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he Academy’s Weakest Became A Demon-Limited Hunter RAW novel - Chapter (341)
〈 341화 〉 악신 토벌전 (8)
화르르르륵!!
악신이 신경질적으로 퍼뜨린 검붉은 화염의 파도와, 내 거센 화력의 얼음 마법이 격돌했다.
새하얀 광명으로 들어찬 영역 속, 세찬 폭발과 함께 대량의 마법진이 구축되고 사라지길 반복했다.
전황을 살폈다.
악신은 위그드라실의 씨앗을 자신의 힘으로 삼았다. 즉, [위그드라실]만이 녀석이 사용할 수있는 식물 마법이었다.
회복력도 크게 강화됐겠지만, [빛의 신전]에선 그 효과도 줄어드렀을 터.
빛의 영역은 마족이 가진 모든 능력을 크게 약화시키니까.
얼음 호수에서 스텔라가 이야기했길, 신살의 권능도 [빛의 신전]의 효과 범위에 포함된다.
여전히 신의 온전한 개입은 물론, 힘의 개입조차 어렵겠지만… 아주 미미한 수준으로 날 도와주는 건 가능해진다고 들었다.
‘스텔라.’
얼음 호수에서 스텔라와 이야기했던 내 계획을 떠올렸다.
이제 스텔라의 차례였다.
내가 얼음 호수에서 돌아온 후 1년간의 결실을 맺을 때가 왔다.
* * * * * * * * * *
게임 개발사 힉스를 둘러싸고 세계는 하나의 전환점을 맞이했다.
대한만군 일산에 있는 힉스의 건물로 들어갔던 수많은 인간이 폐쇄된 철로 터널에서 발견되었고, 세계는 힉스를 주목했다.
헬기가 폭격해도 게임사 건물은 눈 깜짝할 새에 원래 모습으로 복구되었다.
미국의 중앙정보국(CIA)이 투입되어도 그들은 모두 실종됐다가 대한민국 어딘가에서 도로 발견되었다.
돌아온 그들은 힉스 건물에 진입했던 기억을 모두 잃은 채였다.
불가해한 현상인 잇달아 적나라하게 벌어졌기에 힉스 개발진은 괴물이나 외계인 등으로 불리기 시작했고, 정부는 그들에게 대화를 요청했다.
그러나 힉스는 일방적인 의사 전달을 원했기에 한사코 대화를 거절하였다.
심지어 지신들은 아무런 피해도 일으키지 않았음에도 인류가 적대적인 태도를 보이니 거슬린다는 반응까지 내보였다.
이후, 정부는 사태가 생각 이상을 심각하다는 점을 인지하고 신중한 접근을 꾀했다.
그러한 재치 상황이 이어지던 때. 즉, 아이작이 얼음 호수에거 스텔라를 만났던 약 1년 전.
힉스는 >메르헨의 마법 기사> DLC를 출시했다.
타이틀은 「아이작」 이었다.
[>메르헨의 마법 기사>는 아무 문제 없는 순수한 게임이며, 이는 DLC도 마찬가지입니다. 게임 외적인 이유로 우리 힉스가 제공하는 서비스에 제재를 가할 시 우리 또한 강압적인 조취를 취할 수 있음을 알려드립니다.]게임 개발 총괄인 알레츠가 동영상 플랫폼에서 힉스 채널을 통해 말했다.
그녀는 상체를 숙이며 예의를 지켰으나, 그 공지는 사실상 국가를 향한 경고나 다름없었다.
힉스의 미스터리와는 별개로 사람들은 호기심을 느꼈다.
>메르헨의 마법 기사>에서 고작 엑스트라에 불과했던 아이작이라는 캐릭터가 DLC의 주인공을 맡게 되었으니.
DLC 스토리에서 아이작은 미래를 알고 있는 처지이며, 상태창마저 인식하는 것을 전제로 하고 있었다.
양산형 판타지 소설에나 나올 법한 도입부를 가진 내용이었으나.
만약 도로시 하트노바가 부유섬과 함께 자폭하지 않았을 경우 이어질 스토리, 앨리스 캐럴의 비밀 등 본 게임에서 기대할 수 없었던 내용을 누릴 수 있다는 점에서 DLC는 >메르헨의 마법 기사>의 팬들의 흥미를 자극하기에 충분했다.
다만, DLC에서 연애 컨테츠가 완전히 배제되었다는 점과 익숙한 주인공인 이안 페어리테일이 아니고 속성까지 이미 정해진 엑스트라 캐릭터를 플레이해야 한다는 점은 마이너스 요소로 작용했다.
그렇다고 해도 뛰어난 그래픽과 조작감, 세밀하고 경쾌한 액션, 풍부한 컨텐츠, 유명한 게임사들의 기술력을 몇 단계나 앞서나간 세심한 물리 엔진 등, 게임성 자체는 가히 시대를 앞서갔다고 평가해도 될 만큼 몹기 휼륭했다.
결국, >메르헨의 마법 기사> DLC는 엄청난 호평을 받았다.
[미스터리한 게임 개발사 힉스의 DLC 신작!] [>메르헨의 마법 기사> DLC 아이작 플레이 근황] [여러분… 이건 미쳤습니다… >메르헨의 마법 기사> DLC 실황] [시대를 한참이나 앞서나간 갓겜 >메르헨의 마법 기사> DLC 리뷰]동영상 플렛폼, 인터넷 커뮤니티, 게임 평가 사이트 등.
>메르헨의 마법 기사> DLC는 힉스의 미스터리 만큼이나 세계에 엄청난 파장을 불러일으켰다.
그렇게 많은 사람들은 >메르헨의 마법 기사> DLC를 한참이나 플레이했고, 그로부터 1년이 지났다.
“야, 저거…”
“하늘 왜 저래?”
“뭐야? 뭔데?”
악신인 부활하며, 돌연 세계의 하늘이 섬뜩한 빗빛으로 물들자 사람들은 혼란에 빠졌다.
TV에선 긴급 뉴스가 방송되었고, 전문가들은 붉은 하늘의 원인을 조사하고 있다고 밝혔다
그때, 힉스는 전세계의 뉴스 체널을 해킹해 하나의 동영상을 송신했다.
[안녕하십니까, 여러분. >메르헨의 마법 기사> 게임 개발가 ‘힉스’의 개발 총괄, 알레츠입니다. 이 방송은 전세계에 모든 언어로 송출되고 있습니다. 여러분께 중요한 이야기를 전달하기 위해서입니다.]광장에서.
지하철에서.
직장에서.
식당에서.
집에서.
세상 어디에서든.
사람들은 모두 숨소리조차 죽이고 그 동영상을 시청했다.
세상이 알레츠의 목소리로 들아차는 순간이었다.
[하늘이 붉게 물든 이유는, 악신이 부활에 성공해 종말이 시작됐기 때문입니다.]힉스의 화제성은 널리 알려져 있다.
그들이 인간보다 우월한 종족이거나 외계인, 혹은 신이라는 터무니 없는 이야기는 이젠 정설처럼 받아 들여지고 있었다.
힉스가 보여온 모든 이능돠 언행을 그저 쇼 따위로 치부하기엔 정도가 지나쳤고, 예고 없이 세계를 뒤덮은 붉은 하늘 현상을 설명할 다른 방도가 없었으니.
그 탓에 사람들은 허구로만 생각하지 않고 알레츠의 이야기를 경정했다.
[우리가 예전에 남겨둔 동영상 내용대로, >메르헨의 마법 기사>는 일종의 메시지입니다. 악신을 쓰러뜨리기 위해 세워둔 계획의 일부였죠. 그리고 우리는 세계를 구할 영웅을 선택했습니다.]동영상 속 어두운 공간.
조명 아래서 알레츠가 말을 이어갔다.
[>메르헨의 마법 기사> DLC 「아이작」은 제가 언급했던 구세주의 발자취를 바탕으로 만들러낸 것입니다. 대한민국이라는 나라의 국민이었던 한 사내가 지금, 아이작의 몸으로 악신 네피드와 전투를 벌이고 있습니다. 그가 악신을 쓰러뜨리지 못할 경우, 인류의 미래는 없을 것입니다. 그러니 부탁드립니다.]동영상 속 알레츠는 정중히 고개를 숙였다.
[새로운 「최종장, 악신 토벌전」이 업데이트되고 있을 겁니다. 업데이트 후, 악신을 쓰러뜨려 주십시오.]알레츠는 디시 고개를 들고 무감정한 인형 같은 인두겁을 내보였다.
[여러분이 악신과 싸운 데이터는 모두 구세주에세 전해질 것입니다. 우리 힉스는 실시간으로 악신의 패턴을 관측하고 분석하여, 즉석에서 반영해야 하기 때문에 도와줄 여력이 없습니다. 이 영상도 사전에 제작한 것이지요.]영상 속, 알레츠 주위로 아이작이 >메르헨 마법 기사>에 빙의된 이후 겪었던 일들이 조각조각 펼쳐졌다.
매일 피와 땀을 쏟으며 단련에 매진하고.
한기로 뒤덮은 몸을 이끌며 혹한이 몰아치는 바닥을 이빨로 기어가고.
온몸이 만신창이가 되어가면서도 싸워가고.
그럼에도 나아가며.
웃으며, 기어이 포기하니 않는 한 소년의 모습을 사람들은 사야에 담았다.
[여러분은 게임을 플레이하며 그가 피땀 흘려 달려온 여정을 잘 알고 계실 겁니다. 그를 도와주실 수 있는 건 여러분뿐입니다.]사람들의 손이 떨렸다.
누군가는 주먹을 쥐었고, 누군가는 눈을 내리깔았고, 누군가는 두 눈에 전의를 품었다.
알레츠가 또 한 번 고개를 숙이자 영상이 종료되었다.
길거리와 인터넷은 굉장히 시끄러워졌고, 많은 사람들은 일제히 게임기로 향했다.
모든 사람이 힉스의 말을 진실이라고 믿었든 안 믿었든 상관없었다.
전세계에 송출된 그 영상은 사람들이 >메르헨 마법 기사>를 실행하게 할 유인책으로 충분한 효과를 발휘했다.
새로운 「악신 토벌전」이 업데이트되자 기존 조작법을 토대로 액션이 더욱 정교해졌고, 플레이어들은 [무궁빙설경]과 [검은 둥지]가 격돌하는 공간 속에서 아이작을 조작하며 악신과 싸울 수 있었다.
그러나 악신이 너무나도 강력하고 변수가 많은 나머지, 전세계 플레이어들이 발 벗고 나서도 패배만이 반복되었다.
커뮤니티에선 온갖 수단을 동원해 악신을 이기는 방안을 찾아내기 위한 토론이 벌어졌고.
전문가들은 게임 속 요소들을 분석하며 가장 효율적인 전투법을 도출하려 고심했고.
각자 악신을 몰아넣을 수 있는 플레이 방법을 제공하기도 했다.
그러는 동안, 종말이 시작되었다.
세계 곳곳에 불규칙적으로 검은 구체가 나타나 공간을 잠식했다.
구체에 맞닿은 부분은 모두 조용히 소멸했고, 세계는 아수라장이 되었다.
그리 진정한 종말의 풍경이 펼쳐지니, 더는 힉스의 말을 허황된 거스로 치부하는 사람은 나타나지 않았다.
쿠우우우우우우우!!!
돌연 대한민국 영공에 웅대한 검푸른색 소환진이 전개되었다.
그 아래로 눈 많은 겇의 마족이 모습을 드러내며 사람들을 놀라게 했다.
마족, 개명의 루시페르.
종말이 시작되며 악신의 봉쇄가 풀리자 그가 모습을 드러낸 것이었다.
“꺄아악!!”
“뭐, 뭐…뭐야…!”
“괴물…?”
루시페르는 허무의 구체에 잡아먹힐 뻔한 생물들의 시간만을 되감아, 그들의 죽음을 막아내길 반복했다.
시간은 상대적 개념이다.
모든 것의 시간을 되돌리는 것보다, 그리 일부분만들 되돌리는 편이 루시페르레겐 훵씬 간단한 일이었다.
루시페르는 얼음의 왕 아이작을 떠올리며, 그가 지켜내려 한 풍경을 셀 수 없이 많은 눈으로 둘러보았다,
[얼음의 왕… 이 몸은 지금, 고결해지고 있는가?]아이작에게 닿디 않을 질문을 던졌다.
인류는 루시페르가 적이 아니라 아군이라 인지하고 더욱 >메르헨의 마법 기사> DLC를 플레이에 집중했다.
이안 페어리테일의 영역 지배, [빛의 신전]이 발동된 이후로 힉스는 실제 아이작과 악신의 싸움을 중계하기 시작했다.
단순히 그래픽이라고 치부하기엔 지나치게 현실적인 광경이 영상 속에 내비쳤다.
“악신 네피드가 생명의 힘을 품었으나, 이안 페어리테일이 [빛의 신전]을 사용하는 데 성공한 것으로 파악되었습니다…! [빛의 신전]의 효과는 마족의 권능과 힘을 약화시키는 것으로……!”
방송에선 아이작과 악신의 실제 전투 장면을 바탕으로 해설자가 상황을 설명했고.
유명한 게이머가 악신을 쓰러뜨리기 위해 구군분투하는 영상 또한 실시간으로 TV에 나오기도 했다.
게임을 잘 못 하는 이들은 각자가 있는 장소에서 TV나 인터넷 동영상을 시청하며 신에게 기도하거나, 아이작이 승리하길 빌거나, 그를 응원했다.
종말 속에서 전세계 인류가 승리라는 단 하나의 목표를 향해 힘을 합쳤다.
약한 이라도 상관없었다.
그들이 플레이한 데이터 하나하나가 아이작에겐 무척 소중했으니
─’내겐 아무런 지혜도 없어.’
얼음 호수에서, 아이작이 얼음 의자에 앉은 채 스텔라에게 했던 말이다.
─’내 부족함은 내가 가장 깊이 실감하고 있다. 그러니까… 지혜를 빌리려고.’
─’누구로부터 말이죠?’
─’전부.’
>메르헨의 마법 기사> 「최종작, 악신 토벌전」
최종 보스, 악신과의 싸움은 아이작 혼자만의 것이 아니었다.
인류 모두의 싸움이었다.
스텔라가 폭소했던 것도 그러한 연유였다.
인간이기에.
사회를 이루고 힘을 합치며 살아가는 인간이기에.
신격을 코앞에 둔 얼음의 마법사는 끝내 모두와 함께 싸우는 방법을 떠올려 스텔라와 의견을 조율했던 것이다.
독자적으로 강한 신들의 방식과는 궤를 달리하는 계획이었다.
아이작은 그 어떤 기적도 바라지 않았다.
위기에 처한 만화 속 주인공처험 극적인 각성도 기대하지 않았다.
모든 것은 그의 계획 아래 쌓아온 행적들의 결실.
필연과 필연의 교차점.
끝내, 아이작은 자신의 승리를 필연으로 만들 작정이었다.
아이작과 악신의 싸움이 이어지며 전세계에 희비가 교차하던 때.
인터넷 커뮤니티에 동영상과 함께 하나의 게시글이 올라왔다.
[악신 이기는 법, 찾았다.]* * * * * * * * * *
[마족을 적으로 인식했습니다.]마치 파노라마처럼, 많은 전투의 기억이 내 머릿속에 하염없이 스처 지나갔다.
전부 눈앞의 악신 네피드와 벌인 전투의 기억이었다.
수천, 수만, 수십만, 수백만, 수천만…, 셀 수 없이 많은 패배와 한 번의 승리가 내 머릿속에 재생되었다.
그 모든 정보를 토대로 오차 범위를 산정하고, 수많은 변수를 고려했다.
…찾았다. 해답.
[고유특성 [멸악자]가 발동됩니다!]화아아아아!!!
[빙제]의 냉기를 뿜어내며 오즈마가 남긴 최후의 힘을 사용했다. [멸악자]의 효과를 1.5배로 끌어올리며 재차 발동시킨다.금방이라도 신체가 터질 것처럼 마력이 빠르게 회전하며 용암처럼 들끓었다.
현재 능력치는 모두 EX급. 즉, 측정 불가였다.
쩌저적!
빙설룡-힐드를 부분 소환해 융합했다.
내 오른쪽 반신이 용의 비늘로 뒤덮이고, 머리 옆으로 회색 뿔이 튀어나오며, 오른쪽 손톱과 발톱이 날카롭게 벼려졌다.
한쪽으로 튀어나온 백옥빛 날개는 빙설룡의 것과 유사했다.
반인반룡.
내 기동력을 강화시키기 위한 최선의 방책이었다.
지금부터 나는 확실한 승부수를 띄울 생각이었다.
화아아악!!
[빙제]의 냉기 날개마저 펼쳤다.그대로 지면을 박차, 섬보로 도약했다.
파아앗!!
냉기를 폭발적으로 방출하며 악신 네피드를 향해 섬광처럼 나아갔다.
악신은 검붉은 화염 마법과 허무 마법을 난사하였으나, 내 머리속 수많은 정보 덕분에 모든 공격의 움직임돠 궤적을 예측하며 여유롭게 헤쳐 나갈 수 있었다.
[얼음달]의 효과. 악신의 마법진이 전개됭 공간을 예측하고 그 공간 차체를 얼리기까지 하자 악신은 당황하며 많은 눈을 찌푸렸다.질주하던 중, 상공에 떠 있는 [얼음달]에 마력을 들이부었다.
휘이이이! [얼음달]은 면적을 키워 충만한 만월의 형상을 갖추었다.
얼음 마력이 만월을 중심으로 소용돌이친다. 고스란히 내비치는 달무리는 경건하기까지 하다.
1년간 쉬지 않고 단련해온 성과다. 악신에겐 미지의 영역일 터.
악신은 위그드라실의 씨앗 덕분에 강한 회복력까지 거머쥔 상태다.
그 마족이 대응책을 강구할 기회조차 얻지 못하도록, 회복력 조차 무의미해질 만큼, 나는 승부처에서 만월의 [얼음달] 효과 단 한 번으로 이 싸움을 끝낼 작정이었다.
할 수 있었다.
마치 축복처럼 전개된 [빛의 신전]이 있었으니.
화르르르륵!!
허공을 가로지르던 중, 악신은 검붉은 불길을 뿜어내며 내 육신을 소멸시키려 했다.
궤도를 틀어 불길을 피하거나 얼음 마법이나 바위 마법으로 격돌하고 끊임없이 나아가며 치열한 공방전을 벌였다.
날카롭고 묵직한 수증기 폭발의 연속.
비산하는 얼음 조각과 석설들.
세계를 몇 번이고 파괴할 수 있는 대규모 마법의 햐연 숙, 디아칸이 파괴적인 절대영도의 얼음 마력을 입으로 쏘아냈다.
콰아아아아아앙!!!!
[빛의 신전]을 가득 메우는 청광.거센 폭발이 공기를 헤집었다.
그러나 악신에게 큰 피해는 없었다. 단지 나만이 차감고도 눈부신 폭발에 몸을 숨길 수 있었을 뿐.
이렇게 되면, 악신의 패턴은 명료해진다.
화아아아아아!!!
파멸의 [위그드라실]이 빛을 발하고, 악신이 검붉은 화염으로 이글거리는 대형 마법진을 구축했다.
악신의 세계멸망급 마법, 두 번째 유형.
악신이 팔을 뻗자 묵직한 화염 마력의 폭풍이 일어서며 광대한 벽을 이루더니 사방으로 뻗어나갔다.
화르르르르르륵!!!!
시공간마저 어그러뜨리는 화염이 기이한 폭음을 내며 진격해온다.
모든 것을 쓸어버리는 소멸의 벽.
그 마력 밀도는 무한에 가깝다.
다가오기만 해도 온몸이 타버릴 것 같은 여기가 덮쳐오자 더욱 강렬리 냉기를 뿜으며 몸을 식혔다
드높게 날아올라 소멸의 벽의 사정거리에서 벗어나는 것 말곤 피할 방도가 없었다.
[얼음달]의 효과로 시간을 멈추기까지 한다면 기습을 노릴 수 있을지도 모른다.다만, [얼음달]의 시간 정지 효과는 악신에게 통하지 않는다. 아마 흑염으러 이루어진 갑주가 시간의 빙결마저 녹이기 때문이겠지.
사실상 시간 정지 효과는 빠르게 이동할 때나, 이미 시전된 악신의 공격을 피할 때 말고는 쓸 이유가 없었다.
…애당초 파할 생각조차 없었다.
소리를 내지르며 두려움을 몰아냈다.
필사적으로 마력을 끌어올려 [빙제]의 냉기를 최대 출력으로 휘감고, 얼음 마법을 시전하며 일직선으로 질주했다.
콰가가가각!!!
섬뜩한 굉음.
전신이 극도로 짓눌리는 압력, 그리고 피부를 뒤덮는 작열감이 느껴졌다.
그대로 어둠의 화염을 뚫고 악신의 코앞에 이르렀다.
순식간에 벌어진 일이었다.
[……!!]악신의 많은 눈이 휘둥그래 뜨였다.
상공 방향으로 미리 공격 마법을 시전하려고 준비해둔 채로.
훌륭한 판단이었다. 내가 [얼음달]의 효과로 시간을 멈추고, 위로 피해 공격할 줄 알았을 테니.
누가 보더라도 그 편이 합리적이고 냉철한 판단이겠지.
누구든지 아예 소멸의 불꽃을 뚫고 오리라곤 예상치 못했으리라
내게 전핸 데이터에 따라, 내가 악신이 처음으로 사용할 소멸의 벽을 충분히 뚫고 지나갈 수 있다는 사실을 알아냈다.
두 번째부터는 어림도 없을 터였다. 악신이 소멸의 벽의 위력을 얼마나 늘려야 할지 깨달았을테니.
그렇다고 해서 피해를 온전히 막을 수는 없었다.
이미 전신에 치명상이 가득했다. 죽기 직전이나 다름없었다.
심지어 팔 말고는 도저히 움직일 수 없을 지경이 되었다.
그중 한쪽 팔은 이미 소실되었다. 소멸의 불꽃이 왼팔을 휘감았던 까닭에, [빙결 폭발]로 왼팔을 날려 보냈으니.
뭐, 예상했던 손해였다. 오히려 이 정도면 거저먹기였다.
우리의 승부에서, 잠깐이라더 행동 패턴을 예측하는 데 실패했을 때 감수해야 할 리스크는 상상을 초월한다.
지금 이 순간, 이 찰나 악신에게 빈틈이 생겼다.
이적 따윈 없었다.
지금까지의 싸움에서 악신은 단 한 번도 방심하지 않았으니, 그야말로 필연으로 가꾸어낸 일생일대의 기회나 다름없었다.
쏟아낼 건 혼신의 힘을 다한 일격뿐
오른손에 얼음 마력이 소용돌이치며 응축되고, 5성급 [빙결 폭발]의 푸른 마법진이 그 위로 떠올랐다.
그리 모인 얼음 마력은 마치 보름달처럼 달무리를 발하며 신비로운 푸른빛을 내비쳤다.
차라라라!!
경쾌한 빙결 소리.
만월의 [얼음달]이 푸른 광체를 발했다.
─그거 아냐?
순간, 나는 미소를 지으며 악신 네피드의 머릿속에 이야기했다.
─내가 얼리지 못하는 건, 없다.
만월의 효과는 극명하고 단순하다.
절대적인 빙결을 일으키는 것.
그 대상에 예외는 없다.
악신을 향해 오른팔을 휘둘렀다.
잠시 시야가 새하얗게 물들고, 냉기가 악신의 전신을 파고들며.
뒤늦은 굉음이 영원의 영역에 날카롭게 올려 퍼졌다.
콰아아아아아아아앙!!!!!
점차 굉음이 사그라지고, 공간이 어그러지며 느리게 소용돌이쳤다.
그대로 나와 악신은 강한 중력을 받으며 불가항력으로 어딘가로 빨려 들어가기 시작했다.
주변을 둘러보니 푸른빛으로 둘러싸인 통로다. 명계로 이동할 때와 같은 감각이 느껴졌다.
‘이러면 안 되는데…!’
큰일이다.
이건 오즈마와의 싸움 때 겪었던 일.
지나치게 강력한 에너지가 터지며 공간마저 박살나 균열이 생겨 버렸다.
이안이 마무리를 지어야 할 텐데.
빙괴 속, 얼어붙은 여성형 마족이 눈앞에 있었다.
충격파를 고스란히 맞아 검붉은 화염이 크게 잦아들어 그녀의 얼굴과 얄찍한 목이 내보였다.
“끄으…!”
이를 악물고 꾸역꾸역 마력을 끌어올렸다. 악신은 어떻게든 이안이 창명검으로 베어내야만 토벌할 수 있었다.
나와 함께 외딴 차원으로 끌려가선 안 된다는 얘기다.
“……!”
그 순간이었다.
마치 당연하다는 듯이, 악신의 뒤통수 너머로 신성한 광명이 내비쳤다.
놀랄 수밖에 없었다.
이안 페어리테일.
어느새 의식을 되찾은 그가 창명검을 뒤로 뻗은 채 신성력을 연소처럼 뿜어대며, 로켓처럼 기어이 우리를 뒤쫓아왔다.
‘아… 그랬지.’
입가에 절로 미소가 흘러나왔다.
이안은 기절을 단련해온 기절 전문가다.
기절한 뒤 깨어나는 속도가 점점 빨라지는 것은 그동안 체감해오지 않았는가.
즉, 저 녀석은 빠르게 각성해 기절을 끝마친 것이었다.
이안은 격렬히 포효하며, 신성력을 머금은 창명검을 꽉 거머쥐었다.
내가 빙결을 풀자, 동시에 새하얀 검격이 악신의 목에 내질러졌다.
채애애애앵!!!!
청아한 폭음이 울려 퍼지며 무지개색 광원이 떠올랐다.
검격의 궤적이 악신의 목을 가르고, 눈부신 폭발이 악신의 남은 육체를 집어삼켰다.
날아가 버린 악신의 머리가 잿빛 가루가 되어 사라져갔다.
그녀가 지은 마지막 표정은… 분간할 수 없었다.
시야가 어무 흐릿해졌으니까.
그저 이겼다는 사실만이, 내 가슴속을 깊이 울리고 있었다.
“…이작…!”
이안이 뭐라 소리치며 내게 팔을 뻗었다.
함께 미지의 차원 너머로 끌려 들어가는 가운데서, 어떻게는 날 구해주고 싶은 걸까.
“…작…!!”
이안은 목청이 터져라 심각하게 소리치는 듯했다.
청각이 온전치 못해서 잘 들리지 않았다. 아까부터 이명만이 귀를 찢을 듯이 울릴 뿐이었다.
다만, 이안. 저 녀석까지 휩쓸릴 필요는 없었다.
이미 내가 빨려 들어가는 속도엔 가속도가 붙었다. 이건 어쩌지 못한다.
반면에 이안은 빛의 폭발 덕분에 반대편으로 밀려나 아직 가속도가 붙기 전 상태.
저 녀석 만큼은 살릴 수 있으리라.
‘어차피, 난 곧 죽을 텐데.’
내 몸 상태도 여실히 느껴졌다.
나는 곧 목숨을 잃을 것이었다.
돌아가 봤자 아무런 소용도 없었다.
남은 마력은 얼마 없었다. 감지하건데, 이안도 처지는 마찬가지였다.
가까스로 힘을 들여 이안을 향해 팔을 뻗었다. 마지막으로 남은 마력을 긁어내, 그 손에 얼음 마력을 모았다.
이안에게 씌운 [빙결 차단막]을 풀고, 얼음 보호막만 씌워둔 채로 얼음 마력을 터뜨렸다.
콰아아앙!!!
충격하가 퍼져나가며 얼음 보호막으로 감싸진 이안을 멀리 날려 보냈다.
미안하지만, 녀석이 뭐라 하는지 열심히 소리쳐도 거리가 빠르게 멀어지니 들리지 않았다.
이안과는 반대로, 나는 차원의 균열 안쪽으로 더욱 빠르게 밀려났다.
점점 주위가 어둡게 변해간다.
별다른 생각은 들지 않았다.
생각할 힘조차 남아 있지 않았다.
정신이 점점 아득한 너머로 날아가고 있었으니.
이젠 졸음을 참을 수 없었다.
나는 서서히 눈을 감았다
차라랑!!
그때였다. 청아한 소리가 들린 것은.
도로시나 오즈마의 별빛 마법에서 났던 소리.
턱. 누군가가 내 손을 붙잡았다.
그 손은 우주를 품은 듯 휘황찬란 별빛으로 가득했다.
물감이 번진 듯한 시야로도 분간이 갈 정도로 아름다운 손이었다.
그는 나를 잡안 끌며 어딘가로 날아갔다.
맞잡은 손을 타고 회복 마력이 느껴졌다. 허전했던 왼쪽 어깨로부터 왼팔이 재생되었고, 죽음을 맞이해야 할 운명이었던 육신이 빠르게 회복되어갔다.
별빛을 휘감은 누군가가 수준 높은 마법으로 내 몸을 치유하고 있음이 분명했다.
도수 맞는 안경이라도 쓴 것처럼 점차 시야가 또렷해지고.
어느덧 고요가 나를 찾아왔다.
“…어?”
눈을 감았다 뜨자 우주의 풍경이 내 시야를 뒤덮었다.
이 감각. 와본 적 있는 곳이다.
몸이 회복된 덕분일까. 멀어져 가는 의식을 붙들어 맬 수 있는 정도의 기력이 생겼다.
별안간 누군가의 기척이 느꼈다.
그쪽으로 고개를 돌리자 나와 거리를 벌리고 서 있는 검은 정장의 여성이 보였다.
인두겁을 쓴 게임 개발사 힉스의 개발 총괄, 알레츠
즉, 별의 요적 스텔라였다.
[두 번째 대면이군요.]“…날 구한 거야?”
스텔라는 고개를 끄덕였다.
[당신이 차원의 저편으로 넘어가길래 건져냈죠. 그곳은 버려진 쓰레기장이나 다름없어서, 들어가게 되면 아무런 희망이 없거든요.]스텔라는 머나먼 은하를 바라보았다.
[…조금 전, 악신 네피드는 소멸했습니다.]깊게 호흡했다.
그 한 마디에 북받치는 가슴속을 추스를 시간이 필요했으니까.
그러나 감상에 젖을 때가 아니었다.
아직 알아야 할 것들이 있었으니.
“메피스토는?”
[도망쳤습니다. 악신이 패배한탓에 모든 권능을 잃고 무력화되었죠.]스텔라는 다시 나를 쳐다보았다.
[당신도 아시겠지만, 마족은 모두 악신과 유기적인 관계를 맺고 있었죠. 메피스토는 악신이 사라져서 서서히 붕괴의 길을 걷고 있습니다. 게다가 스노우화이트가 밤의 마력까지 심어두어 끔찍한 고통에 시달리고 있기까지 하죠. 살고 싶다며 동굴에 몸을 숨겼지만, 계속 고통만 느끼며 앓아 눕다가 얼마 안 가 목숨을 잃고 말 겁니다. 허망한 최후죠.]스텔라의 대답은 무미건조했다.
[나중에 찾아가 보시죠 당신은 이미 신격에 도달한 것이나 다름없으니, 그 마족을 찾는 건 무척 간단한 일일 겁니다.]“그래…”
나는 목에 건 펜던트를 꺼냈다.
작년에 도로시가 선물로 주었던 펜던트다.
“다른 사람들은 무사해?”
[꽤 많은 사상자가 발생했지만, 당신이 애착을 가진 인간들은 모두 무사합니다.]“…다행이네.”
정말로 다행이었다.
그 후로 잠시간 침묵이 흘렀다.
[할 얘기는 많지 않은 것 같네요.]“그런 것 같다.”
나머진 내 눈으로 직접 확인하고 싶으니까.
[환성호 씨. 드릴 말씀이 있습니다.]다시 스텔라를 쳐다보았다.
스텔라는 미소를 지었다.
[절 포함해 힉스 개발진 모두, 곧 인세(人世)를 떠날 겁니다. 악신을 쓰러뜨리기 위해 예외적으로 인세에 개임하고 말았지만, 이젠 그럴 이유가 없으니까요. 그래서 말인데, 지금이라면 화를 내셔도 얼마든지 받아들일 수 있습니다.]얄밉게도 농담조로 말하는 스텔라.
이제 와서 깊은 악감정 같은 건 없었다.
그런 게 있었다고 해도, 지근은 뭘 어찌할 기력이 남아 있지 않았다.
선하게 미소 지으며 잔자히 대답했다.
“…됐어.”
[오호? 후회하지 않겠어요?]“지쳤거든, 이제.”
지쳤다.
지금은 그저 푹 쉬고 싶었다.
[그렇습니까…]이야기가 다 끝난 까닭인지, 스텔라의 몸체가 빛나기 시작했다.
그 몸은 많은 별빛을 담은 미지의 형태로 변화했다.
[한성호 씨. 당신에게 몇 번이고 감사를 표해도 모자랄 지경입니다. 당신은 당신이 바라는 모든 것을 누릴 자격이 있습니다. 지금, 당신은 [불로]의 축복과 누구보다도 월등한 ‘자유’를 얻었습니다. 모두 제가 드리는 선물입니다.]멀어지는 의식과 함께 주변의 풍경이 빠르게 변화해갔다.
수많은 은하와 별빛이 빛살을 그렸고, 내 몸은 멀리 있던 나선형 은하의 어딘가로 옮겨졌다.
문득 창백한 푸른 점이 보였다.
[영웅이여.]스텔라는 내게 상체를 숙였다.
[평안하시길.]익숙한 푸른 행성.
지구가 보였다.
눈을 감으니 다사롭고 포근한 감각이 상냥하게 내 전신을 휘감았다.
이윽고, 나는 어딘가로 빨려 들어가는 감각을 느끼다 잠에서 깬 것처럼 어딘가에서 정신을 되찾았다.
“……?”
딱딱한 지면에 맞닿은 감각.
천천히 눈을 뜨자 대리석 바닥이 눈에 들어왔다.
밤의 아련한 어둠으로 들어찬 장소. 주변은 널따란 광장이었다.
몸을 일으키고 주변을 두리번거렸다. 무척 낯익은 곳이었다.
고개를 뒤로 돌리자 근엄한 장군 동산이 눈에 보였다.
그 아래엔 ‘忠武公李舜臣將軍像’이라는 한자가 크게 새겨져 있었다.
뜻은, 충무공 이순신 장군상.
이곳은…
“광화문…?”
대한민국, 광화문.
그 이름이 머릿속에 떠오르자, 나는 형용할 수 없는 감정을 느꼈다.
“저쪽에…!”
“찾았다! 그분이다!”
“이봐요! 괜찮아요?”
마치 기다리고 있었던 것처럼 몇몇 사람들이 내게 달려왔다. 전부 한국인들이었다.
스텔라가 날 회복시켜준 덕분이지 목소리가 명확히 들려왔으나, 뭐라 대답할 기력은 없었다.
“아이작 씨! 괜찮으세요?”
‘아이작’이라고 날 알아본다.
분명 힉스 때문이겠지.
사람들은 나를 부축하며 연신 괜찮느냐고 똑같은 질문을 쏟아냈다.
그들의 목소리가 점점 멀어져 갔다.
졸음이 몽글거렸다.
다시 눈이 서서히 감기다, 그대로 나는 잠들고 말았다.
······
사법시험을 코앞에 둔 때였다.
어머니의 부고 이후, 공부가 손에 잡히지 않는 건 당연했다.
두꺼운 법학 서적을 읽던 중 시야가 흐릿해져 눈물이 뚝뚝 흘러내렸다.
며칠간 평점심을 가질 수 없었다. 어머니와의 이별이란 그토록 날 허무하게 했고, 내게 탈력감을 안겨주었다.
어두운 방 안에 틀어박혀 지내던 어느 날, 그냥 아무 생각 없이 집을 나섰다.
정처 없이 아무 곳이나 돌아다녔다. 정말로 아무 생각 없었다.
고시촌, 아스팔트 도로, 많은 빌딩, 시끌벅적한 상가, 육교.
그리 길을 걷다가 문득 고개를 들어보니, 은은하고도 아련한 노을빛 하늘이 나를 사로잡았다.
새삼스러운 감상이 머릿속에 떠올랐다. 하늘은 저렇게 예뻤구나, 하고.
내 눈은 다시 길거리로 향했다.
식당이나 포장마차 앞에서 밥을 먹는 고시생들이 보였다. 그들은 음식을 씹는지 마는지 대충 목구멍으로 넘기며 수험용 작은 요약집을 읽고 있었다. 그러다 그만 음식을 잘못 삼키고 말아 물을 벌컥벌컥 마시는 모습도.
다른 쪽에선 어느 중년 남성이 보였다. 정장 차림으로 지친 몸을 이끄는 모습을 보니 퇴근하는 모양새였다. 그는 치킨 냄새 한껏 풍기는 봉투를 든 채 노을빛으로 물든 인도를 걸었다. 그대로 누군가와 통화하는가, 싶더니 지쳤던 얼굴에 화색을 피어 올리며 들뜬 목소리로 ‘아들~’하고 불렀다.
대파가 비죽 튀어나온 식재료 든 검은 봉투를 들고, 남은 손으로 어린 딸아이와 손잡고 걸으며 장난스럽게 수다를 떠는 어느 가정의 어머니도 보였다. 딸아이는 만화 캐릭터 이야기로 떠들어댔고 어머니는 알아듣지 못하는 듯했지만, 그저 웃으면서 맞장구쳐주었다.
지하철역을 나와 부리나케 버스에 타려는 사람들이 보였다. 저마다 일을 마치고 퇴근하는 모습이었다.
우르는 그렇게 살아가고 있었다.
때론 치열하게, 때론 힘겹게.
기쁜 일이 있든, 슬픈 일이 있든, 시시각각 변해가는 하늘 아래 하루하루를 살아가고 있었다.
언제나 보아왔던 그 풍경들이 그날따라 어째선지 무척 아름다워 보였다.
나는 다시 책상으로 돌아가 스탠드를 키고, 사법시험용 서적을 들여다보았다.
마음이 정리가 됐는지, 그날은 무척 공부가 잘 되었다.
“……”
기억 속을 헤매다 천천히 눈을 떴다.
창문을 뚤고 들어오는 노을빛은 한때 내가 자주 보아왔던 태양의 색이다.
이곳은… 병실인가.
“어머! 정신이 드세요?”
침대 옆, 기계에 표시된 내 바이탈을 체크하던 간호사가 깜짝 놀랐다.
“자, 잠깐만 기다려주세요! 의사 선생님 불러올게요!”
간호사는 허겁지겁 병실을 나섰다.
조심히 상체를 일으켰다. 나는 환자복 차림이었다.
멍하니 창밖을 내다보았다. 빌딩으로 이루어진 도심의 풍경과 노을빛 하늘의 조화는 썩 낯익은 것이었다.
다만, 종말이 진행됐던 탓인지 빌딩 곳곳이 음푹 파여 있거나 무너진 흔적들이 보였다.
이곳 사람들은 모두 무사했을까.
스르르.
내 손을 내려다보았다. 손발처럼 익숙한 얼음 마력이 가볍게 흘러나왔다.
여전히 나는 아이작이었다.
다만, 느껴진다. 내 몸속을 감도는 힘은 악신과 싸웠을 때보다 더욱 강해져 있었다.
한태 내가 체험했던 신격의 편린. 초월자의 격이 내 안에 담겨 있었다.
덜컥. 얼마 안 가 병실 문이 열리며 여러 명의 의사가 부산히 안으로 들어왔다.
열린 문틈으로 복도 쪽을 내다보니, 검은 정장을 차려입은 채 병실 문 앞을 지키는 경호원들이 엿보였디.
극진한 대우였다.
“아이작 님! 정신이 드셨군요.”
머리가 반쯤 벗겨진 노년의 의사가 가식적인 미소를 지으며 내게 다가왔다.
가슴팍에 부착된 명함을 읽었다.
병원장이었다.
“우리 병원에서 가장 좋은 상급 병실입니다. 정부 차원에서 권고가 내려와서요. 아이작 님을 모시라는, 그런 의미로.”
게임 개발사 힉스가 날 위해 이것저거 많은 걸 해준 모양이다.
날 이곳으로 데려온 건 스텔라의 뜻이겠지.
“저, 얼마나 기절하고 있었습니까?”
“예, 일주일만에 깨어나셨습니다.”
스텔라가 회복시켜준 까닭일까. 일주일 정도면 양호했다.
이미 한 달이나 기절해본 경험이 있었기에 상대적으로 낫다고 느껴지는지도 모르겠지만.
어쨌는 내 몸을 덮은 이불을 옆으로 젖히고 침대에서 내려가려는 때였다.
“일어나실 수 있겠습니까?”
“네. 별문제 없어요.”
배려심 어린 질문에 선하게 웃으며 대답했다.
일단 돌아가야겠지. 돌아갈 방법은 모르겠지만.
메피스토는 내 손으로 끝장내고 싶었다. 할 얘기도 있고.
“저기, 그럼 아이작 님.”
“예?”
“한번 창밖을 봐보시겠습니까?”
병원장의 웃는 얼굴이 의미심장했다.
창가 쪽으로 몸을 움직이고 창문을 열었다.
아름다운 노을빛 하늘. 빌딩 숲.
그 아래를 보고 나니, 나도 모르게 입이 벌려졌다.
병원 교툥에 방해가 되지 않도록, 질서정연하게 모인 군중과 방송국 차량들이 내 시야를 가득 메웠다.
사람들은 모두 길바닥에 앉아 있었다.
기도하는 사람, 응원하는 사람, 말없이 병원을 뚫어지게 쳐다보는 사람… 정말로 많은 사람이 보였다.
그들은 팻말을 들고 있거나 현수막을 어딘가에 고정해둔 채였다.
저마다 내게 감사를 표하거나, 내 활약을 추앙하거나, 내가 무사히 깨어나길 기원한다는 내용이 담겨 있었다.
알 수 없는 전율이 전신을 감싸 돌았다.
한동안 나는 아무런 말도 꺼낼 수 없었다.
“감사합니다, 아이작 님. 우리를 지켜주셔서”
그 목소리에 고개를 뒤로 돌렸다.
병원장을 포함해 의사들과 간호사들이 내게 상채를 숙이고 있었다.
“정말로, 고생하셨습니다.”
“……”
무슨 말을 해야 할지 알 수 없었다.
대뜸 한 남성이 병원에서 뛰쳐나와 확성기를 들고 소리쳤다.
“모두 주목해주십시오!! 지금, 막 아이작 님께서 깨어나셨습니다!!”
모두가 일어났다.
“와아아아아아아!!!”하고, 사람들은 일제히 일어나 팔을 뻗거나 만세하거나 환호성을 내질렀다.
안도감과 기쁨이 그들의 만면을 채웠다.
심리를 읽을 수 있기에, 그들이 진심이라는 사실을 알아차리는 건 어렵지 않았다.
‘네가 보여주고 싶었던 게 이거구나…’
스텔라.
네가 날 이곳으로 데려온 뜻을 알 것 같았다.
나는 저들이 누군지 모른다.
그러나 저들은 오로지 나 하나 무사하다도 저리 기뻐하고 있었다.
한 사람 한 사람의 얼굴을 살폈다. 그들 모두를 기억하려고 했다.
그들이 내지르는 환호성을 머릿속에 선명히 각인시키려 했다.
그리 한동안 사람들이 열광하는 광경을, 홀린 것처럼 묵묵히 바라보았다.
휘이이이!!
“어, 어?!”
이윽고, 병실 한가운데서 마력으로 일렁이는 게이트가 나타났다. 익숙한 마력이었다.
병원 관계자들은 소스라치게 놀란 듯했다.
게이트에서 누군가가 튀어나와 병실 바닥에 발을 내디뎠다.
그쪽으로 고개를 돌리자, 연금발을 가니 어여쁜 여성이 눈에 들어왔다.
“안녕, 여보.”
자상한 목소리.
앨리스 캐럴. 그녀가 태평하게 눈웃음을 짓고 인사했다.
“앨리스…”
놀랍지 않았다.
내가 돌아갈 방법으로 상정하고 있던 상황이었으니.
“여기 좌표는 스텔라가 알려줬어?”
“그렇단다. 역시 바로 알아차리는구나.”
이제 신들은 신살의 권능을 걱정하지 않아도 된다.
마음껏 메르헨 아카데미가 있는 세계에 개입할 수 있겠지.
그러니 날 위해, 스텔라는 앨리스에게 지구의 좌표를 가르쳐준 듯했다.
앨리스는 다소곳이 내게 손을 내밀었다.
“돌아가자.”
내 입가에 미소가 번졌다.
따스한 바람이 불어와 내 피부를 쓰다듬었다.
아마 이건, 봄바람이리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