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he 100th Regression of the Max-Level Player RAW novel - Chapter 314
만렙 플레이어의 100번째 회귀 314화
314. 시간이 해결해 주겠지
기자 회견장을 나오는 류민의 얼굴은 후련했다.
‘정체를 밝히니 속 시원하군.’
그동안 다른 사람인 척, 다른 사람의 얼굴을 흉내 내며 살아왔다.
그러나 이제는 그럴 필요가 없다.
당당하게 얼굴을 내밀며 자신의 닉네임이 검은 낫이라고 밝힐 수 있다.
‘이제 세상 사람 모두가 알게 되겠지.’
그렇다 해도 문제는 없다.
위협은 모두 제거했고, 설사 있다 하더라도 어떤 미친놈이 검은 낫을 공격하겠는가?
‘어쩌면 이렇게 오래 숨길 일이 아니었을지도.’
미연의 사태를 방지하고자 정체를 숨겨왔지만, 오히려 그 때문에 주변 사람이 상처를 입었다.
‘이럴 의도는 아니었는데…… 씁쓸하군.’
잠깐 민주리를 떠올린 류민은 핸드폰을 들었다.
전화할까 망설이다가 고개를 슬며시 저었다.
‘시간이 해결해 주겠지.’
민주리는 제쳐두고 일단은 기부 문제부터 해결해 보자.
류민의 손가락이 톡톡톡 바쁘게 움직였다.
* * *
1조에 가까운 기부액은 대기업에서도 망설일 만큼 액수가 크다.
그걸 개인이 기부한다는 건 어지간한 대부호가 아니고서야 쉽게 할 수 없는 일.
그렇기에 류민의 기부는 세간의 주목을 받았다.
[검은 낫, 드디어 얼굴 공개! 여심 자극하는 얼굴에 두근두근.] [검은 낫의 정체는 21살 남성으로 밝혀져…….] [검은 낫, 자신의 전 재산 9,900억 기부하기로…….] [속보! 검은 낫의 기부 목록 99군데 확인돼…….]마지막 기사를 보던 류민이 피식 실소를 지었다.
‘기사 참 빠르네.’
이체한 지 1시간도 지나지 않았는데 벌써 목록이 올라왔다.
예고를 하고 기부해서인지 파악이 참 빠르다.
‘대충 쓴 기사는 아닌지 내용은 정확하네.’
류민은 100억씩 99군데에 기부했다.
사회공헌재단, 유니세이프 코리아, 초록 어린이재단, 한국 노인건강협회, 한국소아암재단, 불우이웃돕기 단체 등.
도움이 될 만한 단체 중 되도록 투명한 곳만 골라서 한낱 한 시에 전부 이체되도록 손을 썼다.
그 결과 류민의 계좌 잔고는 1원도 남지 않았다.
‘통장이 텅장이 되어버렸네. 뭐, 동생 계좌에 100억을 남겨놓긴 했지만.’
중요한 건 자신의 명의로 기부를 하고 잔고가 0원이 되어야 한다는 것.
그것이 현실의 룬을 얻기 위한 조건이었다.
그래서 정체를 밝히고 보란 듯이 기부한 것이다.
‘굳이 정체를 밝히지 않아도 기부는 할 수 있겠지만.’
아무래도 공개적으로 기부하는 편이 평판을 올리기에도 좋지 않겠는가?
1조에 가까운 돈이 어디서 났는지 따지지도 않을 테고.
‘최대한 많은 돈을 기부해야 그에 상응하는 룬을 얻을 수 있어. 내가 99%의 현금을 털어 넣은 것도 이 때문이고.’
어떤 룬이 나올지는 류민도 모른다.
얼마나 많은 금액을 기부했느냐에 따라 룬의 가치가 달라지기에.
‘이걸로 조건 하나는 클리어했군.’
사실 룬을 얻는 조건은 기부하는 것만이 아니다.
현실의 돈만이 아니라, 골드도 다른 플레이어에게 넘겨야 한다.
‘정확히는 현실의 돈과 이계의 골드 잔액을 0으로 만들어야 하지.’
이 두 조건을 최초로 채우고 나서야 비로소 룬을 얻을 수 있다.
류민이 현재 사신교에 와 있는 이유가 여기에 있었다.
‘조금 있다가 사신교로 플레이어들이 모이면 가지고 있는 골드를 싹 다 나눠줘야겠어. 골드를 다 털어버려야 룬을 얻을 수 있을 테니.’
지난 회차 때, 류민은 20라운드를 앞두고 현생을 정리했다.
마지막 라운드가 될 수 있다는 이유로 현금과 골드를 모조리 사용한 것이다.
‘현금은 전부 기부했고, 골드 또한 아이템을 구매함으로써 몽땅 써버렸지.’
그러자 뜻밖에도 조건에 충족하며 금액에 비례한 룬을 얻을 수 있었다.
‘그때 얻은 게 [광폭의 룬]이었지? 나쁘지 않은 룬이었어.’
피해를 입으면 그에 비례하여 공격력이 올라가는 룬으로 룬 자체는 쓸만했다.
‘다만 쓸 일이 없어서 문제였지. 피해를 보기도 전에 보스룸 앞에서 소멸당했으니까.’
하지만 이번에는 결과가 다를 것이다.
그때 얻은 광폭의 룬보다 더 좋은 룬이 나오리라 확신한다.
이번엔 전과 달리 1,600억이라는 어마어마한 골드를 털어버릴 작정이니.
‘기부한 현금은 이전 회차랑 비슷하지만, 골드는 다르지.’
이전에는 5천만 골드밖에 없었지만, 지금은 1,600억 골드가 있다.
골드가 압도적으로 높으니 확연히 다른 결과가 나올지 모른다.
‘골드만 0으로 만들면 룬을 획득할 수 있어.’
전처럼 아이템으로 전부 소비하기엔 불가능하니 다른 플레이어에게 넘기는 편이 나으리라.
그런 생각으로 일찌감치 플레이어들에게 소집 문자를 보냈지만 민주리가 올지는 모르겠다.
‘어쨌거나 잠시 후면 알 수 있겠군.’
약속 시간이 다가오는 것을 확인한 류민이 평소와 달리 가면을 벗은 채로 마당에서 기다렸다.
그러자 엄준석이 옆으로 다가왔다.
“검은 낫 님. 더운데 들어가서 기다리시죠.”
“아니, 여기서 기다리지. 곧 있으면 사람들이 올 테니.”
“그러셔도 되고요…….”
힐끔 본 엄준석은 뭔가 적응되지 않는다는 얼굴이었다.
“왜 그러지?”
“그냥…… 느낌이 이상해서요. 항상 가면으로만 보던 검은 낫 님을 이렇게 맨얼굴로 보다니.”
“내가 검은 낫이라는 걸 알고 놀랐겠군.”
“엄청나게 놀랐죠. 로스트야크 님이 검은 낫 님이었다니…… 상상도 못 했습니다.”
예전에 민주리와 함께 사신교를 찾았을 때 류민의 얼굴을 봤던 엄준석이기에 놀랄 만도 했다.
“게다가 그 많은 금액을 기부하실 줄이야……. 저라면 그렇게 못할 겁니다.”
“못하겠지. 그만한 돈이 없잖아.”
“하하, 그렇죠. 돈도 없지만 있어도 못할 겁니다.”
한차례 웃던 엄준석이 진지한 얼굴로 물었다.
“아쉽지 않으십니까? 힘들게 모은 돈을 거의 다 쓰셨는데.”
“돈이야 있다가도 없는 법이지.”
“무슨 말씀하시는 게 수십 년을 사신 분 같습니다. 21살이라는 게 믿기지 않을 정도예요.”
류민은 나이에 대해 별다른 언급을 하지 않았다.
회귀로 살아온 세월만 따지면 110살이 넘었는데 그런 것까지는 밝히고 싶지 않은 류민이었다.
“그런데 검은 낫 님. 다음 라운드 정보는 모른다고 하시지 않았습니까?”
“그랬지.”
“그런데 소집은 무슨 이유로……?”
“필요할지 모르겠지만 선물 좀 주려고.”
“선물이요? 어떤……?”
“슬슬 오는군.”
약속 시간이 가까워지자 사람들이 하나둘 나타났다.
모두 소식을 접했는지 가면을 벗은 류민을 보며 꾸벅 머리를 숙였다.
상대가 검은 낫이라는 걸 알고 있는 것이다.
“검은 낫 님, 소식 들었습니다. 기부하셨다면서요?”
“정말 좋은 일하신 것 같습니다. 대단하십니다.”
“정체도 밝히셨던데…… 이렇게 젊으신 분인 줄 몰랐습니다.”
들어오는 사람들과 이런저런 대화를 나누며 류민은 머릿수를 세어봤다.
‘스물둘, 스물셋…….’
시간이 지나자 더 많은 인원이 들어왔고 약속 시간이 되어서야 모든 인원이 소집됐다.
‘나를 제외하면 70명이군.’
한 명이 모자란다.
얼굴을 확인했기에 누가 오지 않았는지는 쉽게 알 수 있었다.
‘시간이 해결해 줄 거야…….’
주문 외우듯 읊조리며 류민은 좌중을 향해 말했다.
“마지막 라운드를 앞두고 너희를 부른 이유는 다름이 아니다. 선물을 주기 위해서다.”
“선물이요?”
“기대하고 있는 그런 선물은 아니다. 다음 라운드에 대한 정보는 이미 말했듯이 모르니까.”
“그럼 어떤…….”
“일단 거래부터 받아들이라고.”
류민은 한 명씩 붙잡고 거래 기능을 사용했다.
그러자 거래창을 본 플레이어가 놀랐다.
“이, 이렇게 많은 골드를 주시다니?”
“골드?”
“검은 낫 님이 말씀하신 선물이 골드인가?”
“얼마나 주셨길래…….”
궁금한 얼굴로 사람들이 저마다 검은 낫과 거래했다.
거래가 끝난 사람의 반응은 한결같았다.
언제 다 쓸지 짐작도 가지 않는 금액에 두 눈이 휘둥그레졌다.
인당 23억에 가까운 골드를 나눠줬으니까.
“그 돈이면 상점에서 펑펑 쓰고도 남을 거야.”
“나, 남아도 너무 많이 남는데요?”
“이걸 언제 다 쓰지?”
“쓸 기회가 지금밖에 없는 거 아니야?”
플레이어들이 놀람과 동시에 한편으론 당황했다.
지금 이렇게 많은 골드가 생겨봤자 쓸데는 없었으니까.
그렇다고 싫은 내색을 하는 플레이어는 없었다.
‘이용해서 미안하지만 잠깐 골드 좀 맡아주라고. 현실에서 얻을 수 있는 마지막 룬을 꼭 얻어야겠으니까.’
그렇게 마지막 70번째 플레이어까지 나눠주면서 골드를 0으로 만든 그때.
류민의 눈에만 보이는 알림창이 떠올랐다.
계획한 대로 룬을 획득하자 류민의 입가에 미소가 지어졌다.
‘드디어 18가지 룬 리스트를 모두 모았다.’
현금과 골드에 비례해 들어온 룬은 초월의 룬.
전과 달리 골드를 퍼부어서 그런지 전에는 얻어본 적 없던 새로운 룬이다.
‘어떤 룬인지 확인해 볼까?’
곧장 정보를 열어본 류민의 눈자위가 서서히 커졌다.
* * *
[제 이름은 류민. 만으로 20살이고요, 이것이 제 진짜 모습입…….]TV에서 기자 회견장에서의 폭탄 발언 영상이 흘러나왔다.
전국, 아니, 전 세계적으로 류민의 얼굴과 정체가 공개된 셈이지만 민주리는 아무래도 좋다는 듯 TV 전원을 꺼버렸다.
한때 사랑하던 사람이지만 지금은 보기 껄끄러운 얼굴일 뿐이다.
‘처음 만났을 때부터 20라운드가 된 지금까지, 날 속였어.’
물론 재미 삼아 속였던 게 아니라는 걸 안다.
혼란을 피하기 위해, 주변의 소중한 사람을 지키기 위해 정체를 숨겨왔던 거라는 걸 이해한다.
그걸 아는데도, 자신의 마음은 왜 이리 불편하고 속상할까?
왜 사랑하는 사람에게 배신당한 기분이 드는 걸까?
왜 자신을 가지고 놀았다는 생각이 드는 걸까?
‘마냥 착하기만 한 줄 알았던 민이가…… 다른 가면을 쓰고 있었다니…….’
괴로운 마음으로 머리를 부여잡던 그 순간.
민주리의 뇌리에 번뜩하며 빛줄기가 스쳐 갔다.
‘아.’
깨우친 것이다.
‘난 왜 민이가 순진할 거라고 생각했지? 편견에 사로잡혀 있던 건 나였나? 그 편견이 깨진 게 불편해서 내가 이러는 거고?’
꼬리에 꼬리를 물고 생각해 보니 확실하게 알게 됐다.
자신은 지금 사랑하는 사람에게 배신당한 것이 아니었다.
자신의 편견이 깨진 것의 방어 기제로 배신이라는 프레임을 씌우고 있을 뿐이었다.
불편한 진실을 마주할 정도로 자신의 심성은 강하지 않았으니까.
‘역겨워.’
나 자신이 너무도 역겹다.
편견이 무너졌단 이유로 다른 사람도 아니고 4년 넘게 짝사랑하던 남자를 탓하다니.
‘이대론 안 되겠어. 미안하다는 말이라도 해야지. 안 그러면 난 정말…….’
민주리는 서둘러 류민에게 문자를 보냈다.
만나자고.
만나서 얘기하자고.
생각을 정리할 시간은 이제 끝났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