히 관리 안 된 대포에 불 붙여봤자 고장밖에 더 나겠어?”
“에르가네스, 너 답지 않게 약한 소리를 다 하네. 그런 건 근성으로 어떻게든 버텨야지. 지금은 전시야. 전쟁 중이라고. 대체 뭐 때문에 대마법사들에게 세금 감면을 해준다고 생각….”
서로 언성이 높아진다.
원래 대단한 사람들이 한 자리에 모이면 이렇게 되는 건 흔한 일이었다.
이들은 각자의 삶에서 주인공처럼 살아왔던 사람들이라 “내가 옳다.”라는 사고가 머리에 가득 담겨져 있는 자들일 테니까.
짝.
그때 아이라가 손뼉을 쳤다.
“한 시간 정도 휴정하도록 하지.”
* * *
사람들이 모두 막사 안을 빠져나갔다. 한참 시끄러웠던 자들이 빠져나가자 막사는 마치 다른 세상처럼 느껴질 정도로 고요해졌다.
타닥, 타닥.
어찌나 조용해졌는지 타오르고 있는 모닥불 소리가 들려올 정도였다. 덕분에 나는 이 막사 안에 모닥불이 있는 지 처음 알게 됐다.
모닥불뿐만 아니라 저쪽에 놓인 간이침대 등을 보면 이곳은 아무래도 아이라의 침소로도 사용되고 있는 곳인 모양이었다.
“…….”
“…….”
아이라와 나는 서로 말을 하지 않은 채 침묵했다.
원래 아이라는 이것저것 조잘거리는 타입이 아니었기 때문에 이렇게 대화가 끊기는 때는 종종 있었다. 하지만 오늘은 조금 느낌이 기묘했다.
매우 어색하다고 해야 할지.
무슨 말이라도 하면 좋을 것 같다는 기분이 든다.
처음 선을 보러 온 나온 남녀가 마주보고 앉았을 때 딱 이런 기분을 느낄까? 선을 본 적이 없어서 모르겠다.
애초에 선이라는 것은 결혼을 전재로 남녀가 만나 대화를 나누거나 식사를 하는 행위. 나와 아이라는 그런 과정을 필요 없이 이미 부부였다.
다만.
진짜 부부가 된 게 맞는 건지 자꾸만 의심이 들고 어색해졌다.
그래서 나는 불안한 눈초리를 이리저리 옮겨서 아이라를 바라봤다. 평소 즐겨 입던 옷과는 대비되는 경장과 갑옷. 그 머리에는 내가 전에 손으로 붙잡았던 왕관이 놓여 있다.
그때 아이라가 말했다.
“갑옷을 벗을 테니, 도와주렴.”
그것은 높지도 않고 낮지도 않고, 차갑지도 없고 그렇다고 따뜻하지도 않은 적당한 느낌의 말씨였다. 어떻게 이렇게 절묘한 중간을 지나갈 수 있는 건지 오히려 감탄이 들 정도다.
나는 그녀를 향해 다가가서 그 허리에 묶여 있는 매듭이나 어깨에 장착되어 있는 견갑 등을 풀어주었다. 생각했던 것보다 제법 무게가 된다.
문득.
단 둘만이 있는 막사, 아이라의 갑옷을 하나 둘 벗기고 있다는 것에서 묘하게 야릇한 감정을 느끼게 됐다. 신혼 첫 날 신부의 족두리를 벗겼던 새신랑들이 딱 이런 기분이었을까?
물론 나는 아이라의 옷 위에 얹어져 있던 갑옷만을 벗겨서 벽에 잘 걸어두었을 뿐이었다. 그것으로 나는 아이라의 몸에서 손을 때고 어색하게 섰다.
아이라가 말했다.
“아무 곳에나 앉아있어도 돼.”
그 말이 내게 꼭 용기를 주는 것 같아서, 나는 참고 있었던 이야기를 하기 위해 입술을 열 수 있었다.
“저. 제가 아이라 님과 부부가 되었다고도 들었습니다. 비록 결혼식은 올리지 않았지만, 서류는 그렇게 작성되었다고 들었거든요.”
“그렇지.”
팔락.
아이라는 그저 자신의 앞에 놓인 책을 넘겼다. 무엇이 적혀 있는 책인가 슬쩍 봤더니 근처 지리가 상세히 그려져있는 지도였다.
그 알록달록한 그림을 보며 내가 다시 묻는다.
“그럼, 아이라 님과 저는 이제 가족이 된 겁니까?”
“일단은.”
내 말에 아이라는 떨거나 흔들리거나 하는 일 없이 평탄하게 답했다. 인간이라면 마음의 동요가 있을 법도 한데 전혀 그런 기미가 없다.
마치 아이라에게 있어서 나와 부부가 되었다는 것은 아침이 되어 아침을 먹고, 점심에 점심식사를 하는 것처럼 당연한 일 중 하나처럼 느껴졌다.
그녀답다고 생각하게 되면서도, 나로서는 오묘한 감정을 느끼게 되는 것도 당연한 일.
역시 단순히 서류상 부부가 된다고 하루아침에 가족처럼 지낼 수 있는 건 아니구나. 그런 식으로 혼자 납득하려던 때였다.
문득.
그런 생각이 내 머릿속을 번개처럼 스쳤다.
나는 그걸로 좋은가?
겨우 이런 쇼윈도 부부 같은 관계를 위해 목숨을 걸고 다른 아가씨들의 도움까지 받아가며 그날 그 고생을 했나? 아니, 아니었다.
그래서 나는 천천히 의자에서 몸을 일으킨 후에 아이라를 향해 다가갔다. 웃긴 소리겠지만 지금이 비무제에 참가해 우승을 노리던 때보다 더 긴장되는 순간이었다.
“…….”
아이라는 가만히 앉아서 자신의 앞에 놓인 지도를 바라보고 있었다. 마치 내가 일어나 무엇을 하든 신경 쓰지 않으려는 듯한 태도였다.
내가 물었다.
“아이라 님, 입술을 만져 봐도 될까요?”
“어째서?”
어째서냐고?
“그야, 저희는 가족이고. 가족끼리는 입술 정도 만져볼 수 있을 테니까요. 왜냐하면 부부는 입술뿐 만 아니라….”
내가 말해놓고도 횡설수설 같았다. 머리에 쥐가 난 기분이다. 마치 무슨 비유를 들면 좋을까. 어렸을 적의 기억이 딱 이것을 설명하기 좋겠지.
내가 아직 꼬마였던 때의 어느 크리스마스 날.
아침에 눈을 뜬 나는 생각지도 못할 만큼 커다란 선물에 깜짝 놀랐던 적이 있었다. 꽤 씀씀이 좋은 후원자가 당시 유행하던 조립형 로봇을 남자아이들에게 준 것이었다.
당시 나는 내가 받은 선물이라는 사실 자체를 믿을 수가 없었다.
마치 누군가의 몰래 카메라 같아서. 내가 선물 포장지를 뜯는 순간 “사실 이건 네 것이 아냐. 네 것은 여기 크레파스야.”라고 내 선물을 빼앗아가 버릴 것만 같은 불안함마저 있었지.
그래서 며칠이나 포장지를 뜯지 못했던가.
지금 내가 딱 그 꼴이었다.
앙그마르에서도 가장 아름답기로 소문이 난 아이라가 나의 아내가 되었다니.
실감이 나질 않아서 마치 누군가가 튀어나와 “짠, 모두 연극이었습니다.”라고 말하며 무대와 소품이 치워질 것만 같았다.
그럼 엘가도 미르나르미도 스텔라도 모두 “고생하셨어요.”라고 말하면서 무대 위에 나만을 남겨둔 채 퇴근해버릴 테지.
내게는 선물 가득 끌어안고 행복해하는 모습의 나보다 적막한 현실에 혼자 남게 된 나를 상상하는 것이 훨씬 쉬웠다.
“…….”
그런 생각이 들자 나는 아이라의 입술을 향해 뻗고 있던 손을 멈출 수밖에 없었다.
만약 내게 손이 닿은 아이라가 비누거품처럼 사라질 바에야, 포장지를 뜯지 않고 내버려두는 게 낫다. 슥. 그때 아이라가 나와 눈을 마주쳤다.
방금까지 읽고 있던 지도를 덮고 오롯이 나만을 바라보고 있다.
“이제야 알겠다. 태오야, 너는 어린아이구나.”
“…실례지만, 제가 이렇게 보여도 나이는 여왕님 보다 많은데요.”
“그런 걸 말하고 있는 게 아냐. 커다란 포장의 선물을 받았음에도 혹 그 안에 들어있는 것이 초라한 거짓일까 뜯지 못하는 아이. 그게 너야.”
“…….”
“그것을 열고 실망하기보다. 그저 홀로 포장의 너머를 상상하는 걸 택하고 마는 거야. 그 편이 낫다고 생각하는 거지.”
슥.
아이라의 손가락이 내 손에 닿았다.
“하지만 그 안을 열고 확인해 보기 전까진, 손에 들어온 게 아냐. 그 모양은 어떤지. 얼마나 부드럽고 따뜻한지 직접 확인해 보렴.”
마침내 아이라의 손길에 이끌린 내 손끝이 그 부드러운 입술에 닿았다.
“어떠니. 포장지를 열어본 소감은.”
그것은 생각했던 것 이상으로 무척 부드럽고 따뜻해서.
“오히려 현실감이 없네요.”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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