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he Blood Knight's Villains RAW novel - Chapter (300)
나의 악당들 300화
54. 성기사(8)
부니의 서신을 받은 건 점심나절이 었지만, 그걸 펼쳐보는 건 잠시 미 뤄두어야 했다. 사제 마셀의 부름을 받아 병력을 끌고 온 자잘한 영주며 기사들이 만남을 청해온 탓이다.
교단의 지원요청에 응하여 득달같 이 달려온 건 다섯 명의 귀족으로, ‘앤트럼’ 지방과 ‘오든록’ 지방 등 세테니오라 수도원 지척에 영지와 장원을 둔 자들이었다.
귀족이라고 그들과의 만남을 부담 스러워할 필요는 없었다. 개중 둘은 고작 남작이고, 나머지 셋은 나와 같은 기사였으니까.
다들 세력이 큰 귀족이 아니라서 거느린 병력도 보잘것없었다.
각자 스물에서 마흔쯤 되는 병사를 데려왔고, 가병(家兵)이나 종자 몇 을 제외하면 죄다 징집병이었다. 그 나마 오든록의 어느 요새에서 왔다 는 ‘셈피 남작’은 잘 훈련된 창병과 궁수를 백이십 명가량 데려오긴 했
다.
그러나 수도원 성직자들은 삼백 명 도 채 되지 않는 오합지졸 군대론 안심하지 못하는 눈치였다. 내가 말 을 꺼내지도 않았는데 조금만 더 수 도원에 머물러달라 청해온 것을 보 면 확실했다.
다섯 귀족과의 만남은 별 영양가 없이 마무리 되었다. 애초에 딱히 용건이 있어서 만남을 청한 게 아니 라 내 얼굴이나 한 번 보겠다고 찾 아온 거였거든.
다만 대화의 말미에 셈피 남작이 꺼낸 주제가 썩 흥미롭긴 했다.
“언젠가 경의 주군을 찾아뵈어 감 사를 표하고자 했는데, 인연이 이렇 게 닿았으니 경이 이를 전해주면 고 맙겠군.”
“감사라니, 무슨 말씀이십니까?”
“3왕자 전하의 군대가 오두엔느를 탈환한 일 말일세. 덕분에 아비든 지방이 평안을 되찾았고, 나도 한시 름 놓았지. 내 성은 아비든과 지척 이거든.”
오두엔느? 오두엔느 항구?
“처음 듣는군요. 오두엔느를 탈환 했다니, 거기를 빼앗긴 일이 있습니 까? 누구한테요?”
“이런, 이쪽 소식을 전혀 모르는 모양이군.”
셈피 남작은 쯧, 혀를 차더니 부연 했다.
“‘찬송의 마녀’가 이끄는 어인족 군대가 기어코 오두엔느를 집어삼키 지 않았나.”
“어인족 군대가……
“원래 놈들이 노리는 건 그 남동쪽 에 있는 비티안 항구였네만, 금세 포기한 모양일세.”
셈피 남작은 고소를 머금은 채 어 깨를 으쓱였다.
“하긴, 제깟 놈들이 뭘 어쩌겠나?
‘선혈백(鮮血伯)’의 쇠비늘 함대가 하필 비티안으로 들어왔으니.”
선혈백? 쇠비늘 함대?
무의식중에 옆을 돌아보았다. 내 옆자리에서 귀족들과의 대화를 도와 주던 헤일라는 평소와 같은 무표정 한 얼굴로 차를 홀짝이고 있었다.
“혹시 선혈백도 모르는 겐가? 아일 란트의 첫 번째 혈기사 아켈레 백작 각하 말일세.”
“아, 음, 알고 있습니다. 몇 번 들 어본 적이 있어서…… 대충 말끝을 흐리며 미소를 지어 보였다.
김승수와 포이닉스가 뒤섞인 누군 가로서, 포이닉스의 아버지 이야기 를 들을 때마다 어떻게 반응을 해야 할지 잘 모르겠다.
“뭐, 좋네. 그럼 이야기가 꽤 편하 겠군.”
내 어색한 표정을 알아차리지 못한 듯, 셈피 남작은 흥이 돋은 기색으 로 말을 이어갔다.
“내 전해 듣기로, 선혈백께선 혈기 사를 마흔 명도 넘게 거느리고 오셨 다더군. 함대와는 별개로 말일세.”
“……마흔 명이요?” 혈기사는 쌍왕가가 자랑하는 엘리 트 무력 집단으로, 아일란트 공작령 전체를 통틀어도 채 백 명이 안 되 는 귀한 존재들이다. 그런데 아켈레 백작이 그중 절반을 끌고 대륙에 왔 다고?
“종자들도 포함한 수겠죠.”
나지막이 말을 꺼낸 건 다름 아닌 헤일라였다.
이 자리에 앉은 직후부터 다섯 귀 족은 빼어난 미녀인 그녀를 집요하 게 흘긋거리고 있었다. 하지만 헤일 라는 그런 시선을 알아차리지 못한 건지, 아니면 신경을 쓰지 않는 건 지 어째 나른한 기색으로 눈을 깜빡 일 뿐이었다.
“아일란트는 구리와 은, 그리고 철 이 풍부한 섬이에요. 덕분에 혈기사 와 가병은 물론이고 종자나 일반병 에게도 질 좋은 장비를 입힌다고 들 었어요.”
“으음, 그런가?”
“예, 남작님. 아마 세인들의 눈엔 잘 무장한 종자들이 혈기사로 보였 겠죠.”
“그럴 수도……. 견식이 넓은 아가 씨로군그래.” 헤일라가 대답 대신 슬쩍 고개를 숙이며 다시 차를 홀짝거리자, 셈피 남작은 큼큼 목을 가다듬었다.
“어쨌든, 선혈백과 혈기사들, 거기 에 함대까지 왔으니 찬송의 마녀나 바다거인들 따위가 당해낼 턱이 없 지.”
“으음. 그렇겠군요.”
“해서 어인족의 공세가 오두엔느 항구로 집중된 걸세.”
목을 가다듬던 셈피 남작은 약초와 향신료를 넣어 끓인 포도주로 입술 을 적셨다.
“선혈백이 나타난 비티안에 비할 바는 아니겠으나, 오두엔느도 그리 만만하진 않았네. 영주인 ‘시릴로 자작’은 물론이고, 거기 주둔 중인 3왕자 전하의 부하들 역시 하나같이 쟁쟁한 이들이잖나.”
그는 한 명씩 이름을 거론하며 손 가락을 꼽았다.
“은왕자의 오만한 기사, 라이암 경 이야 말할 것도 없고, ‘방패처녀’라 불리는 북방 출신 용병대장도 나름 뛰어난 인물이라 들었네.”
……방패처녀?
난 눈썹을 긁적이다가 질문했다.
“그 방패처녀라는 용병대장, 이름 도 아십니까?”
“이름? 그게, 뭐였더라……
“혹시 그라니아 아닙니까?”
“그래, 그런 이름이었던 것 같군. 아는 사이인가?”
“예. 한때 전우였으니까요.”
“아, 하긴, 둘 다 3왕자 전하의 막 하이니 당연한 일이군.”
그라니아는 사우스하버에서 만나 한동안 함께 다녔던 용병이다.
검과 방패를 기가 막히게 다루는 전사였지. 포이닉스의 기억을 되찾 기 전 내 검술의 근간을 닦아준 스 승님이기도 하고.
뱃고동 여관 뒤뜰에서 함께 뒹굴었 던 것이 엊그제 같은데, 어느새 명 성 있는 용병대장이 됐구나. 감회가 새로운걸.
“누데인족 전사단, ‘하레스 키스’의 우두머리인 아탈란테도 있네.”
라이암 경과 그라니아에 이어, 또 다시 익숙한 이름이다.
“그녀는 ‘나피닷 알 누보아’라고 불리는데, 누데인어로 ‘구원의 딸’이 라는 뜻이라더군. 그 거창한 별명답 게 누데인 씨족 셋이 그녀를 따르고 있다던가.”
두어 달 전인가 ‘꿈의 영지’에 처 음 들어섰을 때, 대체 어떻게 된 일 인지는 모르겠지만, 아탈란테와 만 난 적이 있다.
그때 이것저것 근황을 나누며 오두 엔느에 주둔하고 있다는 소식도 전 해 들은 기억이 있다.
“그런 쟁쟁한 이들이 저항을 했음 에도 불구하고, 오두엔느는 잠시 찬 송의 마녀와 어인족 무리의 손에 떨 어지고 말았지.”
테이블에 모여앉은 귀족들이 어느 새 헤일라 대신 자신에게 집중하고 있음을 알아챈 셈피 남작은 슬쩍 미 소를 지었다.
“그러나 시릴로 자작과 라이암 경 을 중심으로 군대는 다시 힘을 모았 네. 그리고 마침내 일주일, 아니, 이 제 열흘 전이로군, 저 멀리 서쪽 초 원에서 온 신비한 주술사를 앞세워 마침내 찬송의 마녀를 내쫓았다는 군.”
“……그런 일이 있었군요. 처음 듣 습니다.”
‘저 멀리 서쪽 초원에서 온 신비한 주술사’라면, 우테콰이의 처제이자 영혼주술사인 ‘칸자이 이오피야’를 이르는 거겠지.
오만한 라이암 경, 방패처녀 그라 니아, 구원의 딸 아탈란테, 영혼주술 사 이오피야.
하나같이 재회하고 싶은, 혹은 만 나보고 싶은 이름들이다.
“오두엔느. 오두엔느 항구라.”
산길을 따라 사흘쯤 남하한 뒤 배 를 타면 하루 만에 도착할 수 있을 만큼 가까운 곳이다.
지금 당장 달려갈 수 있는 형편은 아니다. 하지만 가까운 시일 내에 모두 만날 수 있을 것 같다는 예감 이 든다.
마침내 부니의 편지를 펼쳐본 건 슬슬 해가 저물어가는 늦은 오후였 다.
-나리, 부니입니다.
건강하심니까? 기스톨 잘 도착했다 들었슴니다. 어디든 나리 소문 들려 참 조습니다.
저 이제 멀대 아닙니다. 외팔이대 관 부니라고 부릅니다.
“글씨 하곤.” 괴발개발 쓰인 글씨에 피식 웃음이 흘러나온다.
일자무식인 부니가 글을 배운 건 대관으로 임명된 직후, 내 지시에 의해서였다. 롱빌의 필경사 벨딘에 게서 온갖 구박을 들으면서도 힘써 글을 배우던 놈의 모습이 아직도 눈 에 선하다.
글씨체나 맞춤법은 여전히 형편없 만, 그래도 이렇게 편지를 써 보낼 정도면 그간 얼마나 노력을 했는지 대충 짐작이 가서 마음이 훈훈해진 다.
그렇게 미소를 지은 채 다시 편지 를 보니, 거지 같은 글씨나 괴상하 게 쓰인 단어도 쉬이 이해가 되었 다. 참 신기한 일이다.
-원래 라발턴의 대관, 군쥐크입니 다. 옛날 대관 테커 아들입니다. 테 커는 30년 전 알로트 왕자 시절에 임명됐습니다. 군쥐크는 깡패 거느 리고 장원 주민들 괴롭힙니다. 소출 말고도 땅값 3할 받습니다. 순 개새 낍니다.
언젠가 들은 적이 있는 이야기다.
롱빌의 선술집 ‘황금의 칼’에서 만 난 여섯 명의 용병 중 빡빡이 스티 드먼과 얌전한 제네사, 그리고 부니 가 라발턴 출신이라 종종 고향에 대 해 떠들었던 것이다.
-알로트 왕자는 735년에 역적이 됐습니다. 3년 전에 이 근방은 울카 르 왕자님 영지 됐습니다. 그리고 지금 라발턴은 나리 땅입니다. 전 나리가 임명한 새 대관입니다.
근데 군쥐크는 나리가 내린 임명장 을 안 믿습니다. 나리가 준 돈으로 용병을 5명 사고, 고향 친구들 모았 습니다. 전투 중에 깡패 6 죽였습니 다. 군쥐크는 도망쳤습니다. 금화로
수배 걸었습니다.
부니의 글은 매끄럽지는 않았지만 군더더기가 없어서 오히려 쉽게 이 해가 되었다.
금화 다섯 장과 은화 쉰여섯 닢이 라는, 시골 장원치곤 나름 거금인 금액이 편지에 동봉된 사연도 알 수 있었다. 최근 몇 년간의 소출과 군 쥐크가 수탈하여 모은 재산을 합친 뒤 장원의 예산 얼마를 제한 나머지 를 모두 보낸 것이었다.
-154 은화 라발턴에 씁니다. 호수 에 띄울 배 1, 소 4, 짐말 2 샀습니 다. 또 염소 15, 돼지 7 샀습니다. 닭은 많아서 안 샀습니다.
날 풀리면 망루 세우고 목책 고치 고 길 닦습니다. 돈 모이면 대장간 넓힙니다. 소출 3년 모으면 됩니다.
숲에 나무 없습니다. 개나 소나 열 매 줍고 짐승 잡고 나무 자릅니다. 금지령 내려야 됩니다. 허락해주세 요…….
“진짜 별의별 걸 다 적어놨네.”
일곱 장 짜리 편지는 위와 비슷한 내용으로 꽉 채워져 있었다.
장원에 사는 사람은 총 570명이고 그중 건장한 사내는 181명이며 올 해 얼마가 죽었고 얼마가 태어났다 는 등 인구에 관련된 정보, 근처 장 원에 사제가 부임했다는 소식, 뒷산 에서 코볼드 떼가 수를 불리고 있다 는 소문까지.
라발턴에 관련된 것이라면 시시콜 콜한 부분까지 모두 알리고 싶다는 열망이 느껴지는 편지였다.
-나리는 여전히 전투 많다고 들었 습니다. 병사 뽑아 보내야 하지만 사람은 적고 일은 많습니다.
이 편지 들려 보낸 남자, 야경꾼 딜런입니다. 라발턴에서 가장 장사 입니다. 한 명 뿐이지만 도움 됐으 면 좋겠습니다.
필요한 것 있으면 편지 쓰시고, 건 강하세요. 스티드먼한테는 송어 오 늘도 맛있다고 말해주세요.
정성스레 쓰인 편지를 몇 번이고 다시 읽어보았다. 알 수 없는 감상 에 잠기는 한편, 편지의 마지막이 자꾸 눈에 밟힌다.
“……스티드먼은 여기 없는데.”
차원문을 통해 라-팔라이스로 떠 난 녀석들이 떠오른다.
빡빡이 스티드먼과 궁수 콜, 주근 깨 미라와 애꾸눈 시모스.
그리고 엘렌.
“후우.”
쓴웃음을 한숨으로 지워낸 뒤, 난 등받이에 몸을 기대었다. 테이블에 올려둔 편지를 툭툭 두드리다 문가 에 우두커니 서 있던 사내를 돌아보 았다.
“이름이, 딜런? 야경꾼이었다고?”
“예, 나리.”
야경꾼 딜런은 평범한 농사꾼과 비 교하면 아주 건장한 체격을 가진 사 내였다. 부니의 편지에 의하면 라발 턴에서 가장 장사였다니 덩치만 큰 것은 아닐 거다.
게다가 라발턴에서 이곳까지 한 달 반 동안 홀로 여행을 해왔다는 건, 이 세상의 치안 상태를 감안하면 그 자체로 범상치 않은 능력이다.
“전투가 있었다고?”
“군쥐크 놈이 깡패들과 함께 칼을 들고 덤볐습니다. 부니가 미리 준비 를 하지 않았다면 큰일이 났을 겁니 다.”
“그렇군.”
그 외에도 편지에 관한 이야기를 몇 개쯤 더 나눈 뒤에야 그에 대한 질문을 했다.
“여기 오게 된 건, 부니의 명령을 받아서야?”
“절반은 그렇습니다.”
딜런은 무뚝뚝한 표정 그대로 말을 이어갔다.
“전 라발턴에서 쓸모가 없습니다.”
“쓸모가 없다고? 왜?”
“제 아비도, 형도 야경꾼입니다. 아 비는 늙었지만 형은 젊습니다. 마을 에 야경꾼이 둘이나 있을 필요는 없 습니다.”
“그래? 그럼 용병 일이 하고 싶은 거야?”
“용병, 말입니까?”
그는 어리둥절한 눈빛으로 되물었 다.
“저는 나리의 영민입니다. 용병이 아니라 그냥 병사입니다.”
“……그런가.”
난 눈썹을 긁적이다가 피식 웃음을 터뜨렸다.
“뭐, 알겠어. 부하를 불러 거처를 정해줄 테니 잠시만,”
그 말이 끝나기도 전에 베테랑 컨 휘어가 급한 기색으로 문을 열고 들 어왔다.
“오, 컨휘어. 마침 부르려던 참이었 는데.”
“예? 무슨 일로-”
“여기, 딜런이라는 녀석인데 앞으 로 함께 지낼 테니 잠자리랑 장비 좀 준비해줘.”
“아, 예. 알겠습니다. 그보다……
가까이 다가온 컨휘어는 엄지로 뒤 를 가리키며 목소리를 낮추었다.
“테오도라 공녀님께서 와 계십니 다.”
“공녀님이?”
“예. 나리께 긴히 드릴 말씀이 있 다는데요.”
“••••••그래?”
드디어 마음을 정했나 보군.
파랑손 퓨전 판타지 ‘장편소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