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angmun reincarnation RAW novel - Chapter 2
당문전생 (2)
변명은 비겁자들의 도피처다
당찬일은 아침 일찍 일어나자마자 몸을 풀기 시작했다.
‘몸이 바뀌니 이것도 힘들군.’
비천대장 시절부터 새벽마다 했던 것이건만 십 년 만에 하려니 영 개운하지 못했다. 물론 그 이유는 이 어린 신체 탓이기도 하다.
그래도 움직여야 한다.
이제야 전생과 현생을 구별하게 되었으니 그에 맞추어 움직여야 마땅하지 않겠는가?
당찬일이 열심히 몸을 푸는데 늙수그레한 노인이 다가왔다.
“아이고, 소공자님, 아침부터 열심이십니다요.”
노인의 이름은 방평.
당문의 방계혈족으로서 젊은 시절 한가락 했다지만 지금은 그냥저냥 비질이나 하면서 먹고산다.
“제가 약골이니 어떻게든 단련을 해야지요.”
“암요. 좋은 일입니다.”
싱글벙글 웃으며 방평이 자신의 훈련 방법을 늘어놓다가 마저 비질하느라 사라지자 대략적인 시간을 가늠한 당찬일이 땀을 닦았다.
석 달.
아직 어린 육신의 역량이 올라오지 않는다.
하긴 십삼 세 소년의 체력에 뭘 바라겠느냐마는, 그게 후엔 더욱 큰 도움이 되리란 것이 당찬일의 생각이었다.
‘차분히. 한 걸음, 한 걸음 가는 거다.’
당찬일이 눈을 감고 정리하는데 집사 당황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공자님, 본가로 가실 시간입니다!”
드디어…….
‘당과로와 대면이다.’
* * *
‘그새 당문의 위세가 더 커졌구나.’
연무장으로 들어서던 당찬일이 티 나지 않게 주변을 살폈다.
‘전각이 무려 일곱 채나 늘었고, 연무장도 사천 평 이상 확장됐어.’
당찬일은 십삼 년 동안 잠들어 있었다.
그동안 당문은 쉬지 않고 돈을 벌어들였고, 관과의 유대를 공고히 했으며, 상계의 지배력을 넓혔다.
그런고로 전각 일곱 채와 대지 사천 평은 당문의 입장에서는 별것이 아니다.
“본가는 처음이지?”
당인이 묻자 당찬일이 고개를 끄덕였다.
“예.”
유평월일 때는 하루에도 몇 차례씩 드나들던 곳이지만.
“누누이 말했지만 할아버님…… 아니지, 가주님께서는 매우 엄하시다. 말 한 마디, 행동거지 하나도 조심 또 조심을 기울여야 한다.”
“예.”
당과로.
이 삶에서도 떠올리는 것만으로 절로 긴장된다. 당찬일은 조심스럽게 마른침을 삼켰다.
당과로. 시대의 거성이자 괴물.
그의 심계(心計)는 너무 깊어 천하제일의 지략가들조차 어찌할 수 없고, 무위는 육백 년 당문 역사상 최고라고 평가를 받는다.
재력과 무력.
거기에 관의 힘을 빌려 콧대 높은 무림맹의 원로들마저 발아래 굴복시킨 희대의 승부사이자 난세의 간교한 영웅[奸雄].
그가 바로 당과로다.
저 멀리 대전이 보이자 당인이 서둘러 옷매무새를 바로 하면서 당찬일의 옷도 정리해 주었다.
그런데…….
‘뭔가 이상한데.’
유평월이었던 시절, 하루가 멀다 하고 당문 본가를 들락거렸던 당찬일이다.
세월이 아무리 바뀌었다고 해도 당문 정도 되는 곳의 전통은 쉬이 바뀌지 않는 법.
‘사람이 너무 없어.’
아무리 좋게 생각해도 지금 모습은 가주가 출정식을 앞둔 상황 같지 않다.
‘하인들도 왜인지 홀가분한 표정 아닌가?’
당찬일의 얼굴이 점점 더 어두워질 때 총집사인 방공유가 당인을 발견하고 헐레벌떡 뛰어왔다.
“하독처주님! 하독처주님!”
“아, 방 총집사! 아버님은…… 아니, 가주님께선 아직 도착 전이신가?”
당인의 태평한 태도에 방공유가 제 가슴을 마구 두드렸다.
“그게 무슨 말씀이십니까요? 가주님께선 벌써 출정식을 하시고는 제갈세가로 향하셨는데!”
“뭐, 뭐라고?”
당황한 당인이 입을 떡 벌렸다.
“그럴 리가 없네, 그럴 리가 없어! 분명 나는 진시 초까지 도착하라고 전달을 받았다네!”
“무슨 말씀을 하시는 겁니까! 가주님께서 자제분들께 분명 묘시(卯時: 아침 5~7시) 초까지 모이라고 명을 내리셨는데요!”
이때 연무장을 가로질러 걷던 당숙정이 당인과 당찬일을 발견했다.
“하! 뻔뻔하기가 하늘을 찌르는군. 출정식도 빼먹고 이 늦은 시간엔 왜 나온 게야!”
“아, 아니, 독물부주님께서 어제 분명 진시 초라고…….”
“내가 언제?”
어처구니없다는 듯 당숙정이 콧방귀를 날렸다.
“난 정확히 전달했어. 하독처주가 잘못 알아들은 게지.”
당숙정의 표정은 처음과 조금도 다르지 않았다.
모르는 사람이 본다면 당인이 정말 잘못 알아들은 것으로 느낄 정도였다.
“하독처주라는 작자가 시간 하나도 제대로 못 지킬 줄은 몰랐네. 그러니 가주님의 눈 밖에 났겠지.”
당숙정이 혀를 차며 사라지는 뒷모습을 당찬일은 지그시 노려봤다.
‘제기랄, 당했다.’
역시 감이 죽었다, 그것도 아주 많이.
이전 같았으면 싸한 느낌이 드는 순간부터 준비를 했을 터다.
‘너무 쉽게 생각했어. 당숙정이 이렇게까지 나올 줄이야.’
어제저녁, 표독스러운 얼굴로 쏘아붙이던 당숙정이 떠올랐다.
‘뭔가 이상해.’
당숙정이란 인물이 신경질적이고 치사한 건 사실이지만 이렇게까지 두뇌 회전이 빠른 부류는 아니다. 십삼 년이란 시간 동안 변했다면 할 말은 없지만.
그럼 뒤에서 뭔가 언질을 준 사람이 있을지도 모른다.
아니, 그런데 왜 굳이 아버지에게 이런 거지? 그녀의 말대로 이미 눈 밖에 났다면 이럴 이유조차 없는…….
‘잠깐! 이럴 때가 아니지!’
지금 중요한 건 당숙정이 아니라 당과로다.
자신과 뜻이 조금이라도 어긋나면 혈육일지라도 눈 한 번 깜빡이지 않고 쳐 내는 잔인한 인물이다.
그가 친히 나선 원정길에 직계 자식이 참석하지 않았다.
그것도 아침을 같이하자고 미리 언질을 주었음에도 불참을 한 꼴이다.
‘이렇게 되면 그간 세워 둔 계획이 헝클어지는데.’
사실 당찬일은 열 살이 되던 해부터 자신의 전생을 기억했다.
하필 당문이라니.
하고많은 문파, 세가 중에 당문에서 환생했다니.
처음에는 그 즉시 야반도주할 생각까지 품었지만 자신의 부친이 당인이란 사실을 알게 되어 극단적인 선택을 미루었다.
그 계획이 지금 한꺼번에 무너지려 한다.
‘안 돼. 이 사람을 이렇게 밀려나도록 둘 순 없어.’
당찬일은 재빨리 생각을 정리한 뒤에 반쯤 넋이 나간 당인을 불렀다.
“아버지,”
“그래, 찬일아. 내가 참…… 생각이 짧아 아버님의 배웅조차 하지 못했구나.”
태연하게 말은 뱉었지만 당인의 놀람이 얼마나 컸는지 충분히 느껴졌다.
당찬일은 탄식을 쏟아 내고 싶었지만 참았다.
‘정말…… 아버지, 세상을 너무 모르시는군요.’
이 상황을 배웅 정도의 문제로 생각하다니.
지금의 상황이 얼마나 위중한지 아버지는 전혀 파악하지 못한 모양이다.
이건 부모, 자식 간의 예의 문제가 아닌데 말이다.
“지금 이러고 있을 때가 아니에요. 먼저 할아버님을 뵈어야 하지 않겠어요?”
“그래야 할까? 이미 출정을 하셨다는데…….”
당찬일은 다시 한 번 속으로 한숨을 뱉었다.
자칫하다가는 하독처주 직위의 박탈뿐 아니라, 세가에서조차 축출당할 수도 있다는 걸 아직 모르고 있는 모양이다.
“그러니까 더 가야죠. 아직 늦지 않았어요.”
“늦지 않았다고?”
“그럼요. 얼마 전에 세가 근처에서 소일하던 마부들한테 들었는데, 본가의 후문 뒤편으로 올라가면 야산이 하나 나오거든요.”
“그런데?”
“그곳을 지나 좌측으로 꺾어지면 풀숲에 가려진 작은 언덕이 있다고 들었어요.”
“그런데?”
당찬일이 도통 모를 소리를 늘어놔서 당인의 눈이 휘둥그레졌다.
“예. 굉장히 낮은 언덕이에요. 거기서 뛰어내리면 반 시진 이상 시간을 단축할 수 있어요. 그러니까 그길로 쭉 움직이면 출정대를 만나실 수 있을 거예요.”
후문 야산으로 통하는 횡단 길은 비천대의 정예들이 익히 아는 지름길이다. 물론 이런 샛길은 소수만이 공유해서 당문 식구들조차 잘 모른다.
“정말이냐? 그거 다행이다. 어서 가 봐야겠어.”
급히 말 머리를 돌리는 당인을 향해서 당찬일이 손을 입에 대고 외쳤다.
“우리 집 가훈은 중원 최고잖아요!”
“응?”
당찬일의 뜬금없는 말에 당인이 잠시 말 머리를 돌렸다.
그를 향해 당찬일이 재차 고함을 질렀다.
“할아버지께 아버지의 효심을 보여 주세요!”
잠시 당찬일을 바라보던 당인이 힘주어 고개를 끄덕이고는 쏜살같이 사라졌다.
‘뭐, 뭐지?’
난데없이 뭔가 일이 벌어졌는데 도통 영문을 알 수 없으니 방공유가 당찬일을 빤히 쳐다보았다.
씨익.
“아버님께서 어떤 식으로든 가주님께 인사를 올리겠다고 저러시네요.”
* * *
따그닥― 따그닥―.
황금마차는 화려하고 거대했다.
마차 안에는 무심한 표정의 노인이 미동조차 하지 않은 채 전방을 응시하고 있었다.
그가 탁자 위의 물병에 손을 가져갈 즈음 행렬 뒤에서 황진을 일으키며 말 한 필이 무서운 속도로 다가왔다.
“가주님! 가주님!”
반사적으로 당과로를 실은 마차를 막아서던 당문의 무인들이 말에 탄 이를 확인하고 긴장을 풀었다.
“하독처주님?”
그럼에도 당문 무인들의 고갯짓에 무려 삼백여 당문 정예들이 당인의 앞을 막아섰다.
천자라도 보이기 어려울 정도의 위용!
“무슨 일이십니까, 하독처주님?”
“나, 나는…… 헉! 헉!”
거친 숨을 토하던 당인이 황금마차를 보며 외쳤다.
“나는 가주님께 인사를 올리지 못했다네!”
“인사요?”
당문의 정예들이 어쩔 줄 몰라서 허둥거리는데 당과로가 손을 들었다.
“예, 가주님!”
쫘악.
당과로가 신호하자 바다가 갈라지듯 수천을 헤아리는 당문의 정예들이 좌우로 나뉘며 길이 열렸다.
“가주님! 가주님!”
말에서 뛰어내린 당인이 당과로 앞에 무릎을 꿇었다.
“먼 길 떠나시는데 제가 그만 늦어 인사를 올리지 못했습니다! 이 죄, 무엇으로 대신해야 할지 모르겠습니다!”
땅에 머리를 박으며 당인이 잘못을 고했지만 당과로는 어떠한 반응도 내놓지 않았다.
얼마나 흘렀을까?
한참 동안 무감정한 눈빛으로 당인을 응시하던 당과로가 입을 열었다.
“왜 늦었느냐?”
“그, 그게……!”
곧장 당숙정과 어제 있었던 일을 고하려던 당인의 머릿속으로 당찬일의 외침이 스쳤다.
당인은 어금니를 꽉 깨문 채 외쳤다.
“가주님을 배웅하지 못한 죄, 죽음으로 갚고 싶습니다!”
“왜 늦었냐고 물었다.”
“드릴 말씀이 없습니다. 죽여 주십시오!”
당인이 그저 잘못했다는 말만 반복하자 당과로가 눈살을 찌푸렸다.
“네 말이 천하의 명마도 아닐진대 어찌 행렬을 따라붙었느냐?”
―아버지의 효심을 보여 주세요!
“가주님을 뵈어야 한다는 생각으로 죽을 각오를 하고 산을 넘었습니다!”
계속해서 땅을 박은 머리에서 어느새 피가 주르륵 흘러내렸다. 그런 당인을 외면하며 당과로가 다시 손을 들었다.
촤라락!
당문의 정예들이 황금마차 주변을 빼곡히 감싸며 전진했다.
“몸성히 다녀오십시오, 가주님!”
당인이 목 놓아 부르짖었지만 끝내 마차에선 아무런 답변도 나오지 않았다.
덜컹덜컹.
흔들리는 마차 안에서 뭔가를 골똘히 생각하던 당과로가 지나가듯 중얼거렸다.
“오늘 다섯째의 정신이 전에 없이 맑은 날인가.”
* * *
‘그 양반, 내 말을 이해했으려나 몰라.’
용사비등(龍蛇飛騰)의 서체로 적힌 편액을 바라보며 당찬일이 인상을 구겼다.
[변명은 비겁자들의 도피처다.]가주인 당인이 세운 가훈이자 하독처의 처훈이기도 한 구절을 읽던 당찬일이 고개를 돌렸다.
‘이제 슬슬 돌아오실 때가…….’
벌컥!
문이 열리며 당인이 죽다 살아난 표정으로 들어섰다.
“아버지!”
반색하며 일어서던 당찬일이 당인의 얼굴을 보고 입을 닫았다.
“설마 가셨던 일이……!”
“아아!”
손을 휘저으며 의자에 앉은 당인이 주전자째로 물을 들이켰다.
“후아, 이제야 살겠다.”
주전자를 내려놓은 당인이 몸을 앞으로 굽혔다.
“어찌어찌 대처는 했는데 가주님께서 용서하셨을는지 모르겠구나.”
어깨를 흔들며 숨을 몰아쉬는 당인을 내려다보던 당찬일이 희미한 웃음을 지었다.
‘그 정도면 선방입니다.’
모르긴 몰라도 어쭙잖은 변명을 늘어놓거나 구질구질하게 덧붙였더라면 당인은 족보에서 파였으리라.
당과로는 변명하는 사람을 인간으로 취급하지 않으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