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he Academy’s Weakest Became A Demon-Limited Hunter RAW novel - Chapter (281)
〈 281화 〉 체스 (4)
* * *
“체크메이트.”
뷔엘은 게임 말을 옮긴 뒤 말했다. 내 질문에 대신 대답하듯.
체스판을 내려다보았다.
내가 다룬 검은색 군대는 하얀색 군대와 크게 격돌하지 않았다. 나는 계산을 마친 뒤 체크메이트만을 노리기 위한 한 수를 준비했었으니까. 뷔엘의 진형이 지닌 맹점을 노렸다.
그러나 뷔엘은 내 전략 위에서 뛰어놀아 역으로 나를 몰아넣었다.
“이유는 말 안 해도 알고 있는 것 같군. 신기하게도. 이미 짐작했다는 건가.”
뷔엘은 의자 등받이에 등을 기댔다.
녀석의 머리카락은 갈색으로, 두 눈동자는 평범한 모습으로 뒤바뀌었다. 그러나 소름끼치는 미소는 여전했다.
“이 이야기를 한 건 내 나름의 의무라고 생각했어. 우린 싸우게 될 테니까.”
“…그러냐.”
“그럼 용무는 끝.”
뷔엘은 씨익 웃으며 합장했다.
“조심히 들어가라, 아이작 학생.”
가볍게 손을 흔들며 인사하는 뷔엘.
더 할 이야기는 없었다. 우리는 서로의 의사를 확인했다.
내가 여기서 공격해도 뷔엘은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 하는 상황이다.
그렇다고 해도 선제공격은 어려웠다. 저놈이 반격하면 분명 내 목숨은 위험해질 테고 악신 토벌을 위한 이 여정은 여기서 막을 내릴지도 모른다.
그러나 뷔엘은 일말의 의심 없이 내 전력을 [멸악자] 수준으로 착각하고 있다.
내가 자길 건드리지 못 하는 이유도 ‘내가 못 이겨서’라고는 조금도 생각하고 있지 않다.
‘앨리스랑 대치했을 때와는 다른 양상이야.’
그때는 내가 이름 없는 영웅이라는 확증이 없었고, 도로시라는 억제제를 내세울 수도 있었다.
하지만 현재 내 정체는 확고하며, 뷔엘에게 실질적인 억제제란 없었다.
허울뿐인 억제제라면 ‘빙제 아이작’이 지닌 미지의 힘과 뷔엘의 확고한 신념, 자기 계획이 틀어질 수도 있다는 우려뿐.
뷔엘은 상대가 방해꾼이 아니라면 굳이 희생자를 늘리려고 하지 않는다.
‘이 대치 상황을 이어가야 해.’
내가 한계 모를 미지의 힘을 지닌 강자라고, 뷔엘의 착각을 유지시켜야만 했다.
그러지 않으면 내 계획은 크게 꼬이게 될 터.
“…….”
나는 자리에서 일어나 출입문 쪽으로 향했다.
손잡이를 돌리고 나가기 전. 나는 동작을 멈추고 입을 열었다.
“후회하지 마라.”
그 말을 남기고 그곳을 떠났다.
서로가 서로의 심리는 읽을 수 없지만, 격전을 벌여야 할 때가 언제인지는 서로 마음이 통한 것 같았다.
……
날 기다리고 있을 무녀 미야에게 다음에 얘기하자고 전해달라고 빙설룡-힐드에게 지시했다.
괴묘-체셔에겐 뷔엘을 상시 멀리서 감시하라고 지시했다. 만일 위험한 일이 생기면 곧바로 도망치는 데 주력하라고 했다.
슬슬 땅거미가 내려앉고 있는 때. 나는 조세나 숲에 있는 아지트에 루체와 카야, 도로시, 앨리스를 불렀다.
익숙한 애들임에도 그 네 명의 여학생이 모인 광경은 꽤 진풍경이었다.
‘이렇게 모인 적은 처음이지?’
각자 따로따로 떨어진 채다. 다들 붙어 있으려 하지 않았다.
앨리스가 아지트에 방음 결계를 전개한 뒤, 나는 뷔엘과 나눈 이야기를 그녀들에게 모두 전했다.
뷔엘이 불사의 힘을 가졌으며, 건드려선 안 되는 위험한 존재라는 사실도 알려주었다.
“이거, 위험하지 않아…?”
소파에 가부좌 자세로 앉아 있던 도로시가 당황한 목소리로 물었다.
“반은요.”
“반?”
“론 강사는 아직 절 이길 수 없다고 판단한 것 같습니다.”
대답하고 차를 한 모금 마셨다.
“아마 사전탐색 목적으로 절 만나러 온 것 같아요. 제 전투 스타일이라도 미리 파악할 생각이겠죠.”
지피지기면 백전백승이라던가.
아카데미에서 내가 빙제라는 이명에 걸맞은 실력을 드러내진 않겠지만, 시험이든 뭘 통해서든 내 전투법을 분석하는 건 충분히 가능한 일이다.
뷔엘은 내 움직임 하나하나에서 많은 결론을 도출할 것이었다.
“선전포고를 한 건 절 도발하기 위해서겠죠. 반대로 절 곧바로 죽일 생각이 없다는 얘기이기도 하고요.”
“애기야.”
스으으. 테이블에서 턱을 괸 앨리스가 ‘애기’라고 나를 부르자 다른 여자애들에게서 음산한 기운이 풍겨 왔다.
어째 얘네, 분위기가 좋지 않네….
“왜?”
“론 강사가 무슨 목적으로 널 없애려는 건지 짐작한 게 있을까? 애기의 신분과 힘을 생각한다면 애기를 노리는 게 얼마나 위험한 행위인지 론 강사가 모를 것 같진 않은데.”
론 강사, 즉 뷔엘의 목적.
여기서 설명해도 될까?
‘어차피 협력을 구해야 할 애들이니까….’
이 정도는 설명해야겠지.
나는 >메르헨의 마법 기사> 속 내용을 떠올리며 어떻게 설명할지 짧게 고민을 마쳤다.
“이 이야기부터 할게. 어떻게 알았는지 묻고 싶어도 묻지 마. 괜히 머리 아파지니까. 철저히 지켜야 할 비밀인 건 당연한 거고.”
“아이작 님께서 그리 말씀하신다면 당연히 그래야죠. 무슨 비밀이건 무덤까지 가져가겠습니다아.”
벽면에 기대고 서 있던 악식의 카야가 눈을 감고 애교스럽게 대답했다.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유일하게 천족과 긴밀한 관계를 맺은 사람이 있어. 그 사람은 카르네다스 가문 소속이었고.”
“시엘 카르네다스의 가문 말씀이시군요, 아이작 님?”
“응. 그 사람은 빛의 아이, 그러니까 이안 페어리테일을 발견하면 천상 세계로 데려와 달라고 부탁받았어.”
앨리스는 “스케일이 커지는구나.”하고 반응했다.
“그 약속의 증표로 받은 것이 ‘천위 시계’.”
얼음 마력을 흘리며 손가락을 가볍게 휘둘렀다. 회중시계 모양을 단출하게 표현한 얼음 마력은 금세 공기 중에 흩날리며 사라졌다.
루체는 흐음, 하고 의미심장한 숨소리를 내뱉었다.
“그 약속과 시계는 카르네다스 가문에 대대로 내려져 왔고, 시엘과 아벨에게 이르게 된 거야. 참고로 아벨은 기사학부의 한 학년 후배고, 시엘의 친동생이야.”
나는 안경을 한 차례 들쳤다.
“천위 시계는 자기 주인을 자기가 알아서 선택해. 그렇게 아벨이 현 천위 시계의 주인이 된 거고.”
“천위 시계…. 그게 론 강사의 목적과 연관성이 있다는 거니?”
앨리스의 물음에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천위 시계는 인간계에서 천족을 감지하면 제2의 시간을 돌리게 돼. 인간에게 사태를 파악할 시간을 주고, 때가 되면 막대한 힘을 터뜨리면서 전 세계의 마력을 교란시킬 거야. 론 강사는 그걸 악용할 생각이고.”
마족 중에서 마력을 무효화시킬 수 있었던 놈은 땅속 거인이 유일하다.
그와 비슷하게도, 마력을 교란시키는 능력을 지녔던 마족으론 심해 괴수가 있었다.
하지만 천위 시계는 그들의 권능과는 차원이 다른 효능을 자랑한다. 범위가 전 세계이기 때문이다.
“무섭네, 그거…. 엄청 위험할 것 같은데. 천족 뭐시기는 왜 그런 걸 인간한테 줬대?”
“도로시, 머리가 있으면 사고를 해보는 걸 권장할게.”
“너한테 물은 거 아니니까 그 입 좀 다물어줄래, 앨리스?”
도로시는 이마에 십자 핏줄이 돋아났지만, 내 앞이라 그런지 화를 참으며 앨리스에게 애써 미소를 건넸다. 앨리스는 싱긋 웃었다.
“천족은 인간계에 간섭해선 안 된다는 조약을 맺었어. 그리고 인간계에 있는 천위 시계는, 조약을 위배해 인간계에 내려온 천족을 감지해.”
천위 시계는 뷔엘이나 뷔엘의 반역 부대를 감지하고 제2의 시간을 돌리고 있으리라.
“아이작 님은 정말 모든 걸 아시는군요….”
“모든 것까지는 아니지만, 어쨌든.”
카야의 감탄사에 고개를 가로저었다.
내 말을 무조건 믿어주는 그 태도가 고마웠다.
“쉽게 말해 천위 시계는 경종(警鐘)이야. 천위 시계의 효과가 퍼지는 날엔 천상 세계도 알아차릴 수 있으니까.”
결국, 뷔엘의 모반 행위가 드러난다.
그때가 되면 배드 엔딩 「신의 심판」의 리스크에서 벗어날 수 있게 될 터.
“천상 세계의 병력이 출동하기 전까지 인간이 천족에게 대응하도록 만들기 위해, 천위 시계는 모든 마력을 교란시키는 거야. 그러면 적어도 인간 입장에선 싸울 만해지거든.”
“천족이 그만큼 강하단 겁니까?”
“카야. 이안의 신성력이 얼마나 강력한진 너도 알지?”
“네, 본 적이 있으니까요. 그렇다면….”
긴장한 얼굴의 카야에게 말했다.
“빛 속성을 보유한 전투 베테랑들이 천족의 병사들이야. 뿐만 아니라, 천족이 무장하면 원소 저항력까지 극대화 돼.”
“싸우게 된다면 많이 골치 아프겠네요….”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럼 애기야, 론 강사는 전 세계의 마력이 교란되면 무슨 이득을 얻는다는 거니?”
천위 시계의 효과가 발동되기 전, 뷔엘과 녀석의 부하들은 어느 장소를 사수할 것이다.
그곳은.
“‘블랙 스톤’. 세계의 심장이라 불리는 곳. 거기가 놈의 목적이야.”
앨리스와 루체는 눈을 가늘게 좁혔고, 도로시와 카야는 눈을 크게 떴다.
블랙 스톤.
검은 돌에 둘러싸인 땅으로, 사실은 화산 같은 곳이다. 중심부에 커다란 호수가 있다.
전생으로 비유하자면, 태양계 화성의 올림푸스몬스 같은 곳이라 보면 된다. 너무나도 비대한 나머지 평야라는 착각마저 드는 산.
블랙 스톤은 범위가 어마어마해서 산이라는 사실이 밝혀지는 데에도 시간이 걸렸다.
그곳 깊은 곳엔 정체불명의 자연 마나가 매장된 것으로 확인되었으며.
마법계에선 블랙 스톤이 이 세계의 미스터리를 품고 있을지도 모른다는 이야기가 나돌기도 한다.
“그곳 아주 깊은 곳에 오랜 세월 농축된, 상상을 초월하는 자연 마나가 이 세계 내부를 순환하고 있어.”
뷔엘의 목적은 그곳에 매장된 대량의 마력.
“세계의 마력이 교란된다면 그곳도 예외는 아니야. 론 강사는 불안정해진 대량의 마나를 자극해 분출시킬 거고, 그 자연 마나를 이용할 거야.”
그 자연 마나를 자기 것으로 삼아 천신을 끌어내리기 위한 롱기누스의 창을 만들고.
악신이 가진 신살의 권능으로 천신을 없앨 것이다.
>메르헨의 마법 기사>에선 뷔엘이 천신을 부상 입히고 끌어내 악신과 싸우게 할 계획이었다고 대강 설명이 나온다.
하지만 신살의 권능이란 게 악신에게 있었다는 걸 알게 된 지금은, 뷔엘의 목적에 담긴 속뜻을 또렷하게 내다볼 수 있었다.
“그렇게 되면, 엄청난 재앙이 닥치겠지.”
일순, 아지트에 정적이 흘렀다.
“어쨌든 너희들에게 하고 싶은 말은, 평소처럼 지내되 론 강사가 아카데미에 있는 동안 놈을 주의하란 거야. 너희들은 특히 나랑 밀접하게 엮여있는 애들이니까, 론 강사가 어떻게 대할지 몰라. 그리고…, 론 강사는 내가 막을 거고.”
이 애들에게만 정보를 밝힌 이유는 두 가지였다.
첫째, 내가 가장 깊게 믿을 수 있는 동료들이라서. 둘째, 가능한 한 꼬리를 밟히지 않기 위해서.
“이해가 안 되는데.”
그때, 그동안 말이 없던 루체가 조곤조곤하게 한 마디 꺼냈다.
모두의 시선이 루체 쪽으로 돌아갔다.
루체는 잰걸음으로 다가와 내게 고개를 들이밀었다. 냉철한 아쿠아마린빛 눈동자가 나를 직시했다.
“왜 그런 위험을 네가 감수해? 어차피 황실 기사단이든, 마법 부대든, 황실엔 싸울 전력이 차고 넘쳐. 근데 왜 네가 위험해져야 하냐고.”
“어?”
“왜 천족이 널 노리게 돼버렸고, 왜 넌 의무처럼 천족을 막으려는 거야? 같잖은 정의감 때문에 그래?”
무게가 실린 잔잔한 목소리. 마치 꾸짖는 듯했다. 생기를 잃은 루체의 눈동자에 담긴 뜻은 단호하고도 명료했다.
납득이 가는 반응이었다. 내게 안 좋은 일이 닥치면 자신은 세상이 무너지는 기분을 느낄 것이라고 루체가 얘기한 적이 있었으니.
“아이작.”
루체는 내 어깨에 손을 올렸다.
“세상 사람 다 죽어도 너만은 안 돼. 그러니 제발 얌전히….”
“얘야, 점수 따기는 그만하지 않을래?”
“뭐?”
앨리스가 살포시 다가와 루체를 툭 건드렸다. 루체는 살벌하게 앨리스를 노려보았다.
앨리스는 자상하게 웃고는 나를 쳐다보았다.
“애기야, 얘기 다 끝난 것 같은데. 어서 해산하는 편이 좋지 않겠니?”
“…응.”
고맙네.
나는 자리에서 일어났다.
“용건은 이게 다야. 다들, 미안하지만 당분간 부탁할게. 그리고 걱정해줘서 고맙다. 다음에 얘기하자.”
루체의 어깨를 툭툭 두들겨준 후 그녀를 제치고 지나갔다.
뒤쪽으로 슬쩍 곁눈질하자 가만히 서있는 루체의 뒷모습이 보였다. 그녀의 깊은 한숨 소리가 들렸다. 감정을 추스르고 있는 듯했다.
나는 출입문을 열고 아지트를 떠났다.
*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