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he Assassin Monarch RAW novel - Chapter 111
111화
아슈 제국, 왕궁에 위치한 대전의 숨겨진 지하실.
벽도 아니고 허공에 벽이 갈라진 것처럼 균열이 크게 나 있다.
힐 아슈의 피로 완전한 통로가 열렸어야 했지만 운명이 뒤틀렸고, 대신 대교주의 피로 작은 균열이 생긴 것이다.
꿀렁 꿀렁.
그곳에서 새까만 점액질이 느릿하게 흘러나왔다. 그것은 바닥에 떨어졌다가 중력을 거스르고 서서히 일어나며 인간의 형상을 만들어 냈다.
“마모트님의 영원한 종이 신의 사자를 뵙습니다.”
론 아슈는 코를 바닥에 박고 두 손을 뒤집어 손바닥이 하늘로 향하게 한 채 정체불명의 그것을 맞이했다.
-Βρήκεςτο κλειδί.
‘열쇠를 찾았느냐?’
머리를 헤집는 그의 목소리에 론 아슈는 높이 든 두 손을 덜덜 떨며 대답했다.
“죄, 죄송합니다. 대륙의 모든 왕국에 요청하였으니 곧 찾아내어 마모트님을 기쁘게 해 드리겠습니다!”
스스스스-.
까만 인간의 형상은 천천히 론 아슈에게 얼굴을 가까이 하였다. 그가 움직일 때는 소름 끼치는 소리가 동반됐다. 마치 수십 마리의 독사가 온몸을 기어 다니는 듯한 소리였다.
-Θα ανοίξω το κλειδίΘα σου ανοίξω το κλειδί.
‘마모트님께서는 실망하셨다. 종들을 불러 원기를 모아라. 내가 직접 열쇠를 열겠다.’
론 아슈는 실망이라는 말에 충격을 받아 휘청거렸다. 최선을 다했다고 반발하고 싶었지만 눈앞의 존재에게는 감히 티를 낼 수 없었다.
그는 그저 가장 충성스러운 목소리로 크게 외칠 뿐이었다.
“천명을 받들겠습니다!”
론 아슈는 돌바닥에 이마를 강하게 내리찍었다. 골이 울리고 피가 줄줄 흘렀지만 그의 눈빛은 강렬했다.
* * *
마물의 기원은 마족의 세계다. 제국 왕궁에 생긴 균열은 마물의 광기와 포악함을 더했다.
판테르 대륙에서 지내면서 온순해졌던 부분이 본래의 모습으로 돌아오고 있는 것이다.
카르마 북문.
-캬하아악!
“끄아악!”
두 팔이 잘린 오크가 진녹색의 피 분수를 뿌리며 덤벼들어 입으로 병사의 얼굴을 물어뜯었다. 놈들을 보고 있자니 두려움과 통증을 담당하는 기관도 결여된 듯했다.
제국의 병사들은 그 악독한 모습에 점점 질려 버렸다.
‘내가 저걸 어떻게 잡아…….’
공포는 전염성이 강하다. 그것은 눈코 뜰 새 없이 빠르게 퍼졌고 수많은 탈주병을 낳았다.
전장의 분위기가 피폐해진 상황, 디마 후작은 북문 성벽 위에서 인간과 마물의 사체가 산더미처럼 쌓인 전장을 내려다보았다.
세뇌에서 풀리기 직전에 자신의 검을 손쉽게 받아 내던 남자가 떠오른다. 그가 만약 이 전장에 함께 있었다면 어떻게 되었을지 저절로 상상이 되었다.
그때 옆에서 쉰 소리가 들려왔다.
“그놈이 있었다면 달라졌으려나…….”
펜릴 백작.
100세가 넘는 나이에 최전방에서 마법사단을 지휘하는, 디마 후작이 지금 이 상황에서 가장 의지하는 마법사이자 인간이었다.
“예?”
“아니, 그냥 늙은이의 넋두리요. 성 주민들은 다 대피했소?”
디마는 잠시 그의 시선을 피했다.
카르마는 제국의 수도, 판테르 대륙에서 가장 인구가 많은 도시다.
주변 귀족들에게 미리 공지했지만 수백만의 주민을 한꺼번에 수용해 줄 곳은 없다. 떠돌이 생활을 하며 받아 줄 영지를 찾다가 상당수가 굶어 죽거나 마물의 먹이가 될 것이다.
거동이 불편한 약자들은 구석에 숨어 두려움에 떨며 최후를 맞이할 것이다.
“아마도…….”
“애매한 대답이구려. 아무래도 여기서 뼈를 묻어야겠구만.”
온순한 대답에 비장함이 깃들어져 있다. 늙은이의 진심에 디마의 심장은 강렬하게 떨렸다. 그는 고개를 돌려 왕궁 쪽을 바라보았다.
“펜릴 백작, 저는 왕궁에 다녀와야겠습니다.”
“예, 편~히 다녀오시오.”
디마는 펜릴을 가만히 바라보았다. 그가 없었다면 버티지 못했을 것이다. 디마는 그에게 존경의 의미를 담아 짧게 묵례하고는 성벽 아래로 내려갔다.
왕궁은 카르마 북문에서 10킬로미터 내외로 말을 타고 가면 금세 도착할 수 있었다.
“디마 후작님 오셨습니까!”
싸늘한 기운을 풍기는 디마 후작의 등장에 병사들은 기겁하며 내성 문을 다급히 열었다.
“디마 후작님 오셨습니까!”
전란의 시대에는 무력이 더욱 피부에 와닿는다. 그렇기에 제국 최고의 무력을 지닌 디마 후작의 발걸음을 감히 방해하는 이들은 없었다.
초고속으로 왕의 대전에 도달한 디마는 대전 문을 양손으로 거칠게 열어젖히고 성큼성큼 걸어가 단상 바로 앞에서 멈춰 섰다.
쿵.
디마는 비장하게 왕 론 아슈에게 한쪽 무릎을 꿇었다.
“디마 경, 전장에서 바쁘게 지내야 할 경이 여기까진 무슨 일이오?”
지금 상황을 강 건너 불구경하듯 말하는 왕의 태도에 디마는 아랫입술을 질끈 깨물고는 고개를 들었다.
“전장의 병사들은 점점 줄어들고 마물의 기세는 드높아지고 있습니다. 귀족들의 사병은 대체 언제 도착하는 겁니까?”
“내 경의 말대로 귀족들에게 요청했소. 그런데 오지 않는 걸 보면 이게 끝인가 보오.”
디마는 분노에 차 자리에서 벌떡 일어섰다.
“거짓입니다! 귀족들을 압박하여 사병들을 더 동원시켜야 합니다! 이곳이 뚫리면 제국의 미래는 없습니다!”
쾅!
디마의 외침에 맞춰 론 아슈도 팔걸이를 주먹으로 때렸다.
“그들이! 반기를 들면 나의 미래는 없소! 지금 같은 전란이 반란의 적기란 걸 모르시오?”
디마는 론 아슈를 노려보았다. 괴변이다. 왕은 마물 군단을 왕궁으로 불러들일 생각이다. 아민이 급박한 때에 붉은달 기사단을 왕궁에 주둔시킨 이유와 상응한다.
“……진정…… 전하의 뜻이 그러하십니까?”
“감히 이 제국의 왕에게 두 번 말하게 할 생각이오? 이만 물러가시오.”
디마는 론 아슈를 두 숨을 쉴 동안 가만히 바라보았다.
궁정 마법사 아민을 스승으로 두어 뼛속까지 세뇌된 가엾은 아이, 그에게 권력이 없고 현재 시간이 많다면 되돌리도록 노력하겠지만 지금으로선 방법이 없다.
척!
디마는 불끈 쥔 오른 주먹을 심장에 강하게 갖다 대어 충성을 표하는 인사를 하고는 뒤돌아서 대전을 나섰다.
같은 날, 먹구름에 달이 가려진 깜깜한 밤.
붉은달 기사단의 병영 로비에 살아남은 기사단이 모두 모였다. 가브와의 전투로 절반이 넘게 죽고 오크 로드와의 전쟁에서 일곱 명을 잃어, 현재는 스물다섯밖에 없었다.
그들 대부분 세뇌에서 풀렸고, 풀리지 않은 자를 구별하기도 힘들었다.
촤라락-.
붉은달 기사단장 디마는 제국의 국기를 들고 와서 바닥에 넓게 깔았다. 그리고 애검을 뽑아 거침없이 손을 베고는 피를 국기에 흩뿌렸다.
“헙.”
“음…….”
그 의미심장한 행위에 기사단원들이 움찔하며 말을 아꼈다.
디마는 고개를 들어 기사단원들을 한 명씩 돌아보고는 비장한 얼굴로 입술을 뗐다.
“나는 오늘, 제국의 태양이 되겠다. 붉은달의 기사들이여, 나와 함께하겠는가.”
처저적, 척, 척!
* * *
세피아 왕국, 제국에서 남쪽으로 스리시미어스 사막을 건너면 가장 먼저 도달하는 왕국이다. 왕국 최북단의 스텐디 마을은 사막을 건너기 위한 상인과 용병으로 항상 붐볐다.
마을 입구에서 병사들이 행인들을 검사하고 있다. 가브는 살짝 미간을 좁혔다가 그들에게 수배지가 없는 것을 보고 가슴을 곧게 펴며 걸음을 옮겼다.
병사는 가브를 힐끔 보곤 손을 내밀며 사무적으로 물었다.
“어디서 오셨소?”
“북쪽에는 제국밖에 없지.”
가브는 대답과 함께 용병패를 꺼내어 보여 주었다. 병사는 그것을 받다가 뒤에 가려져 있던 힐 아슈를 발견하고는 눈이 휘둥그레졌다.
‘그녀의 용모도 알려진 것인가.’
가브는 그 격한 반응에 당황하며 검병에 손을 가져가다가 멈춰 섰다. 병사의 눈빛이 마치 서큐버스에게 홀린 것처럼 멍했기 때문이다.
“저, 저 여인은…… 이, 일행이오?”
그녀의 신분을 나타낼 패는 따로 없었다. 가브는 몸을 움직여 병사의 시선을 가리며 대답했다.
“내 종자요.”
“아.”
병사는 그제야 가브의 용병패를 보곤 입맛을 다시며 그에게 되돌려 주었다.
“들어가시오.”
병사는 은발을 흩날리는 힐 아슈의 뒷모습을 한참 동안 바라보았다.
사막을 건널 파티를 구하거나 급히 거래하기 위해 많은 사람들이 모인 광장에 가브와 힐이 들어서자 사람들의 이목이 확 집중되었다.
“허업.”
“뭐야, 엘프야?”
“자기야, 지금 어디 봐?”
“와…… 씁.”
빛나는 은발의 특유의 신비로운 기운, 엘프를 연상케 하는 힐 아슈의 외모는 남녀를 불문하고 본능적으로 시선을 사로잡았다.
사막을 건너면서 생존에만 집중하느라 생각지 못했던 문제가 발생했다. 가브는 바로 자신의 망토를 풀어 힐의 머리에 덮었다.
“쓰고 있어라.”
“많은 사람들의 시선이 느껴져요. 여긴 재미있는 곳이에요.”
“재미없어.”
폭력이 최고의 권력인 시대에 보호받지 못하는 미인은 득보다 실이 많다. 더 강한 폭력을 지닌 사람에게 이리저리 팔려 다니다가 절명하는 미인들이 대다수였다.
가브는 귀찮은 일을 미연에 방지하기 위해 후드를 구하고 싶었지만, 뒤늦게 돈이 한 푼도 없다는 것을 깨달았다.
“가브 씨, 배고파요.”
베헤모스를 만났을 때는 워낙 급박한 상황이었기에 짐을 하나도 챙기지 않아 주머니에 들어 있던 육포가 식량의 전부였다.
선인장으로 수분을 보충할 수는 있었지만 힐 아슈는 거대 개미나 거대 전갈의 고기를 먹지 못했다. 그 때문에 가브가 또 그녀를 안고 달려 일주일 만에 사막을 건너 스텐디 마을에 도착한 것이다.
“흠…….”
어떻게 돈을 구해야 할지 고민하던 중, 한 무리가 가브 일행에게 다가왔다. 벌써부터 날파리가 꼬이나 싶어 미간을 좁히던 때에 무리의 선두에 선 중년인이 말을 걸었다.
“형씨! 날 기억하시오?”
낯익은 목소리에 고개를 돌려 보니 상인 해롤이 반색하고 있었다.
고급 가죽으로 된 옷이나 뒤에 있는 짐마차, 호위병들의 갑옷을 보니 전보다 성공한 티가 확 났다.
“여기서 또 보는군요.”
가브의 말에 해롤이 한껏 미소를 지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게요! 그때 형씨를 못 만났다면 나는 아마 잘게 잘게 찢어져 개미굴에 저장되었을 것이오! 이보게들! 여기가 내 목숨을 구해 주셨던 은인이야, 은인!”
고용주의 말에 호위병들과 하인들은 억지미소를 지으며 고개를 주억거렸다.
해롤은 정말 반가운지 가브의 어깨를 연신 쓸어내리며 말을 이었다.
“아이고, 이렇게 또 보게 될 줄이야. 정말 네비아 신께 감사하게 되는구려. 아차, 그런데 그때 그 미인과 덩치 큰…… 어헛!”
해롤은 얼굴만 빼꼼 내밀고 천진한 표정으로 눈을 깜빡이고 있는 힐 아슈를 보고는 화들짝 놀랐다. 수많은 도시를 다니며 수많은 사람들을 마주한 해롤도 놀랄 정도로 뛰어난 미인이었던 것이다.
그는 이내 흐뭇한 얼굴로 가브를 다시 보았다.
“형씨도 성공했구만그려.”
꼬르륵.
가브는 소리의 진원지인 힐의 배를 보았다가 다시 해롤에게 시선을 돌리며 진중한 어조로 말했다.
“돈 좀 빌려주시오.”
단도직입적인 가브의 말에 해롤의 얼굴이 순간 굳었다.
상인들은 아무리 목숨을 빚졌어도 돈에는 인색하다. 그 역시 뼛속까지 상인이기에 돈이라는 말에는 뒷걸음부터 치는 것이다.
“그…… 당연히! 빌려드릴 수는 있지요. 그런데 돈이 왜 필요한지 알려 주실 수 있소?”
가브는 가감 없이 필요한 것들을 말했다. 가브 본인과 힐 아슈의 얼굴을 가릴 후드가 달린 가죽코트 두 벌과 크레아 왕국까지 갈 경비였다.
해롤은 자신의 짐마차에 있던 후드 코트와 호밀빵, 물주머니를 꺼내어 주고 경비까지 정확하게 계산하여 주었다.
“……대략 2주…… 두 끼씩이면 두 명이니까 사흘에 2실버씩 9실버……. 아니다. 10실버 드리리다! 생명의 은인인데 이런 것도 못해 드리겠소? 갚으실 필요 없소! 크핫핫!”
10실버는 비싼 음식 한 끼의 값어치다.
그러나 앞으로 만날 일이 없는 사람에게 먹을 식량에 입을 옷에 돈까지 주는 상인은 없다. 가브는 그의 마음을 충분히 느끼고 감사해했다.
그런데 그것으로 끝이 아니었다. 해롤은 가브의 팔짱을 잡아끌며 한 여관으로 데리고 갔다.
“우리도 이제 막 출발해야 해서 마지막 한 끼는 든든하게 먹이려고 했소. 같이 가시죠! 꼭 한 번 식사를 대접하고 싶었소.”
“저는…….”
“예! 같이 가요!”
조그마한 주먹을 턱 아래까지 들어 올려 꼭 쥐고 대답하는 힐의 모습에 해롤은 함박웃음을 터트리며 앞장서서 갔다.
“우와…….”
언제나 평온했던 힐 아슈도 일주일을 굶고 나서 맡는 음식의 냄새에는 절로 감탄사를 흘렸다.
그렇게 오랜만에 따뜻한 죽과 뜨끈한 국물, 야들야들한 고기를 뜯고 있는 중이었다.
쾅!
여관 문이 거칠게 열리며 시커먼 무리가 들어왔다. 그 선두에 금덩이를 주렁주렁 달고 있는 중년인이 느끼하게 미소를 지으며 이죽거렸다.
“어이, 대머리 해롤. 내 물건 처먹고 잘 지내셨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