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he Academy’s Weakest Became A Demon-Limited Hunter RAW novel - Chapter (61)
제르베르 남서부엔 줄곧 같은 자리에 웅대한 먹구름이 머무르고 있었다.
상시 자색 천둥이 광채를 발하고 있기에 먹구름의 빛깔은 무척이나 밝다.
그 구름 아래 지상은 번개 지옥이나 다름없다. 번갯불이 초 단위로 셀 수 없이 지상을 내려치고 있으므로. 멀리서 지켜본다면 매 순간 허공에 새겨지는 자색 번갯불을 질리도록 감상할 수 있을 것이다.
그 구름은 뇌신조의 고밀도 마력으로 탄생한 보금자리였으니.
어느 날, 천앙의 대마녀가 수많은 번갯불을 뚫고 뇌신조를 찾아왔다. 자기 사역마가 되어 세상을 누벼보지 않겠느냐고 제안했던 그녀. 참 재밌는 여자라고, 뇌신조는 생각했다.
그녀와 오랜 여정을 함께하고서.
끝내 뇌신조는 썩은 인간 시체로 이루어진 검은 용, 악룡-오르키스로부터 저주를 받아버렸고.
악룡의 저주로 들끓는 파괴본능을 억누르기 위해 내면에서 온몸이 뜯겨나갈 듯한 지독한 싸움을 벌여와야만 했다.
새로운 주인, 루체 엘타니아가 대량의 번개 마나로 상시 뇌신조를 억눌러 주지 않았다면 수 년간 그 싸움을 이어가지도 못했을 것이었다.
마침내 아이작의 활약으로 뇌신조는 자유를 되찾았으나.
여전히… 그의 싸움은 끝나지 않고 있었다.
“지금도 안 떠올라? 그릉과 싸웠을 때. 아이작 아니었어?”
메르헨 아카데미 마법학부 생활동, 최상위권 기숙사 샤를관. 몇 주째 지치지 않고 반복되고 있는 질문이 있었다.
달빛처럼 은은한 목소리가 그 질문을 담았다. 로즈골드색 머리칼을 길게 늘어뜨린 여학생, 루체 엘타니아의 목소리였다.
루체는 자기 방 화장대 앞에 앉은 채 거울을 바라보며 몰포나비 색감의 머리 장식을 달고 있었다. 비단처럼 고운 머리칼은 빗질이 잘 돼 있었으며, 단아한 화장 상태도 양호했다.
아카데미로 파견 나온 엘타니아 가문의 메이드 솜씨였다.
루체는 메이드에게조차 마음을 열지 않았기에, 두 사람의 관계는 공과 사가 극명하게 구분되어 있었다. 극단적일 정도로 ‘공’ 쪽에 치우쳐져 있다고 해야 할까.
화장대 위에는 작은 까마귀 형태의 뇌조 한 마리가 앉아 있었다. 몸집을 줄인 8성급 사역마, 뇌신조-갈리아였다.
루체는 레벨 150의 귀재이자 천부적인 마력량을 타고났으며, 뇌신조와 감응된 정도가 몹시 뛰어난 상태.
저번에 학사 인력들 앞에서 정상이 된 뇌신조를 소환하고, 그 감각을 익힌 뒤.
별 다른 시행착오 없이 뇌신조를 그리 작게 만든 것이었다.
[흠흠….]뇌신조는 식은땀만 하염없이 흘렸다. 검은 몸체라 땀에 젖어도 티는 나지 않았지만.
저주에서 해방된 뇌신조는 루체와 재회한 이후, 그간 서로에게 하지 못했던 많은 이야기를 나누었다. 웃기도 했고, 가슴속이 뭉클해지는 여운을 느끼기도 했다.
그리고 그 대화 내용 속에서 유독 뇌신조를 곤란하게 만드는 것이 있었으니.
바로 그릉에 관한 이야기였다.
[몇 번이나 얘기했다만…, 아무리 생각해봐도 기억이 나질 않는다.]굵직한 목소리로 몇 주째 같은 답만 늘어놓고 있는 뇌신조-갈리아.
아이작이 자기 정체를 숨겨야 할 이유가 있다는 사실은 불 보듯 뻔했다. 하물며 그는 뇌신조의 은인. 그가 곤란해할 문제는 일으키지 않는 게 은인을 향한 도리라고 뇌신조는 생각하고 있었다.
설령 루체가 ‘네가 알고 있는 걸 전부 불어’라고 강압적인 태도로 나온다고 해도, 뇌신조는 명령 불복종의 페널티까지 기꺼이 감수할 셈이었다. 더럽게 아프겠지만, 자신을 저주에서 해방 시켜준 은인을 위해서 견뎌낼 것이었다.
하지만 루체는 일상생활 속에선 뇌신조의 의사를 존중하고 명령은 조금도 내리지 않고 있었다. 부탁하거나 질문할 뿐이지. 그나마 다행이라고 여겨야 할까.
물론 루체가 그릉 문제로 속앓이를 하고 있다는 사실은 뇌신조로선 안타까울 따름이었다. 그녀는 뇌신조에게 더할 나위 없는 소중한 존재였기 때문이었다.
[만약, 아이작과 그릉이 같은 인물이라고 하면 어쩔 테냐?]뇌신조는 속에 품고 있던 의문을 넌지시 물어보았다.
“…….”
루체는 아쿠아마린빛 눈동자를 내리깔았다.
뺨에 홍조가 떠오르고, 입꼬리가 움찔 떨린다. 평소 사람들을 만나면 인상을 찌푸리거나 포커페이스를 유지하던 모습과는 완전히 대비되고 있었다.
“난 언제든, 마음을 쏟을 준비가 돼 있어. 아무리 생각해도 아이작이 그릉이라고밖에 안 보여서…. 어서 납득할 만한 증거가 나와줬음 좋겠어.”
루체가 아이작에게 품고 있는 감정은 우정과 사랑 사이에 있는 무언가다.
그녀는 아이작이 그릉이라고 거의 확신하고 있는 상태였다. 하지만 아직 명확한 사실이 아니므로, 달콤한 향기처럼 새어 나오려는 마음을 억누르고 있었을 뿐.
우정이란 무엇인가. 그 의문의 답조차도 제대로 파악하지 못한 루체인데.
현재 그녀의 감정은 몹시 복잡하게 꼬여 있어서 뇌신조는 마냥 곤란한 심정이었다.
뇌신조는 제 주인의 사랑을 응원하고 싶었다. 루체가 좋아하는 남자 하나 잡아서 즐겁게 연애하는 모습을 본다면 행복할 것 같은 기분.
그러니 ‘아이작이 그릉이다’라고 눈 딱 감고 한마디만 해 버리면, 루체의 복잡하게 얽혀 있는 심리적 매듭을 단칼에 베어버릴 수 있을 것 같은데….
은인을 향한 도리가 쇠고랑처럼 뇌신조의 발목을 붙잡고 놓아주질 않았다. 애당초 아이작이 루체에게 정체를 들켜도 됐다면, 그가 먼저 나서서 말했을 것이었다.
[흠….]“…진짜로 기억 안 나는 거 맞지?”
[몇 번이고 내 대답은 같다.]뇌신조는 그렇게 골이 깊은 심리적 갈등 속에서 자맥질했다. 식은땀이 멈출 기미를 안 보였다.
그 치열한 내면의 싸움이 뇌신조를 궁지로 몰아넣는다.
루체는 실망한 얼굴로 나지막한 한숨을 내뱉었다.
[아이작 보러 갈 거냐?]“아이작 요새 마부 일 때문에 바빠서 곤란해…. 저녁은 돼야 훈련장에서 잠깐 볼 수 있을 거야.”
[…….]“…지금 보러 갈까?”
[그가 곤란해 한다고 방금 말하지 않았나?]“어쩔 수 없잖아. 이제 못 참겠다고, 나….”
방학이 되면서 아이작과 함께 있는 시간이 늘어서 기뻤으나.
아이작이 마부 일로 바빠지면서 또다시 함께 있는 시간이 확연히 줄어든 루체였다.
그간 버텨 오긴 했지만, 이제는 인내심이 한계에 치달아 있었다.
“난 이미 친구의 맛을 알아버렸어. 이젠 돌이킬 수 없어….”
마치 타락한 것 같은 말투였으나, 내용이 너무도 건전해서 뇌신조는 위화감을 느끼고 있었다.
* * *
뇌제, 그 채무불이행자 새끼는 바르토스관에서 교장 엘레나와 투자에 관한 얘기를 마친 후 자국으로 돌아갔다.
대체 왜 그가 직접 행차한 것인지는 지금도 의문이었다. 하지만 그가 마족에게 힘을 실어 준다든지, 날 방해하려고 나타난 것은 아닐 테니…. 그리 복잡하게 생각하진 않기로 했다.
만약 앞으로 예기치 못한 일이 벌어진다면, 그 이유를 추론하기 위한 퍼즐조각쯤으로 쓰기로 하고 판단을 보류하기로 했다.
여담이지만, 뇌제가 내 마차에서 떠났을 때는 분노보단 안도감이 더욱 강하게 들었다.
애초에 걔, 내 [천리안] 감지하고 찾아온 거였잖아. 그래서 뇌제가 지급하지 않은 삯을 내 목숨값으로 치자면, 나름 이득인 기분도 들었다. …호구 마인드인가?
아무튼 무사히 지나가서 다행이었지…. 뇌제가 손가락 하나만 까딱해도 나는 바로 저승행이었을 텐데.
“……?”
오늘도 마부 일을 하고 있었다.
마카담식 길을 지나던 중, 길가에서 나를 향해 팔을 내밀고 있는 한 여성이 보였다. 히치하이킹하듯이.
자기 정체를 숨기기 위해서일까. 로브 모자로 머리칼을 가리고 인식 저해 안경을 써서 얼굴을 흐릿하게 보이게 했지만, 루체였다.
[ 루체 엘타니아 ]Lv : 150
종족 : 인간
속성 : 물, 번개
위험도 : X
심리 : [ 당신과 함께 있고 싶어 합니다. ]
무슨 생각으로 자기 정체를 숨겼는진 금세 짐작이 갔다.
루체는 내가 마부 일을 하는 걸 알고 있는 상태였다. 저번에 이런저런 얘기를 나누다가 내가 알려 준 까닭이었다.
그래서 이번 기회에 루체는 자기가 손님이 됨으로써 나와 함께 있는 시간을 늘리고 싶었던 모양.
하지만 루체가 마차를 이용하고 내게 삯을 주는 식이 돼버린다면, 내가 부담감을 느낄지도 모르겠다고 걱정한 듯했다. 그래서 정체를 숨긴 듯 보였다.
‘기특하네.’
그 마음을 무시하긴 힘들었다. 태워줘야겠다.
물론 삯은 받아 낼 것이다. 친구 혜택으로 10퍼센트 정도는 할인해 줄까.
마차를 세우고 루체를 태웠다. 내가 “어서 오세요!”라고 활기차게 인사하자, 그녀는 고개만 조용히 끄덕였다.
“어디로 가세요?”
“아무 데나…. 바다가 보이는 곳으로.”
기껏 맞춰줬더니만.
평소에 좀 구체적인 계획을 짜오면 안 될까. 목적지부터 그렇게 두루뭉술하면 어떡해.
“그, 손님. 어느 바다인지 확실하게 말씀해주셔야…?”
“아무 데나, 바다가 보이는 곳으로.”
“…그럼 카스트리 해안가로 갈게요.”
똑같은 대답을 반복하길래, 대충 떠오르는 대로 대답하고 마차를 몰기 시작했다.
루체를 힐끔 쳐다보았다.
[ 루체 엘타니아 ]심리 : [ 당신에게 정체를 숨기는 데 성공해 기뻐하고 있습니다. ]
인식 저해 안경 때문에 루체의 얼굴은 흐릿하게 보였다. 하지만 입꼬리를 꿈틀대고 있을 그녀의 표정이 눈에 선했다.
곧이어, 허공에 물 마나가 응집되기 시작하고.
[내 주인! 아이작 속이기 대성공!]작은 범고래 사역마, 벨로가 기쁜 듯이 소리쳤다.
녀석은 곧바로 역소환되었다.
[ 루체 엘타니아 ]심리 : [ 당신에게 정체를 숨기는 데 실패해 절망하고 있습니다. ]
…못 들은 척 할걸. 미안하다.
여기서 눈치를 못 챈 척하기엔 벨로의 등장이 너무도 결정적이었다. 나는 이제야 루체인 걸 알아차렸다는 듯이 그녀의 이름을 나지막이 불렀다.
“루체?”
“…흐윽.”
루체는 살짝 울먹이는 소리를 내면서 인식 저해 안경을 벗고 로브 모자를 거두었다.
로즈골드색 머리칼을 곱게 늘어뜨린 루체의 모습이 눈에 비쳤다. 고개를 푹 숙이고 얼굴을 가리는 그녀. 자포자기한 심정 같았다.
……
“도착했다~.”
아킨스 해 방면.
루체가 학사 인력들 앞에서 뇌신조를 소환했던 카스트리 해안가. 모래알과 노을빛 바다가 찬연히 빛나고 있었다.
나는 정체를 들켜 시무룩해진 루체의 기분을 풀어 주기 위해 온갖 이야기들을 늘어놓았다.
다행히 루체는 나와 함께 있다는 사실만으로도 기쁜지, 금세 귀를 기울이고 즐겁다는 반응을 보여 주었다. 입을 터는 재미가 있었다.
중간부터는 루체의 작은 범고래 사역마, 벨로가 다시 튀어나와 대화에 끼어들었다. 이든도 ‘꾸웅’거리며 내가 하는 말에 호응해줬기에, 마차를 운전하는 동안 분위기는 시종 즐거운 편이었다.
온종일 마력을 운용하면서 마차를 운행하다 보니 온몸이 뻐근했다. 나도 잠시 해안가에서 쉬고 가기로 했다.
수평선 너머로 져가는 석양이 붉은 잔양을 흩뿌리고 있었다. 꽤 좋은 타이밍에 왔구나.
나와 루체, 이든, 벨로는 바닷바람을 맞으며 모래사장을 천천히 걸었다.
벨로와 이든은 서로에게 장난치면서 키득거리고 있었다. 어쩌다가 씨름하는 모양새가 됐는데, 더 강한 벨로 쪽이 일방적으로 이든을 쓰러뜨리고 있었다. 이든, 좀 이겨봐라.
흩날리는 루체의 로즈골드색 머리칼이 노을빛을 반사시켰다. 그녀는 바닷바람에 휘날리는 머리칼을 귀 뒤로 넘기면서 저물어가는 석양을 가만히 쳐다보았다.
그러다가 루체는 슬그머니 내 쪽으로 눈길을 돌리고는, 다시 정면을 쳐다보다가, 고개를 숙이며 은은한 미소를 머금었다.
[ 루체 엘타니아 ]심리 : [ 당신과 함께 바다에 와서 무척 기뻐하고 있습니다. ]
절로 아빠 미소가 흘러나온다.
내 딸아이가 ‘아빠랑 바다에 와서 정말 즐거워요!’라고 한다면 이런 기분일까. 물론 딸아이는 가져 본 적 없어서 잘 모르겠지만.
“기쁘다. 다른 사람 눈치 안 보고 아이작이랑 있을 수 있어서.”
루체의 깃털처럼 속삭이는 목소리가 바닷바람을 뚫고 내 귓가를 울렸다.
“그렇게 좋냐.”
루체는 환하게 웃으면서 고개를 끄덕였다.
우리는 아카데미 길가에 나돌아 다니는 얼룩무늬 고양이가 귀엽다든지, 방학이라 학식의 질이 낮아진 것 같다든지, 같은 시답잖은 이야기를 나누다가.
모래사장에 나란히 앉아서 수평선 너머로 저물어가는 석양을 물끄러미 바라보기 시작했다.
“아이작 춥겠다. 이거라도….”
루체는 입고 있던 로브를 벗으려 했다. 내 어깨에 덮어 주려는 분위기라, 나는 다급히 손을 휘저었다.
아무리 여름이라지만 슬슬 저녁인 데다 바닷바람 때문에 쌀쌀한 기운이 있었다. 로브를 벗으면 루체 쪽이 추울 것이다.
나는 도라○몽의 4차원 주머니처럼 마법 주머니에서 당연하다는 듯이 기다란 담요 두 장을 꺼내 들었다. 예전에 탄타크 지하 동굴에 갔을 때 챙겼던 것이었다.
그중 하나를 루체의 어깨 위에 걸쳐주었다.
‘헤헤’ 웃으면서 거리낌 없이 담요를 몸에 감싸는 루체. 어째 시간이 갈수록 미소가 자연스러워지는 것 같네. 내 차애캐 성장하는 느낌이 들어 절로 흐뭇해진다.
우리는 붉게 물든 석양의 가두리를 조용히 눈에 담기 시작했다.
몸을 덮은 담요는 서늘한 바닷바람 앞에서 적절한 온기를 제공해주고 있었다. 상당히 아늑한 기분이었다.
“아이작.”
“응.”
“난 원래, 사람은 다 고슴도치 같다고 생각했거든.”
루체는 잔잔한 목소리로 속내를 털어놓기 시작했다.
“조금만 가까워져도 가시에 찔리는 기분이라. 전부 싫었어. 근데 아이작은 가까이 있을 수록 기분이 좋아져.”
그 그윽한 한마디 한마디가 여운처럼 귓가에 맴돌았고.
“지금도. 나 정말 행복하다. 그런 기분이야.”
마치 속삭이는 듯한 울림이, 솜털처럼 내 고막을 살살 간질였다.
방학이 되면서 루체와 함께 보내는 시간이 많아졌다. 그래선지 요새 그녀는 들뜬 기색을 많이 보였지.
[심리 간파]를 써 보면, 루체는 나만 보면 기뻐하거나 행복하다고밖에 느끼지 않는 것 같았다. 그래선지 당사자인 나조차도 기분이 덩달아 좋아질 때가 많았다. 지금도 마찬가지고.그렇다고 해도 나 이외의 사람들한테는 여전히 싸늘한 기운을 풀풀 풍겨댔지만. 그럴 때마다 되려 내가 겁먹어서 한 마디도 못했었지.
“다행이네.”
미소로 화답했다. 나도 네가 있어서 즐거운 기분이니까.
그렇게 우리는 말없이 석양의 잔양에 취해 들었다.
나는 루체 쪽을 힐끗 곁눈질했다. 그녀는 깊은 상념에 잠겨 있었다.
심리를 읽고서 루체가 슬픈 감정도 느끼고 있다는 사실을 알아냈다. 아마도 어린 시절을 떠올리고 있는 듯했다.
천앙의 대마녀와 헨젤 오빠를 잃은 뒤.
루체는 거의 매일 엘타니아 가문의 저택 옥상에 올라가, 수평선 너머로 저물어가는 석양을 바라보곤 했다. >메르헨의 마법 기사>에서 묘사됐던 걸 떠올리자면 그렇다.
그럴 때마다 루체가 얼마나 무거운 생각들을 짓씹었을지 나로선 감도 안 잡힌다.
이후, 항상 혼자였던 루체가 마음을 열어 준 사람은 아마도 내가 유일할 것이다.
그런 생각을 하고 나니, 루체와 함께 해안가에서 석양을 바라보는 일이 어떤 의미를 지니는지 새삼스레 깨닫고야 만다.
루체는 이제 혼자가 아니다. 처음엔 그녀의 친구가 된 일을 후회하긴 했어도, 역시 그녀에겐 깊은 애정밖에 느껴지지 않는다. 그녀가 쓸쓸해하는 건 그다지 원하지 않게 된다.
그래서, 지금은 내가 루체 곁에 있다는 사실이 기쁘게 느껴졌다.
루체는 내 시선을 느꼈는지 고개를 돌려 나를 빤히 쳐다보다가, 뺨에 홍조를 띨 정도로 배시시 웃기 시작했고.
나도 그녀와 똑같이 배시시 웃었다.
벨로와 이든이 떠드는 소리.
바닷바람 소리, 밀려드는 파도 소리.
한 여름날을 보내기엔 꽤 낭만적인 분위기라는 생각이 들었다.
“아.”
이윽고, 루체는 무언가를 떠올렸다는 듯 품 안에서 작은 보따리 하나를 꺼내 내게 내밀었다.
짤랑거리는 소리가 들렸다. 겔이 많이 들어 있는 모양.
루체는 부끄러워하는 얼굴이었다.
“오늘 삯 포함해서…, 겔 많이 들어 있어. 그러니까 당분간, 아이작 마차 독점해도 될까?”
“……?”
뭔가 강한 위화감이 느껴져서 루체와 보따리를 번갈아 보았다.
이거 완전…?
“안 돼?”
“됐어…. 이따 오늘치 삯만 줘. 친구니까 10프로 할인해 줄게. 잘 계산해서 줘야 한다.”
“어어?”
내가 거절하자 당황하는 루체.
아무리 간접적인 형태라고 해도, 양심적으로 친구비는 받을 수 없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