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he Blood Knight's Villains RAW novel - Chapter (298)
나의 악당들 298화
54. 성기사(6)
“……조금 고민스럽군요.”
망설이는 척하다 뱉은 말에, 테오 도라의 연녹빛 눈동자가 반짝였다.
“고민이라. 무엇이 말이오?”
“공녀님의 말씀대로, 성자께선 제 게…… 계시를 남기셨습니다.”
“계시?”
“예. 성당기사인 카바르 경의 말로 는 그렇다는군요.”
‘흐음’하며 생각에 잠겼던 공녀는 이내 미소를 지었다. 초록을 머금은 수선화가 봉오리를 틔우는 것만 같 은 모습에 난 몰래 침을 삼켰다.
“흥미로운 이야기로군. 측근에 있 는 성직자들 대신 생전 처음 보는 기사에게 계시를 남기셨다니.”
“……흐흠. 그래서, 이야기를 계속 하기 전에 한가지 약속을 받고 싶습 니다.”
“말해보시오.”
“비밀을 지켜주십시오.”
난 애써 진지한 표정을 지으며 말 을 이었다.
“성자께서 다름 아닌 저에게 계시 를 남긴 이유가 있을 겁니다. 그래 서 전 이 계시를, 일종의 소명이라 고 생각합니다.”
“그런가. 퍽 무거운 짐을 지게 되 셨군.”
“온전히 저의 임무로 여겼기 때문 에 카바르 경을 포함한 엘 가노어 교단의 성직자들에게는 자세한 내용 을 알리지 않았습니다.”
“……엘 가노어 교단의 성직자들에 게는? 그럼 다른 이들에겐, 이를테 면, 칼란다리 교단의 성직자들에겐 계시의 상세를 밝힐 거라는 뜻이 오?”
“예. 정확히 말하면 공녀님께만은 알려드릴 셈입니다.”
동그랗게 뜬 눈에 이채가 서렸다.
“날 특별대우하는 건 아닐 테고. 이유를 물어도 되겠소?”
“성자님과 서신을 주고받으셨다는 이야기를 들었습니다.”
“그렇소. 대륙에 드리우는 암운이 우려되어 성자께 조언을 구했지.” “서신의 마지막에, 긴밀히 상의할 바가 있다며 성자님께서 공녀님을 불러들이셨다고도 들었습니다. ”
테오도라가 고개를 끄덕여 수긍하 자 난 천천히 왼손을 내밀었다.
“그렇다면, 제게 전해진 계시 중 일부는 공녀님의 몫이었을지도 모릅 니다.”
“……내 몫이라면?”
“한 번 보시죠.”
그리고 소매를 걷었다.
우웅.
손목에 둘린 빛의 띠, 아니, ‘차원 인장’이 방을 밝혔다. 색색의 프리 즘에 조명을 비춘 것 같은 신비로운 무지개가 테오도라의 놀란 얼굴 위 에 드리웠다.
“마, 법? 아니, 마나가 아닌데.”
“손을 잡으십시오.”
“손을?”
“보여드리겠습니다. 제게 주어진 계시를.”
내 차원 인장에 담긴 건 준차원인 ‘꿈의 영지’다. 이는 환계에서 비롯 되었으므로, 차원 인장이 내뿜는 마 력 역시 환계의 것이었다.
환상과 꿈을 이루는 마력은 중간계 에서 좀처럼 보기 힘든 것이다. 강 력한 성기사인 테오도라 역시 그 낯 선 마력에 꿀꺽 침을 삼켰다.
“무서우십니까?”
“……그럴 리가. 빛의 검이자 기름 부음을 받은 자를 두렵게 할 수 있 는 건 오직 주님 뿐이오.”
스스로 다짐하듯 그리 말한 공녀는 ‘후’ 한숨을 내쉬더니 장갑을 벗었 다. 전에도 느낀 거지만, 기사의 것 이라고는 상상할 수 없는 작고 새하 얀 손이다.
“후우.”
그녀는 그 손을 과감하게 내뻗는가 싶더니, 덜컥 멈추며 입을 열었다.
“……음, 그래도, 이게 무엇인지는 알고 싶은데.”
커다란 눈망울이 어린 사슴의 그것 처럼 흔들린다. 두꺼운 서코트와 지 엄한 신분, 딱딱한 말투에 감춰져 있던 여리고 순한 얼굴이 순간적으 로 모습을 드러냈다.
벌컥 터져 나오려는 웃음을 온화한 미소로 승화시키며, 난 그녀를 안심 시켰다.
“별것 아닌 잔재주입니다. 해가 되 는 일은 없을 테니 안심하십시오.”
“……알겠소.” 테오도라는 조그만 손을 몇 번 쥐 었다 펴더니 고개를 끄덕였다.
“그대를 믿겠소. 외숙의 기사이자 성지의 수호자인 그대를 말이오.” 직후, 망설임을 털어낸 그녀가 내 손을 맞잡았다.
구우우웅-
구슬이 쟁반 위를 구르는 듯한 기 이한 금속성에 이어, 빛의 띠에서 까만 연기가 터지듯 솟구쳤다.
“ 앗-”
의연하게 손을 맞잡은 것도 잠시, 테오도라는 기이한 촉감의 연기에 깜짝 놀라고 말았다.
“경, 잠깐, 이건!”
테오도라가 새된 소리를 내며 물러 나려 했으나, 난 단단히 붙잡은 손 을 놓아주지 않았다.
“걱정 마시고 가만히 계십시오
“하지만, 으으, 주여-”
까만 연기가 원반의 형태를 이루었 다. 그리고 테오도라가 본격적으로 비명을 내지르기 직전, 원반이 우리 둘을 집어삼켰다.
세상이 뒤집혔다.
테오도라는 넓고 푸르른 창공에 내 던져졌다.
“꺄아아악!”
귓가를 스치는 거센 바람과 허리를 저며오는 부유감에, 그녀는 눈을 질 끈 감고 비명을 질러댔다.
“공녀님, 진정,”
“아혹, 꺅, 꺄아아아-!”
테오도라가 연달아 비명을 터뜨리 자 그녀와 손을 맞잡은 채 구름 위 를 비행하던 포이닉스는 작게 쓴웃 음을 지었다.
하지만 그 쓴웃음도 잠시, 이 준차 원의 주인인 그에겐 이 귀한 손님을 진정시킬 의무가 있었다.
“괜찮으니 이만 진정하십시오!”
“아흐으-”
포이닉스가 하얀 손등을 살짝 두드 리자 테오도라는 흠칫 몸을 떨었다. 그리고 다급히 양손을 더듬어 그의 팔뚝을 잡아채었다.
“공녀님, 괜찮습니다. 여긴 그저 꿈 일 뿐입니다.”
“으, 으으, 다, 당신은?” “저 포이닉스입니다. 아무 일 없으 니 눈을 떠 보시면,”
그 말이 끝나기도 전에, 공녀는 꼭 감긴 눈꺼풀을 파르르 떨며 반쯤 울 먹이는 목소리로 고함을 질렀다.
“대체, 도대체 나한테, 무, 무슨 짓 을 한 거야!”
“제 꿈에, 성자님께서 남긴 계시에 공녀님을 초대한 겁니다.”
사방이 세찬 바람 소리로 가득한 가운데, 포이닉스는 부드럽고 침착 한 말투로 그녀를 달래었다. 테오도 라는 천천히 이성을 되찾고 슬쩍 실 눈을 떴다.
“아흐.”
감탄과 공포가 뒤섞인 신음.
둘은 고운 솜 같은 구름을 헤치며 낙하하고 있었다. 푸르던 창공이 검 게 물들어가는 와중이었다.
성채, 가옥, 마을 따위가 좁쌀보다 도 작게 보였다. 황금빛 밀밭과 그 사이를 지나는 실 같은 도로가 시야 를 가득 채웠다. 빛과 어둠이 교차 했다.
“하, 하아.”
반평생을 수녀로 산 고귀한 성기사 는 그 장엄한 광경에 완전히 매료되 고 말았다.
공포에 질려 떨던 건 그새 잊었는 지, 속눈썹 아래의 녹옥 같은 눈동 자는 아래로 보이는 풍경을 기억에 새기느라 한껏 벌어진 채였다.
“공녀님.”
다시금 들려온 부드러운 음성에 테 오도라는 천천히 고개를 돌렸다. 달 과 별이 쏟아지는 밤하늘 아래, 한 사내가 까만 눈을 장난스레 반짝이 고 있었다.
“이제 좀 괜찮으십니까?”
그 몽환적인 모습에 그녀는 잠시 숨을 쉬는 것도 잊고 멍하니 입을 벌렸다. 테오도라는 연녹빛 눈동자 에 그가 가득 차오른 다음에야 자신 이 양손으로 사내의 팔뚝을 꼭 붙잡 고 있다는 걸 깨달았다.
“……아.”
“죄송합니다. 놀라게 해드릴 의도 는 없었는데, 제가 실수를 저지른 것 같네요.”
그녀는 포이닉스의 팔을 놓아주려 다 얼른 손아귀에 힘을 더했다. 깃 털처럼 천천히 떨어지고 있다곤 하 지만, 여전히 둘은 까마득한 하늘 위에 떠 있던 탓이다.
“이게 대체 어떻게 된 일이에, 아 니, *끄음* 무슨 조화란 말이오?” 허둥지등 말투를 고치는 테오도라 를 바라보며, 포이닉스는 작게 웃음 을 베어 물었다.
“말씀드렸다시피, 제 꿈속인 동시 에 성자님께서 남긴 계시입니다.”
차가운 인상은 따뜻한 미소를 머금 었고, 날카로운 눈매는 부드러운 시 선을 품었다. 그 모순적인 인상의 미남자가 손을 들어 땅을 가리켰다.
“저기를 보십시오.”
심장이 손바닥으로 옮겨간 듯, 포 이닉스의 맨 팔뚝과 맞닿은 부분에 서 세차게 맥박이 울려댄 탓에 테오 도라는 저 혼자 곤욕을 겪고 있었 다. 그녀는 속으로 기도를 하며 평 정심을 구하다가 곧 이어진 포이닉 스의 말에 깜짝 놀라 아래를 내려다 보았다.
“성자님입니다.”
“ 뭐요?”
밀밭 한복판에 키 큰 노인 하나가 서 있었다. 회색 후드 아래로 드러 난 풍성하고 하얀 수염이 인상적인, 온화한 인상의 노인.
“저분이, 성자님?”
“예.”
“ O 으 ’’ —丁그 •
실제로 본 건 처음이지만, 그녀는 그 노인이 성자 아벨임을 단번에 확 신할 수 있었다. 노인이 풍기는 신 성한 기운이 먼 거리에서도 선명히 전해진 탓이다.
그때, 가만히 서 있던 노인이 한쪽 으로 고개를 돌렸다.
“이제 시작이군요. 잘 보십시오.”
포이닉스의 말이 끝나기가 무섭게, 성자의 시선이 향한 곳에서 구그그 긍- 하고 대지가 떨리는 소리가 들 려왔다. 황급히 그리로 고개를 돌린 테오도라는 헉하고 숨을 삼켰다.
비늘이 검게 번쩍거리는 뱀이, 어 지간한 건물쯤은 단번에 집어삼킬 만큼 거대한 뱀이 구불구불 밀밭을 뭉개며 어딘가로 기어가고 있었다.
“저건••••••
“접니다.”
“……포이닉스 경 말이오?”
“성자님께서 그러시더군요. 제가 검은 뱀이라고.”
테오도라의 눈동자에 의문이 떠오 를 즈음, 거대한 뱀은 어느새 허공 에 뜬 둘의 발밑까지 기어와 붉은 혀를 쉭쉭거리고 있었다.
“저기는, 수도원이 아니오?”
“맞습니다.”
깎아지른 절벽을 울타리 타 넘듯 기어오른 뱀이 세테니오라 수도원에 닿았다. 뱀은 그 몸집만큼이나 거대 한 똬리를 틀어 수도원을 감싸 안았 다.
“……뱀이 수도원을 지키고 있군. 경이 그런 것처럼 말이오.”
“다음은 공녀님 차례입니다.”
“내 차례?”
그 순간 그녀의 몸에서 밝은 빛이 터져 나오기 시작했다.
“윽, 이건.”
망막을 태워 버릴 법한 새하얀 황 금빛에도 불구하고, 포이닉스는 테 오도라의 손을 맞잡은 채 담담한 투 로 말했다.
“역시. 공녀님을 상징하는 거였군 요.”
그의 말대로 테오도라는 마치 태양 처럼 빛나며 수도원과 그 주변에 드 리운 어둠을 밀어내었다.
“상징? 성자님의 계시에, 날 상징 하는 게 있었다는 거요?”
“네. 서쪽에서 떠오른 태양이었습 니다.”
“서쪽에서 떠오른 태양……
“제가 공녀님께 이 계시를 공유하
는 이유 중 하나입니다.” “이유 중 하나? 다른 이유도 있다 는 거요?”
“예. 보시죠.”
쩡!
돌이 깨지는 듯한 기이한 굉음과 함께 한쪽 땅이 접혔다. 저 머나먼 곳의 풍경이 코앞에 떨어지듯 다가 왔다.
으-헝!
“윽!”
난데없이 터진 포효에 테오도라가 인상을 찌푸렸다. 그녀의 시선에 향 한 곳에선 은빛 갈기를 뽐내는 젊은 사자가 밀려오는 그림자를 향해 으 르렁대고 있었다.
“울카르 왕자님입니다.”
“……그래, 그렇군. 은사자. 외숙부 의 상징으로 저것만큼 어울리는 게 없겠지.”
“예. 이게 공녀님께 이 계시를 보 여드리는 또 다른 이유입니다.”
끈적하게 물결치던 그림자는 이내 파도가 되어 사자를 집어삼켰다.
“이런!”
테오도라는 저도 모르게 신성력을 끌어올렸다. 그에 반응하듯 그녀의 몸에서 뿜어지던 광채가 기세를 더 했으나, 강처럼 흐르는 그림자는 꿈 쩍도 하지 않았다.
“저걸 어떻게-”
“아직 안 끝났습니다, 집중하십시 오!”
째
이번엔 얇은 유리가 깨지는 듯한 소리가 터졌다. 수도원, 검은 뱀, 은 사자, 황금 밀밭, 그림자 등 사방의 풍경이 먼지처럼 흩어졌다. 테오도 라가 내뿜던 빛도 꺼졌다.
대신 희미한 은색 광채가 저 멀리 서 흘러왔다. 동시에 미증유의 힘이
불어닥쳤다.
“으, 으윽!”
“괜찮습니다.” 둘은 마치 빨려드는 것처럼 어딘가 로 쇄도해갔다. 테오도라는 또다시 몸을 움츠렸으나 무력하게 눈을 감 지는 않았다. 어느새 어깨를 단단히 감싼 포이닉스의 팔이 그녀를 안심 시킨 덕분이다.
찰나가 영겁처럼 흘렀다. 둘은 단 단한 돌벽 사이에 자그맣게 트인 창 앞으로 날아들었다. 은빛 광채가 흘 러나오는 바로 그곳이었다.
창 안엔 묘령의 여인, 아니, 소녀
가 앉아있었다. 수녀복 위에 흰 머 릿수건을 둘러 조막만 한 얼굴만 드 러낸 소녀. 그녀의 밝은 남색 눈동 자는 창밖을 향해 있었으나, 포이닉 스와 테오도라를 보지는 못하는 기 색이었다.
“••••♦•유릴?”
“예?”
포이닉스는 흠칫 놀라 테오도라를 돌아보았다. 수녀복의 소녀를 마주 한 성기사는 눈을 휘둥그레 뜬 채였 다.
“저 소녀가 누군지 아십니까?”
“알다마다. 근 십 년 만에 보는 거 지만, 유릴, 사랑스러운 내 어린 이 모를 못 알아볼 리가 있나. 여기서 보게 되다니……
“어린 이모? 그렇다면,”
테오도라의 아버지는 토팔의 공작 인 선제후 아빌람버스의 형이고, 어 머니는 밀라놀의 국왕인 라이오넬 3 세의 딸이다. 그 사실을 되새긴 포 이닉스는 슬쩍 미간을 좁혔다.
“그럼, 저 소녀가 공주란 말입니 까?”
“그렇소. 네 번째 왕녀이자, 베센 왕비 전하의 유일한 딸.”
“……베센 왕비?”
“그래, 베센 왕비 전하. 울카르 왕 자의 모친 말이오!”
포이닉스는 눈을 크게 뜨며 소녀를 돌아보았다. 다시 보니, 블루토파즈 를 연상시키는 남색 눈동자는 울카 르의 것과 똑 닮아 있었다.
“울카르의, 동생? 그러면 이 계시 는—”
유릴과 포이닉스의 눈이 마주친 그 때, 또다시 유리가 깨지는 소리와 함께 꿈을 이루던 모든 요소들이 가 루가 되어 흩어져갔다. 단단한 돌벽 과 창문은 물론이고 유릴 역시 순식 간에 사라졌다.
“경, 이건!” “……꿈이, 계시가 끝난 겁니다. 이 제 돌아가야,”
놀란 테오도라를 안심시키던 포이 닉스는, 그녀를 돌아보고 심장이 멎 은 사람처럼 몸을 굳혔다. 테오도라 역시 주변의 다른 요소들처럼 가루 가 되어 흩어지고 있었기 때문이다.
아니, 흩어지는 게 아니었다.
테오도라의 백금 같은 머리칼과 연 녹빛 눈동자, 새하얀 얼굴이 흩어지 며 새로운 얼굴이 드러났다.
“누, 나?”
“누나?”
음성은 그대로였다. 신경질적이면 서도 따뜻한 목소리가 아니라, 온화 하지만 단단한 목소리.
“무슨 소리를 하는 게요? 정신 차 리시오, 경!”
그녀의 다그침에 포이닉스는 숨을 몰아쉬며 눈을 깜빡였다. 다음 순간 그의 팔뚝을 붙잡고 있는 건 김수연 이 아닌 테오도라였다.
“경? 포이닉스 경!”
“……으, 아, 죄송, 돌아가야, 돌아 가겠습니다.”
포이닉스는 얼른 마력을 끌어올렸 다. 왼쪽 손목에서 빛의 띠, 차원 인장이 번뜩였다.
주인의 다급한 마음에 화답하듯, 차원 인장에서 뿜어진 까만 연기는 순식간에 원반의 형태를 이루었다. 그리고 둘을 집어삼켰다.
꿈이 끝났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