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he Blood Knight's Villains RAW novel - Chapter (72)
나의 악당들 072화
20. 혼란의 도시(1)
눈앞이 번쩍거림과 동시에 수많은 정보가 감각을 통해 뇌로 흘러들어 왔다. 가장 먼저 느껴진 감각은 피 부를 핥는 따사로운 햇볕이었다.
와, 이게 얼마 만에 보는 해냐. 거 의 일주일 만인 것 같은데.
그러나 그 반가운 감각을 만끽하기 도 전에, 오묘한 부유감이 가랑이를 조였다.
“O 어 ” — —1,
나름대로 각오를 다졌지만, 순간이 동이라는 게 쉽게 적응할 수 있는 현상은 아니었다.
벌써 세 번째 경험이었음에도 가슴 이 덜컥 내려앉는 건… 어찌 보면 당연한 일이지.
특히, 순간이동으로 도착한 곳이 땅으로부터 백 미터쯤 상공이라면 더더욱!
나는 상황을 파악하곤 곧장 고함을 질렀다.
“엘렌! 귀걸이, 귀걸이!”
“꺄윽,”
정말 다행히도, 비명을 가까스로 삼킨 엘렌은 즉시 마력을 끌어올려 비행 효과를 발동시켰다.
그러나 여전히 엘렌의 비행 능력은 형편없었고, 우리는 줄 끊어진 연 마냥 바람을 타고 이리저리 흔들렸 다.
“어어一”
“야, 그냥 가만히 있어! 천천히 내 려가기만 하면 돼!” “으, 말은 쉽지, 네가 해봐!” 아오- 진짜 맘 같아선 내가 하고 싶다, 임마!
다행히 엘렌도 생존본능 같은 게 발동한 건지, 이내 균형을 잡더니 천천히 활강하기 시작했다.
“천천히, 천천히, 겁먹을 필요 없 어, 천천히-”
잔뜩 집중한 엘렌은 혼자 무어라 중얼거리고 있었다. 나는 몰래 숨을 돌리며 발밑을 둘러보았다. 그런데, “…어?”
아래에 펼쳐진 풍경은 내가 알던 사우스하버와는 영 딴판이었다. 순 간적으로 ‘다른 도시인가?’ 하고 착 각할 정도였다.
사우스하버는, 마치 거대한 괴물이 날뛰기라도 한 것처럼 엉망진창이 되어 있었다.
건물들은 얼핏 살펴도 200여 채는 무너져 있었고, 판석이 깔려 있던 바닥은 곳곳이 내려앉거나 갈라져 있었다.
시장이 펼쳐져 있던 거리는 폐허가 되어버렸고, 방앗간, 치안용 망루, 경비대 주둔지 등도 모조리 무너져 있었다.
가장 충격적인 것은 소금성과 성벽 이었다.
성주의 거처인 소금성은 거의 절반 쯤 허물어져서 금방이라도 주저앉을 모양새였다. 네 모서리의 궁탑 중 둘은 완전히 무너져 내렸고, 사방에 하얀 기와가 흩뿌려져 있었다.
도시를 부채꼴로 감싸 안은 성벽은 거의 4분의 1가량이 무너져 있었다.
길게 무너진 잔해의 중간은 해자에 서 흘러넘친 물 때문인지 더러운 웅 덩이로 채워져 있었다.
설마 도적놈들에게 당한 건가?
순간 그런 생각이 들었지만, 도시 를 오가는 병사들의 차림새를 보니 그런 것 같지는 않았다.
특히 도시의 광장엔 군막들이 여럿 펼쳐져 있었는데, 난 그것들을 보고 최악의 상황은 아니라고 확신할 수 있었다.
군막들 사이에서 황금사자의 깃발 이 휘날리는 걸 확인했기 때문이다.
“천천히, 천천히- 거의 다 왔어. 천천히, 천천히-”
엘렌의 중얼거림대로 우리가 지상 에 가까워졌을 즈음이었다. 한 무리 의 병사들이 우리를 감시하고 있었 다.
“남서쪽으로 내려온다!”
“광장, 광장으로 가!”
“라이암 경에게 보고해!”
경계심이 가득한 고함소리…. 그게 끝이 아니라, 몇몇 병사들은 우리를 향해 쇠뇌나 활을 겨누고 있었다.
•••젠장할, 딱 봐도 편히 쉬긴 글렀 구만.
커다란 천막 안, 중무장한 기사들 앞에 한 병사가 한쪽 무릎을 꿇고 있었다.
기사들 사이에 앉은 미남자가 뻑뻑 해진 눈을 비볐다. 그는 빛나는 은 발을 한차례 쓸어올리더니 병사에게 되물었다.
“•••누가, 어디서 나타났다고?”
“그, 반쯤 벌거벗은 사내와 금발의 소녀입니다. 도시의 상공에서 나타 나 이쪽으로 내려오고 있습니다.”
은발의 사내는 한동안 제대로 쉬지 못했는지 꽤 지친 얼굴이었다. 하지 만 이목구비가 워낙 수려하여 고개 를 드는 것만으로도 천막 안이 환해 지는 듯했다.
미남자는 조용히 관자놀이를 누르 더니 곁에 있던 기사에게 물었다.
“랭볼트 경, 내가 제대로 들은 게 맞소?”
“어찌 들으셨습니까?”
“웬 변태가 소녀를 데리고 하늘에 서 떨어졌다고 들은 것 같은데.”
“하면 제대로 이해하셨습니다, 주 군.”
푸른 망토를 두른 기사, 랭볼트 얼 쇼어가 콧수염을 매만지며 대답했 다. 그러자 아름다운 용모의 왕자, 울카르는 한숨을 내쉬며 중얼거렸 다.
“이놈의 도시에선 도저히 이해 못 할 일들이 끊임없이 터지는군.” 왕자의 말에 주변의 기사들이 동의 한다는 듯 쓴웃음을 머금었다.
다른 기사들보다 머리 하나는 큰 거한은 인상을 와락 찌푸리며 왕자 에게 말했다.
“경계가 허술한 탓입니다, 주군. 성 벽에 있는 작자들을 죄다 끌어내서 매질해야 합니다.”
거한이 언성을 높이자 왕자는 등받 이에 몸을 기대며 깍지를 꼈다.
“성문수비대 말이오?”
“달리 누구겠습니까, 주군?”
“그들이 빠지면 안 그래도 제 역할 을 못 하는 성벽이 절반쯤 비게 될 텐데. 그 자리는 어떻게 채운단 말 이오?”
“백작이 동원해 둔 민병대들을 활 용하면 됩니다.”
왕자는 고개를 작게 내저었다.
“그게 불가능하다는 건 안키르 경 도 알잖소.”
“주군.”
“민병대는 한낱 어중이떠중이들을 모아둔 것에 불과하오. 쓸 만한 자 들이 몇 있다고 한들 수비대를 대체 할 만한 무리는 아니지.” 왕자의 단언에 콧수염을 매만지던 기사, 랭볼트가 신중한 표정으로 입 을 열었다.
“하오나 주군. 도시에 입성하며 우 리 군대도 많이 상했습니다. 이대로 계속 피해가 쌓이면 도시 안팎으로 좋을 게 없습니다. 그리고, 요 며칠 간 혼란한 와중에도 민병대를 조련 한 것은… 결국 그들을 군대로 쓰기 위함이 아니었습니까?”
“조련이라고 해봐야 군령을 세운 게 고작이오. 경계란 강한 인내심과 엄정한 군기를 기본으로 삼는 작전 이니, 그들에게 맡겼다간 일을 그르 치게 되겠지. 민병대의 쓰임새는 따 로 염두에 둔 바가 있으니 경들은 그에 대해 논하지 마시오.”
왕자가 좌중을 돌아보며 말을 끝맺 자, 기사들은 일제히 고개를 숙여 보였다. 울카르는 희미하게 미소를 짓더니 전령에게 말했다.
“가서 내 말을 전하라. 그들을 생 포하여 심문하되 고문하지는 말라 고.”
“예, 전하.”
전령이 빠져나가자 왕자는 나지막 이 한 사람의 이름을 불렀다.
“아리아드 경.”
“예, 주군.”
울카르의 부름에 기사들 사이에서 웬 늙은이가 툭 튀어나왔다.
왜소한 체격과 거친 수염, 까맣게 그을리고 깊이 주름진 얼굴을 가진 노인은 어울리지 않게도 허리춤에 장검을 차고 있었다.
주변의 기사들이 묵직한 판금갑옷 을 입고 있는 것과는 달리 노인은 누비 갑옷만 대충 걸친 채였다.
기사라기보단 용병이나 병사에 가 까운 행색이었지만, 왕자는 아무렇 지도 않게 노인을 향해 질문했다.
“경의 말을 따라 성벽을 보수하고 방어태세를 점검했소. 무너진 성곽 뒤에 웅크린 채 주린 배를 붙잡고 버텼지. 하지만 상황은 호전될 기미 가 안 보이는군.”
언뜻 질책하는 말 같았지만, 노인 은 전혀 개의치 않고 선선히 고개를 끄덕거려 보였다.
“이미 말씀드리지 않았습니까, 주 군. 이제 상황이 나아질 일은 없습 니다. 최악으로 치닫는 상황 속에서 끈질기게 버티는 것만이 유일한 해 답이지요.”
“경은 그게 정말 답이 되리라 생각 하시오? 시궁에서 쥐를 잡고 썩은 나무껍질을 벗기며 언제까지 버틸 수 있겠소?”
“그리 오래 버티지 못할 겁니다.”
왕자의 얼굴에 금이 가려는 순간, 노인이 잽싸게 말을 이었다.
“도적놈들은 우리보다 상황이 더 나쁠 겁니다. 근처에 근거지도 없는 놈들이니 대충 마련한 보급은 진즉 바닥이 났을 것이고, 지금은 악으로 버티고 있을 뿐이겠지요.”
“어찌 그리 확신하시오?”
“지난 며칠간 이어진 무모한 공세 를 보면 어렵잖게 짐작할 수 있습니 다, 주군.”
그러자 팔짱을 끼고 있던 안키르가 인상을 구기며 반박했다.
“그게 무모한 공세인지 아니면 우 리의 숨통을 끊기 위한 마지막 파상 공세인지 어찌 안단 말이오?”
“우리가 끝까지 버텨낸다면 아무런 의미도 없는 무모한 공세가 될 테 고, 우리가 끝내 무너진다면 시의적 절한 파상 공세가 되겠지요.”
“•••그게 대체 무슨 궤변이오?”
헛웃음을 삼킨 안키르는 왕자를 돌 아보며 말했다.
“마적놈들은 말까지 잡아먹으며 덤 벼들고 있습니다. 끝까지 버텨보겠 다고 마음을 먹은 게 분명합니다, 주군!”
“…그래서 경의 의견이 뭐요?”
“상황이 이 지경이 된 것은 우리가 겁쟁이처럼 움츠려 있었던 탓입니 다. 오늘 밤, 아껴둔 식량을 풀어 병사들을 배불리 먹인 뒤 새벽을 기 해 놈들을 쳐야 합니다. 제가 선두 에서 기병들을 휘몰아쳐 단숨에 놈 들을 깨뜨리겠습니다.”
“그다음엔?”
“마적들을 몰아내어 보급로를 확보 한 뒤 다시금 힘을 모아 바다에서 기어 올라오는 놈들을 쫓아내면 될 일입니다. 무엇이 어렵겠습니까?”
거대한 기사의 우렁찬 호언장담에 왜소한 노인은 작게 웃음을 흘리며 고개를 가로저었다.
“해적들은 밤낮없이 정찰선을 운용 하고 있습니다. 우리가 마적들을 공 격하면 금세 알아채고 뒤를 치겠지 요. 게다가 마적들을 격파한다고 해 도, 놈들은 잠시 흩어질 뿐 들판을 휘저으며 보급로를 털어댈 겁니다. 무엇하나 얻을 게 없는, 하책 중의 하책 입니다.”
“•••지금 말 다 했소?”
“아직입니다, 안키르 경. 마적들이 말을 잡아먹는 모습을 보인 것도 우 리를 끌어내려는 일종의 기만책이었 을 겁니다. 전장에서 숱하게 경험을 쌓은 경께서 그런 뻔한 속임수에 속 아 넘어가다니, 애석한 일이 아닐 수 없군요.”
“하, 뭐라고! 이 천한 노인네가!”
안키르가 얼굴을 시뻘겋게 물들이 며 언성을 높이려는 찰나, 울카르가 손을 들어 그를 만류했다.
“그만, 그만!”
“하나 주군, 이 작자가….”
“경들끼리 다툴 것 없소! 애초에 이 수라장에 발을 들인 것은 내 선 택이었으니, 성을 내고 싶거든 나에 게 내시오!” 왕자의 호통에 기사들은 조용히 고 개를 숙여 보일 뿐이었다. 울카르는 한숨을 내쉬며 아리아드에게 재차 질문했다.
“그래서, 결국 답은 하나란 말이 오? 아무런 방책도 없이, 그저 주님 께 기도하며 놈들이 물러나기만을 바라야 하나?”
노인은 거친 턱수염을 매만지더니 애매한 어조로 대답했다.
“사실 마음에 걸리는 바가 있긴 하 옵니다.”
“그게 무엇이오?”
“저 도적놈들이 이토록 사우스하버 에 집착하는 이유를 알 수가 없습니
다.” “•••그야, 사우스하버는 남부에서도 손꼽히는 대도시이니 그만한 부가 있으리라 믿는 게 아니겠소?”
왕자의 말에 노인은 고개를 내저었 다.
“아무리 도시에 돈이 많다 한들 털 기 어렵다면 그게 다 무슨 소용이겠 습니까? 왕국에서 무명(武名)이 드 높은 주군께서 직접 행차하셨음에도 저들이 물러나지 않는 것은 필시 모 종의 이유가 있기 때문일 겁니다.”
“모종의 이유?”
“예. 뭔가 믿는 구석이 있든, 아니 면 목적이 있든… 놈들이 이 도시에 집착하는 이유가 분명히 있을 겁니 다. 그게 뭔지만 알아내어 처리한다 면 도적들도 물러나겠지만….”
“…지금으로선 알 도리가 없군.”
“송구하옵니다, 주군.”
울카르는 저도 모르게 빠져나오려 는 한숨을 가까스로 삼켰다. 그러곤 짧은 고민 끝에 짙푸른 광채가 흐르 는 눈동자로 좌중을 훑어보며 선언 했다.
“오늘 밤, 출정하겠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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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상외의 말에 다들 놀란 표정을 지었고, 그중에서도 노기사 아리아 드는 미간을 좁히며 앓는 소리를 내 었다.
“주군, 그게,”
“적들을 단번에 깨뜨리겠다는 뜻은 아니오. 병사들의 사기를 다잡고 적 들의 기세를 재차 꺾어두겠다는 의 미요.”
“으음….”
왕자의 굳은 어조에 늙은 기사가 물러섰다.
“지금까지 해온 대로… 라이암 경 이 이곳을 지키고, 랭볼트 경이 항 만을 맡으시오. 안키르 경과 내가 기병들을 이끌고 적진을 휘젓겠소.”
“예, 주군-”
우렁찬 대답과 함께, 기사들의 열 기가 군막 안을 채워갔다. 다들 왕 자의 명령을 반기는 기색이었다.
공격 계획을 세우기 위한 짧은 회 의가 끝나자, 이번엔 중년의 사내가 나섰다.
그는 옆구리에 알록달록한 깃털로 장식한 화려한 헬름을 끼고 있었다.
걸치고 있는 판금갑옷은 먼지 하나 없이 광이 났고, 머리는 깔끔히 빗 어넘겼으며, 면도까지 한 채였다.
갑옷에 흙먼지가 가득 앉은 다른 기사들 때문에 특히 눈에 띄는 외양 이다.
“주군의 지시대로 이틀간 백작의 친위대 장을 감시하였습니다.”
“결과는 어떤가?”
“불만이 많아 보였습니다. 자신이 백작을 직접 모셔야 한다고 입버릇 처럼 떠들어대고 있습니다.”
중년 기사의 보고에 왕자는 팔걸이 를 두드리며 물었다.
“귀찮은 일이군. 경의 복안은?”
“전처럼 무관장을 이용하면 됩니다. 나름 책임감이라는 게 있는 작자이 니 알아서 부하들을 달랠 것입니다.” “친위대장이라는 자, 백작의 사촌 이라고 하지 않았나? 무관장이라고 한들 그를 통제할 수 있을 것 같지 는 않은데. 특히 이런 상황이라면.”
왕자의 부정적인 반응에 중년 기사 는 잠시 망설이다 입을 열었다.
“친위대장은 엄연한 귀족이라 함부 로 제거할 수는 없습니다. 눈에 거 슬리신다면 소금성에 백작과 함께 감금해두겠습니다. ”
울카르는 잠시 고민하더니 고개를 끄덕거렸다.
“라이암 경의 뜻에 따르지. 소금성 의 경비도 다시금 점검,”
“전하!”
그 말이 끝나기도 전에, 한 병사가 천막에 뛰어들었다. 왕자는 기사들 이 호통치려는 것을 만류하며 병사 에게 턱짓했다.
“그, 하늘에서 내려온 괴한이 전하 를 뵙고자 합니다.”
“•••나를?”
“예, 병사들 중 몇이 그를 알아보 았는데….”
이어지는 전령의 말에 왕자의 짙푸 른 눈동자에 이채가 서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