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he Academy’s Weakest Became A Demon-Limited Hunter RAW novel - Chapter (204)
* * *
평범한 데이트였다.
수국 정원을 걸었고, 상가에서 빵과 구운 고기를 먹었고, 시답잖은 이야기로 웃고 떠들었다.
적대적인 관계만 아니었다면, 무엇 하나 이상할 게 없는 데이트였다.
오늘 낮, 팔라딘의 심리를 읽었다. 이미 내일 벌일 작전이 하달된 모양이었다.
앨리스가 악신의 부활을 앞당길 수 있는 아이템인 환상 시계를 손에 넣었다는 의미다. 지금쯤 그 시계는 다른 세계에 있는 하수인이 가지고 있겠지.
반면에 내가 적이라는 사실은 여전히 팔라딘 사이에선 확정된 사항이 아니었다.
공신제 폐막식 날을 돌이켜보면, 앨리스는 내가 적이라는 사실을 확신하고 있을 가능성이 높았다. 이는 즉, 아직 그녀가 부하들에게 내가 적이라는 사실을 알려주지 않았다는 얘기다.
그래서 대화를 나누고 싶었다. 앨리스의 속마음이 무엇인지 확인하고 싶었다. 오늘이 그럴 수 있는 마지막 기회라고 생각했다.
교정 외곽. 해변가에 이르렀다. 앨리스가 나와 함께 그곳에 가고 싶다고 했기 때문이었다.
하늘엔 먹물이 깔려 있었다. 별빛마저 보이지 않을 만큼 먹구름이 들어찬 까닭이었다. 하늘이 어두우면 지상의 빛나는 것들이 더욱 아름답게 보이는 법이다. 우리는 아름다운 쪽으로 시선이 끌렸다.
파도가 모래사장을 쓸며 드나들 때마다 발광생물이 마력의 빛을 발산하고 사그라지길 반복했다. 마치 바다에 오로라가 일렁이는 것 같았다. 플랑크톤처럼 눈에 안 보이는 발광생물이 이곳 여름에는 그토록 많았다.
앨리스는 신발을 벗고 고운 모래사장을 거닐었다. 나도 맨발로 그녀를 뒤따랐다.
“여름엔 여기 밤바다가 이렇게 예쁘단다. 그래서 매년 오고 있어. 애기는 와본 적 있니?”
“아뇨, 처음 와봅니다. 예쁘긴 하네요.”
“날씨까지 좋았으면 완벽했을 텐데.”
하늘은 금방이라도 비를 쏟아 낼 듯했다. 앨리스는 아쉬워하는 얼굴이었다.
우리는 바닷바람을 맞으며 해변을 따라 걸었다.
“…앨리스 선배.”
“응.”
“메르헨 아카데미엔 왜 오셨어요?”
“재미없는 질문을 하는구나. 그냥 여길 졸업하면 살기 편해지니까. 그뿐이란다. 애기는?”
“저도 같은 이유예요. 앨리스 선배처럼 강하진 않지만요.”
“음, 애기도 충분히 몸값 높은 인재라고 생각하는데. 그럼 애기는 하고 싶은 게 뭐니?”
“마법사인데 아직 구체적인 진로는 못 정했어요. 선배는요?”
“난 여왕님처럼 떠받들여지며 살고 싶구나. 내가 마음에 드는 사람하고도 오순도순 행복하게 살고 싶고.”
“그건… 진로가 아니지 않아요?”
“난 진로를 물은 적이 없단다. 하고 싶은 걸 물은 거지.”
“그런 거면 저도 비슷하죠. 왕처럼 떠받들여지며 살고 싶고, 제가 좋아하는 사람들과 오순도순 행복하게 살고 싶습니다. 안 그러고 싶은 사람이 어딨겠어요?”
“사람들이라…. 애기는 욕심이 많구나.”
툭.
콧잔등에 빗방울이 떨어졌다.
하늘을 쳐다보았다. 슬슬 먹구름이 비를 퍼부으려는 듯했다.
앨리스도 비를 맞았는지 고개를 치들었다. 점차 빗방울이 거세졌다.
“비 오네요. 돌아갈까요?”
앨리스는 발을 멈추고 나를 돌아보더니 손을 내밀었다.
“애기야, 손.”
“……?”
함정은 아니었다. 마력이 느껴지지 않았으니까. 그저 내게 손을 내민 것뿐이었다.
뭘까, 싶어서 앨리스의 손을 붙잡자 그녀는 나를 이끌고 곧장 바다로 뛰어갔다.
“앗!”
첨벙! 우리는 바닷물을 밟았다. 한 발짝씩 내디딜 때마다 바닷물이 푸른빛, 연녹빛으로 발광했다.
빗방울이 점차 굵어져 갔다. 소나기구나.
빗물이 바닷물에 닿을 때마다 발광생물이 자극을 받고 더욱 강한 빛을 발하고 사그라지길 반복했다. 썩 아름다운 풍경이었다.
어느새 앨리스의 연금발은 축축하게 젖어 있었다. 아름다운 빛깔의 파도가 우리의 발목을 적셨다.
“예쁘지?”
“네…, 상당히.”
“비는 싫어해?”
“지금은 좋아요.”
앨리스는 싱긋 웃었다.
셔츠가 홀딱 젖어 속옷이 비쳤기에, 얇은 외투를 꺼내 앨리스의 어깨에 걸쳐주었다. 그녀는 고맙다며 외투를 싸맸다.
“이거 봐.”
앨리스는 시시덕거리며 바닷물을 연신 밟아 댔다. 그녀가 발길질을 할 때마다 바닷물에 맑은 빛이 올라왔다.
나도 바닷물을 쿡쿡 밟아보았다. 발밑엔 모래밭이 닿는 감촉만 느껴졌으나, 발을 내지를 때마다 아름다운 빛이 터져 나왔다.
어느새 온몸은 소나기에 푹 적신 채였다. 옷이 축축하고 무거워졌다. 그러나 이제는 다 젖었으니 거리낄 것이 없는 듯한 묘한 해방감이 들며, 은근한 가슴 떨림이 느껴졌다.
앨리스는 거친 발길질로 내게 바닷물을 뿌렸다. 깜짝 놀라 괴상한 외마디 비명을 내지르자 그녀는 웃음보가 터졌다.
내 입가에도 웃음소리가 튀어나왔다. 단순히 지금이 재밌고 웃기기 때문이었다.
우리는 바닷물을 뛰어 밟으며 서로에게 연신 물장난을 쳤다.
“우왓!”
순간 중심을 못 잡아 뒤로 자빠졌다. 안 그래도 젖어 있던 몸이 바닷물에 홀딱 젖어 버렸다.
앨리스는 깔깔 웃어댔다. 내 몸에 빛가루가 묻어났다.
앨리스는 내게 다가왔다. 손을 내밀어 주려나 싶었더니 내 옆에 자빠져 바닷물에 온몸을 흠뻑 적셨다.
그녀의 몸에도 빛가루가 묻어났다. 그 모습이 웃겨서 그만 웃음이 터져 나왔다.
“히, 애기야. 나 좀 일으켜줘.”
“자요.”
나는 앨리스의 손을 잡고 몸을 일으켰다.
그녀의 손은 나보다 작았고, 굳은살이 박혀 있었다.
몸을 일으킨 우리는 서로를 바라보며 시시덕거렸다.
한참 바다에서 뛰어놀다 해안동굴에 들어갔다. 마법 주머니에 넣고 다니는 장작 더미를 쌓아 놓은 뒤 화염 주문서를 발동하고 모닥불을 피웠다. 여기서 몸을 데우지 않으면 감기에 걸릴 테니.
동굴 밖에선 빗줄기가 하염없이 쏟아지는 소리가 들려왔다. 이따금 천둥이 쳤다.
“재밌었다~.”
앉아서 모닥불을 쬐던 앨리스가 웃으며 말했다. 순수하게 즐거워하는 모습이었다.
나는 맞은편에 앉아서 모닥불의 온기를 만끽했다.
마법 주머니에서 담요를 꺼내 앨리스에게 건넸다. 그녀는 싱긋 웃으며 담요를 받아들이고 어깨에 걸쳤다.
물을 끓이고 준비해둔 찻잎으로 홍차를 타주었다. 홍차가 든 컵을 건네자, 앨리스는 기뻐하며 그것을 받아들였다.
“언제 이런 걸 챙겼니?”
“평소에 갖고 다니는 편이에요. 저도 선배처럼 홍차 좋아해서요.”
앨리스는 홍차를 마시고는 흡족한 표정을 지었다.
이후 한동안 우리는 침묵을 지키며, 타닥대는 모닥불을 가만히 지켜보았다.
“앨리스 선배.”
불쏘시개로 모닥불 속 장작을 뒤적거리며 앨리스를 쳐다보았다. 그녀의 연분홍빛 눈동자에 모닥불의 형상과 내 모습이 아주 작게 내비치고 있었다.
“왜애, 애기야?”
아직 즐거움이 여운처럼 남았는지 앨리스의 목소리가 들떠 있었다. 애교스러운 목소리였다.
다시 모닥불 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묻고 싶은 게 있었다.
“선배는 남자 취향이 뭐예요?”
앨리스는 피식 웃었다.
“갑자기 왜 그런 걸 묻니?”
“저인가 해서요.”
앨리스는 이 세계에 파멸을 가져오려 한다.
그런 애에게도 이성 취향이라는 게 있고, 그게 바로 ‘나’라고 괴묘-체셔가 알려주었다.
그렇게 인간적인 감정을 지닌 앨리스가, 어째서 극단적인 악역이 되는지 이해할 수 없었기에 묻고 싶었다.
앨리스는 장난스럽게 미소 지었다.
“…애기가 맞으면? 나랑 사귈 거니?”
“그럴까요?”
내가 담담한 어조로 내뱉은 대답이 의외였는지, 그녀의 얼굴에 흐르던 능청맞은 미소가 서서히 사그라졌다.
앨리스의 속마음을 떠보고자 그런 대답을 한 것이었다. 그녀의 인간성을 확인하고 싶기 때문이었다.
사람 마음을 이용하는 느낌이라 미안한 감정도 들지만.
내일이면 서로를 죽여야 하는 관계가 될 테니, 지금은 그녀의 속마음을 떠보는 일이 가장 중요하다고 판단했다.
앨리스는 생각을 정리하는 듯하더니, 예상 밖의 질문을 던졌다.
“애기야.”
“네.”
“혹시 담요 많아?”
“여분으로 2개 더 가지고 있어요.”
“그럼 우리, 여기서 자고 갈까?”
“…예?”
…뭐요?
앨리스를 쳐다보았다. 부끄러운 대화를 피하기 위한 장난인 줄 알았으나, 그녀의 표정은 진중했다.
대뜸 앨리스는 홍차가 든 컵과 담요, 외투를 바닥에 내려놓더니 자리에서 일어났고.
아직 채 마르지 않아 속옷이 비치는 차림으로 내 옆으로 다가왔다.
그러더니 두 손으로 바닥을 짚고 내게 고개를 가까이 내밀었다.
“선배…?”
반사적으로 몸을 뒤로 빼자, 그녀는 더욱 가까이 다가왔다.
혹시라도 내가 방심한 틈을 노리려는 걸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어, 바닥을 짚은 그녀의 손을 내 손으로 덮었다.
앨리스는 자기 손을 덮은 내 손을 힐끔 곁눈질하더니 다시 내 눈을 쳐다보았다.
앨리스가 나를 덮치려는 자세가 되어 돌연 야릇한 공기가 흘렀으나, 그녀를 견제하려면 어쩔 수 없었다.
그리, 우리는 지근거리에서 서로의 눈을 응시했다.
“아이작.”
앨리스는 속삭였다.
“오늘 밤엔, 내 곁에 있어 주면 안 될까?”
시간이 멈춘 듯했다.
오로지 모닥불이 타닥대는 소리만이 여전히 시간이 흐르고 있음을 증명할 뿐이었다.
“…왜요?”
“그냥…. 그래 줬으면 좋겠어서.”
앨리스의 의중을 온전히 이해할 수 없었다. 무슨 생각으로, 무슨 심정으로 그리 말하는 걸까.
확실한 건, 빈틈을 보여선 안 된다는 것이었다. 지금처럼 유혹하는 것도 결국엔 나를 죽이기 위해서일 테니까.
앨리스에게 있어서 표면적인 내 모습은 세계 멸망도 가능한 희대의 대마법사다.
해치우기 어려운 최악의 강적이자 가장 드높은 장애물일 터였다.
그렇기에 더욱 받아들일 수 없는 제안이었다.
눈을 내리깔았다.
결국…, 앨리스에게서 진정한 속마음을 듣는 건 어렵겠다는 판단이 세워졌다.
지그시 눈을 깜박이고, 상냥한 미소를 짓고서 다시 그녀를 쳐다보았다.
“…선배, 그런 제안은 나중에 진짜 사랑하는 사람이 나타나면 하세요.”
핑계에 불과한 말이었다.
하지만 다짜고짜 제 감정 따라 내게 하룻밤을 제안하는 앨리스의 태도를 고려해 본다면, 가장 적절한 대답이기도 했다.
그 대답에 앨리스의 눈이 좁혀졌다. 고혹적인 표정도 사그라졌다.
“꽤 강단 있구나. 재미없게.”
“그런 소리 많이 들어요.”
주로 마녀 모자 쓰고 다니는 애한테.
“옷, 마저 말리고 돌아갑시다. 비도 그친 것 같은데.”
“…그러자꾸나.”
앨리스는 내게서 물러나며 몸을 일으켰다.
우리는 동굴 입구 쪽을 쳐다보았다. 어느새 빗소리가 멎어 있었다.
이윽고, 짐을 챙기고 동굴을 빠져나갔다. 한동안 앨리스는 아무런 말도 꺼내지 않았다. 그래서 우리는 대화 없이 아카데미로 돌아가야만 했다.
교정엔 가로등만이 고요히 빛날 뿐이었다. 밤이 깊은 탓에 교정을 돌아다니는 학생은 없었다.
앨리스는 바르토스관 앞에서 멈춰 섰다.
“애기야, 오늘 즐거웠단다. 조심히 들어가렴.”
“응? 선배, 기숙사 안 들어가세요?”
“아직 할 일이 남았단다.”
“아, 힘드시겠어요….”
나는 손을 흔들었다. 마지막으로 웃어주면서.
“그럼 내일 봐요, 선배.”
“응, 내일 보자.”
앨리스와 헤어지고 기숙사로 향했다. 그녀는 바르토스관 안으로 들어갔다.
걸으면서 바르토스관을 쳐다보았다.
학생회실 쪽 창문은 내내 어두웠다.
* * *
[니오옹. 왜 아이작을 죽이려 하지 않았니?]앨리스 캐럴이 학생회실에 들어오자 뚱뚱한 보라색 고양이 사역마, 괴묘-체셔가 얼굴을 드러냈다.
어둠 속, 그 마수의 몸통은 보이지 않았다.
[아이작이 아무리 강하다고 해도, 어떻게든 죽일 방도를 찾아내야 하지 않았겠니? 왜, 어째서, 아이작을 죽이지 않은 거니?]“…….”
앨리스는 말없이 찻잔에 홍차를 탄 뒤, 김이 모락모락 피어오르는 찻잔을 들고 학생회장 자리에 앉았다.
그러더니 홍차를 홀짝였다.
“우리의 목적은 악신을 부활시키는 거니까. 어차피 내일이면 모든 게 끝나.”
[니옹! 맞아, 내일은 정말 재밌을 테니까 아무렴 상관없지! 후후!]괴묘는 몸의 투명화를 풀고 학생회장 책상에 앉았다. 그의 입가가 길게 찢어졌다. 기괴한 미소였다.
[그런데 왜 그랬니?]“뭐가?”
[싸우기 전에 아이작한테 위로라도 받고 싶었니? 내일 그 애가 적이 되면 지금의 관계가 완전히 끝나 버리니까? 내일 이 세계를 끝장낼 사람이 할 만한 발상은 아닌 것 같은데에?]“…웃기는 소릴 하는구나.”
앨리스는 태연하게 반응했다.
“재밌으니까 마지막으로 갖고 논 것뿐이란다.”
괴묘는 후후후, 웃으면서 연기가 되어 사라지기 시작했다.
[그렇구나. 그런 거구나. 기대되네. 내일 우리 앨리스가 악신을 부활시킬 때, 아이작이 어떤 표정을 지어줄지. 정말 기대돼. 부디 날 실망시키지 말아줘, 앨리스.]괴묘의 모습이 사라지고.
앨리스는 그 사역마가 사라진 자리를 지켜보다 목에 끼인 초커를 살살 매만졌다.
수많은 긁힌 자국. 까끌까끌한 감촉이 느껴졌다.
의자를 돌려 창밖을 쳐다보았다. 먹구름 사이로 손바닥 만한 달이 고개를 내밀고 있었다. 그 풍경을 바라보며 천천히 홍차를 들이마셨다.
그리 홍차를 다 마신 뒤, 자리를 벗어나 홍차를 한 잔 더 타러 갔다.
어둠에 익숙해진 눈으로 찻잎을 담는 통을 들여다보았다. 텅 비어 있었다.
마지막 홍차였구나.
앨리스는 그리 중얼거리며 빈 찻잔을 내려놓았다.
*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