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he Blood Knight's Villains RAW novel - Chapter (273)
나의 악당들 273화
52. 고대의 관문(1)
형광등의 창백한 빛이 방을 싸늘하 게 물들였다.
“승수야! 백승수!”
두꺼운 철제문짝이 덜컹거렸다.
틱, 티디딕-
낡은 안정기가 거슬리는 소리를 내 었다. 불빛이 점멸했다.
덜컹대던 문짝이 강렬한 파열음을 낼 즈음, 나는 푹 한숨을 내쉬었다.
“웬 개꿈이냐, 이건.”
중얼거림과 동시에 세상이 정지했 다. 먼지 앉은 형광등 속, 일렁거리 다 멈춘 전류가 인상적이다.
머리가 희끗희끗한 중년인은 성난 표정으로 방으로 들어서다 얼어붙은 채였다.
그의 뒤로 내 또래, 아니, 대여섯 살쯤으로 보이는 아이들 서넛이 옹 기종기 모여 있다.
보육원에 머물던 시절의 한 장면.
이전이었다면 이 고역스러운 기억 을 끝까지 감상해야 했겠으나, 이제 꿈은 온전히 나의 영역이다.
구우우웅.
어느새 왼쪽 손목엔 하얀 띠가 둘 려 있었다. 띠는 잠시 진동하다가 번쩍 빛났다.
중년인, 형광등, 좁은 방, 어린아이 들은 하얀빛을 쬐고 먼지가 되어 스 러졌다. 악몽은 그렇게 끝났다.
아니, 끝나지 않았다.
꿈이 먼지가 되어 사라진 암흑공간 에 별들이 차올랐다. 난 본능적으로 누구의 소행인지 알아차릴 수 있었다.
“……트릭스터 아재?”
“아재 아니라고- 끙, 됐다.”
번쩍거리는 진은 왕관, 칠혹 속에 별이 비치는 마신의 로브, 파란 눈 동자와 물결치는 금발.
아름다운 소년은 허공에 앉아 다리 를 꼬았다.
“악몽은 잘 해결했더라? 역시 운 하나는 기가 막힌다니까.”
“……운이 좋다고? 내가?”
“그래. 다른 건 둘째치고, 차원 인 장을 얻을 줄은 몰랐어. 한 번도 관 측하지 못한 일이야.”
“갑자기 나타나서 무슨 소리야? 차 원 인장이 뭔데?” 소년은 턱으로 내 왼쪽 손목을 가 리 켰다.
“그게 차원 인장이야.”
“••••••이게?”
“차원의 주인임을 증명하는 동시 에, 차원 그 자체가 담긴 물질이지. 네가 얻은 건 저열한 준차원에 불과 하지만…… 원래 세상을 가로지르는 여행도 한 걸음부터 시작하는 법이 니.”
난 가만히 손목에 둘린 빛의 띠를 살폈다. 띠는 점차 옅어지다 사라졌다.
“트릭스터 아재.”
“말해.”
“장비 주러 온 거지?”
“뭐?”
“매번 그랬잖아. 다음 챕터 넘어갈 때쯤 이렇게 나타나서 몇 마디 지껄 이고, 장비 하나 던져주고.”
“……그래서?”
“줄 거면 이번엔 마검으로 줘. 사 도 방패도 좋고.”
소년은 어이가 없다는 듯 헛웃음을 지었다.
“그깟 장비가 중요해? 따로 질문하
고 싶은 건 없고?” “질문? 하, 어차피 제대로 말해 줄 것도 아니면서. 의미심장한 척 헛소 리 찍찍거릴 거면 그냥 장비나 빨리 내놔.”
소년은 복잡한 표정으로 나를 바라 보더니 푹 한숨을 내쉬었다.
“마검과 사도의 의지는 안 돼.”
“왜‘?”
“네게 허락된 물건이 아니니까.”
“으흐음.”
예상은 했지만, 역시 안 되는군.
“창고에 박혀 있는 아이템들만 줄 수 있는 거구만?”
“한 번에 다 주는 것도 안 되고?”
“……그래, 네 말대로야.”
“그러면 엉뚱한 거 말고 신발이나 줘.”
“신발? 아엘로포스?”
“어. 뚜벅이 신세 탈출하게.”
“……알겠어. 여느 때처럼, 깨어나 면 곁에 아엘로포스가 있을 거야.”
소년이 마지못해 고개를 끄덕이자, 난 팔짱을 끼며 축객령을 내렸다.
“좋아. 일 다 봤으면 이만 꺼져.”
“……몇 년 전에도 한 번 말했지 만, 넌 내가 본 동양인 중 제일 무 례한 놈이야.”
“사기꾼, 납치범 새끼가 예의를 운 운하네. 나잇살 처먹으면서 양심도 같이 호로록하셨나?”
소년은 잠시 가만히 있다가 불쑥 손을 뻗었다. 바닥을 가늠할 수 없 는 마력이 아무런 기척 없이 공간을 집어삼켰다.
“커헉,”
보이지 않는 손아귀가 전신을 움켜 쥐는 듯했다. 혈기를 끌어올리며 몸 부림을 쳐봤지만 옴짝달싹할 수 없 었다.
“이익, 이 치사한 새끼가- 이거 안 놔!”
“……음, 이런. 나도 모르게.”
마력이 흩어졌다. 암흑공간에 내팽 개쳐진 나는 숨을 고르며 쉴 새 없 이 욕을 지껄였다.
소년은 아랑곳하지 않고 입을 열었 다.
“그건 그렇고, 엘렌은 보냈더라?” 예상치 못한 질문에 입매가 절로 굳어진다.
“잘했어. 너답지 않게 꽤 현명한 판단이야.”
“……현명하다고?”
“그래. 시련이 필요한 아이야. 성장 을 위해서든, 생존을 위해서든.”
구우우우-
별로 가득한 암흑공간이 무겁게 울 어댄다. 끝이 다가오는 것이다.
“앞으로가 걱정이군.”
“뭐?”
“네가 아는 것과 전혀 다른 사건들 이 펼쳐지는 와중에도 이번처럼 현 명하게 판단할 수 있을까?”
소년은 무릎을 꼰 자세 그대로 붕 떠올랐다.
“행운을 빌어.”
쨍, 세상이 조각났다.
기스톨 지방의 주도(主都)인 모도 스에서 산길을 타고 남서쪽으로 이 틀쯤 걸어가면 조그만 산속 마을인 폴빌에 이르게 된다. 골만, 카바스, 셰아는 바로 그 폴빌에서 나고 자란 청년들이다.
걸음마를 시작할 무렵부터 늘 붙어 지내던 셋은 열두세 살 즈음에 각각 도시와 숲, 수도원으로 흩어졌다.
각자 길을 나서며, 그들은 다시는 어린 시절처럼 친구들과 모일 수 없 으리라 여겼다. 하지만 불과 몇 년 만에 골만과 카바스, 셰아는 얄궂은 운명에 이끌려 폴빌에서 재회하게 되었다.
가난한 농부의 여섯 번째 아들인 골만은 앤트럼 지방의 주도인 ‘리안 웰’에서 일하게 되었다. 양초장이 길드의 정식 직공인 외삼촌이 보증 을 서준 덕에 도제 생활을 시작하게 된 것이다.
골만은 나이는 어려도 끈기가 있고 손재주도 좋았던 터라 금세 기술을 익혔다. 귀한 재료인 밀랍에는 손도 대지 못했지만, 돼지나 양의 기름을 이용하여 썩 쓸 만한 양초를 만들곤 했다.
그러던 어느 날, 골만의 외삼촌이 변을 당했다. 동료 직공이 그의 방 에서 부정한 징표를 발견했다며 교 회에 고발한 것이다.
전후 사정을 파악하기도 전에 외삼 촌은 교회로 끌려갔다가 주검이 되 어 돌아왔다. 이후 골만도 갖은 고 초를 당하다가 도망치듯 리안 웰을 떠나 고향으로 돌아갔다.
그 시기, 소꿉친구인 카바스와 셰 아는 이미 폴빌로 돌아와 있었다. 둘 다 골만과 비슷한 신세였다.
카바스는 아버지와 형을 따라 ‘오 든록’ 지방의 숲에서 덫을 놓으며 생활했다. 그러던 중 트롤의 공격을 받고 혼자 살아남았다. 이후 고향으 로 돌아와 결혼한 누나의 집에서 신 세를 지고 있었다.
셰아는 유명한 상인의 서녀(應女) 다. 그녀는 열두 살쯤 갑자기 나타 난 아버지에게 끌려가 왕도의 수도 원에 들어갔는데, 육 년 만에 남모 를 사연으로 수도원에서 쫓겨나 고 향으로 돌아오게 되었다.
청년이 되어 만난 세 친구는 처음 엔 어색해했으나 금세 이전의 우정 을 회복했다. 오랫동안 공유한 추억 과 오갈 데 없는 신세라는 동질감 덕이었다.
백수 내지는 식충이 따위로 불리며 시간을 죽이던 셋은 기이한 소식을 듣게 된다. 이 지방의 영주인 마티 안베르 백작이 사실은 흡혈귀였고, 어느 기사에게 목이 베여 소탕되었 다는 이야기였다.
거기까지라면 세 친구에게도 나쁠 것 없는 이야기겠으나, 이후의 이야 기가 문제였다.
왕이 보낸 군대가 레이븐즈 클리프 와 모도스를 점거했고, 일대의 혼란 을 다스리기 위해 대규모 징집을 실 시할 거라는 소식.
말이 왕의 군대지, 그들은 다른 지 방에서 온 이방인들이다. 징집당해 끌려갔다가 무슨 일을 겪게 될지는 아무도 모르는 일이었다.
특히, 형들의 은근한 눈총을 받는 골만이나 매형의 집에서 더부살이를 하는 카바스 같은 이들은 왕의 군대 가 마을에 들이닥친다면 꼼짝없이 징집될 팔자였다.
이 골치 아픈 상황을 타개하기 위 하여 세 친구가 머리를 맞댈 무렵, 눈보라가 불어닥치는 산길 너머에서 일단의 여행객들이 등장했다.
그들은 스무 명에 조금 못 미치는
일행이었다. 두세 명을 제외하곤 다 들 단단히 무장을 한 채였는데, 한 눈에 봐도 용병들 같았다.
그런데 덩치 큰 용병들 사이에서도 유독 눈에 띄는 거구가 둘 있었다. 특히 그중 하나는 흡사 오우거를 연 상케 하는 거인이었다.
두 거구를 포함한 몇 명이 촌장의 집에 들어서자 호기심 많은 마을 사 람들은 눈 쌓인 울타리 근처를 기웃 거렸다. 그러다가 창문 너머로 오우 거만 한 거인이 망토를 벗는 모습에 다들 숨을 삼켰다.
거인은 생가죽으로 만든 반바지만 하나 걸치고 근육질 상반신을 훤히 드러낸 채였다. 붉은 기운이 감도는 피부와 이질적인 이목구비, 몸 여기 저기에 새겨진 신비한 문신 때문에 한 번 보면 잊지 못할 인상이다.
마을 사람들 중 하나가 ‘붉은 곰이 다’ 하고 신음을 흘리듯 중얼거렸 다. 산골 마을 폴빌에까지 명성을 떨친 초원의 대전사가 그들을 돌아 보았다.
사람들을 발견한 거인, 우테콰이는 창문 너머로 씨익 웃어 보였고, 마 을 사람들은 새된 비명을 지르며 흩 어졌다.
붉은 곰 우테콰이를 알아본 마을 사람들은 용병들의 우두머리, 그러 니까, 판금갑옷을 입고 허리춤에 장 검 두 자루를 찬 장신 사내의 정체 도 쉽게 알아차렸다. ‘피투성이 검 사’라는 무시무시한 별명을 지닌 기 사, 포이닉스가 틀림없었다.
어지간한 장한보다 머리 하나쯤 큰 키와 그에 어울리는 덩치는 과연 들 은 대로였으나, 소문과는 달리 세눈 박이도 아니었고 시뻘건 혀를 고간 까지 늘어뜨린 모습도 아니었다.
짙은 눈썹과 날카로운 눈매, 굳게 닫힌 입술 탓에 차가운 분위기를 풍 기긴 했지만 보기 드문 미남자인 것 은 확실했다.
소문과 전혀 다르면서도 한편으론 비슷한 인상이라서, 사람들은 이야 기를 전한 음유시인을 욕해야 할지 칭찬해야 할지 헷갈릴 지경이었다.
한편, 두 거구와 함께 촌장의 집에 들어선 것은 뜻밖에도 여인들이었 다.
두 여인 중 포이닉스의 건너편에 앉은 건 키가 조금 큰 쪽이었는데, 그녀는 한마디로 절세의 미녀였다.
가지런히 모아 한쪽 어깨로 늘어뜨 린 흑단 같은 머리칼과 그에 대비되 는 하얀 얼굴에 끌려간 시선은 이내 멀리서 보아도 그 촉촉함이 느껴지 는 새빨간 입술에 빨려든다.
그 입술에서 눈을 떼기란 쉽지가 않아서 유려한 곡률의 코와 짙은 눈 썹, 그리고 또렷하게 빛나는 눈동자 까지 온전히 감상한 건 자제심이 뛰 어난 몇몇에 불과했다.
그녀는 광택이 감도는 진홍색 튜닉 에 검게 염색한 양모로 짠 바지를 입고 루비 브로치를 단 공단 망토를 걸치고 있었다.
그 고급스러운 옷차림을 차치하더 라도, 그녀에게선 알 수 없는 기품 이 느껴졌다. 단박에 귀족임을 직감 할 수 있을 정도였다.
심지어 검은 천을 씌운 어린애 몸 통만 한 무언가를 오른팔로 소중히 껴안고 있는 모습조차 고귀해 보일 정도였다.
다만, 얼굴에 표정이 없어서 생기 가 느껴지지 않는 게 흠이라면 흠이 었다. 건너편에 앉은 포이닉스 역시 딱딱하게 굳은 얼굴이었기에 둘은 얼핏 남매처럼 보였다.
여인 중 키가 조금 작은 쪽은 포 이닉스의 옆에 앉았는데, 벽난로 앞 에서도 추위가 가시지 않는지 몸을 벌벌 떨어대고 있었다.
그녀는 동방에서 온 여인이었다.
폴빌의 주민들 입장에선 그 인종이 달라 나이를 가늠하기 어려웠다. 하 지만 앳된 얼굴을 보아하니 아무리 많이 쳐줘도 스물을 넘을 것 같진 않았다.
까만 머리칼은 어깨를 간신히 덮을 정도였고, 그 아래 드러난 조그만 얼굴에선 눈만 커다랬다. 짧은 눈썹 과 오똑한 코, 도톰한 입술이 하나 같이 작아서 귀여운 인상이었다.
그녀는 양털유를 먹인 가죽 망토 위로 얼굴만 쏙 내밀어 포이닉스의 눈치를 살피고 있었다.
뭔가 바라는 게 있는 듯 입술을 달싹거렸는데, 이내 포이닉스의 얼 굴이 여전히 굳어 있음을 보곤 도로 입을 꾹 다물었다. 그리고 손을 꼬 물거리며 망토 자락만 더 단단히 여 미는 것이었다.
셰아는 명성 높은 전사들이 마을에 왔다는 소식에 골만과 카바스를 끌 고 촌장의 집 앞으로 달려왔다.
“저 둘이 그 유명한 짝패구나. 참 수자와 강타자…… 그녀는 단정한 미간을 좁히며 창문 너머를 유심히 살펴보았다.
“……그럼 정화자는, 불의 마녀는 어디에 있지?”
“저 여자 아냐? 얼굴이 예쁜 걸로 도 유명하던데.”
골만이 송아지의 그것처럼 커다란 눈을 끔뻑이며 절세의 미녀, 헤일라 를 가리켰다. 셰아는 단호히 고개를 저었다.
“머리가 검잖아. 불의 마녀는 금발 이라고.”
“그럼 저쪽인가?”
카바스가 원숭이처럼 긴 팔을 들어 마구간 쪽을 가리켰다. 거기엔 용병 열댓 명이 우두머리인 포이닉스가 용무를 마치고 나오길 기다리고 있 었다.
개중 카바스가 가리킨 이는 용병들 사이에서 몇 안 되는 여인 중 하나 였다.
“……아닌 것 같은데.”
중키의 여인은 한눈에 봐도 마법사 는 아니었다. 짐승의 털로 보강한 가죽갑옷 위에 사슬조끼를 덧입고 왼 팔뚝엔 조그만 방패를 묶었으며 등엔 커다란 한손반검을 매고 있었 기 때문이다.
심지어 머리칼 역시 금색이라기보 단 연한 갈색으로 보였다. 또, 소문 으로 듣기에 불의 마녀는 피부가 눈 처럼 하얗다는데 저 여인, 움베르타 의 피부는 보기 좋게 그을려 있었 다.
“음, 지금 중요한 건 불의 마녀가 누군지 알아내는 게 아니야.”
“그럼?”
사람들의 시선을 의식한 셰아는 골 만과 카바스를 헛간 뒤편으로 끌고 갔다.
“아직 모르겠어? 너희에게 지금 살 길이 열린 거야.” “살길?”
“마을에서 떠날 방법이 생겼다고.”
“마을을 떠나?”
“우리가 왜?”
“아니……. 후우.”
셰아는 두 소꿉친구의 멍청한 얼굴 을 보고 가슴을 두드릴 뻔했다. 하 지만 수도원에서의 세월이 영 헛된 것만은 아니었는지, 그녀는 이내 짜 증을 억누르며 말을 이었다.
“징집을 피해야 할 거 아냐.”
“징집? 너, 설마.”
“뭐가 설마야. ‘국왕 폐하를 배신 할 순 없다!’ 같은 헛소리라도 지껄
이려고?”
골만은 당혹스럽다는 듯 인상을 찌 푸렸다.
“우리더러 저 용병들을 따라가라는 말은 아니겠지?”
“정확해.”
“셰아, 너 미쳤어?”
골만은 어이가 없다는 듯 헛웃음을 터뜨렸다.
“징집을 피하려고 피투성이 검사를 따라가? 기는 용이니 아누파드니 불 지옥의 악마니 온갖 흉악한 괴물들 을 사냥해 대는 작자를?”
“그래.” “그건- 끓는 냄비에서 뛰쳐나와 불 속에 뛰어드는 격이잖아!”
“내 말부터 들어봐. 징집에 끌려가 면 사실상 왕가의 노예가 돼버리는 거야. 도망이라도 쳤다간 탈영범으 로 수배가 될 테고. 그렇지?”
“그런데?”
“용병은 달라. 피투성이 검사의 부 하가 되긴 하겠지만 여전히 자유민 이고, 기스톨을 벗어날 때쯤 적당히 눈치를 보다가 도망쳐도 아무런 문 제가 없다구.”
“ O 으”
골만은 잠시 어물거리다가 다시 입 을 열었다.
“근데 왜 하필 피투성이 검사야? 그럴 거면 차라리 상단이나 다른 용 병들을 따라가는 게 낫잖아.”
“그건 안 돼.”
“네 형들이 가만히 있지 않을 테니 까. 자기들을 대신해서 징집에 끌려 가야 할 네가, 웬 어중이떠중이들을 따라서 도망친다고? 당연히 촌장님 과 자경단에 도움을 청해서 막으려 들겠지. 안 그래?”
그 말이 그럴 듯하다 여겼는지 골 만이 입을 다물자, 셰아는 확신에 찬 표정으로 말을 덧붙였다.
“하지만 피투성이 검사의 부하가 된다면? 네 형들 중, 아니, 마을 사 람들 중 감히 누가 저 괴물들 앞에 나서겠어?”
“……그래도, 혹시 형들이 앙심을 품고 왕의 군대에 날 신고하면, 그, 징집을 피해서 도망쳤다고 고발할 수도 있잖아.”
“피투성이 검사는 울카르 왕자님의 기사야. 피투성이 검사의 부하가 되 는 건 울카르 왕자님의 부하가 되는 거나 다름없다구. 고발이 먹힐 리 없지.”
골만이 심각한 얼굴로 입을 다물 고, 잠자코 팔짱을 끼고 있던 카바 스가 불쑥 입을 열었다.
“그럴 바엔 차라리 숲으로 도망칠 래.”
“……숲으로?”
“북쪽의 갈까마귀 숲을 지나면 오 크델리로 갈 수 있어.”
“그럼 골만의 말대로 고발을 당할 수도 있어. 너라면 평생 도망자로 살 수 있을지도 모르지만, 골만은 아닐걸.”
“하지만 셰아. 골만은 순진해 빠졌 고 난 눈치라곤 없어. 피투성이 검 사의 부하가 된다고 해도, 멀쩡히 살아남아 도망칠 수 있을까?”
“물론이지.”
셰아는 헛간 밖으로 슬쩍 고개를 내밀어 촌장의 집을 살폈다. 포이닉 스가 나이 지긋한 촌장과 무어라 대 화를 나누고 있었다.
“나도 함께 갈 거거든.”
“뭐? 네가 왜? 넌 징집대상도 아 니잖아?”
“해야 할 일이 있어.”
두 소꿉친구의 의구심 어린 시선에 그녀는 설명하는 대신 눈을 빛내며 질문했다.
“어때? 할 거야, 말 거야?”
골만과 카바스는 서로 눈을 마주치 더니 결국 고개를 끄덕였다.
“좋아. 그럼 이제 피투성이 검사를 꼬셔서 용병으로 변신해야겠네.”
셰아가 빙그레 미소를 지었다.
“가장 중요한 건 첫인상이야. 오늘 은 가진 돈을 탈탈 털어서 무기랑 갑옷을 구하고, 내일 찾아가자.”
두 청년은 그들의 친구가 수도원에 다녀온 뒤로 생긴 것에 어울리는 얌 전한 태도를 갖추게 되었다고 여겼 다.
“어때? 재밌겠지?”
오산이었다. 셰아는 어린 시절의 말괄량이 소녀 그대로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