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he Blood Knight's Villains RAW novel - Chapter (23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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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의 악당들 233화
47. 악몽(15)
열심히 팔다리를 주물러 준 덕분인 지, 다행히 이번 기절은 그리 길지 않았다.
“괜찮은 거 맞지?”
“응. 괜찮아.”
십 분 만에 깨어난 헤일라는 포커 페이스를 되찾았다.
“깜짝 놀랐네. 왜 다시 기절한 거 야?”
“……잠시 놀랐을 뿐이야. 신경 쓰 지 마.”
“ O 으 ’’ —三6三
뭐, 멀쩡하다니 마음이 놓이긴 하 는데 어째 찝찝하단 말이지.
주변을 수색 중인 뭉치와 우테콰이 를 불러올 즈음, 헤일라는 준비해 둔 옷을 입고 의무실을 빠져나왔다.
준비해 둔 옷이라고 해봐야 직원용 세탁기를 이용해 핏물을 뺀 속옷과 코스프레 이벤트룸에서 얻은 미니드 레스가 다였다.
그중 속옷이야 원래 입던 것이니 별로 상관이 없겠지만, 미니드레스 는 조금 걱정스러웠다.
하얀 옷깃과 하얀 소매를 단 검은 색 미니드레스. 허리에는 잘록하게 라인이 들어가 있고 치맛단은 무릎 위까지 올라올 만큼 짧은, 일상과 비일상의 경계에 있는 애매한 디자 인의 의상이었다.
헤일라 입장에선 좀 이색적인 디자 인일 테니 어찌 받아들일까 걱정이 었는데,
“으흠.”
기분 좋은 콧소리를 내는 걸 보니 마음에 든 것 같다.
휴, 다행이다.
원래 입고 있던 옷이야 걸레짝이 되어버렸고, 대체품이라곤 털이 달 린 두꺼운 인형옷이나 실용성 없는 하녀복, 단추가 서너 개쯤 부족한 제복 정도가 다였다. 지금 입은 옷 에 만족해 주니 감사할 지경이다.
스스로 몸을 비틀며 옷맵시를 살피 던 헤일라는 불쑥 나를 돌아보며 질 문을 해왔다.
“어때?”
“……어?”
난 잠시 눈을 끔뻑거리다가 슬쩍 미소를 지었다.
“당연히 잘 어울리지. 너한테 뭔들 안 어울리겠냐?”
농담을 덧붙였음에도 그녀는 고개 만 살짝 끄덕였을 뿐 아무런 말도 하지 않았다.
아무래도 농담이 아니라고 생각하 는 모양인데…….
그래. 합리적인 자신감이지, 뭐.
이어서 헤일라는 주변의 풍경, 그 러니까, 번쩍거리는 놀이공원을 돌 아보고 입을 작게 벌렸다.
“에, 헴!”
이미 수색을 겸해서 주변을 한바탕 휘젓고 온 뭉치는 괴상한 헛기침으 로 헤일라의 주의를 끌었다.
“저거, 엄청나요.”
“저게 뭔데?”
“마차 칸에 앉으면, 막, 막 돌아요! 이렇게!”
녀석은 키즈코너에 있는 놀이기구 중 하나인 ‘판타스틱붕붕카’를 가리 키며 설명을 이어갔다.
“색깔이 어-엄청 많아요. 거기서, 막, 휙휙! 머리카락이 하늘에 닿아 서, 막, 휙휙!”
……뭐라는 거야?
뭉치가 눈을 반짝 빛내며 양손을 휘적거렸지만 헤일라는 전혀 이해하 지 못한 얼굴이었다.
“저기, 저기에 있는, 긴 거는요, 화 살같이 빨라요! 처음에 막, 휙 떨어 져서 엄청 놀라써요-”
난 잠자코 서 있다가 불쑥 한걸음 나서며 뭉치에게 엄한 표정을 지어 보였다.
“뭉치야.”
“네에?”
“내가 수색하랬지, 놀이기구 타랬 어?”
“엣, 에.”
“뭐가 ‘에’야. 대답 안 해?”
“……아니오. 저……
“그런데 뭐? 롤러코스터에서 떨어 져? 내가 위험하니까 저쪽엔 얼씬도 하지 말랬지?”
“에에.”
“‘에에’만 하지 말고 대답을 하라 니까?”
“……아으으.” 뭉치가 입술을 삐죽이며 울먹거릴 무렵, 헤일라의 배에서 ‘꼬르륵’ 소 리가 들려왔다.
“ 아.” 헤일라가 당황한 듯 눈을 빠르게 깜빡거리자 콜이 턱을 쓰다듬으며 말을 꺼냈다.
“마스터 캐스라이트의 포션을 복용 하셨으니 허기가 극심할 겁니다. 움 직이기 전에 배를 채우는 게 좋겠습 니다.”
그녀는 잠시 뜸을 들이다 입을 열 었다.
“시간을 많이 썼어. 여길 벗어나는 게 먼저야.”
“서두를 것 없다.”
어디선가 뜯어온 깃발 조각에 숯으 로 그림을 그리던 우테콰이가 느긋 한 어조로 덧붙였다.
“길 찾기, 시간 필요하다. 굶주리면 버틸 수 없다.”
“길을 모른다는 뜻인가요?”
“옳다.”
헤일라의 시선이 내게 향하자 고개 를 끄덕여 보였다.
“네가 누워있는 동안 짐작 가는 곳 을 몇 군데 훑어봤는데, 하나같이
꽝이더라고.”
내가 검은 원반이 있으리라 짐작한 장소는 정문의 매표소, 실외공원으 로 향하는 관문, 지하 주차장으로 이어지는 출입구 등이었다.
하지만 이미 말한 대로 검은 원반 같은 건 없었다.
“마법 같은 게 걸려있는 것 같아.”
“마법.”
“응. 여기서 나가려고 하면 시간을 되돌리기라도 한 것처럼 뿅, 하고 원점에서 나타나더라.”
“그러면 아마,”
헤일라가 무어라 말을 이어나가려 던 찰나, 또다시 ‘꼬르륵’ 소리가 울 려 퍼졌다.
당황한 헤일라가 입을 꾹 다물었 다. 얼굴이 조금쯤 상기된 채 새까 만 눈을 깜빡거리는 모습에 난 헛웃 음을 터뜨리고 말았다.
그래, 금강산도 식후경이지.
내가 일행을 이끌고 간 곳은, 헤일 라가 잠든 사이 수색을 하다가 발견 한 경양식점이었다.
물론 식당이라곤 해도 점원을 불러 메뉴를 주문하는 건 당연히 불가능 했다. 이 경양식점은 물론이고 놀이 공원 전체에 사람이 하나도 없었던 탓이다.
그나마 다행히도, 식료품들은 멀쩡 히 있었다.
그래서 결국 내가 오늘의 요리사가 되었다. 가스레인지, 냉장고, 개수대 등의 현대 문물을 다룰 수 있는 사 람이 나밖에 없었거든.
뭐, 능숙하게 가스 불을 켜는 모습 에 일행이 의구심 어린 시선을 보내 긴 했지만 아무렇지도 않게 무시했 다. 혹시 이에 대해 캐물으면 ‘내 꿈인데, 뭐?’ 하고 뻔뻔하게 대답할 셈이었다.
난 주방에 있는 재료들과 자취를 통한 노하우를 모조리 때려 부어 ‘혼돈의 볶음밥’을 만들었다. 일행은 볶음밥을 한 숟갈 맛보더니 오묘한 표정을 지었다.
뭐, 입맛에 맞는지 어떤지는 모르 겠지만 다들 시장이 반찬이라고 자 기 접시를 깨끗이 비웠다. 심지어 헤일라는 무려 세 접시나 먹었다.
……아니, 저 호리호리한 몸에 어 떻게 밥이 여섯 공기나 들어가냐. 물약의 부작용 때문인가?
뭐, 그건 그거고.
놀이공원 한구석에 있는 식당에 초 원의 광전사, 동방의 암살자, 공작가 의 금지옥엽, 용병 궁수가 모여앉아 볶음밥을 먹는 풍경은…….
참, 오묘하다 못해 비현실적이었다. 꼭 영화 촬영 중 휴식을 하는 배우 들 같기도 하고. 이런 장면을 보게 되리라고는 상상도 못 했는데.
상체를 꼿꼿이 세운 자세로 앉아있 던 헤일라는 음료를 한 모금 마시곤 ‘읏’ 하고 미간을 찌푸렸다. 그리고 눈을 커다랗게 뜨며 유리잔에 든 레 모네이드를 가만히 살펴보는 것이었 다.
톡 쏘는 맛이 신기한 모양이지?
“그건 안 마시는 게 좋겠다.”
내가 손을 뻗어 레모네이드가 든 유리잔을 치우자 헤일라가 눈을 깜 빡였다. 무채색의 시선엔 의아함이 담겨 있다.
“너 배에 구멍 났잖아. 과식한 것 도 좀 걱정되는데 탄산, 아니, 그런 자극적인 음료수까지 마시는 건 좀
그렇지.”
유리알처럼 빛나는 새까만 눈이 나 와 레모네이드를 번갈아 살폈다.
그러길 잠시, 헤일라는 어깨를 조 금 늘어뜨리며 고개를 끄덕였다.
“고마워.”
“……응? 뭐가?”
“치료해 준 거.”
대충 눈대중으로 살펴본바, 헤일라 의 키는 170이 조금 안 되었다.
미들월드의 평범한 여성들과 비교 하면 상당한 장신이었지만, 그에 비 해 손은 조금 작은 편이었다. 그 작 은 손이 총상을 입었던 옆구리를 천 천히 더듬었다.
“이렇게 내장까지 말끔히 치료하는 건 아주 어려운 기술인데.”
“포션 덕이지, 뭐.”
“그래도. 넌 가문의 치료술을 제대 로 익힌 것도 아니잖아. 대단한 재 능을 타고난 거야.”
“재능은 무슨. 예전에 엘렌을 치료 한 경험이 있었기에 망정이지, 아니 었으면 한참 헤맸을걸.”
레모네이드 대신 머그잔에 든 생수 를 홀짝이던 헤일라가 흠칫 움직임 을 멈췄다.
“엘렌을 치료한 적이 있어?”
“응. 진짜 죽는 줄 알았지, 그땐.”
난 피식 웃음을 흘리며 콜라를 페 트병째로 들이켰다.
“크으-”
이 달달한 탄산의 맛이란…….
다신 맛보지 못할 거라고 생각했는 데, 이 웬수 같은 꿈의 영지 덕에 이런 호사도 누려보는구나.
“사우스하버에 있을 때, 어느 강령 술사한테 뒤통수를 심하게 맞았거 드 ”
“강령술사.”
“루크라는 이름의 늙은이인데, 서 부에서 깽판을 치고 있다는 죽음의 왕도 아마 그놈일 거야.”
옆에서 꺼억, 트림을 한 우테콰이 가 말을 보태었다.
“그 노인, 사악한 주술사인 것 몰 랐다. 현자의 얼굴 가진 마귀다.”
“우테콰이 말대로야. 겉보기엔 그 냥 온화한 노인네처럼 생겼거든.”
뭉치와 콜도 내 쪽으로 귀를 기울 이는 모습에 난 어깨를 으쓱이며 말 을 이어갔다.
“하여튼, 놈에게 속아서 하마터면 죽을 뻔했어. 심지어 엘렌은 출혈이 너무 심해서 심장이 잠깐 멈췄었다 니까.”
“그래서?”
평소와 별다를 바 없는 무표정이었 지만, 헤일라는 어째 굳은 얼굴을 하고 있었다.
“그래서, 어떻게 치료했는데?”
“음, 그때도 다행히 포션이 있었거 든. 그거랑 내 피를 써서 어떻게 잘 치료했지.”
“잘, 어떻게?”
“그거야……
문득 헤일라와 눈을 마주쳤는데, 눈동자 주변의 실핏줄이 몇 개쯤 터 진 것 같다. 눈의 깜빡임이 멎은 탓 인지 아니면 피로가 덜 풀린 탓인지 는 잘 모르겠다.
“……피를 흘려 넣어서 강제로 심 장을 뛰게 했어. 근데, 왜 그렇게 캐물어?”
그녀는 눈을 두세 번 깜빡인 뒤 입을 열었다.
“혈조술을 이용한 치료는 극히 어 려운 데다가 잘못하면 심각한 부작 용이 따를 수도 있어. 그래서 묻는 거야.”
“부작용이라.”
난 눈썹을 긁적거리다가 고개를 갸 웃거렸다.
“글쎄? 잠시 하반신이 마비되긴 했 는데, 그건 허리를 다친 탓에 그런 거였고……. 딱히 부작용이라고 할 만한 건 없었어.”
“나도 뭐, 피를 하도 많이 흘려서 기절할 뻔하긴 했지. 너랑 달리 엘 렌은 내 피를 받아들이질 못해서 거 의 두 배도 넘게 피를 쏟아부어야
했거든.” 머그잔이 딸그락, 하고 작은 소음 을 흘렸다.
“근데 며칠간 열심히 배를 채우니 까 금세 괜찮아지더라고. 그리고, 지 금은 배도 안 고파. 피를 훨씬 덜 써서 그런가?”
헤일라는 잠시 침묵을 지켰다. 티 없이 새까만 눈동자가 음울하게 일 렁거 렸다.
머그잔을 쥔 손끝이 하얗게 물들 고, 뭉치와 콜이 그녀 쪽을 흘긋거 릴 무렵 새빨간 입술이 천천히 떨어 졌다.
“ 앞으로는,”
“••••••응?”
“앞으로는, 조심해.”
“ 뭘?”
“수혈하는 거 말이야.”
헤일라는 나지막한 목소리로 말을 이어갔다. 평소처럼 차분한 말투에 느린 어조였다.
“네 피는 치료제가 아니야. 단순히 피를 쏟아붓는다고 해서 사람 목숨 을 살릴 수 있는 게 아니라고.”
“어, 그 정도는 알아. 당연히 그렇 겠지.”
“그러면, 혈조술사에게 혈액이 얼 마나 중요한 요소인지도 알겠지?”
“……으음, 알지.”
“특히 발루인과 자하카르는 존귀하 고 신성한 피를 지킬 의무가 있어. 네가 아무리 가문을 벗어나고 싶어 한다고 해도 이런 기본적인 관습, 불문율까지 어기는 건 아켈레 백작 님은 물론이고 라빌리아 자작님과 돌아가신 스키엘레 공작님까지 욕보 이는 행위야. 게다가 너와 난 잉태 자니까 더더욱,”
느린 어조로 말을 다다다 쏟아내던 헤일라가 돌연 입을 다물었다. 그리 고 나를 보고 눈을 서너 차례 빠르 게 깜빡이는 것이었다.
……뭐지? 꼭 눈치를 살피고 있는 것 같은데.
내 얼굴에서 어리둥절한 기색을 읽 었는지 그녀는 가만히 마른침을 삼 켰다.
“불쾌해하는 건 이해해. 하지만 잉 태자를 고른 건 가문 전체의 결정이 었어.”
“……으응? 아.”
헤일라가 오해하고 있는 바를 눈치 챈 난 얼른 손사래를 쳤다.
“아니, 내가 불쾌하긴 왜 불쾌해.
그런 거 없어.”
“기분이 상한 줄 알았어. 말이 없 길래.”
“아, 그건, 네가 갑자기 말을 많이 하니까 신기해서 그런 거야.”
“……신기해?”
“응. 조용한 것보다 훨씬 좋은데? 평소에도 말 좀 많이 해라.”
시선을 내리깐 헤일라는 머그잔에 담긴 물을 홀짝거렸다.
“ 어쨌든.”
그러기를 잠시. 그녀는 썩 단호한 눈빛으로 말을 덧붙였다.
“외인에게는 함부로 수혈을 하면 안 돼.”
‘알겠지?’ 하고, 확답을 기다리는 듯한 눈빛이 좀 귀엽게 느껴진다.
난 피식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식사를 마무리한 뒤, 식당을 나서 기 전에 짧게 계획을 세웠다.
사실 계획이랄 것도 없었다. 아까 돌아보았던 외부 출입구들부터 다시 금 살펴보겠다는 거였으니까.
그렇게 식당이 모여있는 건물을 나 서는데, 문득 위화감이 든다.
“……으 ”
너른 놀이공원 안, 왼편에 화단을 끼고 걸어가는 지금의 이 상황 내지 는 장면이 어째 익숙하게 느껴진다. 일종의 기시감이다.
여기는 꿈의 영지다. 이 놀이공원 은 내 꿈을 토대로 만들어진 공간이 고. 이를 잘 알기에 이 기시감이 썩 의미심장하게 느껴진다.
말없이 발걸음을 멈춰 세우자 뒤따 르던 콜이 ‘포이닉스 님?’ 하고 의 문을 표했다. 대답 대신 입술에 검 지를 대어 ‘쉿’ 하고 눈짓했다.
숨을 죽인 일행이 조용히 긴장감을 끌어올리는 동안, 난 가만히 주변을 살펴보았다.
간판을 분홍색 지붕 모양으로 장식 한 화장품점, 가지각색의 젤리와 초 콜릿 따위를 파는 사탕 가게, 유리 창에 놀이공원의 마스코트 캐릭터를 붙인 장난감전문점, 땅콩과 버터를 곁들인 오징어를 파는 노점상, 그리 고, 츄러스 가게…….
“……후, 후우.”
“포이. 왜 그래오?”
어느새 바짝 다가선 뭉치가 눈에서 걱정을 뚝뚝 흘리고 있었다. 난 심 호흡하며 녀석의 머리칼을 쓰다듬어 주었다.
“아무것도 아니야. 가자.”
“에……
뭉치의 코를 살짝 꼬집어준 뒤 걸 음을 옮기려는데,
끼익.
어디선가 경첩 소리가 짧게 들려왔 다. 일행은 누가 먼저랄 것도 없이 소리가 난 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불투명한 유리문이 ‘후웅, 후웅’ 하 고 묵직한 바람 소리를 내었다. 츄 러스 가게 건너편에 있던 화장실에 모습을 드러낸 것은, 익숙한 얼굴의 여자아이 였다.
“어라, 삼촌?”
그림이 프린팅된 커다란 티셔츠에 청치마를 입은, 아담한 체구의 소녀.
이 조우를 진즉부터 예상하였음에 도, 나는 턱을 떠느라 제때 입을 열 지 못했다.
“화장 고치느라 오래 걸렸네. 기다 렸어?”
소녀가, 조카인 지원이가 장난스럽 게 웃음을 짓자 난 주먹을 꽉 말아 쥐었다. 그리고 재차 숨을 고른 뒤 입을 열었다. 억지로 지은 미소는 덤이었다.
“……중딩이. *크흠* 중딩이 무슨, 화장이야. 누나한테 이른다?”
“히, 이르시던가요-”
지원이는 내 기억 속에 또렷이 남 은 표정과 목소리로, 전혀 예상치 못한 말을 꺼냈다.
“어차피 만나지도 못하면서.”
“••••••뭐?”
“삼촌도 죽었잖아. 죽은 사람이 산 사람을 어떻게 만나.”
“그게, 무슨 소리,”
지원이는 미소를 지은 채 가벼운 걸음으로 다가왔다.
뒤에서 움찔거리는 일행을 만류한 사이, 녀석은 내 턱밑에 우뚝 멈춰 섰다.
“흐음, 새 얼굴은……
소녀는 장난기 어린 시선으로 내 얼굴을 신중히 뜯어보았다.
“잘생기긴 했는데, 쪼끔 부담스럽 네. 역시 난 승수 쪽이 좋은 듯?”
“내가, 보여?”
“네? 그게 무슨 바보 같은 소리세
요, 아저씨?”
“아니, 그러니까, 내가……. 김승수 가 아니라, 음, 다른 얼굴로 보이냐 고.”
“당연히 보이죠, 이 아저씨야. 그럼 안 보일까?”
“그런••••••
이게 무슨 소리지? 이전의 꿈에서 만난 사람들은 날 김승수로 보는 것 같았는데. 아니, 혹시 겉모습은 포이 닉스로 보이지만 인식을 김승수로 한 건가? 뭐지?
내가 혼란에 휩싸여 입술을 달싹거 리자 지원이가 피이, 하며 서글픈 미소를 지었다.
“삼촌. 지금 그런 게 중요해?”
“……어?”
“오랜만에 봤잖아. 인사부터 해야 지.”
손을 쭉 뻗어 내 허리를 감싸 안 은 소녀는 명치께에 얼굴을 묻으며 조용히 속삭였다.
“히힛. 오랜만이야, 삼촌.”
“……지원아.”
“진짜, 진짜 보고 싶었어.”
지원이의 이마가 닿은 명치께에서 무언가 솟구치는 것만 같았다.
그래서 난 크게 숨을 들이마시며 목젖을 치는 무언가를 간신히 억눌 렀다.
“……그래. 나도, 보고 싶었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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