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he Blood Knight's Villains RAW novel - Chapter (283)
나의 악당들 283화
53. 한밤의 태양(2)
게임으로서의 다크월드에서, 세테 니오라 수도원은 다섯 번째 챕터에 해당한다. 그리고 그 다섯 번째 챕 터의 보스는 바로 ‘암흑계의 전령’ 이었다.
물론 이 사실이 현실에서도 적용되 리라고는 장담할 수가 없다. 지금까 지 시나리오가 비틀린 부분이 한둘 이 아니니 세테니오라 수도원에서의 일도 예측할 수가 없는 것이다.
생각해보면, 챕터 5의 보스인 ‘암 흑계의 전령’은 이미 한 차례 만났 어야 하는 놈이다.
사우스하버에서 도망친 강도남작 알비안느가 부하들과 함께 롱빌을 점거하고, 이에 산장으로 도망친 말 로리 남작이 플레이어의 도움을 받 아 롱빌을 되찾는 게 원래의 시나리 오였다. 이때 알비안느를 처치하기 직전, 컷신과 함께 나타나 놈을 기 괴한 괴물로 만드는 것이 암흑계의 전령이 처음으로 등장하는 장면이 고.
하지만 현실에서는 나로 인해 몇 가지 변화가 생겼다.
일단, 강도남작 알비안느는 사우스 하버에서 도망치지 못했다. 성문에 서의 전투 중 내가 직접 놈의 목을 베었고, 덕분에 난 ‘참수자’라는 별 명을 얻기도 했다.
알비안느가 진즉 죽었으니 롱빌이 점거당하는 일도 없었다. 남작부인 다이오네아가 윤간당한 뒤 시체가 되어 성문에 걸리는 일도, 말로리 남작이 아내를 빼앗겼다는 수치심에 이를 갈며 복수에 나서는 일도 없었 다.
암흑계의 전령이 접근한 대상 역시 달라졌다. 놈은 마적들에 의해 점거 된 롱빌에 나타나 알비안느를 괴물 로 만드는 대신, 그라두일 산 어딘 가에서 아누파드 여왕 라마쉬다를 타락시킨 뒤 사라졌다.
타락한 라마쉬다는 갈라진 배에서 악신 우쉬투의 권속들을 쏟아내었 고, 마지막엔 암흑기사 ‘아킬렘누르’ 까지 소환했다.
여기까지만 해도 시나리오의 변주 에 머리가 깨질 지경인데, 네 번째 챕터인 레이븐즈 클리프에선 아예 이야기가 통째로 뒤틀렸다.
한낱 좀도둑에 불과했던 사이츠는 라-팔라이스 궁전에서 훔친 금서를 제물로 바쳐 암흑기사 아킬렘누르에 게서 힘을 빌렸고, 이를 바탕으로 레이븐즈 클리프와 꿈의 옥좌를 차 지했다.
챕터 보스인 흡혈귀 군주 ‘텐비에 르마’는 힘을 잃고 도망치다가 오렛 사 주점에서 나와 조우했고, 허무하 게 죽음을 맞이했다.
일련의 사건들을 되새기고 있자니 며칠 전 꿈에서 만난 트릭스터의 말 이 떠오른다.
-네가 아는 것과 전혀 다른 사건 들이 펼쳐지는 와중에도 이번처럼 현명하게 판단할 수 있을까?
내가 아는 것과 전혀 다른 사건들 이 펼쳐진다……. 그것은 세테니오 라 수도원에서 시작될 이야기가 게 임 속 시나리오와는 전혀 다르리라 는, 일종의 예언이었다.
나는 지금까지 수많은 변화를 직접 만들어낸 당사자로서 그 예언에 동 의할 수밖에 없었다.
하지만 미래를 예측할 수 없다고 해서 손가락이나 빨고 있을 수는 없 는 노릇이다. 아니, 미래를 모르니 더더욱 머리를 굴려야겠지.
그런 생각에서 며칠간 나름대로 시 뮬레이션을 해봤지만, 위기에 빠질 수도 있겠다는 생각은 좀처럼 들지 않았다.
이러한 자신감은 믿음직한 동료들 과 하루가 다르게 강해지는 용병들, 그리고 내 캐릭터 시트에서 비롯된 것이었다.
이름 : 나 레벨 : 31
클래스 : 혈기사
능력치 : 남은 보너스 – 0
근력 – 32(68) 민첩 – 30(60) 건강 – 31(64) 마력 – 27(51) 스킬 :
피의 칼날 7pt, 약탈 5pt,
피의 채찍 2pt
피의 방패 3pt, 붉은 손아귀 2pt 흐르는 피 6pt, 뜨거운 피 5pt, 끓어오르는 피 lpt,
전설의 혈통 3pt
갈증 5pt, 피의 갈증 2pt, 피보라 2pt
챕터 5 공략을 위한 적정 레벨은 32다.
내 현재 레벨은 31로, 적정 레벨에 미치지 못하지만 걱정이 되진 않는 다. 그간 공짜 보너스를 워낙 많이 받은 덕에 능력치와 스킬을 포함한 내 실질적인 스펙은 40레벨 초반이 나 마찬가지였기 때문이다.
이러한 힘이 마음속 버팀목이 되어 준 덕에, 트릭스터의 말대로 예상치 못한 일이 발생하더라도 어지간해서 는 당황하지 않을 자신이 있었다.
그러니까, 어지간해서는 말이다.
날이 바뀌었지만 눈보라의 기세는 여전했다. 아니, 더 사나워졌다.
구우우우-
눈 섞인 바람은 협곡을 내달리며 요란스레 으르렁거렸다. 마치 거대 한 나팔고등이 우는 듯 기이한 바람 소리가 천지에 가득했다.
앞도 제대로 살피지 못할 상황이었 지만 그렇다고 야영지에 죽치고 앉 아있기만 할 수는 없었다.
아침 식사를 마친 뒤 두 시간쯤 기다려봤지만 눈보라의 기세는 꺾일 줄을 몰랐고, 난 마침내 결단을 내 렸다.
“어쩔 수 없지. 출발하자.”
가도를 따라 한나절만 걸으면 세테 니오라 수도원이었다. 용병들 역시 이를 모르지 않았기에 입으론 투덜 거리면서도 모닥불을 끄고 옷차림을 고치는 등 길을 나설 채비를 서둘렀 다.
짐말 노릇을 하는 점박이의 고삐를 쥐고 선두로 나섰지만, 쌓인 눈 탓 에 수레가 좀처럼 굴러가질 않았다. 결국 난 짐수레를 끌다시피 하며 앞 으로 나아가야 했다.
헤일라의 애마인 올토니제는 아일 란트 산 명마답게 거센 눈보라에도 굴하지 않았다. 부상자를 실은 데다 안장엔 짐도 가득했지만, 맨몸으로 평지를 산책하듯 눈 덮인 오르막을 가뿐히 오르는 것이었다.
어쨌든, 말들이 어찌어찌 제 몫을 해준 덕에 동료들과 용병들은 비교 적 수월히 여정에 임할 수 있었다. 물론 갑옷과 무기로 중무장한 채 배 낭까지 메고 눈길을 걷는 게 그리 쉬운 일만은 아니었다.
이에 육손이 미텔먼을 포함한 몇몇 신참들이 고생스러움을 성토하며 투 덜거리자, 말총머리 프리츠가 뒤를 돌아보며 쏘아붙였다.
“X팔, 용병이라는 놈들이 이까짓 걸로 애새끼마냥 징징대? 지금부터 입 여는 새낀 이빨을 죄다 뽑아버릴 테니, 닥치고 걷기나 해!”
그의 으름장에 겁먹은 신참들은 입 을 꾹 다물고 말았다.
굵은 눈과 세찬 바람에 갇힌 채 몇 시간이나 걸었을까. 드디어 오르 막이 끝났다.
“저기가 세테니오라 수도원인가.”
눈보라 너머, 산비탈 한쪽으로 툭 불거진 절벽과 그 위에 자리 잡은 구조물이 흐릿하게나마 시야에 들어 왔다.
눈 때문인지 원래 그런 것인지 모 를 하얀 외벽과 점토 기와를 올린 지붕 등을 살피다가 슬쩍 미간을 좁 혔다.
“수도원이 아니라 성채 같이 생겼 네.”
“이런 오지에 자리를 잡으려면 성 곽은 필수니까.”
내 혼잣말에 답한 건 두꺼운 공단 망토로 몸을 휘감은 헤일라였다. 그 녀는 망토 후드를 털어내며 눈을 깜 빡거렸다.
“다른 수도원들과는 달리, 세테니 오라 수도원은 포도가 아니라 마가 목 열매로 술을 만들어.”
“마가목 열매?”
“응. 몸에 좋은데다 맛이 무척 특 이하대.”
흑진주 같은 눈동자가 눈보라 속에 서 반짝반짝 빛났다. 거기에 담긴 기대감에 피식 웃음이 나왔다.
무어라 말을 하려던 그때, 옆에서 손차양 한 채 수도원을 살피던 우테 콰이가 불쑥 입을 열었다.
“연기가 난다.”
“ 연기?”
“옳다. 봐라.”
그 말에 난 안력을 돋우며 다시금 수도원을 살펴보았다. 과연, 우테콰 이의 말대로 수도원 안쪽에서 검은 연기 두어 줄기가 치솟다가 바람에 흩어지고 있었다.
“……어, 젠장. 무슨 일이지?”
그 중얼거림에 답할 수 있는 사람 은 여기에 없었다. 난 서둘러 걸음 을 옮겨 벼랑 위의 잔도에 들어섰 다.
눈보라를 헤치며 아찔한 잔도를 걷 기를 얼마쯤, 세테니오라 수도원이 온전히 모습을 드러내었다.
가까이에서 본 수도원은 일전에 본 레이븐즈 클리프 성만큼이나 커다란 구조물이었다.
하얀 외벽에는 화살을 쏘아내기 위 한 좁은 창문이 여럿 뚫려 있었고, 원뿔 모양의 지붕을 얹은 낮고 뚱뚱 한 탑 너덧 개가 여기저기 솟아 있 었다. 덕분에 얼핏 보면 평범한 요 새나 성채 같았다.
하지만 입구 위쪽엔 고리십자가가 걸려있었고 그 좌우엔 색색의 성화 (聖晝)가 모자이크 양식으로 새겨져 있었다. 그 모습이 한눈에 봐도 광 명교의 성지다운 웅장함을 자랑했지 만…….
“……대체 무슨 일이 있었던 거 지?”
세테니오라 수도원은 마치 전투라 도 치른 듯 아주 만신창이가 되어 있었다.
하얀 외벽은 아래쪽이 새까맣게 그 을렸고, 지붕 중 태반은 점토 기와 가 와르르 쏟아졌으며, 뚱뚱한 탑 중 하나는 미세하게 기울어진 채였 다.
검은 목재에 철판을 덧댄 두꺼운 문짝은 반으로 쪼개져 한 조각은 바 닥에 엎어졌고, 나머지는 입구에 비 스듬히 기댄 모양새였다.
예상치 못한 풍경에 당황하고 있던 그때, 입구 왼편에 붙은 탑에서 고 함이 들려왔다.
“너희들은 누구냐! 주의 이름으로 묻노니, 정체를 밝혀라!” 우렁찬 호통. 중년 남성의 목소리 였다.
탑을 올려다보았지만 심한 눈보라 탓에 실루엣만 몇 보일 뿐 얼굴은 보이지 않았다. 하지만 목소리에 담 긴 기세만으로도 그 주인이 범상한 작자가 아님을 짐작할 수 있었다.
난 점박이의 고삐를 컨휘어에게 넘 기며 앞으로 몇 걸음 나섰다.
“울카르 왕자의 일곱 번째 기사인 포이닉스와 그 일행입니다!”
“포이닉스? 당신이 불사(不死)의 기사, 포이닉스 경이란 말인가?”
“……불사의 기사? 그건 처음 듣는 별명인데……
난 말끝을 흐리다가 눈썹을 긁적이 며 재차 목소리를 높였다.
“뭐, 아마 맞을 겁니다! 그리고 그, 피투성이 검사나 은왕자의 적기사로 불리기도 하는데-”
말하다 보니 얼굴이 절로 뜨거워진 다. 대체 누가 지은 건지는 모르겠 지만, 하나같이 오글거리는 별명들 이다.
잠시 무어라 혼잣말을 중얼거리던 탑 위의 사내는 한 걸음 앞으로 나 섰다. 청수한 인상에 단정히 수염을 기른 얼굴이 이쪽을 내려다보았다.
“잠시 기다리시오!”
잠시 후, 우당탕하는 소리와 함께 수도원의 입구를 틀어막고 있던 잡 동사니들이 하나둘 치워지기 시작했 다. 별의별 물건들을 어찌나 차곡히 쌓아뒀는지, 입구가 완전히 열리기 까지 한참을 기다려야 했다.
마침내 가장 바깥쪽에 있던 거마창 을 붙인 물수레까지 빠져나가고, 하 얀 갑주를 입은 중년인이 병사들을 거느리고 모습을 드러내었다.
코받이가 달린 투구를 단단히 눌러 쓴 중년인은 일행을 한차례 돌아보 더니 나를 빤히 바라보았다.
“빛의 가호가 함께하길.”
“반갑습니다.”
“……정말 당신이 포이닉스 경이 오?”
“예, 제가 포이닉스입니다.”
내가 경쾌히 고개를 끄덕였으나 중 년인은 미간을 좁힌 채 의문을 표했 다.
“젊구려. 적어도 서른은 넘었을 것 이라 여겼는데.”
“칭찬으로 듣겠습니다.”
중년인은 입을 다문 채 내 눈을 가만히 들여다보았다. 그의 연녹빛 눈동자에서 신성력이 느껴졌다.
“……난 카바르요. 교단에서 이곳 을 수호하는 임무를 받았지.”
“과연, 성당기사셨군요. 반갑습니 다.”
“나도 반갑소. 그리고, 당신이 정말 포이닉스 경이라면, 감사를 표해야 겠군.”
“예? 감사요?”
“아치발드 경을 수습해주었다고 들 었소.”
아치발드 경. 스타메이커 솔레바의 노예 중 하나였던, ‘순백의 기사’ 아 치발드 경을 말하는 건가.
“나는 그와 소년기사단에서 13년 간 함께 수련했소. 모든 성당기사들 을 대신하여 감사를 표하는 바요.”
“아닙니다, 경. 당연한 일을 한 것 인데.”
“성당기사의 무장은 하나같이 값비 싼 귀물이오. 그런 귀물 앞에서 나 쁜 마음을 먹지 않는 건 세속에서 보기 드문 겸허함이지.”
그는 칭찬을 하면서도 표정 변화가 거의 없었다.
내가 민망함에 무어라 말을 하려던 찰나. 중년의 성당 기사, 카바르 경 은 몸을 돌렸다.
“따라오시오. 당신을 기다리는 분 이 있소.”
“예‘?”
여기 온 용무를 묻지도 않고, 다짜 고짜 따라오라는 말에 난 조금 당황 하여 되물었다.
“잠깐, 절 기다리는 사람이라뇨? 그게 누굽니까?”
“성자님이 오.”
“성자님‘?”
“그렇소. 성자 아벨. 그분을 찾아온 것 아니오?”
내가 멍청한 얼굴로 고개를 끄덕이 자 카바르 경은 발을 옮겼다.
“그분은 경의 방문을 미리 알고 계 셨소.”
“어떻게-”
“시간이 넉넉지 않소. 우선 따라오 시오.”
결국 난 영문도 모른 채 그를 따 라 걸음을 옮겼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