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esting to Fight Bulk RAW novel - chapter 34
“아니요. 그런 건 없습니다.”
수천 장은 훌쩍 넘어 보이는 수사 자료.
여기에는 없고 내 머릿속에 있는 것이 있다.
‘이 사건 때문에 대한민국이 떠들썩했지.’
바로 이 수사 자료를 바탕으로 드러날 사실들이었다.
“네. 그럼 저한테 따로 하실 말씀이라도?”
어떤 말을 할지 지켜보겠다는 듯 하던 일을 멈추고 나를 바라보는 이천웅.
역시 하던 일을 멈추고 내 질문에 대답하는 정일영.
순간 검사실은 고요해졌고 내 말이 검사실 전체를 울리게 만들었다.
“본격적으로 수사 시작하겠습니다. 영장 하나만 청구해 주시죠.”
* * *
“저··· 검사님?”
겁먹으라고 던진 서류에 오히려 흥분이 된 나를 보며 정일영 수사관은 이천웅의 눈치를 봤다.
‘재미있는 녀석이네.’
이천웅의 표정에서 읽히는 속마음.
수사관의 곤란함을 아는지 모르는지 슬며시 웃으며 나를 응시했다.
“수사 자료는 다 읽어 보시고 영장 청구하시는 거예요? 다 읽기에는 시간이 부족했을 텐데.”
손목을 흔들고 시계를 보며 말하는 이천웅.
“다 읽진 않았지만, 아직 부족한 것 같습니다.”
“뭐가 부족하다는 말씀이세요?”
“그건 영장을 청구해야 구할 수 있을 것 같네요.”
무엇이 부족하든 영장이 있어야 보충할 수 있으니까.
“서류부터 갖추고 천천히 그리고 자세히 읽어 보겠습니다.”
읽어 보지 않아도 알 수 있었다.
연매출이 20조가 넘는 소명 그룹.
1조 원의 개인자산을 보유한 두 형제.
그런 엄청난 자금의 흐름 속에서 역류한 부분을 찾기란 쉬운 일이 아닐 것이다.
‘한 보따리로는 어림도 없지.’
눈앞에 보이는 보자기 하나 분량의 서류 뭉치.
70층짜리 소명 그룹 사옥 하나만 털아도 검사실 안이 서류로 가득 찼을 것이다.
“어떤 영장인지 감조차 안 잡히네요.”
“압수영장과 뒤따라올 수색영장입니다.”
“대상은?”
“소명 그룹 사옥과 천재학, 천재석 두 분의 자택입니다.”
“하하하하.”
분명 이천웅은 웃고 있지만, 같은 식구인 수사관들과 실무관은 긴장한 채 눈을 굴리고 있었다.
“진짜 재미있는 분이시네.”
알고 있기 때문이다.
이천웅의 웃음이 절대 유쾌해서 나오는 것이 아니라는 것을.
“거기 보자기에 뭐라고 쓰여 있어요?”
“인지 수사 제 1호라고 적혀있습니다”
특수부가 다른 부서와 다른 건 사건의 크기뿐만이 아니다.
인지 수사.
수사권을 가진 경찰과 검찰이 말 그대로 어떤 사건을 인지해 시건을 수사하는 것.
보통 인지 수사는 수사권의 꼭대기에 있는 검찰로 인해 시작되며 검찰에서도 특수부가 인지 수사를 가장 많이 했다.
왜?
특수부에서 만지는 사건들의 피고인은 대개 사회적 명망이 높은 사람들이었고, 확실한 증거 없이 건들기에는 오히려 역풍을 맞을 수 있기 때문이다.
여기가 그런 곳이다.
터진 사건을 수습하는 게 아니라 터트릴 사건을 만드는 곳.
그렇다고 아무 이유 없이 소명 그룹을 털려는 것은 아니다.
“우리가 그 보자기에 왜 인지 수사라 적었는지는 아세요, 한 시보님?”
“네 알고 있습니다, 검사님.”
소명 그룹 내부자가 특수부로 비자금 문제를 흘렸을 것이고 특수부는 사건을 만들어 나가고 있는 것이다.
“휘슬 블로워의 내부 고발이 있었을 것이고 본격적인 수사를 개시하기에는 증거가 부족한 것으로 보입니다.”
일개 직원의 고발은 아니겠지.
특수부가 움직였다는 것은 적어도 이사급 이상, 혹은 사장단 중 누군가가 검찰에 직접 휘슬을 불어온 것이다.
“그래요. 잘 알고 계시네. 그렇다면 우리가 영장 청구를 안하는 게 아니라 못 하고 있는 사실 또한 알고 계실 텐데요.”
고위임원의 고발이 있다하더라도 임원과 사주는 엄연히 다르다.
더군다나 사주가 가진 기업의 규모가 클수록 정계에 뻗어 있는 줄기 또한 많을 것이니 말이다.
“네. 다만 영장을 청구할 수 있는 확실한 명분을 만들 수 있을 것 같습니다.”
“명분이요?”
“네. 저한테 맡겨 주신다면 영장 청구 이유란에 적을 확실한 명분을 만들어 오겠습니다.”
비싼 술.
술집 주차장에서 트렁크에 옮겨 담긴 현금 다발.
혹은 대법관 매형이 있다고 하더라도 영장을 기각할 수 없는 확실한 명분.
“흠······.”
이천웅은 외마디 말과 함께 머리를 굴리고 있다.
아마 허락할 것이다.
“일단 명분부터 만들어 오세요. 그런 다음 다시 고민해 봅시다.”
“네, 감사합니다.”
손해 볼 게 없기 때문이다.
실패한다면 내 책임으로 돌리면 되는 것이고, 성공한다면 자신의 공으로 돌리면 되니까.
“어디 가세요?”
이천웅의 컨펌이 떨어지고 나는 곧바로 검사실 밖으로 향했다.
“명분 수집하러 갑니다.”
“하하하, 그래요 잘 수집해 와 봐요.”
발이 아플 뿐, 머리는 아프지 않을 것이다.
이미 알고 있으니까.
거대한 자금의 흐름 속 역류된 부분을.
“차 필요하면 총무과에 요청하시고요.”
“괜찮습니다.”
복잡한 서울 도심에서는 차보다 지하철이 더 빠를 것이다.
“음··· 서울을 벗어날 필요가 없다는 얘기인가?”
“네. 일단 오늘은요.”
내가 맡은 첫 사건.
첫 사건치고는 사이즈가 조금 되지만, 오히려 좋은 기회일지도 모른다.
시보가 해결한다면 그 무엇보다 크게 이름을 알릴 수 있는 좋은 기회이니까.
“그럼 다녀오겠습니다.”
* * *
[특별 수사 제1부 부장검사 민재홍]“이 프로, 너 미쳤어?”
명패 앞 남자가 이천웅에게 소리친다.
언론에 자주 노출되는 특수부라 그런지 부장검사의 외모는 꽤 깔끔했다.
여느 다른 부장검사와 달리 배가 나오지도 않았고, 슈트에 먼지가 묻지도 않았다.
물론 겉모습만 그렇다는 거지 속이 깨끗한지는 모르는 일이다.
“돌았냐고! 아니지··· 시보한테 그런 사건을 맡기는 게 제정신일 리가 없지? 안 그래?”
“저와 부장님한테 더 낫다는 판단을 했습니다.”
“뭐?”
민재홍 부장검사의 불같은 화를 듣고서도 의미심장한 미소를 짓는 이천웅.
“생각해 보십시오. 한 시보는 검사장님이 직접 거두려고 특수부로 보낸 거 아닙니까?”
“그러니까 더 조심해야지. 그 사건 때문에 한치우가 다치기라도 하면 검사장이 가만히 있겠냐고.”
“아니죠. 한치우가 이리 쑤시고 저리 쑤시고 다니면 오히려 역풍은 검사장님이 맞게 되는 겁니다.”
이천웅은 권력에 눈이 먼 사람이었다.
민재홍 부장도 마찬가지였고.
문제는 자신들의 권력욕을 채워 줄 수 있는 강철호 지검장이 특수부 라인이 아니라는 것이다.
물론 한치우는 특수부에서 경험을 쌓게 하고 대검으로 데려가면 그만이지만, 강력부 출신인 강철호가 특수부 라인을 대검으로 챙길 리는 없을 것이다.
“흠··· 그러다가 검사장이 꼬리 자르면 나랑 차장님이 모두 뒤집어쓰게 되는 건데? 어차피 대검으로 넘어갈 사람 아니냐 이 말이야. 이천 검사들을 통솔할 감찰총장이 될 양반이라고.”
“검사장님 성격 아시지 않습니까. 불의와 타협할 사람이 아닙니다.”
“그러니까 이 프로 네 말은 한치우라는 불쏘시개를 이용해서 소명 그룹과 검사장한테 불을 붙이자?”
불같이 화를 내던 민재홍 부장검사가 이천웅의 미소에 화답했다.
“소명 그룹 비자금 사건은 명백한 팩트입니다. 재무 이사의 내부 고발이니까 말입니다. 다만 후환이 두려워 특수부 안에 가둬둔 거죠.”
이천웅은 알고 있었다.
만약 이 사건이 강철호 귀에 들어간다면 강철호는 절대 소명 그룹과 타협하지 않을 것이라는 걸.
“만약 들쑤시고 다니다가 탈이 난다면 검사장님은 분명 한치우 편에 서게 될 것입니다. 그럼 소명 그룹과 검사장님의 싸움이 시작되는 거죠.”
“그래서 우리가 얻는 이득이 뭔데?”
“소명 그룹이 이기면 검사장 라인들이 줄줄이 떨어져 나갈 것이고, 피해가 심하다면 혹시 모르죠. 검사장님의 대검 이사가 취소될지도······.”
“허허, 과연 검찰 엘리트 답구만.”
민재홍 부장검사가 이천웅을 보며 참아오던 야욕을 터트렸다.
“그럼 그 빈자리는 빤하지 않습니까. 저희 차장님이 가시게 될 거라는 거.”
“그런데 말이야··· 자네 계획에는 한 가지 오류가 있어.”
“오류요?”
“한치우 걔 사시 수석에 연수원 탑이라며. 아무리 경험이 없다지만 검사장을 등에 업고 싸운다면 소명 그룹도 꽤 부담스러울 텐데? 승부가 어찌 될지도 모르는 것이고.”
[재무 이사 내부고발 자료]민재홍 부장검사의 말에 이천웅이 품안에서 등기 봉투를 꺼내 놓는다.
“갑작스럽게 생각해 낸 계획이 아닙니다.”
“워∼ 뛰는 놈 위에 나는 놈 있다더니만.”
치우가 본 것은 껍데기에 불과했다.
영장을 청구할 수 있는 명분은 이미 이천웅의 손에 들려 있었다.
보자기가 아닌 이천웅의 품에.
“시보일 뿐입니다. 기소권이라는 칼을 손에 쥐어 줘 봤자 아직 한 번도 휘둘러보지 못한 그런 시보 말입니다. 피고인들 피가 좀 묻고 어느 정도 날이 서야 날카로워지는 법이죠.”
두 사람이 품고 있는 욕심에 부장검사실 안이 뜨겁게 느껴졌다.
“혹시를 생각하지 않아도 된다는 말인가?”
“네. 그리고 정말 만에 하나라도 한치우가 소명 그룹을 잡는다면 그때는 인정하고 무릎을 꿇어야죠. 저희가 살기 위해서요.”
이천웅은 생각했다.
그럴 일은 없을 것이라고.
“다만, 부장님도 여기서 멈추지는 않으실 거라 생각 됩니다. 저희가 이길 확률이 아주 높은 도박이잖습니까.”
자리에서 일어난 민재홍이 외투를 주섬주섬 챙겨 입었다.
“오늘 저녁은 천 대표님이랑 한잔해야겠군. 자네도 같이 가지.”
“네, 부장님.”
두 사람이 방 안을 빠져나가니 환기가 됐고, 그제야 방안이 좀 식은 것 같았다.
[소명 그룹 천재석 대표이사]그들의 욕심이 남기고 간 명함과 함께 말이다.
* * *
청담동의 고급 오피스텔.
40대의 성공한 미혼 남자.
어렸을 때부터 펜을 손에 놓지 않았고, 배움을 펼칠 길을 정계가 아닌 재계로 선택한 남자.
“번쩍번쩍하네.”
그런 남자가 살기에 눈앞에 보이는 건물은 너무나도 알맞은 곳처럼 보였다.
“A동이라 그랬나?”
며칠 전 소명 그룹은 대규모 인사이동이 있었다.
조금은 예상 밖의 인사이동이 말이다.
MBA 과정을 수료하고 소명 그룹의 굵직굵직한 프로젝트를 성공시켜 30대의 나이에 재무 이사가 된 강서빈.
소명 그룹 내부뿐만 아니라 주주들까지 이번 사장단 인사에 강서빈 재무 이사가 당연히 승진할 것이라 믿었지만, 인사를 며칠 앞둔 그는 돌연 회사를 사퇴해 버렸다.
사퇴라 발표하고 힘으로 내쫓아 버린 거겠지만.
왜?
빤하지 않은가.
천재학, 천재석.
두 사람이 벌인 왕자의 난에서 어느 쪽의 장수도 되지 않은 이유였다.
심지어 두 사람의 싸움 과정을 검찰에 낱낱이 일러 바치기까지 했으니 말이다.
“안 보여 주면 내가 직접 찾으면 되지.”
인사이동이 있고 난 후 내부 고발자가 누구인지 드러나자, 이천웅의 검은 속내를 알아차릴 수 있었다.
연매출 20조짜리 기업의 재무를 총괄하는 재무이사.
그의 머릿속과 관리하는 서류는 비자금뿐만 아니라 기업 내부 전체의 정보를 통괄하고 있다고 해도 무방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