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he Blood Knight's Villains RAW novel - Chapter (71)
나의 악당들 0기화
19. 탈출(4)
기이한 마력에 휩싸이기가 무섭게, 우리는 새로운 공간에 떨어졌다.
“…끄웅.”
내가 조심스레 몸을 일으키자 엘렌 도 작게 신음을 흘리더니 주변을 돌 아보았다.
“엘렌, 괜찮아?”
“으응, 여긴…?”
“•••유물의 방인 것 같아.”
우리가 깨어난 곳은 하얗게 빛나는 벽으로 둘러싸인 신비한 공간이었 다. 기껏해야 서너 평쯤 될까 싶은 좁은 공간엔 웬 석상 하나가 덩그러 니 서 있었다.
뭐야, 이 뜬금없는 전개는?
어안이 벙벙해진 나는 엘렌을 돌아 보았다.
“뭐, 어떻게 된 거야? 문자열이랑 기호가 갑자기 변하던데.”
“술식을 조금 바꾼 거야.”
“술식을 바꿔?”
나는 엘렌을 방의 한쪽 구석에 조 심스레 내려주었다. 녀석은 조금 지 친 표정으로 말을 이었다.
“그 마법진들, 함정이 아니었어.”
“함정이 아니라고? 그럼?”
“일종의… 문이지. 마법진을 아는 사람들만 이용할 수 있는 문.”
엘렌의 이어지는 설명을 듣고 나는 헛웃음을 삼켰다.
그러니까, 그 마법함정들은 비밀번 호가 걸린 문 같은 거였다.
문자열을 올바르게 조합하면 이곳, 탈출로인 유물방으로 오게 되지만 틀리게 조합하면 몬스터가 소환되거 나 공격마법이 발동되는 식이었다.
•••나름 다크월드의 썩은 물을 자부 하는 나지만, 처음 알게 된 사실이 다. 게임에서는 알 수 없는 정보가 틀림없다.
설명을 마친 엘렌은 좁은 방을 둘 러보며 불안한 표정을 짓고 있었다.
“근데… 우리 제대로 온 거 맞아? 여긴 온통 괴상한 마나로 가득한 데….”
“어, 책에 비슷한 내용이 있었던 것 같은데. 이런… 음, 신비한 방에 대한 언급도 있었던 것 같아.”
“•••그래?”
엘렌의 미심쩍은 답변을 뒤로하고, 우리는 방을 살피기 시작했다.
방은 그리 넓지 않았지만, 중앙에 있는 물건들을 제외하곤 먼지 한 톨 없이 텅 비어 있었다.
하지만 사방을 둘러싼 재질을 알 수 없는 벽이 환한 빛을 쏟아내고 있어서 휑한 느낌은 별로 들지 않았 다.
중앙의 물건들 중 가장 먼저 눈에 들어온 것은 젊은 남성의 석상이었 다.
조그만 보관(寶冠)을 쓴 남성은 어 깨와 소매를 부풀린 펑퍼짐한 옷을 입고 있었고, 왼손에는 두꺼운 책을 펼쳐 든 채였다.
보관을 장식한 보석들은 하나같이 정교하게 세공된 모양새였고, 바닥 에 끌리는 옷자락은 물결치는 무늬 가 생생히 살아 있었다.
게다가 두꺼운 책에는 손때를 탄 흔적과 조그만 글씨까지 표현되어 있었다.
석상을 살피던 엘렌은 ‘흐음’하고 침음을 흘리더니 조그맣게 중얼거렸 다.
“옛날 마법사 복장인 것 같은데.”
“고대제국의 시설을 통해서 여기까 지 왔잖아. 이 석상도 그 시절 물건 아닐까?”
석상은 손바닥으로 눈 앞을 가리는 자세를 취하고 있었다. 대가의 조각 상인 듯, 인간을 흉내 낸 석상은 어 색한 구석이 전혀 느껴지지 않았다.
그중에서도 압권은 바로 얼굴이었 다. 홉뜬 눈과 반쯤 벌어진 입, 자 연스레 접힌 주름으로 놀란 표정을 조각했는데, 생동감이 넘쳐서 금방 이라도 비명을 지를 것만 같았다.
그러다 문득, 엘렌은 조금 창백해 진 얼굴로 마른침을 삼켰다.
“포이, 이건 석상이 아니야.”
“뭐‘?”
이건 또 무슨 귀신 씨나락 까먹는 소리야?
나는 석상을 재차 살피며 턱을 긁 적거 렸다.
“으음, 아무리 봐도 돌로 만든 것 같은데?
“아니, 아니야. 이건… 석화의 저주 에 걸린 사람이야.”
“•.•석화의 저주?”
“응. 산 사람을 돌로 만들어버리는 무서운 마법이지. 오래전에 실전(失 傳)된 주문이라고 알려져 있는 데….”
나는 문득 소름 끼치는 생각이 들 어 엘렌에게 물었다.
“설마 이 사람, 살아 있는 건 아니 지?”
“•••글쎄, 뭐라고 표현해야 할까. 산 것도, 죽은 것도 아니라고 할까.”
“그게 무슨 소리야? 언데드도 아니 고.”
“지금은 사실상 죽은 거나 마찬가 지지만, 석화의 저주를 해제하면… 다시 살아날지도 모른다는 소리야.”
미친, 그게 가능한 거야?
잠깐만. 그러면…?
“고대제국이 망한 게 언제쯤이랬 지?”
“광명력 원년, 그러니까, 763년 전 일이야.”
“그럼 이 사람을 되살리면 763년, 어쩌면 천 년 전 사람과 대화할 수 있다는 뜻이네?”
“말하자면 그렇지.” 하, 이거 완전 냉동인간이 따로 없 잖아?
지구로 치면 21세기 대한민국 사 람이 고려 시대 사람과 만난다는 뜻 인데….
내가 경악한 표정을 짓자 엘렌은 한숨을 내쉬며 말했다.
“하지만 석화 해제의 주문도 실전 된 건 마찬가지야. 고대제국이 순식 간에 멸망하면서 수많은 마법 학파 의 대가 끊겼거든. 내가 알기로, 현 대에서 이 사람을 되살릴 방법은 없 어.”
“… 아하.”
에이, 묘하게 상상력을 자극하는 상황이라 설레는 중이었는데… 좋다 말았네.
나는 입맛을 다시며 석상 주변을 훑어보았다. 젊은 마법사가 들고 있 는 물건은 모두 돌이 되어 버렸지 만, 그에게서 떨어져 있던 물건들은 온전하게 남아 있었다.
그 물건들이란 두어 뼘 길이의 완 드와 조그만 상자, 그리고 가죽 케 이스였다.
돌이 되어 버린 마법사가 남긴 물 품들답다고 할까? 물건들은 하나같 이 고색창연했지만 어쩐지 신비한 느낌을 풍겼고, 놀라울 만큼 멀쩡한 모습이었다.
완드는 나뭇가지로 만든 물건으로, 밝은 회색빛을 띠었다. 아무런 장식 이 없는데도 어쩐지 고급스러운 분 위기를 풍겼다.
엘렌은 홀린 듯 지팡이를 주워들더 니 홀린 듯 살피기 시작했다.
“자작나무로 만든 지팡이야. 진사 (辰砂)? 아니, 백금을 덧입힌 것 같 은데….”
“좋은 거야?”
“…써봐야 알겠지만, 꽤 쓸 만한 마도구 같아. 운이 좋은걸.”
운이 좋긴, 여기까지 오느라 쎄빠 져 죽는 줄 알았구만.
딱 보니 유니크는 아니고 잘해야 레어, 아니면 매직 아이템 같은데…. 그 고생을 했는데 고작 저거야?
아니, 아니지. 저게 끝이 아니잖 아?
나는 실망감을 잠시 접어둔 채 상 자를 살펴보았다.
벽돌보다 조금 작은 크기의 상자는 상아를 깎아서 만든 물건이었다. 겉 에 금박장식이 붙어 있는 것을 보아 일종의 패물함인 것 같다.
딱 봐도 귀해 보이는 상자답게, 안 에 온갖 종류의 보석과 금붙이를 담 고 있었다.
“…이거, 다 진짠가?”
당연하지만, 평생을 흙수저로 살아 온 나에게 보석을 감별하는 능력 따 윈 없었다. 뭐, 이 세상에 큐빅 같 은 게 있을 것 같진 않으니 아마 진짜일 확률이 높겠지?
내가 엄지손톱만 한 루비가 박힌 펜던트를 들어 보이자,
“뭐, 가짜 같아 보이진 않네.”
엘렌은 건성으로 대답하곤 도로 완 드를 살폈다.
“…아주 그냥 정신이 팔렸구만.”
나는 투덜거리면서 보석함을 뒤적 거렸다. 보석이 박힌 은반지, 통짜 금으로 된 팔찌, 사람 얼굴이 새겨 진 금화 등 딱 봐도 값어치가 상당 할 것 같았다.
•••나, 부자 된 거 맞지?
홀로 희희낙락하는 중에 유독 눈에 띄는 물건이 있었다.
“엘렌, 이것 좀 봐.”
“또 뭔데‘?”
엘렌은 귀찮다는 듯 돌아보았다가, 내 손에 들린 물건을 보곤 눈을 동 그랗게 떴다.
“이게 무슨 마력이지? 순수한 마나 는 아닌 것 같은데….”
내가 발견한 건 한 짝의 귀걸이, 아니, 이어커프(Ear cuff, 귓불을 뚫 어서 끼우는 게 아닌, 귀에 끼우거 나 걸쳐서 착용하는 장신구)였다.
이어커프는 은으로 날개를 형상화 하고 날개 테두리에 청옥을 둘러 꾸 민 물건이었다. 세공이 어찌나 섬세 한지 깃털이 한 올 한 올 흩날릴 것만 같았다.
이 이어커프는 게임 속에서 본 적 이 있는 물건이었다.
이름이… ‘아엘로의 깃털장식’이었 나? 레어 아이템 중에선 꽤 인지도 가 있는 물건으로, 발동 효과가 꽤 쓸 만해서 몇 번 가지고 놀았던 기 억이 있다.
“외부에 문구를 새긴 것 같진 않은 데…. 이렇게 선명한 힘을 품고 있 다니, 이건 대체 뭐지?”
엘렌은 장신구의 정체를 파악하기 위해 구조를 살피고 마나를 흘려 넣 는 등 난리를 피워대었다.
음, 그냥 뭔지 말해 줄까?
•••아니, 아니다. 책에서 읽었다고 구라를 치는 것도 정도가 있지. 갑 자기 주운 물건의 효과를 줄줄이 늘 어놓으면 얼마나 의심스럽겠냐고.
나는 엘렌이 하는 양을 지켜보다가 어깨를 으쓱거리며 말했다.
“별문제는 문제는 없어 보이는데, 한 번 껴봐.”
“ 괜찮을까?”
“찝찝하면 내가 먼저 껴볼까?”
“•••흥, 됐어. 마도구의 ‘마’ 자도 모르는 게.”
녀석은 콧방귀를 끼더니 깃털 장신 구를 귀에 가져다 대었다. 그러곤 귀에 끼기 위해 혼자 낑낑거리기 시 작했다.
“이, 이게 잘, 안 되네.”
“참나, 뭐 하냐? 이리 줘봐.”
“ 익,”
나는 녀석의 곁에 쪼그려 앉으며 깃털 장신구를 낚아챘다. 그리곤 고 리 부분을 살짝 벌려 작은 귀에 끼 워준 뒤 위로 살짝 밀어 올려 완전 히 고정시켰다.
“어때, 편해?”
“•••으음, 괜찮은 것 같은데.”
귀를 매만지던 엘렌은 잠시 눈을 감더니 천천히 고개를 끄덕거렸다.
“역시. 정령이 깃든 물건 같아.”
“그래? 효과는?”
“잠깐만.”
엘렌은 장신구에 깃든 효과를 발동 시키기 위해 마력을 일으켰다.
사실, 내가 이 장신구를 녀석에게 양보한 건 아이템이 가진 특징 때문 이다.
동레벨 최고 수준의 마력을 가진 엘렌이라면 이 물건을 제대로 활용 할 수 있겠지.
후우웅.
“어, 어어!”
당혹성과 함께 엘렌의 몸이 허공에 떠오르기 시작했다. 천천히 떠오르 던 동체가 비틀거리기 시작하자, 녀 석은 당황하여 입을 벌리고 눈을 동 그랗게 떴다.
“포, 포이, 나 좀,”
“나, 나 좀 잡아줘!”
엘렌은 하반신이 마비된 터라 발버 둥을 치지는 못했지만, 팔을 이리저 리 바둥거리며 균형을 잡기 위해 애 를 썼다.
•••그냥 가만히 있으면 괜찮을 것 같은데.
“뭘 보고만 있어! 빨리!”
“•••어휴,”
나는 얼른 녀석의 손을 붙잡았지 만, 엘렌의 몸은 헬륨을 채운 풍선 이라도 된 듯 계속 떠오르기만 했 다.
“얌마, 어디까지 올라갈 거야?”
“이게, 이게 잘 조종이 안 돼!”
“이런 병, *끄응* 마력을 좀 조절 해 봐!”
“그게 말처럼 쉬운 줄 알아!”
엘렌은 울상을 지으며 빽 소리를 질렀고, 나는 천장에 달라붙으려는 녀석을 끌어내렸다. 그러나 이내, 깃 털 장신구에서 비롯된 마력이 나까 지 휘감기 시작했다.
후우웅.
“어, 어어- 나도 뜬다!”
“으윽, 뭐 해, 이 얼간아!”
“얼간이? 지가 띄워놓고?”
“이, 일부러 그런 거 아니거든?”
근데… 이거, 좀 재밌는데? 꼭 중 력이 없는 곳을 헤엄치는 느낌이야.
낯선 부유감에 금세 적응한 난 어 렵잖게 균형을 잡은 뒤 헛웃음을 터 뜨렸다.
“야, 허둥대지 말고 가만히 좀 있 어 봐.”
“허둥대는 게 아니라- *으악!* 자 꾸 몸이 뒤집혀!”
“팔을 휘저으니까 그렇지!”
•••난장판이 따로 없구만.
‘아엘로의 깃털장식’에 깃든 발동 효과는 다름 아닌 ‘비행’이었다.
물론, 아무나 쓸 수 있는 건 아니 었다.
비행의 지속시간과 속도가 마력에 비례하기 때문에, 마력이 낮은 캐릭 터가 사용하면 아주 짧은 시간 동안 느릿느릿 날아다니는 게 전부였다. 마력이 높은 엘렌이라면 잘 활용할 수 있으리라고 생각했는데…. 녀석 은 몸 쓰는 일엔 영 재능이 없는 데다 하반신도 쓰지 못하는 터라 균 형을 잡는 데 상당히 애를 먹고 있 었다.
한참을 허공에서 버둥거리던 엘렌 이었지만, 이내 녀석을 바치던 바람 이 흩어지기 시작했다.
“어, 어어, 포이, 나 떨어-”
그걸 느낀 엘렌은 새된 소리로 비 명을 질렀고, 나는 얼른 녀석을 받 아들었다.
턱.
“ 괜찮냐?”
“•••응.”
엘렌은 자기가 보인 추태에 부끄러 움을 느꼈는지 뒤늦게 얼굴이 붉어 졌다.
한바탕 소란이 끝난 뒤에야 마지막 물건을 살펴볼 수 있었다. 그건 가 죽 케이스였는데, 그 안에는 다섯 병의 마법물약이 들어 있었다.
아니, 다른 물건이야 그렇다 쳐 도… 마법물약이라고?
“…이거 상한 거 아냐?”
엘렌은 물약병들을 들어 흔들어보 거나 빛에 비추어 보더니 자신 없는 투로 말했다.
“별 이상은 없어 보이는데.”
“야, 칠백몇 년 전 물건이라며? 지 금까지 멀쩡하면 그게 마법방부제 지, 마법물약이냐?”
“그렇게 놀랄 일이야? 이 공간부터 가 정상적인 곳은 아니잖아.”
•••뭐, 맞는 말이긴 해. 사방을 빈 틈없이 메운 매끈한 벽에서 빛이 흘 러나오는 것만 봐도, 여긴 절대 평 범한 공간이 아니다.
게다가 칠백 년이면 마법물약은 물 론이고 목제 완드나 가죽 케이스 같 은 것도 죄다 썩어 없어질 시간이 다. 이 공간에 무언가 특별한 요소 가 있다고 생각하는 게 설득력 있겠 지.
“일단 챙겨두자. 나중에 검사해 보 면 되니까.”
좀 찝찝하긴 하지만… 뭐, 이런 방 면에서는 엘렌의 말을 따는 게 편하 지.
나는 패물함과 포션 케이스는 반망 토에 둘둘 싸서 허리춤에 묶어두었 다. 그 모습을 지켜보던 엘렌이 문 득 주변을 둘러보며 입을 열었다.
“그래서, 여기서는 어떻게 나가 지?”
“뭔가 장치가 있지 않을까?”
“흐음. 나 좀 업어줘.”
엘렌은 내게 업힌 채 벽면을 훑기 시작했고, 이내 한쪽 벽에 음각으로 새겨진 마법진을 발견했다. 녀석은 손끝으로 마법진을 더듬으며 눈을 빛내었다.
“이게 맞는 것 같은데.”
“작동시킬 수 있겠어?”
“응. 구조를 보니 마나만 흘려 넣 으면 되겠는걸.” 나는 작게 심호흡했다. 게임에서는 유물방을 거쳐 바로 사우스하버로 귀환할 수 있었는데, 현실에서는 어 떨지 모르겠다.
엘렌도 각오를 다지듯 ‘좋아’ 하고 중얼거리더니 나에게 물었다.
“준비됐지?”
한 손에는 흐룬팅을, 다른 한 손으 로는 목에 둘러진 엘렌의 손목을 꼭 쥔 채 고개를 끄덕였다.
“가자.”
우우웅.
엘렌의 손에서 푸른 마나가 흘러나 오자 마법진이 빛을 내기 시작했다. 기이한 마력이 몸을 감싸는… 슬슬 익숙해질 것 같은 감각이 느껴졌다. 이윽고 마법진에서 뿜어진 빛이 절 정에 달했고, 나는 눈부심을 이기지 못하고 질끈 눈을 감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