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he Academy’s Weakest Became A Demon-Limited Hunter RAW novel - Chapter (130)
한산한 교정에 함박눈이 쏟아졌다.
페르난도 프로스트 교수는 서류에서 눈을 떼고 침침해진 눈을 가볍게 문질렀다. 창밖을 내다 보니 메르헨 아카데미는 눈송이로 뒤덮인 채였다.
퍽 보기 좋은 풍경이다. 부유섬만 없었다면 말이다.
그 거대한 섬이 나타나기 직전의 풍경도 이러했으니까. 이제는 트라우마처럼, 눈으로 뒤덮인 풍경은 페르난도에게 미미한 불안감을 느끼게 했다.
부유섬에 이어 떠오르는 건 검은 괴물, 지금은 이름 없는 영웅이라 불리는 한 명의 대마법사였다.
돌연 메르헨 아카데미에 출현해 마족들을 해치우고 다녔던 그가.
최근에 아스트레앙 공작령에 출현했던 검은 탑 마족까지 해치웠다는 소식이 전 세계에 일파만파 퍼져나갔다.
그의 활동 범위가 메르헨 아카데미에 한정되어 있지 않다는 얘기. 그는 꽤 자유분방하게 움직일 수 있는 모양이었다.
그리고, 지금은 겨울방학.
문득 페르난도는 자신의 스승, 아리아 릴리아스가 했던 말을 떠올렸다.
─ ‘너도 짐작하고 있을 거라 본다만, 그 괴물은 아마도 네 제자.’
“내 제자….”
제자 중 한 명이 검은 괴물이라면, 그는 누구인가. 올해부터 마족들이 출현했다는 점을 미루어 보면 신입생일 가능성이 농후하지만 이조차도 확정적인 건 아니다.
물론, 황실 기사단까지 개입한 마당에 자신이 고민할 문제는 아니었다. 막내 교수로서 겨울방학에도 해야 할 일이 산더미인데.
마탑들의 활발한 연구 결과들을 바탕으로 내년 수업 자료를 고쳐야 하고.
조만간 치를 입학시험 마무리 준비 작업, 다음 학기의 각 학년별 반 배정 평가 검토 및 준비, 연구, 논문 작성, 마족 따위의 위험 요소 대비, 온갖 자잘한 잡무만 해도 겨울방학을 통째로 날려야 할 판이었다.
예전에, 학사 회의에서 휴교를 주제로 심도 있게 논의된 적이 있었다. 마족의 잦은 출현 때문이었지. 하지만 이제 그 논의 주제는 물밑으로 자취를 감춰버린 상황이었다.
하필 황실이 나서서 ‘마족이라는 재해로부터 학생들이 교육받을 기회를 보장하겠다’라며 황실 기사단을 파견 보냈으니.
이는 돌려 말하자면 휴교하지 말라는 얘기나 다를 게 없었다.
‘그리고.’
황녀, 성녀, 무녀.
하나같이 전 세계에서 내로라하는 인물들이 메르헨 아카데미 입학시험에 지원한 상황.
아카데미 일정과, 학생들의 안전 보장을 위한 잠재적 위험요인 대비만으로 머리에 불이 날 지경인데.
그 고귀하신 입시생들의 존재는 입학시험을 준비하고 있는 페르난도에게 큰 부담으로 다가올 수밖에 없었다. 입학시험 내용으로 교장 엘레나 우드라인에게까지 결재 받는 건 이례적인 일이었지.
페르난도는 한숨을 푹 내쉬었다.
“그어어억…!”
똑똑, 하고 집무실 문을 두들기는 소리가 들렸다. 문밖에서 좀비 소리가 들려오자 대학원생임을 페르난도는 알아챘다.
“들어와라.”
문이 열리고 갈색 머리칼의 남자 조교, 마르코가 안으로 들어왔다. 살아 있는 사람의 낯빛이 아니었다.
마르코는 서류 뭉텅이를 가득 안은 채 삐걱삐걱거리며 페르난도에게 다가갔다.
수척한 팔이 서류 더미를 집무용 책상에 내려놓았다.
“끝났나?”
“그어억….”
“수고했다. 다음은 예의 그걸. 입학시험 전까지 끝내야 한다.”
“그어어억…?!”
군말은 하지 않는다. 페르난도는 바로 본론으로 넘어가 염동력으로 띄운 서류 뭉치를 마르코에게 건넸다.
절규하는 마르코. 현기증이 일어 순간 휘청거렸으나, 조교 된 자에게 다른 선택지는 없었다. 그는 터덜터덜 집무실을 나섰다.
이른 아침이지만, 오늘도 그는 밤을 지새울 것이다.
* * *
[자주 보는군, 꼬맹아.]사암의 시련 동굴은 여전히 바위 마력으로 그득했다.
널찍한 공간은 거대한 바위산처럼 생긴 악어거북이 대부분을 차지하고 있었다.
바위 속성 8성급 마수, 암갑귀-고르모스.
녀석은 노년 남성 같은 목소리로 나를 반겼다.
“안녕.”
[내가 왔도다, 고르모스여!]나는 작은 아기용 형태로 소환한 빙설룡-힐드와 함께 암갑귀에게 인사했다.
어제는 빙설룡과 암갑귀를 서로 인사시켰지. 들뜬 기색을 보이던 빙설룡과는 달리, 암갑귀는 세상만사 통달한 현자라도 되는 것처럼 점잖아서 무척 대비되어 보였다.
“안 심심했냐.”
[심심하긴…. 사색을 즐기고 있었다만, 요즘은 네 녀석 때문에 시끄러워서 그럴 틈이 없다.]반개한 눈으로 나를 노려보며 대답하는 암갑귀.
[ 암갑귀-고르모스 ]심리 : [ 당신을 무척 반가워하고 있습니다. ]
겉과 속이 다른 츤데레 자식.
“걱정하지 마라, 자주 올 테니까.”
[자주 오마!] [거참….]어이없다는 듯이 혀를 끌끌 차면서 역시 오지 말란 소린 안 한다.
“오늘도 신세 져도 되지?”
[흠…. 안 된다고 하면 네 녀석이 불쌍하니, 어쩔 수 없지 않겠나.]웅대하고 점잖은 츤데레가 내뱉은 저 말의 속뜻은, 그냥 나와 놀고 싶다는 것이었다.
“고맙다.”
손에 쥐고 있던 잔야의 지팡이를 땅에 내려놓고 가볍게 몸을 푼 뒤, 다시 그것을 집어 들고 벌떡 일어섰다.
그대로 몸속 마력 회로의 흐름을 가속시키고 심호흡을 깊이 들이마신 후, 전투 태세를 갖추었다.
쿠드드, 쿠웅, 쿠웅─.
암갑귀 앞에 바위 마력이 뭉치고, 허공에 생성된 바위 갑주가 타닥타닥 맞붙더니 골렘의 형태가 되었다.
신장 약 4m짜리 골렘 5마리. 그 뒤로 7m에 육박하는 거대 골렘 1마리.
전부, 암갑귀가 내 수준을 가늠하고 만들어 낸 바위 하수인이었다.
[구와아아아악───!]가장 큰 골렘이 나를 향해 포효하자 절로 입가에 미소가 지어졌다.
그래, 이거다.
암갑귀는 아직 내 사역마로 삼을 수 없다. 내게 하나 있는 8성급 사역마 계약진은 빙설룡-힐드와 계약하는 데 쓰였고, 아직 나로선 놈을 이길 수 없으니까.
하지만 오히려, 지금 암갑귀가 내 사역마가 아니기에 녀석을 효과적으로 써먹을 수 있는 방법이 있었다. 그것이 바로 저 하수인들이다.
저들은 실체를 갖춘 상대. 덕분에 마물 환상을 상대할 때와는 비교조차 되지 않는 효과적인 수련이 가능해졌다.
‘저놈이 내 사역마였다면 상상도 못 할 광경이지.’
즉, 개꿀이었다.
저번엔 저 7m 보스 골렘을 이기지 못했지만, 이번엔 기어이 해내리라.
쿵, 쿵. 골렘들이 일제히 내게로 달려들었다. 저들은 빠르게 주먹을 휘둘렀고, 내가 공격을 피하면 능숙하게 바위 마법을 시전해댔다.
나도 얼음과 바위 속성 마법으로 대항해 놈들을 상대했다.
빙설룡은 암갑귀 등껍질 위에 올라가서 나를 지켜보고 있었으나, 녀석을 신경 쓸 여유는 없었다.
콰아아앙──!
다치고, 구르고, 흙먼지를 뒤집어쓰고, 피하고, 마법을 퍼부으며 골렘들을 쳐부숴댔다.
빡세다. 정신이 없네.
“하아.”
그러나 단련이 거칠수록, 효과적일수록, 효율적일수록 짙은 쾌감이 밀물처럼 밀려온다.
분명 굉장히 힘들고 괴로운데도, 저 골렘들을 깨부술 때마다 내가 강해진다고 생각하니 희열이 몰아쳤다.
콰가강──!
이게 야쓰지.
* * *
아이작.
인사할 땐 강아지처럼 순한 인상이었으나, 막상 전투에 돌입하자 그의 눈빛이 냉철하게 돌변했다.
빙설룡과 암갑귀는 골렘 무리와 치열한 싸움을 벌이는 아이작을 가만히 지켜보았다.
전투를 거듭할 수록 그의 전투 감각, 원소 마법의 화력, 마력 운용력은 눈에 띄는 속도로 발전해 가고 있었다.
[신기하군.]무심코 감상을 내뱉은 암갑귀.
작은 아기용 형태의 빙설룡-힐드는 고개를 빼꼼 내밀고 등껍질 아래, 암갑귀의 머리를 내려다보았다.
[뭐가 말이냐, 고르모스여?] [저 꼬맹이 말이다.]화려한 원소 마법이 오가는 격전을 바라보며, 암갑귀는 지그시 눈을 깜박였다.
아직 약하지만 재능은 분명 천재적이다.
노력도 아끼지 않는다.
거기다 서리군주의 기운까지….
[오래 살고 볼일이구나. 저 꼬맹이는 대체 뭐냐?] [뭐, 나는 빙제의 환생으로 보고 있다만.] […왜 그런 생각을?] [빙제의 환생이 아니고선 설명이 안 되지 않느냐? 그런 것이다, 고르모스여! 빙제는 나를 만나기 위해 환생한 것이 틀림없다!]암갑귀는 이 멍청한 백룡에게 무슨 대답을 해야 할지 망설이다 나지막이 한숨을 내뱉었다. 거대한 몸집 탓에 그 한숨은 미풍을 일으켰다.
[여전히 사고방식이 낭만적이구나, 힐드. 뭐라 대답해야 할지 감이 안 잡히는군.] [이해할 필요 없느니라. 마음으로 느끼면 될 일이지.]콰아아아───!
두 마수의 대화는 아이작의 [빙결 폭발]이 일으킨 폭음에 잡아먹혔다.
가장 거대한 골렘을 무너뜨리고, 허공에서 떨어지며 씨익 웃는 아이작. 드디어 해냈다며 성취감에 젖어 든 모습.
암갑귀는 그 사내에게서 눈을 뗄 수 없었다.
문득 떠오르는 건 호승심 넘치던 암제의 모습이었다. 언제나 강해지길 추구했으며, 강자와의 싸움을 선호했던 한때의 주인.
[마음으로 느끼면 될 일….]빙설룡이 한 말을, 암갑귀는 나지막이 곱씹었다.
* * *
“뒤질 것 같다….”
저녁. 잿빛 하늘은 여전히 새하얀 함박눈을 쉴 새 없이 쏟아 내고 있었다.
양손으로 쥔 잔야의 지팡이로 땅을 짚어가며 힘겹게 눈으로 뒤덮인 교정을 가로질렀다. 진짜, 삭신이 다 쑤시는구나….
암갑귀의 하수인 중 7m 골렘을 이겼을 때 성취감에 환호성을 내지를 뻔했지만.
연이어 등장한 10m 골렘한테 쳐 발렸을 땐 이를 바득바득 갈아야만 했다.
압축형 골렘도 있다는데, 그놈은 얼마나 강할지 모르겠네.
[주인, 내가 부축해주는 건 어떻겠느냐?]“괜찮아…. 넌 눈에 띄잖아. 애초에 내가 마력이 얼마 안 남았어. 네 소환 상태 유지 못해.”
빙설룡-힐드는 현재 반딧불이 형태로 내 안주머니에 있었다.
녀석은 화이트클락 공작령의 상징이자 신화에 기록된 백룡 마수다. 도와달라고 하기엔 너무나도 눈에 띈다. 아카데미에 있는 아무한테나 걸려 봐라. 난리 나겠지.
애당초 암갑귀 하수인들 상대하느라 마력도 얼마 안 남았다.
내 몸을 부축하기 위해 빙설룡-힐드나 이든을 적당한 크기로 소환하면 마력이 고갈될 위험이 있었다. 그러니 지금은 회복될 때까지 참는 편이 좋으리라.
뭐, 생활동에 도착할 즈음이면 괜찮아지겠지.
[눈에 안 띄는 모습으로 변신하는 것도 이젠 가능하다만….]그건 뭔 소리냐?
[앗!]“우왓!”
철퍽!
아, 넘어졌다. 다리가 후들거려서 중심을 못 잡았어.
그대로 눈밭에 파묻힌 나는 흰 눈이 전해주는 냉기를 한껏 느끼며 고개를 치켜 들었다.
“아오.”
흙 범벅에 이어 눈 범벅이냐.
가까스로 몸을 일으킨 나는, 무릎을 꿇은 채로 옷에 묻은 눈을 탈탈 털어냈다. 아으, 팔 떨리네.
그때, 뒤쪽에서 뽀드득뽀드득 눈 밟는 소리가 들렸다. 내가 넘어진 걸 본 건가? 창피하게.
“괜찮니?”
연이어 들려오는 부드럽고 고아한 목소리. 어째… 낯익은 목소리였다.
“아, 괜찮습니다. 감사합….”
목소리가 들린 뒤쪽으로 고개를 돌리자, 내 두 눈이 휘둥그레지고 말문이 턱 막혔다.
연금발.
목에 낀 흑백 무늬 초커와 귀에 낀 흑백 귀걸이.
무척 어여쁜 여학생이 상체를 숙이고, 벚꽃 색감의 연분홍빛 눈동자로 나를 내려다보며.
내 머리 위로 우산을 씌워주었다.
“어디서 구르다 왔니? 옷이 엉망이네.”
그녀는 고상하게 치마를 한 차례 쓸고서 두 무릎을 모으고 쪼그려 앉더니, 내 머리에 잔뜩 묻은 눈송이를 툭툭 털어내 주었다.
아주 잠시, 벙찐 채로 그녀를 바라보았다. 무슨 말을 해야 할지 떠오르지 않았으니까.
그녀는 나긋나긋한 미소를 흘리며 내 눈을 똑바로 마주 보았다.
“우리, 구면이지?”
공기가 무겁다. 한없이 쏟아지는 함박눈에 아카데미가 숨을 죽인 듯했다.
앨리스 캐럴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