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he Blood Knight's Villains RAW novel - Chapter (180)
나의 악당들 180화
42. 굴레(12)
“네가 아틸리아구나?”
아틸리아는 아득해져 가는 정신으 로 눈앞의 여인이 누구인지 떠올리 려 애썼다.
“……커헉, 프흐으.”
그녀는 피가 섞인 기침을 뱉으며 눈을 깜빡거렸다.
그리고 이내 그녀는 앞에 나타난 여인과 만난 것이 지금이 처음이라 고 확신했다.
이유는 간단했다. 눈앞의 여인은 같은 여인이 봐도 잊지 못할 만큼 아름다웠으니까.
“포이닉스와는 절친한 사이라고 들 었어.”
여인이 포이닉스를 거론하자, 멍하 니 풀려가던 황금빛 눈동자가 요동 쳤다.
“서로 목숨도 구해줬다며.”
아틸리아가 금방이라도 숨이 넘어 갈 듯 헐떡거리고 있는 것과는 달리 절세의 미녀, 헤일라는 소풍을 나와 책이라도 읽는 것처럼 느긋하기 그 지 없었다.
“둘 사이가 친구 이상일 거라는 이 야기도 있던데.”
조용한 상대를 앞두고 혼자서 떠드 는 것. 헤일라로서는 썩 드문 일이 었다.
그녀는 말하기보다 듣기를 즐겼고, 뽐내기보단 관찰하기를 즐겼다. 그 래서인지 겉보기와는 달리 친화력이 썩 좋은 편이어서 어딜 가든 자신의 사람을 만드는 재주가 있었다. 아틸 리아에 대한 이야기를 알게 된 것도 그 재주 덕이었다.
“사실이야?”
아틸리아는 또다시 밭은기침을 뱉 었다. 그 기침 탓일까? 그녀의 눈에 물기가 차올랐다.
“……너언, *흐으* 무, 뭐야.”
“헤일라. 포이닉스의 약혼녀.”
아틸리아의 호흡이 조금 거칠어졌 다.
헤일라는 그녀를 빤히 내려다보다 가 손을 뻗었다. 내장 조각과 피가 고여있는 옆구리의 구멍을 향해서였 다.
그러나 헤일라의 섬섬옥수가 피에 물드는 일은 없었다. 그녀는 적당히 떨어진 거리에서 마력을 끌어올렸 다.
天 天츠
———7、、•
붉은 피가 구슬이 되어 뭉쳐가자 헤일라는 말안장에서 상처치료의 물 약을 꺼내어 상처에 부어주었다.
“으으-”
부글거리는 소리와 함께 매캐한 냄 새가 퍼져나갔다. 헤일라는 아틸리 아의 피를 조종해 생명력을 북돋는 동시에 마법 물약이 효과적으로 퍼 지도록 유도했다…….
“너!”
날카로운 목소리에 헤일라가 천천 히 고개를 돌렸다. 용병들 사이에 선 엘렌이 그녀에게 완드를 겨누고 있었다.
“지금 뭐 하는 거야?”
“상처를 치료해 주고 있는데.”
“……얼빠진 소리 집어치워!”
헤일라가 가만히 눈을 깜빡거렸다.
포이닉스와 닮은 듯 전혀 닮지 않 은 시선. 엘렌은 이를 악물었다.
“그년은 배신자야. 관문을 무너뜨리 고 사람을 수백 명이나 죽였다고!”
“알아.”
“그런데 왜-”
“가치가 있으니까.”
“……가치, 라고?”
“응. 살려둘 가치.”
상처치료의 물약과 경지에 이른 혈 조술에 힘입어 아틸리아의 옆구리는 금세 아물어갔다. 그 치료 과정이 썩 고통스러웠는지 아틸리아는 어느 새 기절해버렸다.
어깨와 왼팔의 부상은 여전히 심각 했지만 이 정도면 얼마쯤은 버틸 수 있으리라고, 헤일라는 판단했다.
“아미아스, 스티드먼.”
“••••••어, 네?”
“이리 와.”
조용한 깜빡거림, 느긋한 말투.
그럼에도 아미아스와 스티드먼은 헤일라의 명령을 거스를 수가 없었 다. 그녀가 얼마나 무시무시하고 고 귀한 존재인지 잘 알고 있었던 탓이 다. 덤으로, 영주관에 머무른 며칠간 친분 아닌 친분을 쌓은 것도 있었 고.
아미아스와 스티드먼은 헐레벌떡 달려가더니 헤일라가 시키는 대로 아틸리아를 흑마에 실었다.
“하! 지금 뭐 하는,”
어이가 없어 헛웃음을 터뜨린 엘렌 이 두 용병을 꾸짖으려던 차,
“뭣들 하느냐!”
관문의 잔해 위에 서 있던 청년, 도일이 빽 고함을 질렀다.
지휘관으로 보이는 중년의 사내가 그를 만류했지만, 도일은 이미 제정 신이 아니었다.
“가만히 서 있지만 말고, 더 밀어 붙여-!”
아버지인 트리스탄 백작에게서 빌 린 병력 중 3할을 잃었고, 기사 아 흡과 파괴술사 넷이 죽었다.
평소 탐내던 누데인족 계집은 제멋 대로 날뛰다 반송장이 되어버렸고, 뜬금없이 나타난 여인은 살면서 본 그 어떤 미녀보다도 아름다웠다.
그래서 도일은 핏발이 선 눈으로 병사들에게 명령했다.
“아직도 귀가 먹었나! 적들이 지리 멸렬하고 있잖으냐! 계속 공격해!”
그 말대로 롱빌군의 방어선은 이미 무너진 것이나 다름없었다.
북쪽의 목책 근처는 랭볼트 경이 아직도 활약하고 있어 그나마 상황 이 나았지만, 중앙과 남쪽에 해당하 는 구역엔 병사들이 거의 남아있지 않았다.
아틸리아의 폭주에 꼬리를 말고 도 망쳤던 병사들이 서로 눈을 마주쳤 다. 웅성웅성, ‘할 만한가?’ 따위의 대화가 낮게 오갔다.
그렇게 분위기가 반전되고 있음에 도 도일은 분노를 금치 못했다.
“이놈들이- 감히 눈치를 봐!”
“공자님, 잠시만 기다려주십시오. 지금은 후방의 문제부터 처리한 뒤 에,”
“이익, 이거 놔라!”
짜악!
그는 자신을 만류하는 중년의 지휘 관, 앵거스의 따귀를 후려치곤 병사 들을 향해 악을 써댔다.
“아버지 각하께서 여기에 계셨더라 도 네놈들이 망설였겠느냐! 어서 돌 격해-!”
병사들이 퍼뜩 정신을 차렸다.
트리스탄 백작은 23년간의 통치로 마르바 지방을 크게 번성시킨 대영 주이자 모든 병사들이 존경해마지않 는 주군이었으니까.
이내 하사관들의 지휘하에 대열을 정비한 병사들이 롱빌군의 방어선을 향해 돌진하기 시작했다.
“이봐, 너!”
“예, 공자님!”
도일이 가까이에 있던 젊은 부관에 게 명령했다.
“가서 저 계집, 아니, 아가씨를 잡 아 와.”
“아가씨라면, 저 혹발의 여인 말입 니까?”
“그래. 차림새를 보아하니 고귀한 신분인 것 같으니, 곱게 모셔오도 록.”
“……알겠습니다.”
도일의 눈빛에서 번들거리는 정욕 을 읽어낸 부관은 똥 씹은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인 뒤 병사들 틈으로 사 라졌다.
그렇게 기세 좋게 시작한 돌격은 시작하자마자 뜻밖의 난관을 맞았 다. 도일이 빽빽거릴 때부터 주문을 준비한 엘렌이 기다렸다는 듯 화염 구를 던진 것이다.
“Lum—fere(터—져라)!”
짜랑거리는 목소리와 함께 화염구 가 뮬팅엄군의 선두에 작렬했다.
꽝-!
“꼬아악!”
“뜨거, 뜨거워-”
순식간에 스무 명도 넘는 병력이 폭발에 휘말리자, 하사관들은 이를 악물고 병사들을 산개시켰다.
그 모습을 본 롱빌군이 용기백배하 여 방어선을 수습했다. 그러나 그 방어 준비는 결과적으로 헛수고가 되었다.
헤일라가 나섰기 때문이다.
자신을 향해 달려드는 병사들을 바 라보며 그녀는 품에서 한 쌍의 벨벳 장갑을 꺼냈다.
느긋한 동작으로 끼워진 장갑의 손 등 부분에는 마름모 문양이 다섯 개 새겨져 있었다. 꼭 하얀 꽃을 모사 한 것만 같았다.
헤일라가 오른 검지를 앞으로 뻗자 다섯 꽃잎, 아니, 마름모 문양 중 하나가 빛을 내었다.
우웅.
작은 울림과 함께 마름모 문양이 검지 쪽으로 흘러갔고, 검지의 끝에 이르러선 하얀빛을 내뿜는 탄환이 되어,
퉁!
앞으로 쏘아졌다.
“켁!”
선두로 달려오던 병사의 명치에 동 전만 한 구멍이 생겼다.
헤일라가 ‘은하수의 장갑’으로 쏘 아낸 ‘별의 탄환’은 거기서 멈추지 않았다. 병사 두어 명을 더 관통한 뒤에야 관문의 잔해인 커다란 돌덩 이에 처박힌 것이다.
이어서 헤일라는 왼손을 들었다.
이번에도 마름모 문양 하나가 번쩍 이더니 별의 탄환이 쏘아져 나갔고, 너덧 명의 병사들을 꿰뚫었다.
퉁- 퉁, 퉁!
흑발의 미녀가 무표정한 얼굴로 별 의 탄환을 쏠 때마다 병사들이 비명 을 내지르며 나자빠졌다.
“마, 마법이다!”
“궁수!”
어느 하사관의 고함에, 궁수들이 허겁지겁 시위에 화살을 메겼다. 그 러자 궁수들보다도 뒤에 서 있던 도 일이 펄쩍 날뛰었다.
“누가 화살을 쏘라고 했나! 상처 없이 제압해!”
“이 등신 같은 새끼가,”
“뭐라고? 감히 누가-”
분노한 도일이 뒤돌아보자, 얼굴이 벌게진 지휘관이 냅다 주먹을 휘둘 렀다.
쩌억!
지휘관 앵거스는 전장에 잔뼈가 굵 은 중년의 베테랑이다. 그의 주먹 한 방에 귀족 도련님인 도일은 허물 어지듯 쓰러지고 말았다.
“이딴 멍청한 새끼를 위해서 전쟁 을 벌여야 한다니.”
“애- 앵거스 님! 아무리 그래도 공자님을,”
“뭐.”
지휘관 앵거스의 으르렁거림에, 근 처의 장교 몇이 놀란 표정을 지었 다. 앵거스는 바닥에 탁, 침을 뱉으 며 고함을 질렀다.
“공자님께서 쓰러지셨다! 뒤쪽으로 끌고 가!”
장교 중 몇이 당황한 표정을 지었 지만, 이내 안색을 회복하고 얼른 고개를 끄덕였다.
“아, 알겠습니다!”
“궁수 놈들은 뭘 하고 있나! 화살 쏟아부어-!”
애석하게도 그의 명령은 너무 늦은 것이었다.
신선한 시체가 서른 구도 넘게 추 가된 전장에서, 헤일라는 구슬을 굴 리고 있었다. 아틸리아를 치료하면 서 빼낸 피로 만든 구슬이었다.
츠츠츠 _
구슬이 회전하며 전장의 피를 끌어 당겼다. 죽은 자들의 피가 하늘로 솟구치며 구슬로 모여들었다.
“꺼으윽, 이게, 이게 뭐야!”
“어으, 어어, 아파, 아파-”
별의 탄환에 상처를 입은 자들은 제 심장을 조여오는 통증에 발버둥 을 쳐댔다.
그들의 필사적인 몸부림에도 불구 하고, 헤일라의 마력에 장악당한 피 는 원주인의 몸을 떠나 구슬을 향해 치솟았다. 산 채로 피를 빼앗긴 병 사들은 몸을 사시나무처럼 떨며 죽 어갔다.
“어어, 이건 대체-”
기현상에 스티드먼이 말을 더듬자 헤일라는 그를 돌아보며 명령했다.
“뒤쪽으로 물러나 있어.”
“에, 예?”
“어서. 말도 끌고 가.”
그녀의 명령에, 아미아스와 스티드 먼은 아틸리아를 실은 흑마를 끌고 방어선 안쪽으로 도망쳐왔다.
롱빌군 병사들은 입을 쩍 벌리고 끔찍한 풍경을 지켜만 보고 있었다. 방금까지 주문을 외던 엘렌도 마찬 가지였다.
“••••••미친.”
헤일라의 구슬이 회전하며 사방의 피를 휩쓸어 모으는 모습에 엘렌은 엉뚱하게도 분수를 떠올렸다.
안에서 바깥쪽으로 흩뿌려지는 것 이 아니라 바깥에서 안으로 모여드 는, 물 대신 피가 흐르는 분수.
화창한 가을의 햇살이 피 분수에 산란하며 무지개를 그렸다. 섬뜩하 고도 아름다운 풍경이었다…….
뮬팅엄군의 궁수들이 화살을 우수 수 쏟아낼 무렵, 피의 구슬은 구슬 이 아니라 커다란 원반이 되어있었 다.
피를 충분히 그러모은 원반은 제멋 대로 모양을 바꾸었다. 그러곤 망토 처럼, 날개처럼, 커튼처럼 헤일라의 어깨 위에 드리워졌다.
헤일라는 가만히 눈을 깜빡이며 작 게 손부채질을 했다. 그 부드러운 손길에 그녀의 망토가, 날개가, 커튼 이 거세게 요동쳤다.
콰아아-
방어선을 향해 돌격하던 어느 병사 는 움찔 목을 움츠리고 말았다. 사 위가 순식간에 어두워졌기 때문이 다.
병사는 슬쩍 고개를 들었다가 쩍하 니 입을 벌리고 말았다. 머리 위로 붉은 파도가 치며 태양을 가리고 있 었던 것이다.
“……오, 주 광명이여.”
그의 중얼거림이 끝나자마자 붉은 파도는 헤일라를 향해 날아들던 화 살을 집어삼킨 뒤 땅을 향해 비를 쏟아내었다.
콰가곽!
혈액의 빗방울은 한줄기 한줄기가 화살 내지는 작살이라도 된 듯 바닥 을 기던 병사들을 마구 난도질했다.
“으아아악!”
“살려줘, 살려주세요-”
“꺼흑, 꺼어억,”
붉은 지붕에서 피보라가 터질 때마 다 그 아래에 모여있던 병사들이 우 수수 쓰러졌다. 그러면 죽은 병사들 이 뿜어낸 피가 하늘로 솟구치며 구 멍 난 지붕을 보수했다.
끔찍한 순환이었다.
“흐으, 도망쳐어억!”
누군가의 비명과 함께 병사들이 전 의를 잃고 흩어졌다. 붉은 지붕이 없는, 푸른 하늘을 볼 수 있는 곳을 향해 뛰고, 구르고, 기어갔다.
한 뼘 빛을 향해 도망치는 그 병 사들을 헤일라는 놔주지 않았다.
“어윽?”
“내 발, 발이-”
바닥에 흥건한 피가 병사들의 발목 을 붙들었다.
‘발목을 붙들었다’라는 표현은 비 유 같은 것이 아니었다. 곳곳에 고 인 피 웅덩이가 마치 아가리를 벌리 듯 솟아오르더니 병사들의 발을 집 어삼킨 것이다.
“ o o o
하늘에는 붉은 지붕, 땅에는 피의 늪지대.
어느 화창한 가을날 펼쳐진 지옥은 247명의 병사를 하나도 빠짐없이 집어삼켰다…….
쏴아아-
헤일라는 일대에 드리운 망토 자락 을 회수했다.
얼굴을 일그러뜨린 채 땅에 몸을 뉜 병사들은, 그토록 바라던 푸른 하늘이 위에 펼쳐져 있었건만 미동 조차도 하지 못했다.
헤일라는 슬쩍 고개를 들어 관문의 잔해 위를 살폈다. 지휘관 앵거스와 장교들, 궁수들은 이미 후퇴한 뒤였 다.
그녀는 가만히 눈을 깜빡거리다가 천천히 몸을 돌렸다.
새까만 시선에 엘렌은 조용히 마른 침을 삼켰다.
헤일라는 여전히 붉은 망토를 펄럭 이고 있었다. 지금도 어지간한 건물 하나는 쉽사리 덮을 만한 면적이었 지만, 방금 펼쳐진 지옥을 떠올리면 상당히 쪼그라든 상태였다.
그러나 그것이 약해졌다는 뜻은 아 니었다.
피의 망토는 힘있게 맥동하고 있었 으며, 느껴지는 마력도 전과 같이 강렬하기 그지없었다.
또한 새까만 머리칼은 향유를 바른 듯 윤기가 흘렀고, 양 볼은 꽃이 핀 듯 혈색이 감돌았으며, 입술은 이슬 을 머금은 듯 촉촉했다.
엘렌은 헤일라를 마주 보다가 가만 히 눈살을 찌푸렸다. 그녀가 전보다 더 아름다워 보인 탓이다.
‘•…”설마.’
순간 끔찍한 발상이 엘렌의 머릿속 을 스쳤다.
‘아니, 안 돼.’
하지만 그녀는 얼른 의심을 털어내 었다. 눈앞의 헤일라를 의심하는 것 은, 자신이 세상에서 가장 소중히 여기는 남자를 의심하는 것이나 마 찬가지일 테니까.
그렇게 마음을 다잡는 엘렌에게 헤 일라가 다가왔다.
천천히 깜빡이는 눈과 느긋한 걸음 걸이도 그녀의 존재감과 위압감을 줄여주지는 못했다. 주변에 모인 용 병, 병사들은 뱀과 마주친 개구리처 럼 바짝 몸을 굳혔다.
엘렌은 조그만 주먹을 꽉 움켜쥐며 애써 태연한 얼굴을 했다.
“신분을 숨기고 싶어 하는 것 같더 니, 이젠 포기했나 봐?”
“이걸 혈조술이라고 생각하는 사람 이 있을까?”
“물론. 결국 소문은 퍼질 테고, 알 만한 사람들은 눈치를 챌 거야.”
헤일라는 가만히 고개를 주억거리 다가 입을 열었다.
“그럴 수도. 상관없어.”
“……상관없다고?”
“신분을 숨기는 것보다 더 중요한 일이 있다는 걸 깨달았거든.”
“더 중요한 일‘?”
«으 » 흐*
다리를 다쳤을 때 성약을 쓴 덕인 지 엘렌은 지난 몇 개월간 키가 3 센티쯤 컸다. 그런데도 지금 엘렌 앞에 선 헤일라는 한참 높은 곳에서 그녀를 내려다보고 있었다.
아니, 한참 높은 곳은 아니었다.
엘렌이 위압감을 느낀 탓에 헤일라 가 실제보다 커 보이는 것이었다.
헤일라는 눈을 깜빡일 뿐, 추가적 인 설명을 할 생각은 없어 보였다.
결국, 다시 입을 연 것은 엘렌이었 다.
“그게 뭔데?”
“그거?”
“신분을 숨기는 것보다 더 중요한 일 ”
“ 아.”
헤일라는 잠시 고개를 숙이며 손에 낀 장갑을 매만졌다. 남아있는 마름 모꼴 문양은 왼손에 3개, 오른손에 2개뿐이었다.
상관은 없었다. 달 밝은 밤이면 금 세 별빛을 머금어 새로운 꽃잎을 피 워낼 테니까.
“……운명을 지키는 일.”
“운명?”
오 O ” “〒
“그게 무슨 뜬구름 잡는 소리,”
미간을 찌푸리고 있던 엘렌은 순간 입을 다물었다. 일전에 헤일라가 했 던 말을 기억해낸 것이다.
-우리의 아이는 혈기사들을 휘몰 아 대륙을 정벌할 거야. 진정한 혈 왕이 되어서. 그게 우리의 운명이야.
그 말과 함께 아무런 감정 없이 타오르던 눈동자도 떠올랐다.
“설마, 너.”
“그래서 네가 필요해.”
“뭐?”
“가치가 가장 높은 게 너니까.”
엘렌은 유리알처럼 번쩍이는 눈을 빤히 올려다보았다. 그러다가 순식 간에 마나를 끌어올려 ‘바람주먹’을 전개했다.
“Ictum(부서져라)!”
완드의 지휘에 따라 거센 바람이 휘몰아치며 헤일라를 덮쳐갔다. 그 러나,
터엉
허공에서 너울거리던 피의 망토가 순식간에 바람주먹을 막아섰다. 그 리고 거의 동시에 엘렌을 덮쳐갔다.
“멈춰!”
궁수 콜이 재빨리 활시위를 당겨 헤일라의 눈을 겨누었다. 날카로운 화살촉을 마주하고도 헤일라는 아무 런 동요도 없었다.
“화살로는 날 못 막아.”
“닥치고 물러서기나 해.”
“흐음.”
헤일라가 조그맣게 콧소리를 내자, 콜은 위쪽을 홀긋 살폈다. 어느새 엘렌은 피의 망토 안쪽에 대롱대롱 매달려 있었다.
“끄으윽-”
두꺼운 핏줄기가 그녀의 목과 허 리, 양팔을 조이고 있었다. 엘렌의 상태를 확인한 콜은 침착한 기색으 로 말을 이었다.
“잠깐.”
“음?”
“대충 무슨 상황인지 알겠습니다. 포이닉스 님을 원하시는 겁니까?”
“장담컨대, 이런 방법으론 절대 좋 은 꼴을 못 볼 겁니다. 포이닉스 님 이 당신을 찢어 죽이려 하실 테니.”
헤일라가 가만히 눈을 깜빡이자 콜 이 얼른 말을 이었다.
“덕분에 저희와 엘렌 님이 목숨을 건졌으니, 지금 공녀님은 기회를 잡 으신 겁니다. 포이닉스 님은 상벌이 명확한 분입니다. 게다가 공녀님은 아름다운 분이니-”
퉁.
말을 하다 말고, 콜은 시위를 놓았 다. 피의 망토에서 솟아난 거대한 가시가 그에게 쇄도했기 때문이다.
“끄으윽!”
붉은 가시의 끄트머리가 그의 어깨 줄기를 관통했다. 마치 박제된 곤충 처럼 땅에 박힌 콜을 보고, 무기를 꼬나쥐고 있던 동료들이 고함을 내 지르며 달려들었다.
“이게 무슨 짓이야!”
“이런, X팔-”
아미아스와 스티드먼, 미라가 무기 를 악을 쓰며 덤벼들었지만, 피의 망토에 휩쓸려 멀찍이 날아가고 말 았다.
헤일라는 가만히 볼을 쓸어 만졌 다. 화살촉이 긋고 지나간 자리에서 솟아난 피가 벨벳 장갑을 어둡게 물
들였다.
그녀는 콜에게 다가갔다. 피의 망 토가 마구 요동치며 수십 개의 가시 가 불거져 나왔다.
콜이 오른손으로 허리춤을 더듬어 단검을 뽑아 들자, 또 다른 가시가 튀어나와 그의 손등을 찍어버렸다.
“꼬아악!”
“귀족을 대할 때는 입을 조심해야 지.”
“으, 이런 개 같은 년-”
w O 으”
—“S’.
세 번째, 네 번째 가시가 콜을 꿰 뚫었다. 그는 입에 거품을 문 채 몸 을 뒤틀 뿐, 비명도 제대로 지르지 못했다.
깜빡임이 멎은 눈동자가 콜을 한참 내려다보았다.
“……예외를 둘 수는 없지.”
“흐으, 흐-”
“원칙은 중요하니까. 그보다 중요 한 게 감정이고.”
혼자 무어라 말을 되뇐 헤일라는 느긋이 걸음을 옮겨 흑마에 올라탔 다. 안장에 실려있던 아틸리아 역시 피의 망토에 매달렸다.
“ 아.”
고삐를 치려던 헤일라가 콜을 내려 다보며 물었다.
“야만인은 어디에 있어? 이름이, 하탄카 우테콰이라고 했나.”
“……아, 하탄카 씨?”
콜은 드물게도 씩 미소를 지었다.
“엿 먹어. 네 애비에게 가서 물어 보던가.”
다섯 번째 가시가 입을 비집고 들 어가 볼을 꿰뚫었다.
찢어지는 비명을 뒤로하고, 헤일라 는 고삐를 채쳤다. 관문과 목책의 잔해 너머, 아까 전부터 폭음이 들 려오는 곳을 향해서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