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he Blood Knight's Villains RAW novel - Chapter (45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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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의 악당들 457화
66. 은왕자(12)
난 이런저런 사건을 겪으며 나름 큰 명성을 얻었지만, 그래도 울카르 왕자에 비할 바는 아니다.
당연한 것이, 그는 고귀한 핏줄을 이은데다 십 년 전 열일곱 살 나이 로 전장에 데뷔한 이후 오크대토벌, 천일전쟁, 사우스하버의 변란 등을 평정하며 이름을 날렸다. 피투성이 검사니 참수자니 적기사니 하는 별 명이 왕국과 제국 일대에 퍼지긴 했 어도, 유명세로 따졌을 때 대륙 전 체를 통틀어 열 손안에 꼽히는 인사 와 비교하면 무명이나 마찬가지인 것이다.
그러한 울카르 왕자가 도시에 도착 하자 동문 쪽으로 아이스보발트의 시민들이 적잖이 몰려나왔다.
수백, 어쩌면 천도 넘을 듯한 인파 는 낮은 웅성거림과 우려 섞인 소곤 거림으로 왕자를 맞이했다.
물론 그들의 입장에서 왕자는 적국 의 군벌이고 침략자이므로, 환영을 목적으로 몰려나온 건 아니었다. 대 부분은 그 유명한 은왕자의 행차이 니 얼굴이나 한 번 보겠다고 나온 눈치다.
사백여 중장기병 중에서도 최정예 에 속하는 백오십 기만 이끌고 입성 한 울카르 왕자는 흰 갈기의 전투마 에 올라탄 채였다. 4월 정오의 햇살 아래 짧아진 은발이 휘날렸다.
“저게, 그 은왕자라고?”
“……소문대로야.”
대륙에 퍼진 은왕자에 대한 이야 기, 그중에서도 외모에 관한 부분에 는 전혀 과장이 없었다. 길고 곧게 뻗은 눈썹, 부드럽고 깊은 눈매, 우 뚝 선 콧대, 하얀 피부와 그에 대비 되는 붉은 입술. 남녀노소 한 번 눈 에 담으면 평생 잊을 수 없을 만큼 아름다운 얼굴이었다.
“……헥.”
“워어.”
그때, 여기저기서 숨을 삼키는 소 리가 들리더니 일순 작은 소곤거림 마저 멎었다. 천천히 말을 몰고 온 울카르 왕자가 두 눈에 신비한 남빛 을 머금은 채 좌중을 훑어본 탓이 따각- 따가닥. 데이발 가도를 동서로 잇는 아이스 보발트의 대로에 고요가 내려앉았 다. 들리는 것은 오직 일단의 말발 굽 소리뿐이었다.
분명 개중엔 야유를 퍼붓거나 돌이 라도 던져볼 요량으로 달려 나온 간 큰 불만분자들도 적잖이 섞여 있었 을 것이다.
그러나 울카르 왕자가 대로를 반 넘게 지나는 와중에도 소요는 벌어 지지 않았다. 왕자를 따르는 기사들 과 친위기병대에 위압당한 건지, 아 이네스 백작 휘하 병사들이 쏟아져 나와 노변을 채워선지, 그도 아니면 아름답다 못해 신성함마저 느껴지는 은왕자의 외양에 홀려 버린 건지. 나로서는 알 도리가 없었다. 그저 귀찮은 일이 생기지 않아 다행스러 울 따름이었다.
“전하.”
“포이닉스 경.”
내가 말 위에서 예를 표하자 왕자 는 환히 웃어 보였다. 그리고 나를 따라 나온 이들-테오도라 공녀, 아 이네스 백작, 시릴로 자작, 지휘관 해럴드 등-과 하나하나 인사를 나 누었다.
나는 그러는 동안 그의 뒤를 따르 는 이들과 눈을 맞추었다.
왕자의 가장 곁에 있는 건 언제나 처럼 ‘새매기사’ 지젤라 경이였고 랭볼트, 안키르, 라이암, 휠테르로 대표되는 은왕자의 기사들이 죽 늘 어서 있었다. 마스터 리몬드와 고스 패트릭 신부, 라오 가문의 마법사 마다즈 등 측근들도 함께였다.
짧은 인사를 마무리한 울카르 왕자 가 웃는 얼굴로 공치사를 해왔다.
“점령한 지 한 달도 지나지 않은 곳이라곤 믿기지 않을 정도로 안정 되었군. 수고가 많았겠소.”
“별말씀을요. 그리고 사실, 겉으로 만 그렇게 보이는 겁니다. 속은 완 전 개판에 뒤집어지기 일보 직전이 에요.”
“당연히 상황이 좋지만은 않겠지. 하지만 시민들의…… 음, 양순한 태 도를 보니 경의 노고가 상당했음이 짐작되오.”
그의 말에 슬쩍 돌아보니, 길가에 몰려 있던 아이스보발트의 시민들은 분분히 흩어지고 있었다. 방금까지 만 해도 찬탄의 눈으로 울카르 왕자 를 구경하던 자들이 겁먹은 기색으 로 골목, 건물 등으로 숨어들었다.
……갑자기 왜들 저럴까.
설마 나 때문에 저러는 건 아니겠지? 슬쩍 미간을 좁히고 있으려니 왕자 가 손짓을 해 보였다.
“자, 안내하시오. 나를 길 한가운데 세워둘 생각이 아니라면 말이오.”
“아, 옙. 일단 경비대 본부로 가시 죠. 시장관저가 불탔거든요.”
나는 바이콘 대신 타고 온 점박이 의 고삐를 당겨 왕자의 백마와 말머 리를 나란히 했다.
경비대 본부 건물 1층에 마련된 적당한 크기의 회의실에서, 오브도 르프 지방의 동쪽 일대를 점령한 과 정을 간략히 전해 들을 수 있었다.
“……대단하시네요. 오백도 안 되 는 기병들로 그 성채도시를 점령하 시다니.”
미테르게란트 제국의 ‘불푸르트’는 밀라놀 왕국의 하이캐슬에 대응되는 도시라 할 수 있다. 하이캐슬이 고 원의 주도이자 변경의 방패인 것처 럼, 불푸르트 역시 오브도르프의 주 도이자 국경을 감시하고 지키는 요 새 역할을 하는 탓이다.
그만큼 방비가 철저하여 난공불락 으로 유명한 곳인데, 울카르 왕자는 그런 도시를 고작 나흘 만에 점령해 버렸다.
“그리 대단한 일은 아니오. 애초에 실패할 이유가 없었으니.”
상석에 앉은 왕자는 담담한 표정으 로 말했다.
“선제후군은 큰 패배로 사기가 꺾 인데다, 그 너른 성벽을 모두 채울 수 있을 만큼 병력이 넉넉한 것도 아니었소. 별군이 일찌감치 후방을 점한 탓에 보급이 끊긴 지 오래였 고, 도시의 주인인 피코어드 방백은 다름 아닌 경의 손에 목숨을 잃었 지.”
회랑에서의 전투 중, 제국기사들로 구성된 참수부대에서 선봉장 노릇을 하던 자가 떠오른다. 그저 용맹한 귀족기사인 줄 알았던 그가 오브도 르프 지방의 영주인 피코어드 방백 임을 전투 후에야 알고 꽤 놀랐더랬 다.
“심지어 아리아드 경의 술수로 성 문까지 쉬이 열었으니, 점령에 실패 하는 게 오히려 이상하지.”
왕자의 옆에 앉아 있던 눈먼 노기 사, 아리아드 경이 주름진 미소를 지었다.
“요행이었습니다. 전하께 주의 가 호가 임한 덕이지요.”
아빌람버스 공작에게 거짓 투항한 뒤 몇 번의 승리와 조언을 통해 신 임까지 얻어 낸 아리아드 경은, 선 제후군이 왕자의 의도대로 움직이게 만드는 데 결정적인 역할을 했다.
이후 전투에서 패하여 퇴각하는 과 정에서 공작의 의심을 사 불푸르트 에 이르러서는 반쯤 감금되다시피 하였으나, 그 와중에도 스트롬 가문 의 장교와 하사관을 넷이나 포섭하 여 성문을 열게 만들었다.
그런 노기사가 겸양을 떨자, 안키 르 경이 헛웃음을 터뜨리며 말했다.
“그게 어떻게 요행이오? 적 한 번 속이겠다고 생눈을 둘이나 뽑아버린 독기 덕분이지.”
“생눈이라니, 늙고 병들어 제 역할 도 못하는 눈이었습니다.”
그가 별것 아니라는 듯 하는 말에 왕자는 조금 가라앉은 얼굴로 입을 열었다.
“자신의 희생을 평가절하하지 마시 오. 이번 전쟁에서의 공훈에 순서를 매기면 단언컨대 경은 포이닉스 경 바로 다음이오.”
“ 전하••••••
아리아드 경이 감격한 듯 고개를 숙여 보이자 말석에 앉아 잠자코 차 를 마시고 있던 마법사, 마다즈 라 오가 불쑥 입을 열었다.
“조만간 의안이 완성되니 조금만 기다리시오.”
“……의안이요?”
내가 어리둥절한 표정을 짓자, 그 는 선선히 고개를 끄덕였다.
“우리 가문의 최고급 수정구를 깎 아 완성한 물건이니 원래 달고 있던 불량품보다 훨씬 나을 거요. 자잘한 부작용이 조금 있겠지만 기사라는 양반이 그 정도도 못 견디지는 않겠 지.”
울카르 왕자의 왼팔에 달린 은빛 의수를 만든 자의 말이니 영 허튼소 리는 아닐 것이다. 하지만, 아무리 그래도 그렇지, 앞을 보게 해주는 의안 같은 건 SF소설에나 나올 법 한 물건 아닌가?
“라오 가문이 골렘 제작으로 유명 하다는 것도 알고, 그 기술을 이용 해서 왕자님한테 팔을 만들어준 것 도 아는데……. 눈알도 만들 수 있 다고요?”
마스터 마다즈는 입꼬리를 비틀어 자신만만한 표정을 지었다.
“하긴, 눈을 대체하는 도구라니, 들 어본 적이 없겠지. 당연하오. 내가 마도 역사상 처음으로 개발해 낼 물 건이니까.”
“••••••예?”
내가 새된 소리를 흘리자, 어느새 머리를 짚고 있던 왕자가 푹 한숨을 쉬었다.
“내 이미 몇 번이나 경고했소만, 아리아드 경을 실험대상으로 삼는 건 절대로 허락할 수 없소.”
“전하께선 여전히 생각이 꽉 막히 셨군요. 어차피 수명이 간당간당한 노인인데, 의미 없이 죽기 전에 역 사에 남을-”
그렇게 멋대로 지껄이던 중년의 마 법사는 울카르의 지긋한 시선에 입 을 다물었다. 그러나 여전히 미련이 남는지 마른 입술을 적시며 중얼거 리는 것이었다.
“……가축으로 충분히 임상실험을 할 테니 과하게 걱정할 필요는 없 는 ”
“마스터 마다즈.”
눈치 없는 중년인이 입을 다물자, 난 눈썹을 긁으며 전황을 정리했다.
“오브도르프는 전하께서 다 정리했 고, 앙스트 지방도 아탈란테의 부하 인 아넨소가 마무리하는 중이고 ……. 왕국 내부에 남은 잔당도 곧 처리가 될 거라고 하셨죠?”
“오스 백작과 가윈 변경백의 보고 에 따르면 그렇소.”
“그럼 남은 문제는 하나네요. 황제 는 어떻게 상대하죠?”
내 물음에, 울카르 왕자는 가벼운 투로 대답했다.
“협상을 할 거요.”
“……네?”
“협상 말이오.”
제국의 지방을 두 개나 점령해 놓
고, 황제와 협상을 하겠다고?
난 어이가 없어서 작게 입을 벌렸 다. 그리고 이어지는 왕자의 설명에 하마터면 턱이 빠질 뻔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