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he Blood Knight's Villains RAW novel - Chapter (34)
나의 악당들 034화
9-2. 의뢰(1)
잡동사니 사이에서 명상을 하고 있 는 엘렌은 좀 전에 시전했던 주문들 을 곱씹고 있는 듯했다.
나는 녀석의 곁에 주저앉으려다 다 가오는 인영들을 발견하곤 도로 허 리를 세웠다.
“그라니 아.”
“포이 닉스.”
내가 가볍게 미소를 지으며 손을 내밀자, 옆구리에 둥근 투구를 낀 그라니아는 지친 얼굴로 손을 마주 잡아 왔다.
그라니아 뒤엔 이십 대 초반 정도 로 보이는 여인이 뚱한 표정으로 서 있었다. 궁수인 아르날이었다.
그라니아는 내 몸을 훑어보곤 조금 놀란 얼굴로 질문해 왔다.
“꽤 다친 줄 알았는데, 멀쩡하네?”
“어- 조금 긁힌 정도였거든.”
나는 어깨에 감은 붕대를 툭툭 치
며 말했다.
사실, 포이즌의 곡도에 찔린 상처 는 꽤 심각한 것이었다. 하지만 건 강한 몸과 신비가 깃든 피 덕분인지 상처는 벌써 아물어가고 있었다.
오레그 씨의 특제연고를 바르고 붕 대를 감으니 격하게 움직이지만 않 는다면 참을 만한 정도였다.
그건 그렇고, 잠깐. 아까 전투 중 에 봤을 땐-
“안톤은? 안톤도 같이 있지 않았 어?”
“치료를 받고 잠깐 쉬고 있어.”
아, 맞다.
경황 중에 본 거지만, 안톤은 분명 어딘가 다친 것 같은 모습으로 도적 놈들과 맞서 싸우고 있었지.
그라니아 패거리와 간단히 술을 마 신 적이 있어서 안톤이 어떤 녀석인 지는 대충 알고 있었다.
그라니아가 고향에서 용병 일을 시 작할 무렵부터 함께한 나름 베테랑 이고, 용병치곤 순둥순둥한 성격을 가진 녀석이지.
“상처가 심한가 보네?”
“꽤. 팔을 깊이 찔렸거든.” 그라니아가 어두운 표정으로 말끝 을 흐리자, 짧은 뒷머리를 모아 동 여매고 있던 아르날이 심통이 난 목 소리로 대신 말했다.
“상태가 아주 안 좋아. 운이 나쁘 면 불구가 될지도 모르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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딱히 해줄 말을 찾지 못한 내가 입을 다물자 뒤에 있던 아르날이 헛 웃음을 터뜨렸다.
“하, 그게 끝이야?”
“•••응?”
“눈치가 있으면 미안한 척이라도 해보지, 그래?”
뭐야, 갑자기 왜 지랄이야?
내가 무어라 대답하기도 전에, 뒤 에서 뾰족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미안한 척?”
고개를 돌려보니 어느새 명상을 끝 마치고 내 옆에 선 엘렌이 팔짱을 끼고 있었다.
“제 실력이 부족해서 거지들 따위 에게 당한 걸 왜 포이에게 따져?”
그래, 잘한다. 너도 어디 가서 지 랄로 꿀릴 녀석은 아니지.
엘렌의 말에 얼굴이 일그러진 아르 날은 눈을 부라리며 빈정거리는 목 소리로 물었다.
“왜냐고? 설명해 줄까?”
“아르날, 그만.”
그라니아의 한숨 섞인 만류를 깔끔 히 무시한 아르날은 나와 엘렌을 번 갈아 보며 쏘아붙이기 시작했다.
“우리가 여기 온 건 포이닉스를 만 나기 위해서였어. 그리고 도적놈들 이 쳐들어왔을 때 도망치지 않은 건 포이닉스의 성질만 더러운 반편이 동료가 2층에 숨어 있다는 걸 알았 기 때문이지. 어때? 이제 조금 미안 한 마음이 생겨?”
“하, 감히 누굴 더러 반편이라고.”
“질질 짜는 것밖에 못 하는 어린 계집이 반편이지, 그럼 뭐야?”
“아르날, 그만!”
그라니아가 뒤늦게 목소리를 높였 지만… 왠지 일부러 뒷북을 치는 것 같은 느낌이다. 자신이 하지 못하는 말을 아르날의 입을 빌려 하는 것 같다고 해야 하나.
그럼 뭐, 나도 엘렌이 하는 행동을 말릴 필요는 없겠지.
“In flamma_”
냉소를 짓고 있던 엘렌은 짧은 주 문과 함께 손바닥 위로 불꽃을 피워 내었다.
그라니아와 아르날의 얼굴이 순식 간에 경악으로 물들었다. 근처에 있 던 경비대원들 역시 놀란 얼굴로 저 들끼리 수군거리기 시작했다.
“감히 네까짓 용병 년이, 뭐? 반편 이라고? 내가?”
불꽃이 덩치를 키우며 화살처럼 길 쭉해지자, 엘렌의 차가운 미소도 덩 달아 짙어졌다.
반면 엉거주춤하게 선 그라니아와 아르날은 당황한 기색을 숨기지 못 하고 있었다.
위협적인 자태로 열기를 날름거리 는 불꽃화살과 폼멜에 손을 걸치고 있는 나를 번갈아 살피며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고 있는 것이었다.
“•••저, 엘렌 씨. 잠시 진정하시고.”
“진정? 저 활잡이는 나뿐만 아니라 내 스승님, 그리고 라-팔라이스 궁 전 전체를 욕보인 거나 마찬가지야. 그런데 진정하라고?”
오버하기는. 솔직히 한 시간 전까 지만 해도 반편이 맞았으면서.
긴장한 얼굴로 뒷걸음을 치는 그라 니아와 아르날을 보곤 난 작게 한숨 을 내쉬었다.
슬슬 나서야겠군.
“그 정도면 충분해, 엘렌. 진심으로 한 말이 아닐 거야. 동료가 크게 다 쳤으니 그럴 만도 하지.”
나와 눈이 마주친 아르날은 화살집 에서 손을 떼며 고개를 끄덕여 보였 다.
“•••그래, 맞아. 내가 말실수를 했 어.”
엘렌은 잠시 아르날을 쏘아보더니 슬쩍 손을 내저었다.
“이번엔 넘어가겠어. 하지만 두 번 은 없을 테니 입조심 하는 게 좋을 거야.”
불꽃화살이 형체를 잃고 바람결에 흩어지자 녀석은 도로 팔짱을 끼며 입을 다물었다.
•••이 녀석, 어깨가 하늘까지 솟구 칠 것 같은데. 착각인가?
대충 상황이 마무리되자, 문득 의문 이 들어 그라니아에게 물어보았다.
“그런데, 여기 온 게 나 때문이라 고?”
“맞아. 전할 말이 있어서.”
“전할 말?”
그라니아는 잠시 입을 다물더니 잠 시 주변을 둘러보았다.
엘렌이 부린 주문 덕에 오가던 사 람들과 경비대원들의 시선이 모여든 상태였기에, 그라니아는 우리를 여 관 뒤편으로 안내했다.
좀 전에 포이즌과 그 부하들을 상 태로 사투를 벌였던 장소에 이르러 서야 그라니아는 입을 열었다.
“우리가 성주에게 고용된 거, 전해 들었지?”
“응. 요즘 병영에서 머문다며? 거 기 밥은 잘 주냐?”
내 태연한 물음에 그라니아는 짐짓
너스레를 떨며 대답했다.
“뭐, 군대 밥이 다 거기서 거기지. 그래도 여기보단 나아.”
“그야 그렇겠지. 귀리죽만 먹이면 병사들이 죄다 도망쳐 버릴 거 아 냐?”
긴장을 풀기 위한 대화가 썩 마음 에 들지 않았는지, 엘렌은 슬쩍 미 간을 좁혔다.
“쓸데없는 말은 집어치워. 갑자기 성주 얘기는 왜 나오는 거야?”
“우리가 여기 온 게 성주의 전언 때문이니까요.”
“성주의 전언?”
그라니아가 대답을 하려던 차, 갑 자기 웬 걸걸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그건 내가 설명해주지.”
뭐야, 이건 또.
목소리와 함께 모습을 드러낸 이는 다름 아닌 경비대장이었다.
호위병 둘을 거느리고 나타난 경비 대장은 입가에 둥글게 난 갈색 수염 과 투실투실한 볼 때문에 꼭 사나운 불독 같은 인상이었다.
“한낱 용병보단 백작님의 가신인 내가 직접 명을 전하는 것이 효율적 이겠지. 기왕에 여기까지 온 김에 말이야.”
그라니아의 표정이 일그러지는 것 을 무시한 채, 경비대장은 허리에 손을 올리며 엄한 얼굴로 말을 덧붙 였다.
“아무리 뒷골목에서라고 한들, 영 주를 하찮게 부르는 모습도 지켜만 볼 수만은 없는 노릇이고.”
경비대장은 사슬갑옷 위에 체크무 늬로 수놓은 휘장과 두꺼운 망토를 두르고 있었다. 거기에 떡 벌어진 어깨와 허리에 찬 장검까지, 게임 속에서 본 모습 그대로였다.
현실에서도 게임에서처럼 토 나오 게 질긴 맷집을 가지고 있을까?
근데- 경비대장이면 나름 높은 신 분일 텐데. 귀족이려나? 잘은 모르 겠지만, 성주의 가신이라니까 힘이 꽤 있는 양반일 거다.
생각에 잠긴 탓에 잠시 입을 다물 고 있었더니 경비대장은 잠시 눈썹 을 꿈틀거리곤 슬쩍 질문을 해왔다.
“자네가 포이닉스인가?”
“•••맞습니다.”
“그렇군. 세이번의 백작이자 협해 의 지배자이며 사우스하버와 소금성 의 주인이신 오스레드 오브 에아프 리드 각하의 명을 전할 테니 예를 갖춰 듣도록 하게.”
“명이라고요?”
내가 떨떠름한 표정을 지으며 그라 니아를 돌아보자, 그녀는 얼른 말을 덧붙였다.
“정확히 말하면, 의뢰지. 성주님께 서 네게 특별히 의뢰를 한 거야.”
“무슨 의뢰?”
대답한 건 경비대장이었다.
“도시의 상황이 급박하니 감히 거 절할 수 없는 의뢰지. 그러니 명령 이라고 생각하고 성실히 수행해야 할 걸세.”
다시 그라니아.
“성곽 밖으로 서신을 전해주면 돼. 위험한 일이겠지만, 도시를 구하기 위한 일이야. 네 도움이 필요해.”
이번엔 경비대장.
“백작님께서 고대로부터 이어져 내 려온 하수도의 설계도를 내리셨네. 세간에 오가는 자네에 대한 소문이 헛된 게 아니라면, 이 정도 일은 처 리할 수 있겠지.”
또다시 그라니아.
“설계도에 표시된 비밀통로를 이용 해 마적들의 포위망을 빠져나간 뒤, 근처에 주둔하고 있을 지원군에게 성주님의 서신을 전하는 거야.” 그냥 한 명만 말하면 안 되냐? 왜 번갈아 얘기하면서 헷갈리게 하는 거야?
“잠깐, 잠깐만 기다려 주십시오.”
또다시 말을 쏟아내려는 경비대장 을 만류한 뒤, 그라니아에게 질문했 다.
“갑자기 이게 무슨 소리야? 성주 가, 아니, 성주님이 내게 의뢰를 했 다고? 왜?”
“그건.”
“자네가 진상한 가죽을 본 백작님 께서 결단을 내리셨네. 홀로 그런 괴물을 사냥할 정도라면 이 일을 해 결할 적임자라 판단하신 게지.”
진상한 가죽? 괴물?
아, 하수도를 나와서 판 악어가죽 이야긴가?
그러고 보니, 가죽을 사 간 아저씨 가 스스로를 탑의 집사라고 소개했 었지. 그대로 성주에게 올라갔나 보 네.
“성주님이 거느린 병사가 수백은 될 텐데, 그걸 왜 굳이 저한테……
내 의문에 경비대장은 썩 곤란하다 는 듯 얼굴을 찌푸렸다.
“우린 만 너머의 바다와 성벽 너머 의 평야를 감시하고 동시에 도시 안 까지 살피고 있는 형편일세.”
“성곽 방어에 용병들이 동원될 정 도야. 마적들의 공세가 점점 빈번해 지고 있어서, 조만간 동원령이 내려 질지도 몰라.”
동원령이 라니.
사우스하버는 무역을 통한 상업이 발달한 항구도시다. 성주의 힘이 막 강하긴 하지만 외부에서 들어온 상 단들을 내키는 대로 깔아뭉갤 수 있 는 건 아니었다.
그런 사정 때문에 외지인들을 대상 으로 징발령을 내리는 것도 꽤 부담 스러운 일이라고 들었는데, 징병까 지 포함하는 동원령이 내려질 정도 면….
“완전 막장이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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난 엘렌의 중얼거림에 조용히 고개 를 끄덕여 동의를 표하곤 재차 질문 했다.
“그래서. 손이 부족하니 저와 엘렌, 단둘이서 그 일을 처리하라는 겁니 까‘?”
“물론, 그건 아니지. 여기 있는 용 병들과 함께 가면 되네.” “•••그라니아?” 내 의아한 표정을 보곤 쓴웃음을 지은 그라니아가 고개를 끄덕거렸 다.
“원래 나와 아르날, 안톤이 함께할 예정이었는데- 안톤은 힘들 것 같 아.”
“•••왜 너희만? 나머지는?”
“길리우스 씨와 파렐은 잠시 친위 대에 합류한 상태야. 올가 수녀님은 주교의 포고문이 붙어서 교회에 들 어가 있고. 지금은 만나지도 못해.”
“올가 수녀님은 그렇다 치고, 친위 대라니? 친위대가 그렇게 들어가기 쉬운 곳이었어?”
내 질문에 경비대장이 고개를 내저 으며 대신 대답했다.
“그럴 리가. 이건 각하의 배려일세. 위험한 임무를 맡기는 만큼 신분을 보 장해 주겠다는 의지를 보이신 게지.”
나름 뻔뻔한 태도로 지껄이는 경비 대장이었지만, 거짓말에 능하진 않 은 듯 얼굴엔 찝찝함이 서려 있었 다.
이를 눈치채고 슬쩍 그라니아를 살 펴보니, 안색이 썩 어두웠다.
“흐음.”
•••무슨 상황인지 대충 감이 오는 데?
파렐은 괜찮은 투창 솜씨를 가진 용병으로, 그라니아의 친동생이었다. 실력이 떨어지는 건 아니지만, 떠돌 이 용병임을 감수하고서라도 친위대 로 삼을 만큼 뛰어난 녀석은 절대 아니었다.
그런 파렐을 친위대에 잡아둔 것은 아마 그라니아의 배신을 막기 위한 안전장치일 터였다. 임무 중에 그대 로 도시를 버리고 튀어버릴까 봐 인 질을 잡은 거지.
길리우스는… 파렐만 잡아두면 너무 속이 보이니까 같이 붙잡힌 건가?
아니면 나와 마주치기 싫어서 길리 우스가 남기를 자청한 것일 수도 있 겠다.
어쨌든, 시커먼 남정네 둘이 인질 이라니… 여차하면 그냥 도망쳐 버 려도 상관없겠군.
속으로 그렇게 생각하며 진지한 얼 굴로 고개를 끄덕거렸다.
“음, 그렇군요. 정리하면, 용병들과 힘을 합쳐 하수도의 비밀통로를 찾 고, 도시 밖으로 나가 지원군에게 성 주님의 서신을 전하라. 맞습니까?”
“정확하네.”
다크월드를 플레이했던 기억을 되 짚어 보면, 비밀통로를 통해 지원군 에게 서신을 전달하는 임무는 챕터 2의 주요 시나리오 중 하나였다.
지금 받은 의뢰와 비슷한 퀘스트가 게임 속에 존재했다는 거지.
근데 문제는, 순서가 조금 이상하 다는 거였다.
게임 속에선 하수도에서 일련의 단 서를 발견한 뒤, 이를 경비대에 전 달한 결과로 성주에게 받는 게 바로 서신전달 임무였다.
근데 시나리오 앞부분을 뭉텅이로 잘라먹고 이렇게 넘어가 버리다니. 순서가 꼬인 걸까?
부둣가에서의 전투나 악어를 사냥 한 게 영향을 미친 건가?
아니면 사우스하버에 도착하고 벌 써 2주일이나 지난 것 때문일까?
•••으음, 지금 상황에선 정확히 판 단하기 어렵다. 현실과 게임 사이의 괴리는 여전히 어려운 문제였다.
그렇게 잠시 고민하던 나는 이내 한숨을 내쉬며 고개를 내저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