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he Blood Knight's Villains RAW novel - Chapter (400)
나의 악당들 400화
63. 은왕자의 기사들(7)
또다시, 2주 전의 하이캐슬.
“……언제부터 아셨습니까?”
“경이 사우스하버를 떠날 즈음이었 나.”
서늘한 남색 눈동자가 나를 빤히 바라보았다. 울카르 왕자는 침착한 투로 말을 이어갔다.
“당연히 의심이야 처음부터 하고 있었소. 혈조술사나 기량 좋은 전사 는 비교적 흔하지만 그 둘에 모두 해당하는 경우는 드무니까. 아, 경의 외양도 참고가 되었고.”
하긴. 조금이라도 배움이 있는 자 라면 큰 체격에 흑발흑안을 가진 혈 조술사를 보고 아일란트의 공작가를 떠올리는 건 당연했다.
농투성이나 용병놈들이야 대부분 상식이 부족한 무식쟁이들이니 내 정체를 의심하지 않겠지만, 식견이 넓은 상인이나 제대로 된 교육을 받 은 귀족의 경우엔 이야기가 달라지 는 것이다.
“아일란트에 있는 친구들을 통해서 의심을 확인했소. 아켈레 백작의 서 자가 최근 종적을 감추었다는 첩보 를 입수했지. 심지어 경은 이름조차 도 바꾸지 않았더군.”
엘렌에게 라-팔라이스 궁전의 추 격자가 붙었음을 알게 된 것도 그때 라고 했다.
근 1년 전, 사우스하버의 광장에 설치된 군막에서 울카르와 대화를 나누었던 때가 떠오른다. 내가 서임 을 받은 바로 그 날. 그때부터 왕자 는 내가 누군지 알고 있었던 것이
“……제가 자하카르임을 알면서도 기사로 삼으신 거군요?”
“그렇소.”
울카르는 선선히 고개를 끄덕였다.
“유희를 위해 가출을 한 것인지, 아니면 새 삶을 얻기 위한 여정에 나선 것인지 궁금했거든.”
“의문을 푸셨습니까?”
“물론. 혈왕의 후예가 정복왕의 후 예에게 맹세를 하는 걸 보고도 진심 을 의심할 수 있는 자가 몇이나 되 겠소.”
“……전하의 기억과 제 기억이 조 금 다른 모양입니다. 그때 반쯤 날 치기 식으로 서임을 하셨는데.”
“경이 정말로 그리 여겼다면 나의 기사임을 자처하고 다니진 않았을 거요. 위태로운 형세에 처한 나에게 돌아와 충성을 바치지도 않았을 테 고.”
‘충성’이라.
현대 대한민국에서 나고 자란 김승 수에게는 낯설고 어색한 단어였다. 군시절 경례를 하거나 복무신조를 읊을 때나 입에 담았지, 진심으로 무언가에 혹은 누군가에 충성을 해 본 적은 단 한 번도 없었다.
포이닉스도 그다지 다르지 않았다. 내가 가문과 가문의 어른들에게 바 친 건 충성이 아니라 복종이었다. 물론 그마저도 아일라가 죽은 뒤엔 스러져 버렸지만 말이다.
그런 내게, 울카르는 아무렇지도 않게 충성을 운운하고 있었다.
“뭐……
꽤 이상한 일이다. 불쾌함이나 거 부감 같은 게 전혀 느껴지지 않는 건 말이다.
“그야 그렇긴 한데요.”
떨떠름한 투로 말하니, 울카르 왕 자는 앞으로 기울였던 상체를 도로 등받이에 기대었다.
“이젠 터놓고 대화할 때가 되었다 고 판단했소.”
“제 가문에 대해서요?”
“경의 가문과, 경이 가진 특별한 지위에 대해서 말이오.”
그게 뭔데?” “뭐가?”
“네가 가진 특별한 지위 말이야.”
검은 벨벳 쿠션에 비스듬히 기댄 아탈란테가 뚱한 표정으로 질문을 해왔다. 그러고 보니 그녀에겐 이런 얘기를 한 적이 없던가…….
“난 자하카르의 잉태자거든.”
“그게 뭔데?”
“어…… 쉽게 말해서, 내가 첫 번 째로 낳는 자식이 아일란트의 다음 번 공작이 된다고 생각하면 돼.”
“……뭐라고?”
아탈란테는 입을 떡 벌렸다가 말을 더듬거렸다.
“그럼, 그러면 내가 네 아들을 낳 으면 ‘해적대공’이 되는 거야?”
“해적대공이라니……
해적대공은 쌍왕가의 주인을 지칭 하는 여러 별명 중 하나였다. 난 피 식 웃음을 터뜨리면서도 고개를 내 저었다.
“그리고, 그건 아냐. 잉태자는 한 쌍이야. 자하카르의 잉태자 한 명, 발루인의 잉태자 한 명. 그 둘 사이 에서 태어난 첫 아이가 다음 공작이 되는 거지.”
“……잠깐만, 혹시.” 그녀는 무언가 짐작한 듯 미간을 좁혔다.
“너랑 짝을 이룬다는 잉태자가, 설 마 그 썅년은 아니지?”
“썅년‘?”
“헤일라 말이야. 네 사촌이자 약혼 녀라며.”
“……어, 헤일라가 잉태자이긴 한 데.”
아탈란테의 사나운 말투에 괜스레 눈썹을 긁적였다. 그러자 공벌레처 럼 몸을 만 채 푹신한 융단을 굴러 다니던 뭉치가 불쑥 입을 열었다.
“헤일라 썅년 아니야.”
“뭐?”
“헤일라는 좋은 사람이야.”
“하, 멧돼지가 뭘 안다고.”
아탈란테가 빈정거리자 부루퉁한 얼굴이 된 뭉치가 썩 차가운 어조로 대답했다.
“썅년은 너야. 고마운 것도 모르는 썅년.”
“……너, 내 천막에 들여주는 게 보통 일인 것 같아? 이 정도면 충 분히 대접해주는,”
“생색까지 내. 진짜 최악이야.”
Lu—
……우리 뭉치, 언제 이렇게 밀라 놀어가 늘었을까.
내가 한숨을 삼킨 뒤 입을 열려던 찰나 이오피야가 먼저 나섰다.
“그만 해요, 아탈란테.”
“……이오피야, 너까지.”
아탈란테가 서운한 기색을 보이자, 조금 떨어진 곳에 앉아 손바닥 만한 북의 옆끈을 고쳐 묶던 소녀는 쓴웃 음을 지었다.
“먼저 나쁜 말을 했잖아요.”
“내가 쟤한테 그런 것도 아닌데,”
“그래도요. 저 같아도 다른 사람이
아탈란테에 대해 나쁘게 말하면 화 가 날 것 같은데요.”
“포이닉스님한테 또 혼날까 걱정이 되어서 이러는 거니까, 섭섭해하지 마세요.”
“……야. 혼나긴 뭘 혼나고, 섭섭하 긴 누가 섭섭해……
어린 주술사는 말 대신 온화하게 미소를 지었고, 반신의 딸은 못마땅 한 표정을 지으면서도 입을 다물었 다. 뭉치는 ‘흥’하고 콧방귀를 뀌더 니 다시금 융단의 감촉을 즐기기 시 작했다.
“어쨌든, 잉태자라는 지위를 써먹 을 수 있을 것 같다는 거지.”
“……그래, 그게 대단한 지위라는 건 알겠어. 근데 그걸 내세울 수 있 는 건 맞아?”
“내세운다는 거랑은 약간 의미가 다르긴 한데……. 왜, 문제 있어?”
“말이라고 해? 지금 저 오두엔느에 똬리를 틀고 있는 사람들이 누군지 몰라?”
“당연히 알지. 그거야 왕자님이랑 충분히 준비를 했으니 걱정할 것 없 어.”
“흐음.”
아탈란테는 팔짱을 끼더니 머리를 절레절레 흔들었다.
“그건 그렇다 치고. 난 아직도 이 해가 잘 안 돼.”
“뭐가?”
“자하카르라는 걸 알고도 은왕자가 너를 거뒀다니, 이상하잖아. 누데인 족인 나도 왕실과 아일란트의 관계 가 어떤지 아는데. 혹시 딴마음이라 도 먹은 거 아냐?”
“……글쎄.”
난 울카르가 했던 말을 떠올리며, 슬쩍 미소를 지었다.
“왕자님은 왕실에게 버려진 사람이 고, 난 아일란트를 버린 사람이야. 친구가 되지 못할 이유가 없지.”
“아, 그러셔요?”
아탈란테의 얇은 입술에 조소가 떠 올랐다.
“퍽도 신뢰가 가네. 가문의 지위를 써먹겠다는 놈이 그런 말을 하다 니.”
“이용하는 거야 얼마든지 할 수 있 지. 억지로 종마 역할을 떠안았으니 그 정도는 괜찮아.”
“네가 그렇다면야……. 계획은? 진 군로는 그대로지?”
“아, 몇 가지가 수정됐어.”
아탈란테가 손을 뻗자 융단 한쪽에 놓인 평상 위에서 지도가 떠올랐다.
스륵
공허의 광채를 내지도 않고 염동력 을 발휘하는 걸 보니, 과연 공허의 통로를 뚫은 효과를 톡톡히 보고 있 는 모양이다. 하기야 공중부양도 자 유자재로 하는 판인데 가벼운 지도 하나 움직이는 게 어려울까.
지도가 융단 위에 깔리자, 난 먼저 칼날만 건너에 있는 미테르게란트 제국의 항구를 짚었다.
“상륙지점은 원래 계획대로 앙스트 의 ‘프로스하펜’이야.”
“프로스하펜.”
아탈란테의 눈이 반짝였다. 그 호 박색 빛은 공허의 힘이 아니라 열망 에서 비롯된 것이었다.
울카르 왕자는 모든 계획이 성공하 면 앙스트 지방의 절반을 누데인족 에게 주기로 약속했다. 앙스트의 가 장 큰 항구인 프로스하펜 역시 그에 포함되어 있었으므로, 아탈란테가 저런 반응을 보이는 건 당연했다.
“……방비가 만만치 않을 거야.”
“랭볼트 경이 서던쇼어에서 끌고 온 함대가 힘을 써줘야지.”
“강철함대라면 항구를 제압하는 것 정돈 어렵지 않겠지만……. 흑룡함 대가 정박 중일 확률이 높아.”
“흑룡함대라.”
스트롬 공작 가문이 거느린 함대의 이름이다.
미테르게란트 제국은 해양 전통이 짧고 그만큼 해군도 약한 것으로 유 명하다. 하지만 흑룡함대는 백작령 대여섯 개를 합친 만큼이나 광활한 영지를 지닌 스트롬 가문이 막대한 재원을 들여 운용하고 있는 부대다. 마냥 우습게 여길 수는 없다는 뜻이 다.
“그래도 지지는 않을 거라고 하시 던데.”
“왕자가?”
“응. 전력 자체도 강철함대가 우위 고, 항구에 가둬놓고 패는 거니까 더 유리할 거라더라……
프로스하펜은 앙스트 지방에서 가 장 큰 항구도시답게 육로 역시 사방 으로 뻗어 있다. 특히 고대제국의 유산인 ‘데이발 가도’는 우리의 최 종 목표인 백년성으로 향하는 최고 의 지름길이었다.
“피해를 감수하긴 해야겠지만, 선 택의 여지는 없어.”
“그야 그렇지……. 쇠비늘 함대가 지원을 해주면 식은 죽 먹기일 텐 데.”
“그건 기대하지 마. 일단은.”
아탈란테는 말없이 어깨를 으쓱였 고, 나는 프로스하펜의 북쪽으로 손 가락을 훑어갔다.
“프로스하펜만 먹고 최대한 빨리 진격을 시작해야 해. 작은 성채 두 개만 깨면 오브도르프고, 또 성채 하나를 떨어뜨리면 ‘아이스보발트’ 야.”
앙스트 북쪽에 붙어있는 오브도르 프는 밀라놀 왕국과 국경을 맞댄 지 방이다. 울창한 숲으로 유명해서, 하 이캐슬 앞까지 뻗은 숲인 ‘젤른트 리’ 역시 오브도르프에 속한다.
아이스보발트은 우거진 수풀 한가 운데 솟은 언덕에 자리 잡은 도시 로, 오브도르프에선 ‘불푸르트’에 이 어 두 번째로 큰 도시다.
“상륙 이후 일주일, 늦어도 열흘 안에는 여기까지 점령을 해야 해. 이게 이번 원정의 일차 목표야.”
“도시 두 개랑 성채 세 개를 일주 일 안에……
그녀는 가만히 고개를 끄덕였다.
“할만하겠는데.”
“그치?”
허세는 아니다.
아탈란테는 강력한 힘을 가진 비전 술사이자 경지에 오른 창수이며, 그 녀가 거느린 백오십 명의 하레스 키 스는 정예 중의 정예다.
‘공허의 구’ 같은 기술로 성문을 날려버린 뒤 중무장한 정예병들을 밀어 넣으면 작은 성채쯤이야 반나 절도 안 되어 함락시킬 수 있는 것 이다.
물론 제국 기사나 파괴술사 같은 놈들이 훼방을 놓긴 하겠지. 하지만 우리 쪽엔 ‘고함치는 파도’ 랭볼트 경이 있고, ‘앤트럼의 마도사’ 오그 슐리조와 ‘젊은 마스터’ 에포즈가 있다.
프로스하펜 이 나 아이 스보발트에 서 재수 없이 소드마스터와 마주치더라 도 내가 상대할 자신이 있다. 좀 힘 들다 싶으면 뭉치의 도움을 받아도 되고. 제 아무리 소드마스터라도 나 를 상대하면서 ‘진짜배기’ 암살자의 암습을 피하진 못할 거다.
나처럼 얼추 계산이 끝났는지, 아 탈란테는 다음 계획에 대해 질문을 해왔다.
“사실 그다음이 문제인데…… 난 천천히 오브도르프 북쪽에 자리 한 지방을 손으로 짚었다.
“일단, 아이스보발트에서 계속 데 이발 가도를 타고 가면 토팔 지방이 야.”
“거기가 우리 최종 목표잖아?”
“일단은 그렇지.”
토팔은 아빌람버스 공작의 본거지 나 마찬가지인 지방이다. 그중에서 도 주도(主都)인 백년성은 그야말로 스트롬 가문의 심장과도 같은 곳이 고.
“근데 여기까지 먹을 즈음면 적의 본대도 움직일 거란 말이지.”
오브도르프 동쪽, 왕국과의 국경을 짚었다. 이곳에서는 아빌람버스 공 작이 이끄는 일만이 넘는 대군이 하 이캐슬을 공격 중일 것이다.
“아니면 부왕 버카드가 움직일 수 도 있고.”
오브도르프 서쪽에 위치한 지방이 바로 알첸버그다. 알첸버그 가문에 의해 팔백 년째 다스려지고 있는 비 옥한 영지…….
“……그래서 어쩌겠다고?”
“왕자님과 얘길 해보긴 했는데.”
“했는데?”
“지금 판단할 순 없겠더라고.”
“야, 뭐 하는 거야?”
아탈란테가 얼굴을 찌푸리자 나는 실실대며 어깨를 으쓱였다.
“그때 상황에 따라서 행동하기로 했어.”
“너무 대책이 없는 거 아냐?”
“그렇진 않아. 왕자님이 여러 조건 을 제시해주셨거든. 그걸 체크하며 움직이면 되니까 너무 걱정할 필요 는 없어.”
“••••••으음.”
그녀는 이내 한숨을 내쉬었다.
“그래. 너희 주군이 뭐 평범한 사 람도 아니고……
말하다가 말고, 아탈란테는 갑자기 의문이 떠오른 듯 퍼뜩 고개를 들었 다.
“그래서, 이오피야는 왜 데려온 건 데?”
“아, 이오피야는,”
내가 무어라 말하려던 찰나, 천막 앞을 지키고 있던 하레스 키스가 보 고를 해왔다.
“나피닷. 함대가 부두에 들어오고 있습니다.”
“함대가?”
“예. 쇠비늘 함대로 보입니다.”
그 말을 듣자마자 나와 아탈란테, 뭉치는 얼른 천막 밖으로 달려 나갔 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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