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he Blood Knight's Villains RAW novel - Chapter (189)
나의 악당들 189화
막간. 이방의 전사들
‘서던쇼어’는 왕국의 동부 해안가 에 위치한 지방이다. 동방과의 무역 과 각종 수산업이 번성한 덕에 상당 히 부유한 영지로 여겨진다.
서던쇼어에서도 바다를 면한 일대 를 ‘코트 쉬탕’이라 불렀다. 코트 쉬 탕은 이 지방의 고어로 ‘따뜻한 해 안’이라는 뜻이었다.
그 이름답게, 코트 쉬탕은 시월 한 가을에도 포근하기 그지없었다. 덕 분에 가도를 따라 여행하는 열댓 명 의 무리는 가벼운 차림새를 하고 있 었다.
신분도 출신도 각양각색인 여행객 무리 사이에서 초록색 눈동자와 까 만 머리칼을 가진 십 대 후반의 소 년이 툴툴거렸다.
“냄새 때문에 숨을 못 쉬겠어.”
망토 자락을 여며 코를 가린 것도 잠시, 그는 짜증스레 망토를 풀어헤 쳤다.
“게다가 쓸데없이 덥고, 바람도 끈 적거려. 정말 개 같은 곳이야.”
옆에서 걸음을 옮기던 소년의 누 이, 시렌이 쓴웃음을 지었다.
“에단, 투덜거리지만 말고 여행을 즐기려고 해봐. 우리가 언제 또 이 쪽 지방에 와보겠니?”
“즐기는 것도 하루 이틀이지, 벌써 사흘째 걷고 있잖아.”
“고작 사흘이겠지. 오늘 저녁이면 래덴키에 도착한다고 하니까, 조금 만 힘내.”
시렌의 타이름에도 에단은 여전히 불만스러운 얼굴이었다.
“그러게 내 말대로 배를 탔으면 진 즉에 도착했을 텐데. 누나가 고집 부려서 이게 무슨 고생이야.”
“아리아드 경이 해준 말 기억 안 나? 근처에 해적들이 창궐해서 난리 니 조심하라 하셨잖아.”
“그깟 해적 놈들이 무서워서 배를 못 탄다니, 그게 말이 돼?”
그 말에 남매의 뒤를 따르던 드루 이드 자나바스가 웃음을 흘렸다.
“그깟 해적 놈들? 아주 자신만만한 걸. 트롤이나 아누파드 군대에 비하 면 해적은 우습다, 이거지?”
“……그런 말 한 적 없어.”
“아하, 그래?”
에단이 입술을 샐쭉이 내밀자 자나 바스가 팔을 뻗어 소년의 머리칼을 헝클어뜨렸다. 에단은 ‘이익’ 하고 인상을 찌푸리며 팔을 휘저어댔다.
라오 가문의 마법사 남매와 젊은 드루이드는 포이닉스 일행과 함께 롱빌을 떠났다.
포이닉스의 소개 덕에 울카르의 기 사들과 여정을 함께할 수 있었던 바, 서던쇼어까지의 여정은 썩 안전 하고 신속했다.
시렌 일행이 울카르의 기사들과 헤 어진 것은 사흘 전, 북과 동으로 나 뉜 갈림길에서였다.
랭볼트와 아리아드, 그리고 두 기 사를 따르는 기병들은 서던쇼어의 주도 ‘오버록’으로 향했다. 시렌 일 행의 여정은 항구도시 ‘래덴키’가 있는 방향인 동쪽으로 이어졌다.
한편, 시렌은 해적의 창궐에 대하 여 염려가 된다는 듯 말하긴 했지만 솔직히 별걱정은 없었다.
그들 일행은 수많은 사람들이 오가 는 가도를 걷고 있는 데다 여차저차 하여 끼어들게 된 무리엔 용병이 다 섯이나 포함되어 있었다.
게다가 시렌 자신과 동생인 에단은 롱빌에서의 경험 덕에 전투에 꽤 익 숙해졌고, 자나바스도 제 몸 하나쯤 은 지킬 수 있는 사내였다.
그러니 고작 잡졸들 때문에 목숨이 위험해질 일은 없으리라고 여겼다.
그런 생각이 깨진 건 가도를 가로 막은 해적들과 마주한 직후였다.
“매복이다!”
“조심해!”
용병들의 고함과 함께 길가에서 일 단의 해적 무리가 나타났다.
“Sha(죽여)-!”
“Ba nur6n men jiilhu6(계집들은 살려둬)!”
해적들은 언뜻 봐도 수십 명은 넘 어 보였다.
시렌은 처음 들어보는 낯선 언어와 기이한 생김새, 허름한 옷차림과 커 다란 대도를 보고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저, 저놈들이 왜 여기에-”
“동방의 해적이다! 도망쳐!”
그 비명과도 같은 외침과 함께 여 행객 무리는 단숨에 흩어졌다.
리드번에서 온 상인들은 곧장 뒤를 돌아 달려갔지만, 어느새 나타난 해 적들에게 사로잡혔다. 왼편의 언덕 을 넘어 도망치려던 용병들은 경사 를 반도 오르지 못하고 뒤를 잡혀 끔찍하게 살해당했다.
“시렌, 에단, 이쪽으로!”
자나바스는 일행을 바다 쪽으로 이 끌었다.
해적을 피하고자 바다 쪽으로 도망 치다니, 일견 멍청하기 짝이 없는 행동 같았다. 하지만 동부 해안 특 유의 거친 바위들 덕에 일행은 잠시 나마 해적들의 추격을 뿌리칠 수 있 었다.
“Stige opp(일어서라)!”
시렌이 점토 인형을 던지며 주문을 외자, 조개껍질이며 따개비 따위를 잔뜩 박은 골렘이 몸을 일으켰다.
골렘이 해적들을 막아선 사이, 일 행은 정신없이 달음박질을 쳤다. 제 멋대로 생긴 바위들은 하나같이 물 기를 잔뜩 머금고 있었기에 시렌과 에단은 몇 번이고 발을 헛디디며 나 자빠졌다.
그렇게 도망치기도 잠시, 일행은 숨을 몰아쉬며 멈춰섰다.
“허억, 후우-”
“••••••허, 이런.”
자신의 앞에 펼쳐진 풍경에 자나바 스는 탄식을 흘리고 말았다.
거센 파도가 헤아릴 수 없는 세월 동안 등을 두드려 댄 탓일까? 일행 이 밟고 선 거대한 바위는 층층이 쌓인 속살을 훤히 내보이고 있었다.
해안절벽 위에 선 시렌 일행은 오 도 가도 못한 채 시퍼런 바닷물만 내려다보았다.
“Nubian(저기다)!”
“Baowei tamen(놈들을 포위해)!” 대머리 장한의 고함에 해적들이 시 렌 일행을 둘러쌌다. 슬금슬금 모여 든 해적들은 어느새 6, 70명쯤으로 늘어나 있었다.
자나바스는 단창을 들어 두 마법사 앞을 가로막았고, 시렌과 에단은 즉 시 주문을 외기 시작했다.
마법사들이 주문을 외는 모습을 보 고 해적들이 득달같이 달려들었다. 아니, 그러려고 했다.
철컥, 쩔그럭-
절묘한 순간에 울려 퍼진 묵직한 금속음이 해적들의 발목을 잡아챘 다. 해적들은 물론이고 시렌 일행 역시도 요란스러운 기척을 향해 시 선을 돌렸다.
절거덕, 츠컥.
한 인영이 해적들 뒤쪽에서 모습을 드러내었다. 언제 접근해 왔는지도 모를 인영을 돌아보며 해적들은 인 상을 찌푸렸다.
인영은 기묘한 존재감을 풍겼다.
그는 칙칙한 망토를 두르고 있었는 데, 언뜻 보아도 단단한 갑옷을 받 쳐입고 있는 것으로 보였다. 후드를 깊이 눌러쓴 탓에 망토 사이로 보이 는 것은 비죽 튀어나온 한 쌍의 칼 손잡이와 강철로 만든 장갑, 정강이 받이, 발덮개가 전부였다.
‘……엄청 크잖아.’
에단은 양손에 룬 조각을 꼭 쥔 채 인영을 살펴보았다.
소년이 지금껏 살아오며 본 사람들 중 가장 거대한 이는 ‘붉은 곰’ 우 테콰이였고, 두 번째는 ‘피투성이 검사’ 포이닉스였다.
지금 해적들 뒤에서 나타난 인영은 그중 포이닉스와 비견될 만큼 키가 컸으며 어깨도 널찍했다.
척.
인영이 우뚝 걸음을 멈추었다. 아무런 미동도 없었다. 하지만 그 가 주변을 훑어보고 있음을, 에단은 직감할 수 있었다.
뒷걸음을 쳐 망토를 쓴 인영에게서 멀어진 해적들 사이에서, 대머리 장 한이 얼굴을 시뻘겋게 물들이며 입 을 벌렸다. 그러나 그가 무어라 외 치기 직전에 인영이 먼저 입을 열었 다.
“Ae, dirldi(어이, 드루이드).”
드루이드 자나바스는 깜짝 놀라 눈 을 휘둥그렇게 떴다.
뜬금없이 나타난 인영이 전혀 예상 치 못한 언어를 구사한 데다 그 목 소리가 여성의 것이었기 때문이 다…….
“Ban nghero(안 들리냐)?”
조금 짜증이 섞인 듯한 목소리에, 자나바스가 마른침을 삼키며 입을 열었다.
“……당신은 누구십니까?”
“오. 역시 초원의 말을 하는군.”
수십 명의 해적들이 주변을 둘러싸 고 있었지만, 그녀의 목소리는 태연 하기 그지없었다.
“냄새를 쫓아온 보람이 있어.”
“냄새라고 하셨습니까?”
“뭐, 그건 됐고. 너한테 몇 가지 질문할 게 있는데.”
여인의 태평한 말에 자나바스는 주 변을 슬쩍 훑어보며 되물었다.
“……이 상황에서 말입니까?”
“이 상황이 왜?”
자나바스가 속으로 황당함을 삼키 는 人}이, 참다못한 대머리 장한이 빽 고함을 질렀다.
“Sha(죽여)-!”
그의 명령에 동방의 해적들이 무기 를 치켜들며 인영에게 덤벼들었다.
“에이씨.”
키 큰 여인은 귀찮다는 듯 혀를 찼다. 그리고는 허리춤에서 장검 두 자루를 뽑아 양손에 나눠 쥐었다.
길쭉한 장검 한 쌍은 서로를 쌍둥 이처럼 빼닮아 있었다. 다른 것은 오직 하나, 칼날의 색깔뿐이었다.
검고 하얀 한 쌍의 검을 쥔 여인 에게 해적들이 덤벼들었고,
강철의 폭풍이 휘몰아쳤다.
절거덕, 척.
여인이 코앞까지 다가왔지만, 시렌 일행은 미동도 하지 못했다.
자나바스는 눈동자만 움직여 여인 이 남긴 붉은 발자국을 되짚어갔다. 일흔 명이 넘던 해적 중 절반이 너 덧 호흡 만에 조각나 살덩어리가 되 었다. 나머지 절반은 벌레들처럼 사 방으로 도망쳤고. 여인은 구태여 그 들을 쫓지 않았다.
“어이, 드루이드.”
그녀의 쌍검은 방금보다 더 서로를 닮아 있었다. 칼날의 색이 똑같이 붉어진 탓이다.
“……예, 예.” “너한테서 익숙한 냄새가 나.” 여인의 얼굴을 가리고 있던 후드는 짧은 전투의 여파로 뒤로 젖혀진 채 였다.
덕분에 갈기처럼 뻗친 적갈색 머리 칼과 X자로 흉터가 새겨져 있는 이 마, 비스듬히 솟은 눈썹, 날카로운 눈매가 훤히 드러나 있었다.
전체적으로 거칠고 사나운 분위기 를 풍기는 여인이었다.
“가족의 냄새.”
“……가족이요?”
“그래.”
코를 킁킁대던 여인은 씩 미소를 지으며 말을 덧붙였다.
“내 형부의 냄새야. 확실해.”
잠시 멍하니 서 있던 자나바스의 얼굴에 화색이 어렸다.
“설마, 그 형부라는 분이.”
“카라멕.”
“우테— 예?”
“아칸쿠 카라멕.”
“카라, 멕, 말입니까?”
자나바스의 얼굴이 새하얗게 물들 었다. 그걸 빤히 바라보던 여인은 씨익 미소를 지었다.
“역시, 죽었구나?”
“••••••그건.”
“그럴 것 같았어. 툭하면 꿈에 나 와선 질질 짜대더라고.”
미소가 점차 진해졌다. 송곳니를 드러내기 위해 입술을 당기는 것 같 은 미소였다.
“누구야? 카라멕을 죽인 게.”
여인의 맹수와도 같은 시선에, 자 나바스는 떨리는 턱을 악물었다.
마법사 남매와 젊은 드루이드가 정 체불명의 전사와 만났을 무렵.
그로부터 동북쪽으로 얼마간 떨어 진 곳에선 특별한 만남이 이루어지 고 있었다.
‘미드아일’은 밀라놀 왕국의 동부 에 위치한 바위섬과 거기에 있는 성 의 이름이었다. 동부의 수호자라 불 리는 알파드 후작가가 둥지를 튼 곳 이기도 했다.
4개의 섬을 이어 만든 거대한 성 이자 요새인 미드아일은 난공불락으 로 명성이 높았다. 그 명성답게 별 모양으로 꺾인 장대한 성벽과 주문 이 깃든 망루들을 돌파하는 건 어렵 다 못해 불가능에 가까웠다.
그런 미드아일에 웬 낯선 방문자가 도착했다.
방문자는 갈대를 엮어 만든 모자를 쓴 건장한 체격의 사내였다.
품이 넉넉한 갈색 옷을 입고 떡 벌어진 어깨에는 붉은 아마포를 걸 쳤다. 낡았지만 썩 깔끔한 옷차림이 었다.
짤랑.
이국적인 분위기의 사내는 걸음을 옮길 때마다 맑은 쇳소리를 내었다. 기다란 청동 지팡이에 걸린 아홉 개 의 고리가 서로 부딪치며 울어댄 탓 이다.
짤랑.
방울의 소리와도 비슷한 맑은 울림 은 미드아일의 가장 깊은 곳까지 흘 러 갔다.
중무장한 경비병들은 기이한 복색 의 이방인에게 잠깐 시선을 던졌을 뿐 도로 정면을 바라보았다. 그들의 상관인 위사(衛士)가 이방인의 앞에 서 안내인 노릇을 하고 있었던 탓이 다.
삿갓을 눌러쓴 사내는 위사를 따라
서 크고 화려한 응접실에 도착했다. 그는 인기척이 하나도 느껴지지 않 는 응접실을 찬찬히 돌아보았다.
“왔군. 기다리고 있었소.”
뜬금없이 들려온 목소리에 사내의 시선이 응접실 안쪽에 놓인 의자로 향했다. 거기엔 백발•의 미남자가 앉 아있었다.
“이쪽에 와서 앉으시오.”
선사라고 불린 사내는 백발의 미남 자를 빤히 바라보다가 걸음을 옮겼 다. 그러곤 미남자의 반대편에 앉으 며 입을 열었다.
아미타불. 화어(華語)가 아주 유창하십니다.”
“첩실 중에 동방에서 온 아이들이 많소. 그 덕분이지.”
미남자는 입에서 소리를 내고 있었 으나 입술을 달싹거리지도 않았고, 울대를 꿈틀대지도 않았다. 심지어 눈도 깜빡이지 않았다. 미남자는 사 람이 아니라 정교하게 만든 밀랍 인 형이었던 것이다.
이국의 사내는 잠시 침묵하다가 밀 랍 인형에게 말을 건넸다.
“인형과 대화를 나누다니, 바다를 건너자마자 신기한 경험을 하는군 요.”
“결례를 용서하시오. 부친께서 흉 사를 당하신 뒤로 가문의 어른들이 하도 유난을 떨어대서 말이지.”
아름다운 밀랍 인형이 미동도 없이 떠들어대는 모습은 썩 괴기스러운 것이었다.
“이런 조잡한 인형극이라도 벌이지 않으면 외부인과는 대화도 못 할 지 경이라니까. 나도 답답해서 미칠 노 릇이오.”
입을 다물고 있던 것도 잠시, 이국 의 사내는 슬쩍 고개를 숙여 보였 다.
“부친의 일은 유감입니다. 얼마나 상심이 크십니까.” “아, 고맙군. 헌데 자신을 소개하기 에 앞서 고인부터 기리는 것은 썩 특이한 예절 같은걸.”
«으 하 丁그•
이국의 사내는 침음을 흘렸다. 그 리고는 자개로 장식한 테이블에 선 장(禪杖)을 기대고 삿갓을 벗어 무 릎에 올렸다.
파르라니 깎은 민머리와 이마에 찍 힌 여섯 개의 계인(戒印), 선이 굵 은 이목구비와 거친 수염.
중년의 승려가 관절마다 굳은살이 불거진 손으로 합장을 했다.
“소승, 일진(一眞)이라 합니다. 명 성 높은 아센 후작 각하를 뵙게 되 어 기쁘기 한량없습니다.”
초승달 군도(群島)의 통치자이자 다섯 제독을 거느린 동해의 지배자 이며 강력한 저주술사인 아센 후작 은 승려 일진의 합장에 짧은 말로 대답했다.
“그래, 반갑소.”
늙은 시종의 등장으로 둘의 대화는 잠시 끊어졌다. 시종은 밀랍 인형과 동방의 승려 앞에 찻잔을 하나씩 내 려놓은 뒤 응접실을 떠났다.
일진은 찻잔에서 올라오는 향을 맡 고 눈썹을 꿈틀거렸다.
“……요남(燒南)의 차로군요.”
“동방에선 어떨지 모르겠소만, 여 기선 한 모금에 금화 한 장쯤 하는 비싼 물건이지.”
“혜국(뚀國)에서도 귀한 것은 마찬 가지입니다.”
“그런가?”
“예.”
일진은 찻잔을 들어 한 모금 들이 켠 뒤 슬쩍 눈을 감았다. 그가 다시 눈을 뜰 즈음엔 얼굴이 온화하게 풀 어져 있었다.
일진은 느긋하게 차를 음미하고 싶 었지만, 후작은 그리 인내심이 깊지 않았다.
“혜국의 국왕께 도움을 청하긴 했 지만 제무종(諸武宗)의 무승이 오리 라고는 예상치 못했소.”
“……왕후마마께서 친히 행차하시 어 손을 내어달라 하셨습니다.”
“흠, 그런가?”
넓고 화려하지만 휑하고 적막한 응 접실에 밀랍 인형의 목소리가 울려 퍼졌다.
“그런데 말이오. 아무리 왕비께서 직접 청했다고 한들 진자배 항렬의, 그것도 한때 집법당주였던 고승이 이역만리까지 행차했단 말이오? 그 것도 혼자서?”
“……아미타불. 귀가 무척 밝으신 모양입니다.”
일진은 허허 웃으며 찻잔을 내려놓 았다.
“하지만 고승이라니, 당치도 않습 니다. 저는 일개 탁발승일 뿐입니 다.”
밀랍 인형의 눈을 통해서 일진을 살펴보던 후작은 속으로 코웃음을 흘렸다.
동방에 관심이 많은 아센 후작으로 서도 고리가 아홉 개나 달린 선장은 처음 보는 물건이었다. 그런 귀물을 가지고 있는 승려가 일개 탁발승이 라니, 말도 안 되는 소리였다.
의심스러운 눈초리로 건너편에 앉 은 승려를 살펴보던 후작은 밀랍 인 형을 통해 목소리를 내었다.
“……사실 우린 꽤 답답한 상황에 처해있소.”
“답답한 상황이라 하시면?”
“부친의 암살범 말이오. 단서랄 게 거의 없거든.”
밀랍 인형의 입에서 한숨 소리가 흘러나왔다.
“흉사 이후 벌써 5개월이 흘렀건 만, 발견한 거라곤 근처의 해안가로 흘러든 검은 복면 정도가 전부지. 무검회(無劍會)의 암살자가 벌인 짓 이라는 것도 심증만 있을 뿐, 어떠 한 증거도 없단 말이오.”
w O 으” —
“지금에 이르러선 아버님의 손에 암살자도 먼지가 되어버린 게 아닌 가 생각될 정도요. 바다를 헤엄쳐 도망치 려다 가라앉아버 렸던가.”
후작은 아쉽다는 듯 혀를 찼다.
“마음 같아선 당장에 군대를 휘몰 아 윤국(倫國)을 짓밟아버리고 싶지 만……. 심증만으로 전쟁을 일으킬 수는 없는 노릇이지. 무검회 놈들이 윤국 왕실에 자주 붙어먹기는 하지 만, 그렇다고 신하라고 할 수는 없 는 놈들이니까.”
후작의 말에 일진이 탄식을 흘렸 다.
“서부대륙에 오국(五國)의 사정을 이만큼 잘 아는 분이 계실 것이라곤 전혀 예상치 못했습니다. 대단하시 군요.”
어떠한 아부도 느껴지지 않는 순수 한 감탄에 후작은 썩 기분이 좋아졌 다.
“흠, 뭐, 변경의 영주로서 이 정도 는 기본이지. 어쨌든 그대는 미드아 일에 머물며 흉사에 대해서 조사해 보도록-”
“……후작 각하?”
“잠깐, 잠깐만 기다리시오.”
밀랍 인형에서 이어지던 목소리가 돌연 끊어졌다.
어리둥절한 표정을 짓기도 잠시, 일진은 후작에게 무언가 일이 생겼 겠거니 짐작하며 느긋한 손길로 찻 잔을 들었다.
그렇게 차향을 음미하기를 얼마쯤. 밀랍 인형이 다시 소리를 내었다.
“이것 참, 시기가 절묘하군.”
«……
“방금 편지를 한 통 받았소.”
일진이 찻잔을 내려놓자 후작이 말 을 이었다.
“부친께서 흉사를 당하신 직후에 ‘검은 늑대들’이라는, 꽤 평판이 좋 은 현상금 사냥꾼들에게 일을 하나 맡겼더 랬지.”
“일이라고 하시면?”
“무검회의 암살자가 벌인 짓 같으 니 이번 흉사를 소상히 조사해달라 는 의뢰였소. 가능하다면 암살자를 잡아달라고도 했고.”
밀랍 인형의 입에서 부스럭거리는 소리가 들렸다. 아센 후작이 뭔가 종이 같은 것을 만지작거리고 있는 모양이었다.
“솔직히 그리 큰 기대는 없었는데, 성과가 있었던 모양이오.”
일진의 눈빛이 날카로워지자, 후작 은 조금 들뜬 목소리로 말을 이었 다.
“어느 동방의 여인을 만났는데, 기 척 없이 달리고 단검을 잘 다루며 몸놀림이 가벼워 허공을 딛고 하늘 을 난다는군.”
“환신자(還神子) 로군요.”
“환신자?”
일진은 가만히 미간을 좁혔다.
“……무검회는 솎아내기를 당한 아 이들을 데려다 가혹한 훈련을 시킵 니다.”
아솎아내기’는 또 뭐지?”
“윤국의 못된 풍습입니다. 가난한 농가에서 갓 태어난 자식을 산이나 숲에 버리는 일이지요. 주로 농사일 에 큰 도움이 되지 않는 여아들이 당하는 일입니다.”
“호오.”
“윤국 사람들은 이를 ‘신에게 되돌 려보낸다’라고 일컫습니다. 그래서 무검회는 자신들이 길러낸 정예 암 살자를 환신자라고 부르지요.”
“재밌는 이야기로군.”
흥미롭다는 듯 중얼거리던 후작은 이내 목소리를 낮게 깔았다.
“이야기는 이야기고, 난 내 아버지 의 복수를 해야겠소.”
“그 현상금 사냥꾼이 환신자를 본 곳이 어딥니까?”
“저 멀리 중부에 있는 조그만 남작 령이오. 그 여자는 일행과 함께 시 월이 되기 전에 떠났다는군.”
“일행이 있습니까?”
“그렇소. 바로 그 일행이 문제인 데……
후작은 잠시 망설이다가 말을 이었 다.
“그 일행 중에 최근에 명성을 드높 이고 있는 기사가 있소. 호사가들의 말로는 왕국 제일의 기사인 칼리오 라 경에 버금가거나 그 이상일 것이 라 하더군.”
“그게 누구입니까?”
“포이닉스. 울카르 왕자에게 서임 을 받은 기사로, 별명이 열 개쯤 있 는 사내지.”
“포이 닉스.”
“게다가 놈의 옆엔 ‘붉은 곰’에 ‘불 의 마녀’까지 있소. 거기에 무검회 의 암살자까지 끼었으니, 끔찍하리 만치 위험한 일행이겠군.”
후작이 질린 투로 말했지만, 일진 은 별다른 반응이 없었다. 그는 무 릎에 올려두었던 삿갓을 쓰곤 선장 을 짚으며 의자에서 일어났다.
“길잡이를 붙여주십시오.”
“조금만 기다리게. 최근 들어 주변 정세가 하 수상해서 병력을 모으려 면 시간이 필요하니,”
“병력은 필요 없습니다.” 해진 삿갓 아래로 눈빛이 번쩍거렸 다.
“길잡이만 있으면 됩니다.”
밀랍 인형은 잠시 침묵하다가 웃음 기가 섞인 말을 꺼냈다.
“그리하지. 건장한 말도 한 필 내 어주겠소.”
“아미타불. 감사합니다, 각하.”
일진은 깊게 합장한 뒤 미련 없이 몸을 돌렸다.
덩그러니 남은 밀랍 인형 앞에서, 이국에서 온 귀한 차가 차갑게 식어 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