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he Blood Knight's Villains RAW novel - Chapter (73)
나의 악당들 073화
20. 혼란의 도시(2)
시장 한복판에 떨어진 나와 엘렌은 어느새 수십 명의 병사들에게 둘러 싸이고 말았다.
병사들은 하나같이 둥근 접시 모양 의 쇠투구를 쓰고 사슬갑옷을 걸치 고 있었다.
기다란 창으로 무장한 이들이 대부 분이었지만 쇠뇌나 전쟁용 활을 든 병사도 예닐곱쯤 섞여 있었다.
흐음, 투구를 보니 울카르 왕자의 병사들 같긴 한데…. 소금강 너머에 있던 군대가 대체 여기까진 어떻게 들어왔지?
내가 흐룬팅을 쥔 채 멀뚱멀뚱 자 기들을 쳐다보자, 병사들은 인상을 구기며 서로를 곁눈질했다.
병사들을 이끌고 온 하사관은 그러 한 분위기를 읽었는지 작게 한숨을 내쉬며 나섰다.
“이봐, 용병 친구. 싸울 생각이 없 다면 무기라도 집어넣어 두는 게 어 때?”
투구 대신 두건을 두른 하사관은 딱 봐도 짬 좀 먹었을 것 같은 삼 십 대의 사내였다. 나는 그를 마주 보며 어깨를 으쓱여 보였다.
“보다시피 칼집을 잃어버려서. 딱 히 칼을 넣어둘 만한 곳이 없네.”
“그럼 왕자님께서 행차하셔도 그러 고 있으려고? 기사 나리들이 가만히 있지 않을 텐데.”
“으음,”
내가 가만히 턱을 긁자, 뒤에 매달 려 있던 엘렌이 조용히 속닥거렸다.
“혹시나 해서 말하는데, 바보 같은 짓 하지 마.”
“바보 같은 짓이 뭔데?”
“넙죽 칼 던져주지 말라고.”
아, 그 말이었구나. 난 또, 얌전히 찌그러지라는 줄 알고 깜짝 놀랐네.
나는 잠시 고민하다가 흐룬팅을 역 수로 쥐곤 냅다 바닥에 꽂아버렸다.
콰각!
고동빛 칼날이 한 뼘도 넘게 땅을 파고들자, 하사관은 흠칫 놀라 마른 침을 삼켰다. 병사들 역시 놀란 표 정을 짓더니 슬쩍 무기를 고쳐 쥐었 다.
“됐지?”
“•••끙.”
기세 싸움에서 이긴 것 같아서 기 분이 조금 좋아졌다…. 아무리 생각 해도 난 아직 애라니까.
대치가 이어지길 잠시, 시장길 어 귀에서 일단의 병사들이 모습을 드 러내었다. 그 선두에 선 푸른 망토 의 사내는 퍽 낯이 익었다.
“랭볼트 경‘?”
“허, 정말 자네였군.”
콧수염이 인상적인 당당한 체구의 기사가 썩 놀란 표정으로 다가왔다.
“지하로 내려간 뒤 소식이 끊겼다 고 들었는데. 갑자기 허공에서 나타 나다니, 대체 어찌 된 영문인가?”
“음, 그, 말하자면 꽤 긴데… 여기 서 설명드리면 되겠습니까?”
내가 어깨를 으쓱거리며 주변을 돌 아보자, 랭볼트는 한숨을 내쉬며 턱 짓했다.
“따라오게. 왕자님께서 기다리고 계시니.”
그렇게 말한 랭볼트는 곧장 우리를 데리고 도시의 광장으로 향했다.
하늘에서 내려다보았던 대로, 광장 에는 예닐곱 개의 커다란 군막이 펼 쳐져 있었다.
그 주변에는 족히 이삼백 명쯤 되 어 보이는 사람들이 거적때기를 깔 고 앉아 있었는데, 행색을 보니 거 처를 잃은 피난민들 같았다.
추레한 행색의 병사들이 사람들을 감시하고 있었는데… 다들 희망 따 위는 애저녁에 놓아버린 표정들이라 큰 쓸모가 있을까 싶다.
“이게 대체 뭔 난리야….”
주변을 연신 두리번거리는 날 보 며, 앞서 걸음을 옮기던 랭볼트는 의아하다는 투로 물었다.
“무슨 일이 있었는지 모르나?”
“아… 저희가 잠시, 그, 지하에 갇 혀 있었거든요.”
“지하에 갇히다니?”
“하수도에 내려갔었는데 어디서 지 하수가 샜는지 바닥이 무너지는 바 람에….”
“흐음….”
랭볼트는 잠시 콧수염을 매만지더 니 고개를 끄덕거렸다.
“하긴, 지상이 그 지경이었으니 지
하는 더 심했겠군.”
“…그 지경이요?”
“그렇네. 지진 때문에 사람들이 수 도 없이 죽었지. 아성(分城)과 성벽 도 일부 무너져내렸고.”
•••지진? 웬 지진? 게임에서는 없 었던 이벤튼데?
다리아는 괜찮을까? 그라니아네 녀 석들은?
그러다 난 문득 불길한 생각이 들 어 랭볼트에게 물었다.
“그… 혹시 지진이 일어난 게 언제 였죠?”
“며칠 전이었네. 음, 우리가 도시에 들어온 게 지진이 난 직후이니… 닷 새쯤 되었겠군.”
닷새? 5일?
잠깐. 엘렌이 의식을 잃은 게 사흘 조금 안 되고, 출구를 찾아서 헤맨 게 하루 남짓인데. 그리고 그 직전 에… ‘제단’을 발동시켰지.
설마 그것 때문에? 지하군주가 봉 인에서 풀리며 토굴이 무너진 여파 로 지진이 난 건가?
“어, X발….”
사우스하버에 닥친 재앙의 원인이 나일 수도 있다는 생각에, 순간 정 신이 아득해졌다.
이거, 사람들이 알면 아주 엿 되는 거 아냐?
근데 생각해 보니, 제단에 대해 아 는 사람은 나뿐이잖아?
엘렌은 그때 의식이 없었고… 루 크, 그놈이 뭔가 눈치챘을지도 모르 지만, 범죄자 강령술사 새끼가 뭘 어쩌겠어. 그럼 나만 입 다물고 있 으면 괜찮은 건가?
……김승수 이 미친놈■아, 괜찮긴 뭐가 괜찮아? 사람이 수없이 죽었다 잖아, 이 사이코패스 같은 새끼야….
“•••무슨 일인가? 안색이 안 좋은 데.”
랭볼트의 물음에 나는 퍼뜩 고개를 들며 도리질 쳤다.
“아, 아닙니다. 그냥… 생각해 보니 저희도 그때 지하에 갇혔던 것 같아 서요….”
“그런가. 하수도 역시 죄다 무너졌 다고 하던데, 용케도 빠져나왔군. 마 법이라도 부린 건가?” “뭐, 말하자면 비슷하죠….”
그렇게 대충 얼버무릴 즈음, 우리 는 마침내 왕자의 천막에 도착했다. 눈빛이 날카로운 병사들이 지키는 천막 안에는 열 명 남짓한 사람들이 모여 있었다.
구석에 있는 몇을 제외하면 나머지 는 커다란 테이블을 둘러싸고 있었 다.
접시를 받친 양초들과 지도, 가죽 장갑, 투구 따위가 어지럽게 놓여 있는 테이블 곁에는 단 한 사람만이 의자에 앉아 있었다. 울카르 왕자였 다.
“하, 정말 너였군.”
철탑같이 버티고 선 기사들 사이에 서, 왕자는 슬쩍 미소를 지어 보였 다.
“왕자 전하를 뵙습니다.”
“매번 나를 놀라게 하는구나. 이번 엔 하늘에서 떨어졌다고?”
“예, 어쩌다 보니….”
“하하, ‘어쩌다 보니’라. 네 이야기 를 자세히 듣고 싶구나.”
그렇게 말하며 등을 기대던 왕자는 내게 업혀 있는 엘렌을 보곤 의아한 표정을 지었다.
“그 소녀는? 계속 그러고 있을 셈 인가?”
“다리를 다쳤습니다. 서 있을 수가 없는 처지라….”
“저런.”
왕자가 미간을 좁히며 턱짓하니 한 병사가 의자를 내주었다. 웃통을 까 고 있는 내 모습이 보기 민망했는지 걸칠 옷을 가져다준 건 덤이다.
엘렌을 앉힌 뒤 튜닉을 걸치자, 왕 자는 기다렸다는 듯 이것저것 질문 을 퍼부어왔다.
나는 지하에서 있었던 일들을 대부 분 털어놓았지만, 한 가지 부분에 대해선 굳이 말을 하지 않기로 했 다. 제단을 발동시켜 지하군주를 불 러냈다는 사실 말이다.
“흐음. 강령술사에, 괴물에, 고대의 마법까지…. 기가 막힌 모험담이로 군.”
왕자는 팔짱을 낀 채 연신 고개를 끄덕거렸다. 그리고 내 이야기가 끝 나자, 구석에 있던 사제에게 고개를 돌렸다.
“고스패트릭 신부, 강령술사에 관 한 건 교회에 알리는 게 좋지 않겠 습니까?”
“그리하겠습니다. 전하께서 허락해 주신다면 이 용병도 동행하고 싶습 니다만.”
“일단은 먼저 가보도록 하십시오.
대화가 끝나는 대로 교회로 보낼 테 니. 아,”
그렇게 말하던 왕자가 나를 돌아보 며 물었다.
“그간 지하를 누볐으니 교회에서 정화라도 받는 게 좋을 거다. 그러 는 김에 강령술사에 관한 이야기도 전해주면 되겠지.”
“예, 전하. 안 그래도 교회에 갈 참이었습니다.”
“그래, 잘됐군.”
사제가 홀로 천막을 나서자, 왕자 는 이어서 마법사에게 질문했다.
“마스터 리몬드. 이 용병의 모험담 에 대해 어찌 생각하시오?”
마스터 리몬드? 아, 저번에 물의 정령을 소환했던 그 아저씨네.
마법사 아저씨는 잠시 턱을 쓰다듬 더니 애매한 어조로 대답했다.
“사우스하버는 고대의 제국 시절 크게 번성했던 도시입니다. 학자들 은 십만 명이 넘는 인구가 거주했던 것으로 추측하고 있지요. 그런 대도 시이니 지하에 그런 신비한 장치가 숨어 있었다 한들 이상한 일은 아닐 것입니다. 다만….”
“ 다만?”
“그러한 마법적 장치들은 외부인의 침입에 대비해 방비를 갖춰놓기 마 련입니다. 평범한 용병들이 그러한 방비를 극복했다는 것이… 조금 신 기하군요.”
“그러고 보니 그렇군.”
왕자가 설명을 요구하는 듯 나를 바라보았다.
•••뭐라고 설명하지? 엘렌이 마법사 란 걸 밝히기는 좀 껄끄러운데. 마 법사 패가 있는 것도 아니고, 궁전 에서 쫓기는 처지기도 하니….
하고 고민하고 있던 차에, 뒤에서 부터 흘러나온 미풍이 군막을 가득 채웠다. 갑자기 바람이 어디서… 어, 엘렌?
“…이건,”
왕자와 기사들은 다들 어리둥절한 표정이었지만, 구석에 앉아 있던 마 법사는 입을 쩍 벌리고 있었다.
그는 조용히 의자에 앉아 있는 엘 렌과 눈을 마주치곤 믿기지 않는다 는 듯 눈을 끔뻑였다.
“무슨 일인가, 마스터 리몬드?”
왕자의 물음에 리몬드는 잠시 주저 하며 말을 골랐다. 그러더니 왕자에 게 다가가 귀엣말을 속삭였다.
“•••의심할 필요는 없을 것 같습니 다, 전하.”
나름 작게 말하는 것 같은데…. 다 들려요, 아저씨.
“그게 무슨 소린가?”
“저 소녀는 마법사입니다. 마나의 재질과 양을 보았을 때, 명가의 전 인(傳人)이 틀림없습니다.”
“명가?”
“여명 의회나 궁전, 라오 가문…. 셋 중 하나일 겁니다.”
마법사가 물러나자 왕자는 새삼스 러운 눈으로 엘렌을 살폈다.
엘렌은 눈을 내리깔기기는커녕 ‘뭐? 어쩌라고?’ 하는 눈빛으로 왕 자를 마주 보고 있었다.
하여튼, 참 한결같은 녀석이라니까.
“그러고 보니 그쪽의 아가씨와는 아직 통성명도 하지 않았군. 이름이 뭐지?”
“엘렌이라고 합니다.”
얘가 존댓말을 다 쓰네. 녀석도 왕 자 앞에서까지 뻗대기는 힘든가 보 다.
엘렌의 또랑또랑한 대답에 왕자는 팔짱을 풀며 재차 물었다.
“내가 성까지 묻는다면 결례겠나?”
“구태여 하문하신다면 말씀드리겠 습니다. 결례라 한들 누가 감히 전 하를 탓할 수 있겠습니까.”
공손함이라곤 찾아볼 수 없는 엘렌 의 존대도 놀라웠지만, 선선히 고개 를 가로젓는 왕자의 모습도 놀라울 따름이었다.
“…아니, 그럴 것 없다. 보기와는 달리 마도에 배움이 있다는데, 이에 대해 말해보아라.”
“‘가드일 위어’에서의 일이 채 백 년도 되지 않았습니다. 사자의 일족 앞에서 천한 재주를 자랑하기 두렵 습니다.” 가드일 위어? 무슨 소리를 하는지 는 모르겠지만, 뒤에 기사 아저씨들 표정을 보니 썩 좋은 이야기 같진 않은데….
난 잔걸음으로 엘렌의 곁으로 다가 갔다.
기사들의 얼굴에 불쾌함이 아닌 분 노가 어린다면, 언제라도 엘렌을 데 리고 도망쳐야 했다.
그런 생각으로 주변을 •훑어보는데, 몇몇 기사들이 흠칫 놀라는 표정을 지었다.
뭐야, 왜 저러지?
내 의문과는 상관없이, 왕자의 질 문은 계속되었다.
“그럼… 네가 이곳에 있는 것은 개 인적인 용무인가?”
“그렇기도 하고 아니기도 합니다.”
“알다시피 나는 왕가의 일원이다. 혹여 나도 모르게 의무를 저버리고 있는 것은 아닌지 걱정스럽군.”
“괜한 걱정이십니다. 전하께선 제 게 아무런 의무도 없습니다.”
“•••그렇군. 알겠다.”
영문 모를 이야기를 주고받은 둘은 잠시간 서로를 빤히 바라보았다.
침묵은 왕자가 내 쪽으로 고개를 돌리며 끝이 났다.
“도시의 상황은 알고 있나?”
“어, 지진이 났다는 것까지는 들었 습니다.”
“그래. 성벽을 포함한 여러 방어시 설이 무력화되어 적의 공격에 취약 해진 상태지. 그리고… 도시 안의 모든 장정은 징집 대상이야. 근거는 얼마 전에 선포된 백작의 동원령이 고.”
•••X팔.
울카르 왕자는 엘렌을 돌아보며 덧 붙였다.
“엘렌 양도 마찬가지. 비상시이니 전투마법사로서 종군하…. 아니, 일 단 교회에 가보는 게 좋겠군.”
“•••알겠습니다, 전하.”
“그럼 일단…. 이 자는 랭볼트 경 이 데려가도록 하시오. 기량이 뛰어 나고 눈치도 빠르니 항만 수비에 큰 보탬이 되겠지.”
“예, 주군.”
항만 수비? 어, 잠깐. 이러면 안 되는데?
왕자가 물러나라는 듯 손짓을 하려 는 찰나 얼른 말을 꺼냈다.
“전하, 잠시, 제가 드릴 말씀이 있 습니다.”
“음? 뭐지?”
“제가 전에 성주님의 의뢰를 수행 하며 정보를 좀 얻었는데……
내가 빠른 발의 토발드와 그가 가 지고 있던 편지에 관한 이야기를 꺼 내자, 왕자는 표정을 딱딱하게 굳혔 다. 그러더니 번쩍이는 갑옷의 기사 를 보며 물었다.
“라이암 경. 이에 대해 들은 바가 있나?”
“경비대장이 말하길, 미심쩍은 증 거를 얻어 행동에 나섰지만, 허탕을 쳤다고 했습니다.” “그게 끝인가?”
“예, 전하.”
왕자가 잠시 침묵하자, 기사들 사 이에서 웬 왜소한 노인이 나섰다.
“주군, 이건….”
“경이 말한 ‘모종의 이유’가 이것 일 수도 있겠군.”
“맞습니다. 확인해 볼 가치가 있습 니다.”
무슨 얘기를 하는 거지? 혹시 이 쪽도 도시에 내통자가 있다는 걸 짐 작하고 있었나?
왕자는 팔걸이를 두드리며 골똘히 생각에 잠기더니 이내 입을 열었다.
“지금은 도시의 방비와 치안 유지 만 해도 버거운 상황이오. 하지만 내 부의 적을 내버려 둘 수도 없지. 아 리아드 경에게 이번 일을 맡기겠소.”
“맡겨주십시오.”
“라이암 경, 경비대에서… 스무 명 정도는 내어줄 수 있겠지?”
“물론입니다, 주군.”
“좋아.”
울카르 왕자는 고개를 끄덕이더니 나와 엘렌을 번갈아 바라보았다.
“엘렌 양과 너, 음, 이름이 포이닉 스라고 했던가?”
“예, 맞습니다. 전하.”
“둘은 아리아드 경을 도와 내통자 를 잡아내도록 해라. 지난 며칠간 지하를 헤맨 고충은 알지만, 도시의 상황이 급박하니 사정을 봐주기 어 렵구나.”
“물론입니다, 전하.”
“그래. 물러가라.”
왕자의 말에 나는 예를 표한 뒤 엘렌을 안아 들고 잽싸게 천막을 빠 져나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