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angmun reincarnation RAW novel - Chapter 93
당문전생 (92)
정말 못 말리겠군
당숙정이 옅은 회색빛 상념에 젖자 당찬일이 덧붙였다.
“독물부주님의 고견은 어떠하신지요?”
당진과 당암을 대할 때의 천진함 따윈 저 멀리 날려 버린 당찬일의 물음에 당숙정의 입꼬리가 올라갔다.
“저번에 그랬지? 사천은 너무 좁다고.”
당숙정이 자신의 구석구석을 관찰하듯 바라보자 당찬일이 몸을 돌렸다.
“뭐, 넓진 않죠.”
“뭐, 나도 바라던 바야. 우리 당문도 그럴 때가 됐지. 하지만 지금까지 고수했던 정책이 쉽게 허물어질 리 없잖아?”
당찬일이 고개를 끄덕였다.
“옳습니다. 실력만큼 중요한 게 명분이지요.”
쿠르릉!
순간적으로 당찬일이 열네 살짜리 소년이라고는 도저히 믿기지 않는 위엄을 발산했다.
“명분을 얻지 못하면 모든 걸 잃는 것과 같습니다.”
“맞아.”
어쩐지 가슴이 뜨거워져서 당숙정도 빈정거림을 던져 버렸다.
“이제는 우리 당문도 외부로 눈을 돌려야 마땅하지만 명분을 얻어야 움직일 수 있지.”
입술을 깨물던 당숙정이 문득 열심히 무학을 수련하는 이들에게로 시선을 이동시켰다.
“설마!”
당숙정이 사람들에게서 눈을 떼지 못한 채 물었다.
“저……게 명분을 얻으려는 작업인 거냐?”
당찬일이 웃었다.
“본래 아기 새는 스스로 알을 깨고 나옵니다. 하지만 껍질이 지나치게 단단한 경우에는 어미 새가 도움을 주기도 한다지요.”
당숙정이 쓰게 웃었다.
“결국 너는 명분을 인위적으로 만들어 내겠다는 소리로구나?”
“아닙니다.”
수백 년 동안이나 이어진 폐쇄 정책은 너무도 공고하게 굳어져서 절대로 깨트릴 수 없는 벽이 된 지 오래다.
“저분들께 명분을 구하는 거지요.”
당찬일이 웃자 당숙정이 고개를 저었다.
“정말 못 말리겠군.”
* * *
“더 이상 공터를 매입하는 건 무리다. 부지도 없고, 주변의 눈총도 보통이 아니야.”
당암이 딱 자르자 당진이 몸을 살짝 굽혔다.
“그렇다고 여기서 멈추지는 않겠지요?”
당진의 은근한 물음에 당암의 바위 같은 얼굴이 실룩였다.
“네 의견은 뭐냐?”
“저도 좀처럼 막 가는 쪽은 아닌데 이번만큼은 그래 보고 싶습니다, 형님.”
“그러냐?”
당진이 의자에서 엉덩이를 떼고 당암에게 귓속말을 던졌다.
“……라서요.”
당진의 귀띔을 들은 당암이 팔짱을 꼈다.
“흠. 대가주님의 허락은 받았느냐?”
당암이 너무도 자연스레 받아들이자 당진의 눈이 휘둥그레졌다.
“설마 형님도?”
“나 역시 같은 생각이었다. 그 수밖엔 없지 않으냐.”
당진과 당암의 눈길이 허공에서 격하게 얽혔다.
“내가 대표로 대가주님의 허락을 구하랴?”
“아니요.”
당진이 허탈한 미소를 지었다.
“이 정도의 건은 찬일이의 전결로 즉시 집행이 가능한 사항입니다.”
“대가주님께서 그 아이를 신뢰하신다고는 들었다만 그 정도란 말이냐?”
“모르긴 몰라도 아버님께서는 그 이상의 권한까지도 찬일이에게 준 듯합니다.
“단일 건이라지만 고작 열네 살짜리 손자에게 우리 두 당주 이상의 힘을 실어 주시다니.”
주전자에서 차 한 잔을 따라 마시며 당암이 어이없다는 표정을 지었다.
하지만 두 사람은 모르는 사항이 하나 있었다.
당과로는 당찬일이 아무리 좋은 방안을 추진하려 해도 두 사람 모두의 동의를 얻어야만 가능하다는 금제를 걸어 두었다는 것을.
한마디로 당암과 당진 가운데 어느 하나라도 반대한다면 당찬일의 계획은 즉시 폐기(廢棄)된다는 뜻이다.
“요즘 저도 찬일이의 꼭두각시가 된 기분입니다.”
당진이 너털웃음을 터트리자 당암이 묵직한 음성으로 말했다.
“다 좋은데…….”
당암이 당진에게도 차를 한 잔 따라 주었다.
“최근에 그 아이를 너무 가까이하는 것 같구나.”
“그런가요?”
“음.”
당암이 무겁게 고개를 끄덕이자 당진이 찻잔을 들고 향을 음미했다.
“늘 말씀드리지만 형님이 끓여 주시는 다향(茶香)은 일품입니다.”
당진이 눈을 감고 향기를 만끽하자 당암이 희미하게 웃었다.
“칭찬, 고맙구나.”
“그 무슨 말씀을. 이렇게 훌륭한 차를 대접받으니 제가 형님께 감사드려야지요.”
당진이 찻잔에서 모락모락 피어나는 김을 바라보며 무심결에 중얼거렸다.
“이게 대체 얼마 만인지.”
쿵!
순간 주전자를 들고 있던 당암도, 향기를 음미하던 당진도 움찔 몸을 굳혔다.
그렇구나.
언제부터인가 우리 형제는 차 한 잔 나누기도 힘든 삶을 살았구나.
장내에 어색한 침묵이 내려앉고 두 형제는 애써 눈을 피했다.
순간적으로 두 사람의 뇌리를 스치고 지나가는 수많은 상념들과 점점이 흩어지는 낱말들.
“후…….”
탄식과도 같은 한숨을 토한 당진이 찻잔을 내려놨다.
“특별히 찬일이를 가까이하는 건 아닙니다. 제가 가문의 외적 문제를 담당하다 보니 그 녀석의 활동을 간섭할 수밖에 없었지요.”
“그렇겠지.”
당암도 수긍했다.
당진은 자신의 역할을 충실히 이행했을 뿐이다.
당찬일이 만들었다는 《사천무편》의 감수를 맡고, 무학을 모르는 일꾼들과 마을 사람들에게 교육시키는 것은 외당주로서 당연히 처리할 일이었으니까.
사실 《사천무편》을 감수해 준 당진의 속내는 당인의 호감을 얻으려는 것이었다. 그러다 일이 생각 이상으로 잘 진행되자 사심을 거두고 적극적으로 임하게 되었다.
“무엇보다 형님의 지원이 없었더라면 《사천무편》의 열풍 따윈 없었겠지요.”
당진이 고마움을 표시하자 당암이 주판을 꺼냈다.
매사에 빈틈이 없어서 찔러도 피 한 방울 나오지 않을 것 같은 사내에게 주판은 너무나 잘 어울리는 소품이었다.
“지금까지 《사천무편》의 수련에 들어간 금액을 계산하자면…….”
당암이 당진 앞으로 주판을 내려놓았다.
“《사천무편》의 최종 교정과 필사에 이만큼, 인근 공터를 매입하는 데 이만큼, 관아의 나졸들과 부주에게 들어간 액수는 이만큼.”
마지막으로 당암이 주판알을 강하게 튕겼다.
“수련 교관들에게 지급한 비용이 이만큼이다.”
따악!
올라간 주판알을 보고 당진이 턱을 쓰다듬었다.
“생각보다 만만치 않은 금액이로군요.”
“여기서!”
당진의 말을 끊듯 당암이 입을 열었다.
“《사천무편》이 벌어들인 유무형의 수입을 제해 보자.”
당진의 동의도 구하지 않고 당암이 즉시 주판알을 옮겼다.
“일단 잡역부들의 노동성 향상은 실로 눈이 부실 정도다. 이른 아침부터 술 냄새로 다른 이들에게 민폐를 끼치던 일꾼들을 찾아보기 어려워졌지.”
주판을 바라보며 당암이 중얼거렸다.
“이는 우리 당문에서 매우 고무적인 현상이다.”
……하며 올라간 주판알의 상당수를 내렸다.
“다음은 성도부 백성들의 인식 변화다.”
“《사천무편》 수련자가 증가하면서 우리 당문을 친근하게 여기는 이들이 늘지 않았습니까?”
당진이 묻자 당암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 정도가 아니다. 《사천무편》을 익힌 성도부 상인들은 자치대까지 만들어서 시전의 치안을 지킨다더군. 그 덕에 우리 당문은 시전 상인들의 후원자와도 같은 입장이 되었다.”
“《사천무편》이 초심자들에게 훌륭한 무공서란 건 맞지만 시전을 지배하는 흑도 무림 녀석들을 굴복시킬 수준까지는 아닐 텐데요?”
당진이 의아함을 표시했다.
“성도부 인근 시전은 건달패 서넛 몰려다니는 게 다라더군.”
성도부는 누가 뭐라고 해도 당문의 관할이다.
그렇기에 흑도에서도 진출하길 꺼리는 지역이었는데 물정 모르고 자리 잡은 대흉과 하남팔흉까지 당찬일이 복속시키자 성도부의 흑도 세력은 공백 상태나 다름없었다.
“그 상인들의 친근함을 무형의 수익으로 놓고 대충 계산하자면…….”
딱!
당암이 주판에 놓은 대부분의 알을 털자 당진이 신중한 얼굴로 고개를 끄덕였다.
“이래서 형님도 저와 같은 생각을 하셨군요.”
“당연하지 않으냐. 이제부터는 무조건 이득인데 멈출 이유가 없지.”
당암이 주판알을 털어 냈다.
“사실 나는 《사천무편》이 이 정도까지 파급력을 불러올 줄은 몰랐다. 잠시 반짝하다가 수그러들 줄만 알았는데, 오판이었어.”
그건 당진도 마찬가지라서 《사천무편》을 처음 들고 오던 당찬일을 떠올렸다.
“묘한 아이입니다.”
“음?”
“찬일이 말이지요. 처음에는 꺼림칙했는데 어느 결에 편안해지더군요.”
“그런가.”
당암은 시큰둥하게 답했다.
“아마도 《사천무편》의 감수를 부탁하던 시점부터 제 마음이 누그러진 게 아닌가 싶군요.”
당진이 눈을 홉뜨자 당암이 주판을 들었다.
“지금처럼 우리 당문에 긍정적인 자극을 계속 준다면 나 역시 그 아이와 진지하게 이야기를 나눠 봐야겠군.”
주판을 선반에 올린 당암이 당진에게 말했다.
“그럼 분교의 신축 부지와 연무장 공사는 일주일 내에 완료하겠다. 어차피 작은 규모라서 어렵지는 않겠지.”
“고맙습니다.”
포권하며 돌아서는 당진에게 당암이 덧붙였다.
“그 녀석 때문에 우리 당문은 지금까지와는 다른 형태로 변모하게 될지도 모르겠다.”
“대가주님이 윤허하신다면 그리되겠지요.”
“넌 어떠냐?”
“무엇을 말씀입니까?”
당암이 심유한 눈으로 당진을 응시했다.
“그 녀석 때문에 육백 년간 이어 온 우리 당문의 전통이 한순간에 깨질 수도 있다는 사실을 어찌 생각하느냔 말이다.”
당진이 지금까지의 온화한 모습을 지웠다.
“글쎄요. 그 아이가 처음부터 거기까지 내다봤을까요?”
당진이 의자를 짚었다.
“《사천무편》이란 기초 무공서로 성도부 일대에 파란을 일으킨 것이 애초 의도였을까요?”
당진이 어깨를 살짝 들어 올렸다가 내렸다.
“우리 당문에서 일하는 잡일부들을 도우려는 선량한 의도가 인근 마을의 시민들에게 전파되고, 시전의 상인들에게까지 전달된 건 아닐는지요?”
“음.”
“형님, 우리 너무 앞서 나가지는 말지요.”
당진이 진지한 얼굴로 당암에게 간청하듯 말했다.
“그 아이는 신비로운 구석이 많습니다. 태어나면서부터 아파 일어나지 못했고, 십삼 년 만에 깨어났으며, 몇 달 지나지 않아서 우리 당문에 완벽히 적응했지요.”
“그렇다고 들었다.”
“뿐입니까? 고작 열셋의 나이에 흠차대인의 어전시위로 제수되어서 오석산을 상납받던 성도부 탐관오리들을 축출했습니다.”
거기다 제갈세가에서 무림맹주의 아들인 백리천아에게 한 방 먹였다.
“대가주님께서 월권에 가까운 권한을 그 녀석에게 주신 것도 그런 점을 감안하셨겠지.”
“그 과정에서 찬일이가 우리 당문에 해를 끼친 적은 없습니다.”
“만약 그랬다면 나부터 가만있지 않았을 것이다.”
당암이 기세를 모으자 그의 전신에서 살인적인 기도가 피어올랐다.
“찬일이가 우리 당문에 이로운 방향을 제시하면 적당히 맞춰 주고, 아니다 싶을 때는 무시하면 그만인데 무얼 심려하십니까?”
“나의 걱정이 기우(杞憂)라는 말이냐?”
당암의 물음에 당진이 양팔을 벌리는 것으로 대답을 대신했다.
“한 가지는 확실합니다.”
당진이 검지를 들어 올렸다.
“그 아이는 저나 형님처럼 완고한 시각으로 우리 당문을 바라보지 않는다는 거지요.”
잠시 당진을 응시하던 당암이 무겁게 고개를 끄덕였다.
“저는 찬일이가 제시하는 방향이 우리 당문에 해가 되지 않는 선이라면 일단 지지해 주고 싶습니다.”
“큼.”
당암이 대답 대신 콧김을 뿜자 당진이 방문을 열었다.
“형님도 그렇지요?”
당암은 끝내 답하지 않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