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he Academy’s Weakest Became A Demon-Limited Hunter RAW novel - Chapter (20)
이해는 한다.
카야는 어린 시절부터 검성 제랄드 밑에서 군인처럼 자라왔고, 남자와는 벽을 쌓은 인생을 살아왔다.
그런 그녀한테 외간 남자와 한 자리에서 자야하는 상황은 꽤나 심리적 타격이 클 것이다.
거기다 내가 못 생겼다면 모를까, 거울에 비쳐서 본 아이작의 얼굴은 나름 반반한 편. 심지어 그녀는 나를 동경하고 있기까지 하다.
묘한 기류가 흐르기엔 너무나도 적절한 조건들이 충족되어 있었다.
다시 한번 슬쩍 카야 쪽을 보았다. 그녀는 여전히 긴장 상태인 듯했다.
내가 건드릴까 봐 불안한 거겠지. 좋은 의미로든, 나쁜 의미로든, 양쪽 다의 의미로든.
그렇다고 내가 밖에서 잘 수도 없는 노릇이고, 텐트는 하나뿐이고.
얼음 마법으로 이글루를 만들어도, 잠들기 시작하면 마력 컨트롤이 안 돼서 마법이 해제되니 소용없고.
“…….”
“…….”
타닥대는 모닥불 소리, 잔잔히 흐르는 시냇물 소리.
이대로 자연의 ASMR이나 들으면서 입에 풀칠한 채로 있으면 묘한 기류가 더욱 심해질 터.
마침 슬슬 졸음이 몰려오고 있었다.
아마도 지금 상황에선, 내가 텐트 구석에 가서 먼저 잠들어 주는 편이 그나마 그녀를 안심시켜 줄 수 있는 좋은 방법인지도 모르겠다.
“졸리다. 자자.”
“앗, 네, 네엣!”
이병 카야 아스트레앙.
군에 입대하고 막 자대 배치받았을 때가 떠오른다. 내가 이등병 때 저랬지.
나는 담요를 어깨에 걸친 상태로 간이 의자에서 일어났다. 나를 멀뚱히 바라보고 있는 카야를 무시하고 먼저 텐트 안으로 들어갔다.
둘이 자기엔 넉넉한 공간이었다. 그러나 카야가 마음 편히 잘 수 있도록 나는 최대한 구석 자리에 가서 누웠다.
‘오.’
이 안락한 기분 뭐야. 개 좋아.
꼭 놀러 와서 캠핑하는 듯한 기분···이 아니라 진짜 캠핑이긴 하네.
“실례하겠습니다···.”
조금 시간이 흘러.
카야가 조심스레 안으로 들어왔다. 행동거지 하나하나에 긴장감이 배어 있는 모습. 그녀는 어깨에 걸친 담요를 온몸에 꽁꽁 싸매고 있었다.
일부러 대답하지 않았다. 그냥 살짝 곁눈질했다가 다시 눈 감고 자는 척했다.
카야는 내 반대편 구석 자리로 가서 누웠다. 이불과 담요가 쓱쓱 마찰하는 소리가 들렸다.
이내, 조용해졌다.
이 녀석, 잘 잘 수 있을까.
나는 살며시 눈을 뜨고 카야 쪽을 슬쩍 쳐다보았다.
‘아이고.’
덜덜덜.
뭘 그리 긴장한 건지 카야의 몸은 진동벨처럼 격렬하게 떨리고 있었다.
담요를 입술까지 끌어올린 채, 아무것도 없는 텐트 천장만 뚫어지게 쳐다 보면서 말이다.
심지어 내 반대편 구석에 딱 달라붙어 있기까지 해서, 가운데 자리가 지나치게 휑해 보였다.
[ 카야 아스트레앙 ]심리 : [ 당신과 함께 잠자리에 들 생각에 심장이 터질 것처럼 긴장하고 있습니다. ]
안 건드릴 테니까 걱정하지 마라, 좀···.
‘뭐, 저러다 알아서 자겠지.’
나는 다시 눈을 감았다.
온몸이 나른했다. 피로가 몰려온 모양이었다.
하루 수업을 모두 마치고, 마차를 타고, 탄타크 지하 동굴까지 와서 가르지아를 처치하기까지 했으니···.
“아이작 님.”
돌연 나를 부르는 카야.
“지하 동굴에 있던 마족의 마나를 아카데미에서 감지하셨다고 했죠. 혹시 제가 아이작 님 뒤를 밟···, 아니, 주변에 있었을 때도··· 다 알고 계셨습니까?”
당연히 몰랐지.
방금 카야가 한 말을 고려해 보건대, 나를 미행한 건 이번이 처음이 아닌 듯했다.
일단 무슨 이유에서건, 카야가 날 뒤쫓는 상황이 만들어지는 건 영 좋지 않았다.
항상 빡세게 돌리고 있는 내 하루 루틴을 그녀에게 들킨다면, 내 밑천이 드러나게 될 위험성이 크기 때문.
그리 되면 어떤 후폭풍이 들이닥칠지 알 수 없다. 최대한 사려야 하는 입장에서 예상 못할 변수는 두려운 요소다.
금방이라도 잠들 것 같은 정신을 붙들고, 나는 가라앉은 목소리로 대답했다.
“···다시는 그러지 마라. 거슬린다.”
“아, 알겠습니다···!”
카야의 대답은 지진이라도 난 것처럼 떨렸다.
이 정도면 충분하겠지.
붙들고 있던 정신을 내려놓자, 나는 꿈속으로 빠져들었다.
······
한 3시간쯤 지났을까. 군대 혹한기 훈련 때 선잠 자던 꿈을 꾸다 깨어났다. 여기서도 선잠이었다.
상체를 일으켰다. 담요 한 장만 덮고 있기엔 새벽 추위는 만만치 않았다.
나는 내 마법으로 생겨난 한기에는 별다른 추위를 못 느끼지만.
외부 환경에 의한 추위에는 평범한 사람이나 다름없었다.
“어으, 추워.”
나지막이 투덜대며 카야 쪽을 돌아보았다. 담요를 덮은 채 내게서 등을 돌리고 누워 있는 모습이 보였다.
나는 덮고 있던 담요를 그녀에게 덮어 준 후.
마법 주머니에서 여벌 옷을 꺼냈다. 난 이거나 덮고 자야겠다.
어쩔 수 없는 일이었다. 내가 추운 것보단, 어린 마음으로 날 따라온 이 녀석을 덜 춥게 만드는 편이 마음 편하니까.
“아.”
여벌 옷 옆에 들어 있던 재해의 검집이 손에 닿았다. 나는 그 아이템도 꺼내 들었다.
볼 때마다 뿌듯하네.
어렸을 때 유○왕에 나오는 신의 카드, 오벨리스크의 거인신을 얻고 하루 종일 그것만 바라보면서 기뻐했던 기억이 났다. 마치 그때와 비슷한 감정이 들었다.
재해의 검집을 슬그머니 만지니, 미소가 절로 흘러나왔다.
“예쁜 것.”
흐흐. 앞으로 잘 부탁한다.
나는 재해의 검집을 다시 마법 주머니에 집어넣었다.
‘다시 자야지.’
꺼냈던 여벌 옷을 몸 위에 덮고 드러누웠다. 역시 춥네.
나는 팔짱을 끼고 몸을 웅크렸다. 최대한 체온을 뺏기지 않는 자세였다.
다행히도, 잠은 쉽게 찾아왔다.
······
1중대 기상.
빠빠라빠바 빠빠라빠바 빠빠라빠바 빠빠빰!
꿈속에서, 다시는 듣기 싫은 알람 소리를 듣다가 잠에서 깼다. 아주 잠깐이었지만 기분이 엿 같았다.
그런데 뜻밖에도 개운하게 잘 잔 기분이었다. 오래 자서 그런가.
요새 수업, 단련, 공부 코스로 하도 구르면서 자는 시간도 아끼다 보니, 항상 피로는 패시브 스킬처럼 달려 있는 게 일상이었지.
어색하네, 이 상쾌함.
길게 하품하면서 상체를 일으키자, 내 몸을 덮고 있던 담요가 스르르 흘러내렸다.
“……?”
옆에 인기척이 없었다. 옆으로 눈을 돌리니, 카야의 모습이 보이지 않았다. 내게 담요를 덮어 주고 나간 모양이었다.
나는 텐트 문을 열었다. 서늘한 아침 바람이 미약하게나마 남아 있던 졸음을 몰아냈고, 곧바로 타닥대는 모닥불 소리가 들려왔다.
텐트 문밖으로 고개를 내밀었다. 아침 햇볕을 받아 밝아진 협곡. 모닥불 앞에 간이 의자를 깔고 앉아 있는 카야의 뒷모습이 보였다.
내가 어제 줬던 외투를 그대로 입고 있는 모습. 담요도 어깨에 걸쳐둔 채였다.
그녀 앞에는 아마도 아침에 새로 가져왔을 것으로 추정되는 장작들이 까맣게 타고 있었다.
신발을 신고 텐트를 나섰다. 그러자.
“흣!”
어째선지 화들짝 놀라는 카야.
그녀는 부자연스러울 정도로 빠르게 내 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왜 저렇게 놀라냐?
“아, 아이작 님. 일어나셨습니까…?”
어색하게 웃는 카야 눈 밑엔 다크서클이 드리워져 있었다. 피부가 하얗고 곱상한 편이라 유독 눈에 띄는 색감이었다.
제대로 못 잔 게 틀림없었다.
[ 카야 아스트레앙 ]심리 : [ 당신이 진짜로 손끝 하나 안 댈 줄 몰라서, 안도감과 동시에 자신이 여자로서 가진 매력에 회의감을 느끼고 있습니다. ]
···어쩌란 거야?
······
30분 정도 걷자 마차 정류소가 나왔다.
나와 카야는 마차 하나를 잡아 탔다. 아무것도 없는 곳에서 남녀 학생이 나타난 상황이라 그런지, 마부는 미심쩍은 눈빛으로 우리를 훑었다.
마차는 아카데미를 향해 출발했고.
얼마 지나지 않아 카야는 고개를 꾸벅거리며 졸기 시작하더니, 이내 마차 창문에 머리를 기대고 잠들기 시작했다.
그녀가 입고 있던 내 외투가 흘러내려 왜소한 어깨가 드러났다. 나는 외투를 들어 올려 그녀의 어깨 쪽을 덮어 주었다.
마차가 흔들거리고, 그녀의 고개가 흔들리다가 이내 내 어깨에 안착했다. 완전히 곯아떨어진 모습이었다.
생각해 보면 이번 일은 카야가 없었으면 어찌 됐을지 모르겠다. 원래는, 힘을 비축 중이던 가르지아를 먼저 처치하러 가는 건 >메르헨의 마법 기사>에서 허용되지 않는 일이었다. 애초에 2막 4장이 끝나기 전까지 탄타크 지하 동굴에 들어갈 수조차 없다.
나는 그 공식을 완전히 깨뜨려 버렸고, 내가 알지 못했던 게임 속 영역을 탐험하게 되었다. 그렇기에 완벽한 대비는 불가능했다.
하지만 카야가 있었던 덕분에 나는 가르지아의 [금강철괴]를 뚫는 데 성공할 수 있었고.
제프림을 쉽게 주워 담을 수 있었고.
장작도 쉽게 얻어 고된 육체노동을 피할 수 있었다.
‘고맙다.’
도움이 많이 됐다. 언젠가 보답해 줄게.
나는 반대편 창문에 고개를 기대고 창밖을 바라보았다.
푸른 잎이 무성한 나무들에 아침 햇볕이 드리우고.
숲에 만연해 있던 아침 안개가 사그라져 간다.
하늘은 더없이 청아한 푸른빛을 흩뿌리고 있었다.
······
약 4시간 후, 마차는 아카데미에 도착했다.
익숙한 건물들이 보이는 풍경. 집에 돌아온 듯한 착각마저 들었다.
여전히 카야는 곤히 잠들어 있었다. 무척이나 피곤한 모양이었다.
“카야, 다 왔다.”
카야의 어깨를 흔들면서 깨우려고 했는데.
내가 말을 꺼내자마자 그녀는 눈을 번쩍 뜨고는 절도 있게 상체를 꼿꼿이 세웠다.
“기상! …아.”
누가 봐도 본능적인 움직임이었다. 유한 척은 다 하고 살지만, 실상은 온몸에 군기가 바짝 배어 있는 것이다.
“도, 도착했습니까?”
응, 도착했다.
먼저 마차에서 내린 카야는 내게서 고개를 돌리고 입을 가렸다. 몰래 하품하는 듯했다.
나는 그 뒤를 따라 내리고 마부에게 삯을 건넸다. 그는 가볍게 목례하고서 마차를 몰고 떠나갔다.
‘많이 피곤해 보이네.’
얼른 보내주는 편이 좋겠다.
하지만 중요하게 해야 할 말이 있었다. 굳이 안 말해줘도 상관없을지 모르겠으나, 확실히 못 박아 두고 싶었다.
“카야.”
“네, 아이작 님!”
동작이 딱딱 끊길 정도로 절도 있게 내 쪽을 돌아보는 카야.
역시 부담스러울 정도의 기개였다.
어쨌든, 은둔의 가르지아를 처치한 건은 최대한 함구하는 편이 좋겠지.
학생회장 앨리스 캐럴이 내 꼬리를 잡으면 인생 종 칠 테니 말이다.
다행히도 그녀는 재해의 검집 같은 아이템은 물론이고, 은둔의 가르지아가 있었다는 사실조차 모를 것이다.
앨리스는 악신 네피드가 현현하는 걸 도우려는 흑막일 뿐.
악신 네피드가 그녀의 편인 건 아니기 때문이다.
“어제 일은 비밀로 해줘. 다른 사람한테 들키면 곤란해질 테니까, 아무한테도 발설하지 말아줬으면 한다.”
“아, 네에···.”
목소리가 개미 울음소리처럼 기어들어 가는 카야. 왠지 조금 애교가 담겨 있지 않았나?
얼굴은 또 붉게 달아올라 있었다.
[ 카야 아스트레앙 ]심리 : [ 당신과 둘만의 비밀이 생겨서 부끄러워하면서도 우쭐해하고 있습니다. ]
또 뭘 착각하고 있냐···.
“마족 말이야.”
“아 마족, 물론 마족이라 생각하고 있었습니다···! 비밀로 하겠습니다. 아이작 님껜 분명 깊은 뜻이 있으실 테니. 그리고 또···.”
카야는 뜸을 들이더니, 진중한 얼굴로 나를 쳐다보았다.
“아카데미에 마족이 출현하는 이유, 아이작 님께서 마족을 찾아내 해치우시는 이유···. 이 아카데미에 제가 모르는 뭔가가 있어서, 맞습니까?”
“…….”
“…굳이 대답 안 해주셔도 됩니다. 아이작 님은 굉장하신 분이니까, 말씀하시기 곤란한 건 그만한 이유가 있는 거겠죠.”
공기가 무거워진다. 이 대화 흐름. 카야를 내 편으로 포섭할 수 있는 좋은 기회인지도 모르겠다.
모든 원인은 악신 네피드, 바로 그 최종 보스다. 녀석에 관한 정보를 공유할 수 있는 동료가 생긴다면, 그것도 그 상대가 카야라면 분명히 심리적으로 아주 든든할 것이다.
하지만 카야에게 그런 족쇄를 채우고 싶지 않았다.
세상을 가볍게 멸망시킬 수 있는 강대한 존재의 강림. 그걸 막을 수 없다고 하는 건 시한부 선고와 뭐가 다른가. 카야에게 막중한 심리적 부담감을 떠 안겨줄 가능성이 높았다.
어차피 나는 악신 네피드에게 도달할 때까지 마족을 계속 해치워 나갈 것이고, 계획도 이미 세워 놨고, 별일 없다면 카야는 아마 내 말을 계속 따라줄 것이다. 그리 크게 달라질 건 없었다.
그렇다면 대답하지 않는 편이 이 애에게 좋겠지.
“···감사했습니다, 아이작 님. 이만 들어가 보겠습니다.”
카야는 내 침묵을 대답으로 알아듣고 다소곳이 고개 숙여 인사했다.
그녀는 교복 카디건을 벗어서 돌려주고.
내게서 등을 돌리고 발을 움직였다.
떠나가는 그녀의 뒷모습을 바라보면서, 나는 깊은 상념에 잠겼다.
······
메르헨 아카데미는 섬 하나가 통째로 부지다. 그래서 이 섬 안에선 아카데미 주도하에 작은 경제가 형성되어 금전이 순환되고 있다.
도시에서나 볼 법한 별별 곳이 이곳에 다 있다는 얘기다.
그러나 아카데미 규칙상, 아카데미 학생은 바깥에서 가져온 물품을 판매할 수 없다. 학생들이 팔 수 있는 건 아카데미 부지 내에서 합법적으로 얻은 것뿐.
학생들은 모두 아카데미에 입학할 때 ‘마르크스 약조’를 맺고 들어온다. ‘대마법사 마르크스’가 만들어낸 섭리에 주관하는 절대적인 맹약이며, 메르헨 아카데미 부지에 한정해서 효과가 발휘된다. 이를 어길시 ‘강제 퇴학’이라는 결과가 발생한다. 그 정지조건들 중 하나가 외부 반입 물품을 판매하는 일이다.
위탁매매라든지, 도급의 형태로 부가가치를 창출하는 일도 금지된다. ‘여기는 우리 부지니까 우리가 독점할 거다’라는 메르헨 아카데미의 결연한 의지가 느껴진다.
제프림은 아카데미 부지 내에서 얻은 마석이고, 무주물이다. 규칙에 저촉될 일은 없으니 안심이었다.
여담이지만 오로지 매매만 마르크스 약조로 다루는 건 아니다. 예시로, 마법이 개입되는 소비 품목을 외부에서 반입하는 것도 엄밀하게 금지된다. 주문서나 포션 같은 것이 그러하다.
카야와 헤어진 뒤, 나는 감정소를 찾았다. 여러 잡동사니들이 진열된 유리 케이스 너머, 나이 지긋이 먹은 키 작은 할아버지가 나를 맞이했다.
“꺼이, 웬 총각이로고···?”
>메르헨의 마법 기사>에는 여러 감정소가 있다. 그중 해리슨이 운영하는 이곳은 가장 후한 값으로 감정해주는 대신, 초반에는 갈 수 없도록 설정되어 있다.
그러나 이미 후반부 컨텐츠인 비밀 상점을 이용할 수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된 이상, 이곳도 들어갈 수 있을 거라고 나는 확신했다. 애초에 나는 게임 스토리에 구속 받는 입장이 아니니 뭐.
여기서 제프림을 팔면 과연 얼마가 나올까. 기대된다.
참고로 감정소 내에선 누가 뭘 구해오든, 비합법적인 게 아니라면 아무것도 캐묻지 않는다는 불문율이 있다.
게다가 해리슨은 베테랑 정신이 투철한 데다 생각도 유하니, 내가 제프림을 잔뜩 갖고 온 데 별다른 신경은 쓰지 않을 것이다. 단지 운 좋은 청년이로고, 하겠지.
나는 예의 바르게 상체 숙여 인사한 후, 마법 주머니 두 개를 꺼냈다.
마법 주머니는 무게를 줄여주는 효과가 있긴 해도 0으로 만들어 주지는 못한다. 그래선지 제프림이 들어 있는 마법 주머니는 상당히 무거운 편이었다.
그러나 지금 내 몸은 지옥의 PT로 단련된 상태. 이 정도 마법 주머니를 들고 다니는 정도는 거뜬···까지는 아니지만, 죽을 만큼 힘들지는 않았다.
마법 주머니를 벌리고 안에 들어 있던 연노란빛 마석, 제프림을 꺼내 유리 케이스 위에 올려 두었다.
해리슨의 눈길이 내게서 제프림 쪽으로 돌아갔다.
“감정받으러 왔어요.”
“오호, 이것은···.”
해리슨은 제프림 하나를 들고 돋보기로 살펴보기 시작했다.
“어디 보자아···.”
제프림을 이리저리 살피기 시작한 해리슨.
어째 동작이 느리지만 연세를 감안 해서 기다려줘야지. >메르헨의 마법 기사>에서도 그의 동작이 너무 느려서 이안 페어리테일이 답답해하던 게 기억난다.
“흐으음, 호오오···.”
어째 동작이 매우 느리지만, 참고 기다려줄 만했다.
“으음···, 그렇구먼···. 아니, 으음···.”
어째 동작이 나무늘보처럼 심각하게 느리지만, 더 참을 수 있었다.
“꺼이꺼이···, 호허헛···.”
···10분이 경과하고.
인내심이 폭발하기 직전.
“대체 언제쯤 말씀을···.”
“3000겔.”
“예?”
“이거 하나에 3000겔이면 충분하겠어···, 꺼이꺼이.”
답답했던 마음이 눈 녹듯이 사라졌다.
내가 가져온 제프림은 총 56개. 빠르게 암산해 본다.
이는 즉···.
‘168000겔···!!’
그 순간, 내 사고는 정지하고.
그저 한 가지 생각만이 내 머릿속을 환하게 채워갔다.
오늘 저녁은 소고기라고.
* * *
“아가씨, 대체 밤새 어디 갔다 오신 겁니까…?”
메르헨 아카데미 최상위 기숙사, 샤를관.
카야는 밤새 걱정하며 자신을 기다리고 있던 메이드, 메리를 보자 진중한 얼굴로 대답했다.
“아카데미의 평화를, 지키고 왔습니다.”
“……?”
의미불명.
메리는 당혹스러워했다.
카야는 대화를 통해 메리를 안심시켜 주고 혼자서 쉬고 싶다고 한 후, 방 안으로 들어갔다.
어제 잠들었던 작은 텐트와는 비교조차 안 되는, 호화롭고 넓은 방.
그러나 그녀의 의식은 여전히 그 작은 텐트 안에 머무르고 있었다.
“마족….”
어제 있었던 일을 되새김질했다.
추측컨대, 아이작은 마족이 메르헨 아카데미에 나타날 거란 사실을 사전에 알아채고 입학한 듯했다.
필시 아카데미의 평화를 지키기 위해서 마족들을 해치우고 있는 거겠지.
그리고 그의 정체를 함구하고 있어야 그 행보를 방해하지 않을 수 있는 거고.
아이작의 깊은 뜻은 잘 모르겠으나, 그가 하는 말을 잘 따르는 편이 사람들을 지키기 위한 길이라고 카야는 확신했다.
“…아이작 님.”
어제 아이작과 함께 보냈던 시간이 머릿속에서 선명하게 떠올랐다.
동굴 전체를 얼려 버리던 때의 압도적인 모습, 외투를 입혀주던 때의 상냥한 모습, 옆에서 마족에게 마법을 퍼붓던 때의 냉철한 모습.
그 모든 기억이 카야의 머릿속에 가득했다. 그녀의 머릿속이 바다라면, 그 기억은 바다를 채우고 있는 바닷물인 것처럼.
“멋있었어….”
역시 동경해 마지 않는 사람이었다.
그런데 그 기억과는 별개로. 평소와는 조금 다른 감각이 느껴졌다.
새벽에 그가 자기 담요를 몰래 덮어줬을 때였다.
말똥말똥한 정신으로 자는 척하고 있던 카야는, 당혹감과 동시에 가슴속이 포근해지는 감각을 느꼈다.
무엇보다도….
─ ‘예쁜 것.’
화끈.
그 말을 떠올리기만 해도 머리에 열기가 올라왔다.
설마 아이작이 예쁘다고 해줄 줄은 상상도 못했다.
어제부터 자꾸만 가슴속이 시끄러웠다. 규칙적이고도 강렬한 소리가 귓속을 연신 두들겨 대는 것 같았다.
처음엔 긴장감 때문에 그랬으나, 아이작이 담요를 덮어주며 ‘예쁜 것’이라고 해준 이후로는 이유 모를 황홀감이 들기 시작했다.
카야는 화장대 거울에 비친 자기 모습을 살폈다.
붉게 달아오른 뺨…은 문제가 아니었다.
밤을 새고 마차에서 졸았던 탓에 양갈래 머리에선 머리카락들이 삐죽삐죽 삐져나온 채였고, 아침마다 메리가 해주던 화장도 꽤 지워져 있었다.
평소 멋에 그다지 신경 쓰지 않아 왔건만, 오늘따라 흐트러진 제 모습이 왠지 그녀를 속상하게 했다. 뒤늦게나마 머리칼을 가다듬어 봤으나 의미 없는 행위처럼 느껴졌다.
“뭐하는 거지, 나…?”
어째 회의감이 몰려와 카야는 한숨을 내뱉었다.
자신이 느끼고 있는 감정과 하고 있는 행동의 의미를 스스로도 잘 이해할 수 없었다.
애초에 외모 얘기라고 생각하는 것부터 너무 일차원적인 사고방식이 아닌가. 무려 아이작 님이 하신 말씀인데.
‘그냥 좋게 봐주신 건가?’
아카데미의 평화를 지키려고 하는 마음이 기특해서 그런 말씀을 하신 걸지도.
보통 나이 드신 분들이 기특한 어린애를 보면 장하다는 의미로 ‘예쁘다’라고 할 때가 많지 않은가. 그런 느낌이겠지.
아마도 그럴 거야.
“…….”
그럴 텐데….
어째선지 카야는 한동안 머리칼에서 손을 뗄 수 없었고.
거울에서 눈을 뗄 수 없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