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he acting genius began RAW novel - chapter 60
– 그럼, 네가 원하는 대로 해.
– ···기다리고 있을 테니까.
알 수 없는 표정으로 혁진을 올려다보는 어린 수일의 얼굴이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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잔잔하고도 짙은 슬픔이 묻어난 음악과 함께 크레딧이 올라가자, 박수 소리가 영화관을 울렸다.
몇몇 사람들이 자리에서 벌떡 일어섰다. 그들을 시작으로, 취재를 위해 앉아있던 기자들과 관객들고 따라 일어서기 시작했다.
구찬익 감독과 출연진들 역시 일어나 관객들을 향해 몇 번이고 고개를 숙였다. 기립박수가 나올 줄은 전혀 몰랐던 눈치였다.
필립도 기립박수를 보내는 이들 중 하나였다.
다만 그는 손뼉을 치면서도 조금은 찜찜한 심정이었다.
영화 자체만 두고 보자면···
···그래, 좋았다. 완성도나 연출은 흠 잡을 곳이 없었다.
‘그래도, 아쉽지 않다고는 말할 수 없겠군.’
디렉터 구의 작품을 좋아하는 이들이라면 아쉬움을 느낄 수밖에 없는 작품이었다.
8년 전까지만 해도 구찬익은 전통적인 서사와는 거리가 먼 영화를 찍었다. 의도적으로 파편화된 인물들과 장소는 편안한 감상을 방해했으나, 필립은 구찬익이 만들어 낸 모호하고 불친절한 세계를 좋아했다. 언제든 기꺼이 한 마리 물고기가 되어 그 비약의 바다를 헤엄칠 준비가 되어있을 만큼.
‘···이번 작품은 감독 이름을 가리고 봤다면 절대 구의 작품이라고는 생각할 수 없었겠는걸.’
필립은 복잡한 감정들을 삼킨 채 그들과의 대화를 기다렸다.
곧 감독과 두 명의 배우가 사회자, 그리고 통역사와 함께 무대에 올랐다. 사회자는 가벼운 대화로 분위기를 푼 뒤, 본격적으로 질문하기 시작했다.
“이번 영화가 이전 작품과는 결이 많이 다르다는 이야기가 있는데,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글쎄··· 어렵네요.”
작게 기침을 한 구찬익은 천천히 말을 이었다.
“아시다시피, 필름 영화의 시대는 지났지요. 한국에서는 필름으로 영화를 찍지 않은 지 꽤 되기도 했고. 저 역시 필름을 자르고 붙이는 걸로 영화를 시작한 사람입니다. 필름의 시대가 지나갔다는 사실이 내겐 나름의 큰 상처··· 상실이었습니다. 많은 이들이 내 영화를 보고 복잡한 말들로 치장을 해주긴 했습니다만, 실은 내가 찍은 영화들은 엄마를 놓지 못하는 다 큰 아이와도 같습니다. 과거를 잊지 못하는 늙은이이자 영화감독의 한탄이었죠.”
뜻밖의 답이었다.
젊은 프랑스인 감독은 자세를 고쳐앉았다.
동양의 노장 감독이 풀어놓는 자신의 영화에 대한 솔직한 이야기에, 바닥이나 천장의 무늬를 쳐다보던 사람들마저 무대로 시선을 돌렸다.
“그래요. 내게 영화는 한탄입니다. 그런 의미에서 이번 영화 역시 같은 맥락이라고 할 수 있겠지요. 표면적으로는 전혀 다르다고 생각할 수 있지만··· 나는 그렇게 생각하지는 않습니다.”
구찬익의 목소리가 고요한 영화관에 울렸다.
“여기서도 아시는 분들이 있을지 모르겠습니다만. 난 딸이 죽은 뒤로 한동안 영화를 찍지 못했습니다. 그 아이를 놓지 못했던 거지요.”
‘···아.’
필립은 자신도 모르게 한숨을 흘렸다.
“그러나 딸이 쓴 시나리오를 읽는 순간 알겠더군요. 이게 그 아이가 남긴 ‘한탄’이란 걸 말이지요. 그 한탄의 대상이 ‘나’라는 점만 제외하면, 이전까지의 제 작품과 그리 다르지 않습니다. ···질문에 비해 답이 너무 길어진 것 같긴 합니다만.”
“오, 전혀 아니에요, 구. 정말 아름답고 깊은 이야기였어요. 들려줘서 고마워요.”
그 이후, 한층 진지해진 분위기에서 Q&A가 계속되었다. 몇 차례 질문과 답변이 오고 가고, 누군가 손을 들어 질문했다.
“두 주연 배우의 연기가 인상적인데, 특히 ‘수일’ 역을 맡은 배우의 연기가 인상적이었습니다. 신인인 배우로 알고 있는데, 어떻게 그를 캐스팅하게 되었나요? 특별한 점이 있었습니까?”
“···솔직히 말하면, 나는 배우에게 많은 기대를 하는 감독은 아닙니다.”
구찬익 감독은 표정 변화 없이 이어 말했다.
“하지만 이번엔 다르더군요.”
“오우, 그런가요? 어느 점에서 달랐을까요?”
“그건 이 친구가 설명해줄 겁니다.”
그리고 구찬익은 자신이 들고 있던 마이크를 옆으로 넘겼다.
‘···!’
갑작스럽게 마이크를 넘겨받은 유일이 얼떨떨한 얼굴로 객석을 둘러보았다.
오로지 자신에게 집중된 수백 쌍의 눈이 보였다.
“음···.”
한유일은 고심 끝에 입을 열었다.
“처음 감독님을 뵈었을 때, 저에게 ‘하이틴 스타들이 싫다’는 말씀을 하셨습니다. ···그리고 그날 헤어질 때, 감독님께서 제게 주인공을 맡기셨습니다.”
“와우!”
“아마 제가 하이틴 스타답지 않다고 판단하셨기 때문이겠죠.”
객석에서 소소한 웃음이 흘러나왔다. 유일은 옅은 미소를 지은 채 입을 열었다.
“모두 감독님이 믿어주신 덕분입니다.”
누구도 부정 못할, 묵직한 진심이 담긴 말이었다.
그 이후로도 몇 번의 질문이 있었지만, 촉박한 시간 탓에 짧게 답해야만 했다.
“아, 벌써 시간이 이렇게 됐네요. 마지막이니 묻죠. 부디 솔직히 말해줘요. 감독님께 가진 불만이나 부탁이 있나요, 한?”
사회자는 절대 새어나가지 않을 테니 걱정 말라며 윙크까지 했다. 이미 스크린이 올라간 직후부터 이 자리에 있는 기자들이 그들의 대화를 받아적고 있으니, 어떻게 말하든 ‘비밀’이 될 리 없는 말이었다.
유일은 자신을 쳐다보는 반짝이는 눈들을 바라보았다.
이렇게 된 이상, 그는 솔직하게 답하기로 했다.
“작은 불만이 있긴 합니다.”
“오! 그게 뭘까요?”
한유일은 눈썹을 내리며 답했다.
“···분명 베를린에 맛있는 쌀국수집이 있다고 하셨는데, 아직도 가게 이름을 알려주지 않으셨거든요.”
“뭐라구요!”
사회자는 깔깔 웃으며 ‘구, 당신의 배우가 불만에 가득한 것 같은데 어떡하나요’ 따위의 말들을 늘어놓았다.
그렇게 상영회는 유쾌한 분위기로 마무리되었다.
*
그리고 다음 날 점심.
유일은 드디어 소문의 쌀국수집을 갈 수 있었다. 붉은색 간판과 테라스가 인상적인 가게였다.
황이원은 비빔 샐러드 국수를, 구찬익은 고기 쌀국수를 주문했다. 유일은 구찬익과 같은 음식을 주문했다.
“잘 선택했네.”
유일은 테이블을 세팅하고 주변을 둘러보며 메뉴를 기다렸다. 가게 내부엔 직장인들과 관광객들이 뒤섞여 바글바글했다.
구찬익 감독에겐 미안한 생각이었으나, 유일은 쌀국수가 맛있으면 얼마나 맛있을까 하는 생각을 하고 있었다.
하지만 첫 입을 먹는 순간, 그는 자신이 매우 잘못 생각하고 있었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
뜨끈하고 구수하면서도 감칠맛이 도는 끝맛이 혀를 자극했다. 아삭아삭하게 씹히는 숙주, 그리고 두께감 있는 부드러운 고기와 적당히 익은 면의 조화가 완벽했다.
구찬익의 말은 거짓이 아니었다.
“진짜 맛있어요, 감독님.”
구찬익은 ‘그럼 내가 거짓말을 했겠냐’며 툴툴댔지만, 입술 끝이 살짝 말려올라가 있었다.
황이원 역시 만족스러운 얼굴로 깨끗이 그릇을 비웠다.
셋은 부른 배를 두드리며 거리로 나왔다.
“베를린에서 쌀국수 맛집을 찾을 줄은 몰랐네요.”
“이민자들의 도시니까요.”
그렇게 답한 황이원은 구찬익 감독의 눈치를 보다 자신은 길에서 사 먹는 케밥을 더 좋아한다며 속삭였다.
“···여기서 도너 케밥 한 번 먹으면 가끔씩 생각날 겁니다.”
그때였다.
30대 중후반쯤 되어보이는 곱슬머리의 남자가 그들을 따라온 것은.
‘누구지?’
얼굴을 보니 낯이 익었다. 쌀국수 집에서 대각선 테이블에 앉아있던 이였다.
남자는 독특한 악센트가 섞인 영어로 물었다.
“···디렉터 구, 맞죠?”
베를린, 그리고 (2)
남자의 얼굴을 살핀 구찬익은 꽤 반가운 낯으로 악수를 했다.
【필립 시아마. 프랑스 출신의 영화감독입니다. 2년 전 베를린 영화제에서 로 각본상을 받았습니다.】
‘···!’
유일이 새로운 정보에 놀라기도 잠시, 자연스럽게 세 명 사이에 낀 필립은 엄청난 친화력을 발휘하기 시작했다.
“저번에도 베를린에서 봤던 기억이 나는데.”
“네, 맞아요! 이렇게 만나게 되어 영광입니다.”
필립은 황이원과 악수를 하며 해맑게 말했다.
“반갑습니다. 필립 시아마입니다. ···를 아주 인상적으로 봤습니다.”
살짝 커진 눈으로 고개를 끄덕인 황이원은 정직한 영어로 답했다.
“그걸 봤습니까? 꽤 오래 전 영화인데.”
“좋은 영화들을 찾아 보는 게 제 유일한 취미죠.”
황이원과 대화를 하면서도 자꾸만 유일을 흘끔거리던 필립은 이젠 아예 그를 빤히 쳐다보기 시작했다. 유일은 점차 가까워지기 시작하는 그의 다갈색 눈에 조금 당황했다.
한유일의 앞으로 성큼 다가온 필립이 입을 열었다.
“그··· 정말 죄송하지만, 제가 당신 이름을 정확히 어떻게 발음하면 될까요? 위, 일···? 우읠?”
“‘유일’입니다.”
유일이 빠르게 덧붙였다.
“하지만 편하신대로 부르세요.”
“오··· 그렇군요. 미안합니다. 율.”
【애칭이 되었군요.】
‘···쓸데 없는 말 하지 마.’
“다들 오늘 밤에 있는 애프터 파티에 참여하시나요?”
필립의 물음에 브윈이 설명을 덧붙였다.
【오늘 저녁 예데르 페어눈프트 바(Bar Jeder Vernunft)에서 시작할 예정인 베를린 영화제의 애프터 파티를 의미하는 것 같습니다.】
이는 특유의 세련된 디자인과 고가의 명품으로 유명한 패션 브랜드, 구X가 후원하는 파티였다.
유일의 시선을 받은 구찬익 감독은 고개를 저으며 중얼거렸다.
“번쩍번쩍하고 시끄러운 것들, 딱 질색일세.”
‘···음.’
“감독님은 조용히 쉬고 싶으시다고 하시네요.”
한유일이 구찬익의 말을 순화해서 전달하자, 필립은 아쉬운 얼굴로 외쳤다.
“말도 안 돼. 오늘 밤엔 DJ 니키와 린 킴도 온단 말입니다!”
“···그 사람 은퇴한다고 들었는데.”
그 말에 답한 건 뜻밖에도 황이원이었다.
“와, 당신도 린 킴을 아는 군요? 하지만 은퇴는 아니에요! 킴은 작년부터 다시 앨범을 내기 시작했어요. 아주 멋진 앨범인데··· 잠깐, 바로 들려드리죠.”
【린 킴은 한국 출신의 DJ이자 일렉트로닉 프로듀서입니다. 현재로서 데뷔한 지 약 20년이 되었습니다.】
브윈이 설명하는 사이 황이원과 필립 시아마는 서로 린 킴의 최애곡을 공유하며 그새 제법 가까워진 듯했다.
어느새 높이 떠올랐던 해가 서서히 내려가고 있었다. 베를린 돔과 체크포인트 찰리까지 걸으며 꽤 오랜 시간 산책을 한 탓이었다.
“더 늦으면 곤란하겠습니다.”
황이원의 말에 유일도 고개를 끄덕였다. 필립은 아쉬운 듯 보였으나, 이내 웃어보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