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he Blood Knight's Villains RAW novel - Chapter (7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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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의 악당들 074화
20. 혼란의 도시(3)
왕자의 천막을 나선 뒤, 나와 엘렌 은 화살이 가득 담긴 상자에 걸터앉 았다. 노기사 아리아드를 기다리기 위해서였다.
“결국, 내 얘기만 실컷 했네. 상황 이 왜 이렇게 됐는지는 듣지도 못하 고.”
내 중얼거림에 엘렌이 반응했다.
“좀 물어보지 그랬어?”
“그러게 말이다. 왕자님이 어련히 말해 주겠거니 했는데, 끝까지 지가 궁금한 것만 물어보더라.”
왕자라는 타이틀에, 군대까지 거느 리고 있으니 내가 좀 쫄았나 보다. ‘왜 왕자님 군대가 여깄어요?’ 하고 물어보기가 좀 어렵더라고.
“근데 넌 왕자님 앞에서 떨지도 않 고 따박따박 말 잘하더라? 비꼬기도 겁나 비꼬고. 조마조마해서 죽는 줄 알았어 임마.”
“조마조마하긴 무슨.”
“넌 무섭지도 않냐? 왕자님이 빡쳐 서 콱 목이라도 치면 어쩌려고?”
내가 주변을 살피며 속닥거리자, 엘렌은 피식 비웃음을 흘렸다.
“말 좀 싸가지없게 했다고 마법사 의 목을 친다고? 명성 하나로 연명 하고 있는 형편에 그딴 짓을 하겠 어?”
“그게 무슨 소리야? 명성 하나로 연명해? 누가? 왕자가?”
“울카르 왕자가 지금까지 살아 있 는 건 하급귀족들이랑 백성들 사이 에서의 인기 덕분이잖아. 그거 아니 었으면 진작에 왕한테 목이 날아갔 을걸.”
“•••왕이 지 아들을 죽인다고? 왜?”
“자기 아들이 아니라고 생각하니까 그렇지. 몰라서 묻는 거야?”
이건 또 무슨 골치 아픈 소리야. 안 그래도 머리 복잡해 뒤지겠구만.
“야, 됐다. 그 얘긴 나중에 하고. 가드일 위어는 뭐고 의무는 뭐야?”
“•••외국어 배울 시간에 역사책이나 좀 보지 그랬어? ‘가드일 위어의 학 살’ 몰라?”
“모른다, 임마. 매번 구박하지 말고 그냥 설명해 주면 안 되냐?” 엘렌은 슬쩍 미간을 찌푸렸지만, 이내 순순히 대답해 주었다.
“80년쯤 전에 왕이 가드일 위어에 서 마법사를 삼백 명쯤 죽였거든. 제 어미가 정체 모를 마법사에게 죽 었다고 왕이 화풀이를 한 건데… 그 냥 제오레 왕가(王家)다운 짓거리였 지, 뭐.”
“그 의무니 뭐니 운운한 건?”
“왕자가 날 떠본 거야. 내가 ‘여명 의회’의 소속인지 확인해 본 거지.”
“여명 의회?”
“대대로 왕이랑 붙어먹으면서 머슴 노릇 하는 미친놈들 있어. 알 필요 없는 놈들이야.”
아까 마법사 아저씨가 ‘여명 의회’ 랑 ‘궁전’, ‘라오 가문’을 묶어서 마 법의 명가라고 불렀던가?
그중 ‘궁전’이라는 건 아마 엘렌의 출신지인 ‘라-팔라이스 궁전’을 말 하는 걸 테고…. ‘여명 의회’랑 ‘라 오 가문’도 마법으로 한가락 하는 집단인 것 같다.
뭐, 그런 거면 자기들끼리 뭔가 경 쟁의식 같은 게 있는 거겠지.
잠깐. 여명 의회?
챕터 7에 나오는 흉악한 네임드 무리인 ‘트웰브’의 풀네임이… ‘여명 의 열두 마도사’였던 것 같은데.
음, 여명이라는 단어 하나만으로 연관 짓는 건 좀 무린가? 아니, 마 법을 쓰는 미친 새끼들인 것도 겹치 는 것 같은데.
일단 지금은 이름 정도만 기억해둬 야겠다. 당장 급한 건….
그때, 포댓자루를 이고 근처를 지 나는 일단의 병사들 사이에서 낯익 은 얼굴을 발견했다.
“어, 저거? 야, 아이보!”
“•••포이닉스 씨?”
아이보는 여드름이 가득한 얼굴로 멍청한 표정을 지어 보였다. 나는 마침 잘됐다 싶어 얼른 녀석을 붙잡 아왔다.
아이보는 울카르 왕자가 이끄는 군 대에 소속된 젊은 척후병이다. 비밀 통로를 통해 사우스하버로 돌아오며 짧은 시간 동안 나름 전우애 비스무 리한 걸 쌓은 사이이기도 했다.
내게 목덜미가 붙잡힌 채 끌려온 아이보는 ‘어, 어-’하고 멍청한 소리 를 내었다. 그러다가 엘렌을 발견하 곤 눈을 동그랗게 뜨는 것이었다.
“어, 엘렌 님? 무, 무사하셨군요?”
엘렌이 여느 때와 같이 말을 씹자, 아이보는 반가운 표정을 지으며 녀 석에게 다가섰다.
“하수도에 내려가셨다는 얘길 들었 거든요. 걱정하고 있었,”
“그만. 거기서 얘기하면 되잖아.”
그렇게 말하며 앞을 가로막자, 아 이보는 어쩐지 얼굴이 새하얗게 질 려서 고개를 끄덕거렸다.
“그, 네. 그렇죠. 죄송,”
“아냐, 죄송하긴.”
나는 녀석을 반대쪽으로 돌려세우 며 말을 이었다.
“인사는 그만하면 됐고, 뭐 좀 물 어보자.”
“에, 네? 뭘요?”
“우리가 지상에 올라온 지 얼마 안 돼서, 상황이 어떻게 돌아가는지 전 혀 몰라.”
“아, 그러시군요.”
“그니까 대충 설명 좀 해줘 봐. 왕 자님 군대는 여기 어떻게 들어온 거 야?”
“그게….”
아이보는 슬쩍 뒤를 돌아보며 다른 병사들의 눈치를 살피더니 이내 설 명을 시작했다.
수륙양면으로 포위되어 있던 사우 스하버는 지진으로 인해 큰 위기를 맞았다. 성벽 일부와 여러 궁탑이 무너지며 방어선에 큰 구멍에 뚫린 것이다.
지진은 거셌지만 그리 길게 이어지 진 않았고, 진동이 잦아들자 마적들 은 곧장 빈틈을 노리고 공격을 시작 했다.
그리고 그 위급한 상황에서, 세이 번 지방의 백작이자 사우스하버와 소금성의 주인인 ‘오스레드 컬드슨 오브 에아프리드’는, 도주를 선택했 다.
자신의 부인과 어린 아들, 친척과 친위대 몇 명만 데리고 부두로 향한 것이다.
물론 지진으로 인해 어지간한 배들 은 모조리 침몰한 터라 끝내 출항하 지 못했지만 말이다.
어쨌든, 그 위기 상황에서 나선 것 이 바로 울카르 왕자였다. 지리멸렬 하는 수비대를 수습하며 성벽 위에 오른 왕자는 고함을 질렀다.
-자리를 지켜라! 왕자의 명령이다!
고함은 구호가 되어 도시로 퍼져 나갔다.
무기를 버리고 도망치던 병사들은 왕자의 권위에 이끌렸는지, 아니면 저들이 도망칠 곳이 없다는 것을 깨 달았는지 하나둘 성벽으로 모여들기 시작했다.
병사들은 그곳에서, 은발을 휘날리 며 활시위를 당기는 왕자를 보았다. 무너진 성벽 아래에 홀로 버티고 선 거대한 기사를 보았다. 갈대밭을 가 르며 도적무리의 뒤를 덮치는 원군 을 보았다.
그 광경에 병사들은 사기를 회복했 고 왕자의 지휘하에 적들을 몰아내 는 데 성공했다.
거기에 군대까지 사우스하비에 입 성하자 울카르 왕자는 사우스하버를 장악하기 시작했다.
그 과정에서 왕자는 부두에서 발을 동동 구르고 있던 성주와 그의 일가 를 반쯤 무너진 소금성에 가둬 버렸 다.
위급상황에 대비하여 성주를 보호 한다는 명목이었지만 그 말을 믿는 이는 그리 많지 않았다. 어쨌든 손 님이 주인을 감금한 격이니까.
친위대장이나 경비대장 같은 성주 의 가신들은 곧장 반발하며 나섰다.
직접적인 지휘권을 쥔 무관들의 반 발에 내분이 발생할 뻔했으나 무관 들의 최선임자인 무관장이 나서서 중재한 덕에 직접적인 무력충돌은 일어나지 않았다.
무관장 개인의 인망이 두터운 덕이 기도 했지만, 그의 뒤에 왕자의 기 사들이 서 있었다는 점도 큰 영향을 미쳤을 것이다.
왕국의 내로라하는 기사들이 피를 흠뻑 뒤집어쓴 채 눈을 하얗게 빛내 고 있는 것은 충분히 위압적인 광경 이었기 때문이다.
그 후로도 마적과 해적들의 몇 차 례에 걸친 파상 공세가 있었지만, 왕자의 지휘하에 용케도 막아내었다 고 한다.
그리고 원군이 들여온 보급품마저 슬슬 동나기 시작할 무렵, 나와 엘 렌이 하늘에서 뚝 떨어진 것이다.
“•••하하, 개판이네.”
“뭐, 그렇죠.”
이 정도면 시나리오가 조금 틀어진 정도가 아니라 산산이 박살 났다가 재조립된 수준인데?
나는 한숨을 푹 내쉰 뒤 주머니에 서 은화 한 닢을 꺼내어 아이보에게 건네주었다.
“이야기 고맙다. 시간 뺏은 것 같 은데 얼른 가봐.”
“엇. 제가 뭘 했다고 은화씩이나,”
“전에 같이 일할 때 쓴 화살값이라 고 생각하고 받아.”
“헤헤, 진짜 괜찮은데….”
녀석은 그렇게 말하면서도 바지춤 어딘가에 은화를 찔러넣고 있었다. 때마침 아이보와 함께 왔던 병사들 이 고함을 질러왔다.
“아이보! 언제까지 수다나 떨고 있 을 거냐!”
“윽, 지금 갑니다! 다시 봐서 반가 웠어요, 포이닉스 씨. 엘렌 님도요.”
“그래, 얼른 가라.”
아이보는 병사들 쪽으로 뛰어가다 가 문득 뒤를 돌아보더니,
“아, 그때 같이 왔던 야만인이요!”
“… 야만인?”
“네, 그 문신한! 그놈 교수대에 잡 혀 있습니다! 내일 정오쯤에 처형할 거라던데요?”
“뭐라고?”
문신한 야만인?
…설마 우테콰이? 걔가 처형? 왜?
“아이보, 이 어린 노무 새끼야!”
“가, 갑니다!”
고참병의 신경질적인 고함과 함께 아이보는 천막 사이로 사라지고 말 았다.
“얌마! 아이보!”
“죄송해요!”
이런 젠장- 말은 다 해주고 가야 지, 이 자식아!
으, 우테콰이 이 새낀 며칠 새에 대체 뭔 짓거리를 한 거야?
“엘렌, 교수대 쪽으로 가보자.”
“뭐?”
회색빛의 완드를 만지작거리고 있 던 엘렌이 미간을 좁히며 반문했다.
“멋대로 움직였다가 무슨 오해를 받으려고?”
“교수대면 바로 코앞이잖아. 빨리 확인해보고 오면 되지.”
“나중에 가. 괜히 일 꼬이게 만들 생각 말고.”
“얌마, 지금 일 좀 꼬이는 게 문제 냐? 사람이 죽게 생겼는데?”
내 채근에 엘렌은 답답하다는 듯 한숨을 내쉬더니, 이내 낮은 목소리 로 쏘아붙였다.
“너랑 나 아직 의심받는 처지거든? 함부로 싸돌아다니다 일 꼬이면 돈 몇 푼 손해나는 게 아니라 목숨이 위험해질 수도 있어. 왕족 놈들, 하 나같이 인간백정인 거 몰라?”
“아까랑 말이 다르잖아? 왕자가 함 부로 사람을 죽이는 그런 스타일은 아니라며?”
“그건 구실이 없을 때 얘기고, 이 등신아. 우리 없어진 거 보고 탈영 했으니 목 내놓으라 하면 어쩔 건 데? 나야 배경 있는 마법사인 척했 으니 괜찮을지도 모르지만 넌 일개 용병 나부랭이잖아.”
•••그런가.
“그리고, 그 야만인이 뭔데? 그놈 이 잡혔든 죽었든 우리랑 무슨 상관 이야?”
“무슨 상관이냐니….”
하긴, 엘렌에겐 우테콰이를 구할 동기가 전혀 없다. 협해 건너에서 온 마법사와 고원 너머에서 온 야만 인이 무슨 접점이 있겠냐고.
나는 잠시 머리를 긁적이다가 입을 열었다.
“그놈 싸우는 거 못 봤냐? 화살도 다 튕겨내고 힘도 엄청 세잖아.”
“그래서?”
“으음, 이것저것 도움을 받을 수 있는 놈이라는 거지. 당장 지금 상 황에서도….”
어느새 팔짱을 낀 엘렌은 눈을 가 늘게 뜬 채 떫은 표정을 지었다.
“설마 그 야만인을 동행으로 삼겠 다, 뭐 그런 건 아니지?”
“꼭 그러겠다는 건 아닌데…. 아니, 사실 안 될 건 없지 않냐?”
“이 미친놈아, 시체 썩은 내 풀풀 풍기는 노친네 끌고 와서 엿 먹은 게 엊그제 일이야. 근데 뭐? 이번엔 옷도 안 입고 다니는 야만인 새낄
끌어들이겠다고? 너 돌았어?”
할 말이 없네.
‘히히, 걱정 안 해도 돼. 쟤 내 부 캐거든〜’ 하고 접근하기엔 루크한테 너무 세게 뒤통수를 맞아버렸으 니……. 부캐랍시고 우테콰이를 덮 어놓고 믿는 건 미친 짓이다.
하지만 앞으로 난이도가 올라갈 걸 생각하면, 우테콰이 같은 고기 방패 는 하나쯤 필요한데.
그때, 왕자의 천막에서 노기사가 모습을 드러내었다.
“오래 기다리게 했군.”
“어, 아닙니다.”
노기사 ‘아리아드 바린’의 게임 속 모습은 별로 인상적인 편이 아니었 다. 살육왕 울카르의 거처에서 길잡 이 역할을 해주는 NPC였을 뿐이니 까.
길잡이도 꽤 큰 역할이긴 하지만, 챕터 보스로 등장하는 왕자나 픽넴 으로 등장하는 다른 기사들에 비하 면 뭐…. 그냥 배경 설명을 읊어주 는 라디오 정도지, 뭐.
하지만 아리아드 경은 울카르의 휘 하에서 이차원의 마력에 오염되지 않은 유일한 기사였다.
타락하지 않았을 뿐만 아니라 영웅 들을 돕기까지 했으니, 꽤 비범한 인물이라고 할 수 있지. 아직 벌어 지지 않은 미래의 일이지만… 나름 믿을 수 있는 사람 아닐까?
나는 어쩐지 기대하는 심정으로 노 기사의 말을 기다렸지만,
“대략적인 계획은 세웠네. 일단 정 보수집을 해야 하니 자네들은 잠시 대기하도록 하게. 머무를 곳은 있 나?”
“어, 뱃고동 여관에 머무르면 됩니 다. 거기가 멀쩡하다면요.” “뱃고동 여관? 아, 경비대 주둔지 말인가?”
경비대 주둔지? 초소가 아니라?
노기사는 고개를 끄덕거리며 말을 이었다.
“마침 잘됐군. 밤까지 사람을 보내 겠네. 가서 대기하고 있도록 하게.”
거기까지 말한 아리아드는 종자로 보이는 청년과 병사 서넛을 데리고 씽 사라져 버렸다.
“어…?”
•••뭐야, 이게 끝이야? 이럴 거면 왜 기다리라고 한 거야?
아니, 이럴 때가 아니지. 나는 엘렌을 안아 들며 녀석에게 물었다.
“이제 됐지?”
“ 뭘?”
“교회 가기 전에 교수대만 빨리 들 렀다가 가자. 뭔 일인지는 알아볼 수 있잖냐.”
엘렌은 내 목에 팔을 두른 채 미 심쩍은 눈길로 나를 올려다보았다.
“다시 말하는데, 난 야만인은 싫 어.”
“너 설마, X킹 레이시스트냐?”
“뻐, 뭐라고?”
“됐고. 어차피 너한테 선택권은 없 으니 입 다물고 있어.”
“이 미친놈이, 으엑!”
팔을 바둥거리는 녀석을 어깨에 둘 러메자 엘렌이 빽 고함을 질렀다.
“이, 이거 안 놔! 야! 놓으라고!”
조막만 한 손이 허리 어림을 두들 겨대는 걸 무시하며 나는 걸음을 옮 겼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