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aming the Villainess RAW - Chapter (96)
EP.97)애완동물 # 4
097 – 주인과 애완동물 # 4
엘가는 아직 1년 전의 일을 선명히 기억하고 있었다.
곧 있으면 성대하게 치러질 사촌 아이라의 생일을 위해, 오랜만에 앙그마르 왕국의 수도인 모나크 시티에 도착했던 때였다.
“수도는 역시 지루하고 따분하네. 뭐 재밌는 거 없냐?”
당시의 엘가는 변방에서 일어나는 반란과 이민족의 약탈을 평정하기 위해 바쁘게 원정을 다녔던 몸.
그런 엘가에게 가식적이고 허례허식만 즐기는 모나크 시티의 사교회나 만찬은 지옥처럼 끔찍한 것이었다.
“리오네스 아가씨. 과연 듣던 대로 훌륭한 미모십니다. 저희 가문에 가보로 내려져 오는 목걸이를 목에 거신다면 더 아름다워지실 테죠.”
멍청이.
“이번에 첩보에 의하면 튤립의 가격이 굉장히 오를 것이라는데. 저도 3천 골드를 사용해서 튤립을 전부 구매해놨습니다. 나중에 수익이 늘어나면 엘가님께 튤립을 한 박스 선물하죠.”
튤립? 머저리 같기는.
“보르자의 리오네스 저택에는 사자를 키운다고 하던데 진짜입니까? 멋진 동물을 키우는 건 좋죠. 저도 제 별장에 코끼리를 한 마리 들여놓았습니다. 아, 코끼리는 사자보다 강합니다.”
뭔 놈의 코끼리?
특히 수도의 귀족 남자들은 아주 진절머리가 날 정도로 멍청이들뿐이었다. 그들은 자기들이 얼마나 부자고 대단한지 앞 다투어 자랑하기 바빴다.
그래봤자 야욕을 거세당한 하이에나들 주제에.
자신의 아버지인 라인하르트 앞에 서면 벌벌 떨 애송이 같은 사람들이 귀족이라고 으스댄다니. 사자인 엘가 폰 리오네스가 보기에는 그저 우스울 뿐이다.
앙그마르 왕국도 끝물이구나.
무릇 남자라면 야망이 있어야지.
야망.
혼란스러운 정세 속에서 어떠한 방법으로든 역사에 이름을 남기겠다-라는 정도의 꿈은 있어야 하는 거 아닌가?
차라리 얼마 전에 붙잡았던 야만족 노예들이 이 녀석들보다 훌륭했다. 그 녀석들은 겁도 없이 여왕 아이라의 영토에 침공을 할 정도였으니까.
엘가는 자신의 앞에서 코끼리의 멋짐에 대해 떠들어대고 있는 남자를 조롱할 겸 한 마디 짓궂게 내뱉었다.
“노예.”
너는 시대의 노예다.
그러나 남자는 엘가의 뜻을 이해하지 못하고, 더욱 조잘조잘 떠들었다.
“아, 엘가 님께서도 노예에 관심이 있으셨군요. 저도 노예는 좋아합니다. 요일 별로 시종들을 부리지요. 얼마 전에, 새로 생긴 노예 시장이 그렇게 물이 좋더군요.”
남자는 자신이 부리는 노예들에 대해 설명했다. 앙그마르 내전에서 몰락한 귀족들의 영애를 노예로 사서 매일 시중 들게 한다던가-하는 따분한 이야기.
엘가가 적당히 흘려들으며 하품하고 있을 때 남자가 이야기했다.
“그러고 보면 노예 시장에 아주 신기한 노예가 있다지요. 노예 주제에 30금화나 하는 비싼 녀석이라는데-.”
30골드?
그렇게 비싼 노예가 있다니.
“옆 왕국의 공주라도 되나?”
엘가가 비아냥거리자 남자가 설명했다.
“공주가 아니고 남자입니다. 아주 신기한 말을 한다죠. 미래를 알고 있다나.”
“미래를 알아? 그 녀석 이름이 뭔데?”
“태오 가스펠. 그런 이름이었던 것 같습니다. 저도 몇 마디 얘기를 나눠봤거든요. 자기를 높은 값에 사줄 사람을 기다리고 있다고 그러던데. 아주-.”
따분했던 엘가는 그대로 자리에서 일어나 노예시장을 향했다.
그리고 거기서 괴상한 헛소리를 늘어놓고 있는 남자를 한 명 발견했다.
“그러니까, 자유 민주주의가 뭐냐면. 이런 노예도 없고, 귀족도 없고, 평등하면서도 자유와 책임을 중요시하는 사상입니다.”
찾는 건 어렵지 않았다.
많은 사람이 몰려 있었으니까.
“푸흐흐, 이 녀석 말하는 것 좀 봐. 말 도 안 되는 소리를 하고 있어.”
“민주주의는 이미 고대 아르테나 왕국에서 실패한 줄 모르는 건가? 미개하기는.”
“그런 것 치고는 진짜 같은데? 말하는 것도 다른 노예랑 다르고. 점잖은 거 보니까, 어디 학교나 마탑에서 등록금을 못 갚아 팔려온 놈인가 봐.”
“너무 공부를 해서 미쳐버렸다 이거지? 불쌍하구만.”
“…….”
사람들의 조롱 속에 울타리의 남자가 미간을 찌푸린다. 남자라기보다는 소년과 청년 그 사이의 언저리 느낌.
엘가가 물었다.
“네가 태오 가스펠이냐?”
“태오……가스펠?”
남자는 자신의 이름을 처음 듣는다는 것처럼 오히려 되물어왔다.
정신 상태가 좀 이상한 놈인가.
그러나 남자의 얼굴은 금방 매우 기묘하게 바뀌어 일종의 광기나 희열을 내비췄다. 남자는 곧 화가 난 원숭이처럼 철창에 매달려 소리쳤다.
“태오 가스펠, 그래, 그랬던 것이구나! 맞습니다. 태오 가스펠! 여기는 앙그마르 왕국이죠? 아이라 여왕이 있고!”
남자의 눈은 이내 엘가의 몸을 슥슥 훑었는데. 그 시선이 어딘가 몹시도 불쾌해서 걸음을 돌리려던 때였다.
“당신은 엘가 폰 리오네스죠? 금발에 푸른 눈, 그리고 거대한 도끼에 사자의 인장이 그려진 망토! 라인하르트의 딸!”
“날 알아?”
“압니다! 저를 사세요! 후회하지 않을 겁니다! 진짜로! 저는 미래를 알고 있습니다!”
미래를 알고 있다니.
듣던 대로잖아.
당분간 심심풀이로는 사용할 수 있겠다 싶어서 엘가는 노예를 구매하기로 했다.
“원래 10골드인데 5골드만 내쇼. 안 팔려서 곧 처분하려고 생각 중이었으니까.”
듣기로는 30골드에 팔리고 있을 거라고 했는데? 생각보다 가격도 싸다.
그렇게 심심풀이 노예가 구매되었다.
무슨 헛소리를 하는지 듣다가 너무 허무맹랑하거나 지루해지면 적당히 저택 하인으로 부려먹어야지.
제법 똘똘해 보이기도 하고, 언행도 노예들처럼 무식하지 않은 게 어쩌면 사람들의 말대로 학자 출신일지도 모르겠다.
나약한 학자 놈들을 괴롭히는 것도 재밌을지 모르겠어.
그런데 노예가 말하는 것들이 정말 일어나기 시작하며 많은 것이 달라지기 시작했다.
그리고 그런 노예가 이제는 자신의 앞에 서서 장엄하게 말하는 거다.
“저는 몰락한 가문의 후예입니다.”
몰락한 가문의 후예.
귀족이라는 뜻이겠지.
앙그마르 마왕이 토벌당한 뒤로 국내에서는 내전이 잔뜩 벌어져서 몰락한 가문이야 정말 잔뜩 있었으니까.
엘가는 방금까지 울적한 기분이 들었던 것도 잊고 예전 일들을 떠올리게 됐다. 확실히 태오 가스펠은 평범한 노예들과는 달랐다.
어떨 때에는 귀족들보다도 더욱 귀족 같이 말하고, 만유인력이니 질량보존, 공산당이니 하는 기이한 이론들을 주장하기도 할 만큼 똑똑했으니까.
정체를 숨기고 있지만 아마 귀족 출신에서 노예로 전락한 놈이 아닐까-라는 생각은 어렴풋이 하고 있었는데. 역시 그 추리가 정확히 들어맞았다.
엘가는 자신의 현명함을 스스로 칭찬하며 짐짓 관심 없는 척 물었다.
“몰락한 가문이라면, 어느 가문의?”
“그건…. 밝힐 수 없습니다. 제가 위험해 질 수 있으니까요.”
“…….”
엘가는 금방 이해했다. 푸른 피의 귀족의 가문이 몰락하는 데에는 대체로 하나의 이유가 있다. 반란과 반역 정도.
반란가문의 후예나 후손은 엄벌로 다스려져 아주 멸문당하니까 태오 가스펠이 몰락 귀족의 후예였다는 게 밝혀지면 아무래도 쏠리는 화살을 감당해야만 할 터.
숨기고 싶을 테지.
그렇지만 엘가에게 사실 태오 가스펠이 어느 가문 출신이냐는 것은 중요하지 않았다. 어차피 리오네스 가문보다는 훨씬 떨어지는 하급 귀족일 게 분명하니까.
하급귀족이면 사실 다 거기서 거기다.
지금 중요한 것은 그래도 태오가 ‘푸른 피’를 지닌 귀족이었다는 것이다.
그게 엘가 자신의 자존심을 조금 회복시켜 준다.
자기가 구질구질하게 매달리던 남자가 정체모를 고아에 노예라는 것만으로 매일 느껴지고 있던 자괴감이 ‘노예라도 사실 귀족 출신이면, 그래도 뭐-. 나름 합격.’이라는 느낌으로 안정을 찾게 됐다고 해야 할까?
과연 귀족의 후예였구나.
엘가는 짐짓 기뻐지려고 하는 마음을 억누르며 아직 화가 덜 풀린 것처럼 엄숙하게 물었다.
“혹시 우리 리오네스 가문이 너희 가문을 몰락시켰어?”
엘가의 질문이 날카로웠는지 반요정의 태오가 애매하게 시선을 옆으로 흘렸다.
“그게, 그렇다고 볼 수 있죠.”
“그래서 일부러 우리 가문에 접근 한 거지? 노예시장에서 사람들의 주의를 끈 것도 내게 접근하려고 일부러 내 관심을 끈 거지?”
태오가 이해할 수 없다는 것처럼 미간을 치켜 올렸다.
“노예 시장…? 아, 그, 뭐냐. 그렇다고 볼 수 있죠. 역시 엘가님이시네요. 똑똑하십니다.”
“그래서. 가문의 복수를 하기 위해 리오네스 가문에 접근한 것이구나?”
“그건-.”
태오 가스펠이 입을 다물었다.
하지만 엘가는 저 녀석에 대해서 가장 주의해야 할 때는 이야기를 떠들고 있을 때가 아니라, 입을 다물고 생각에 잠겨 있을 때라는 걸 잘 안다.
무슨 꿍꿍이를 꾸며서 혓바닥을 놀릴지 알 수 없는 일이니까.
그래서 엘가는 먼저 선수를 치기로 했다.
“그렇지만 너희 가문이 멸망한 건 결국 너희 탓 아냐? 보니까 앙그마르의 끄나풀이었겠지. 드레이코 가문처럼. 어리석은 왕을 따랐으니 멸망하는 거지.”
엘가는 태오 가스펠의 가문이 앙그마르 마왕과 관련이 있을 것이라 생각했다. 태오가 지닌 ‘예지’ 비슷한 능력도 슬슬 이해가 된다.
앙그마르 마왕에게는 미래와 진리를 꿰뚫는 천리안이 있었다고 했었나.
자신을 따르는 가문에게 그 비슷한 능력을 부여해줬어도 이상하지 않다.
그렇다 해도 엘가는 일종의 서늘함을 느꼈다.
마치 자신의 턱밑까지 칼날이 맞닿아 있는 서늘함.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반역자의 칼날이 이렇게까지 다가와 있었을 줄이야.
한 편으로는 엘가 자신을 이렇게까지 몰아붙인 태오 가스펠, 저 작은 반요정과는 어울리지 않는 집념과 의지가 느껴졌다.
그건 일종의 야망이라고 불러도 좋을 터다.
마치 활활 불타올라서 태오 자신도 엘가도 휘감고 마침내 앙그마르 왕국과 대륙 전체를 태워버릴 정도의 야망이-.
엘가에게 있어서 그건 꽤나 흡족스러운 일이었다. 남자라면 포부가 있어야지.
그런데, 그걸 왜 지금 밝히는 거지?
“그런데, 그걸 이제 와서 밝히는 이유가 뭔데? 네가 반역자 가문이니까. 널 처벌해달라고? 불순한 목적으로 나에게 접근했으니까?”
“아뇨. 그만큼 엘가님께 진심이라는 걸 알아달라는 겁니다.”
“진심?”
“처음에는 정말 불순한 목적이 있었을지도 모릅니다. 하지만, 이제는 아니에요.”
파란 눈동자가 자신을 빤히 바라보고 있었다. 영롱한 파란 눈. 그 눈은 마치 자신의 모든 걸 꿰뚫어보는 것 같기도 했다.
“제 진심이 느껴지나요?”
“흠….”
엘가는 어딘가 탐탁지 않은 것처럼 침음했다. 하지만 야망 넘치는 반요정의 이야기는 아직 끝나지 않았다.
“그래도 저는 무슨 일이 있어도 제 가문을 부흥시켜야 합니다. 아이도 많이 낳아야 해요. 아내들을 많이 들일수도 있겠죠. 숫사자처럼요.”
“뭐?”
뭔 소리야.
엘가는 정말 끔찍한 이야기를 들은 것처럼 기분이 나빠졌다.
“숫사자가 뭐 어째?”
“사자들은 암사자들을 많이 데리고 다니잖아요. 남자답게. 수컷이란 그런 거죠.”
수컷이라니.
반요정과는 어울리지 않는 단어였지만 확실히 본디 역사상의 위대한 영웅들은 대부분 아내가 여럿 있었다.
당장 리오네스 가문의 위대한 선조인 사자왕 보르자 리오네스도 열 명의 아내-암사자(Lioness)들을 데리고 다녔다지.
그들의 도움이 없었다면 척박한 서부를 개척할 수도 없었을 거고.
그래서 리오네스 가문은 사자왕 보르자가 아닌 그의 아내들을 기리기 위해 암사자, 리오네스(Lioness)를 성씨로 채택한 것이다.
그런데 그런 마초적인 이야기를 이 꿀밤 맞는 반요정이 한다니. 엘가는 웃음이 날 것만 같았다.
“그러니까, 네 말은 아이를 많이 낳기 위해서 많은 여자들에게 접근하려고 한다는 거냐?”
“비슷하죠.”
“이거 완전 미친놈 아니야?”
“…….”
입을 꾹 다무는 태오 가스펠. 자기가 생각해도 무모한 이야기라는 건 잘 아는 모양이다.
그런데 가문을 부흥시키고 유지하려는 데에는 아내를 많이 들여서 아이를 잔뜩 낳는 것은 상당히 효과적인 방법이었다.
리오네스 가문의 8번째 가주였던 조셉도 아내를 많이 들이는 것으로 리오네스 가문의 위기를 벗어나게 했으니까. 6명의 가문과 동시 정략 결혼을 했었다지.
그래서 엘가는 어쩐지 부글부글 끓는 화를 억누르며 한 번 물어보자 싶어 입을 열었다.
“그래서, 몇 명 낳아야하는데.”
자녀는 몇 명 정도 생각하고 있냐.
결혼에 있어서는 중요한 이야기다.
태오는 뜸을 들였다.
“…한.”
“한-? 한 명?”
“한 서른 명 정도는 낳아야하지 않겠습니까?”
“…뭐!?”
서른이면 30?
확실히 혼자 낳기는 힘들겠네. 1년에 한 명씩 낳아도 30년이 걸리잖아.
엘가는 문득 그런 생각을 했다가 갑자기 화가 치솟았다. 내가 왜 이런 생각을 하고 있는 거지?
“나가, 이 자식아!”
그래서 엘가는 자리에서 일어나 이 허황된 꿈만 꾸는 남자를 기숙사 바깥으로 내쫓기로 결심했다.
등짝을 짝 때리자 복도로 내쫓긴 남자가 “히에엑…!”하고 비명을 내지른다. 야망이나 영웅다움 같은 것과는 거리가 먼 나약한 비명소리다.
이런 초라한 남자에게 대가문의 영애인 자신이 반했다는 사실이 엘가는 몹시도 분해서 한 마디 더 소리쳐줬다.
“네 다람쥐도 가져가!”
━컹컹!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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