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he Cheating Who Loved Me RAW novel - chapter 52
“기억이 나지 않아요.”
그녀가 거의 들리지도 않을 만큼 작은 소리로 속삭였다.
그는 아까부터 계속 잡고 있던 그녀의 손을 들어올려 다시금 입술로 가져갔다. 그는 부드럽게, 거의 아버지처럼 그녀의 손바닥에 키스했다.
“무얼 기억하지 못한다는 거요?”
그녀는 고개를 저었다.
“모르겠어요.”
“서재로 온 것은 기억하오?”
그녀는 고개를 끄덕였다.
“폭풍은?”
그녀는 잠시 눈을 감았다. 마치 지금 가지고 있는 힘으로는 눈을 뜨고 있는 것조차 버겁다는 듯.
“아직도 폭풍우가 치고 있군요.”
앤소니는 고개를 끄덕였다. 사실이었다. 아직도 빗방울이 아까와 조금도 다름없는 힘으로 창문을 두드리고 있었다. 하지만 천둥 번개는 몇 분 전부터 더 이상 치지 않고 있었다.
그녀는 애절한 눈으로 그를 바라보았다.
“난……난…….”:
앤소니는 그녀의 손을 꼭 쥐었다.
“아무 말도 하지 않아도 괜찮소.”
그녀가 진저리를 치며 긴장을 푸는 것을 느꼈다. 그리곤 그녀가 속삭였다.
“고마워요.”
“계속 얘기를 해주었으면 좋겠소?”
그녀는 눈을 감고-아까처럼
질끈 감은 건 아니다-고개를 끄덕였다. 그는 그녀가 볼 수 없다는 것을 알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미소를 지었다.
“어디 보자.”
그가 중얼거렸다.
“무슨 얘기를 해주면 좋을까?”
“이 집 얘기를 해줘요.”
그녀가 속삭였다.
“이 집?”
그가 놀란 목소리로 물었다. 그녀는 고개를 끄덕였다.
“좋소.”
그가 대답했다. 그녀가 그에게는 너무도 소중한 의미를 가진 돌과 회반죽 덩어리에 관심을 표하는 것에 기묘할 정도로 즐거움을 느꼈다.
“당신은 이는지 모르지만 난 여기서 자랐소.”
“자작님의 모친께서 말씀해 주셨어요.”
앤소니는 가슴속에서 뭔가 따스하고 강력한 불꽃이 피어오르는 것을 느꼈다. 지금 그녀는 스스로 대화에 참여하고 있었다. 기분이 훨씬 나아졌다는 뜻이리라. 만일 그녀가 눈만 뜬다면 모든 상황이 거의 정상처럼- 두 사람이 탁자 아래 들어가 있다는 것만 제외한다면-보일지도 모른다
그녀의 기분을 나아지게 만든 사람이 자기 자신이길 바랐다는 것 자체에 앤소니는 놀랐다. 그가 물었다.
“남동생이 여동생이 제일 좋아하는 인형을 물에 빠뜨린 이야기를 해줄까?”
케이트는 고개를 저었다. 그리고선 다시 바람이 거세지며 빗방울이 요란한 소리와 함께 창문에 부딪히기 시작하자 몸을 움찔거렸다. 하지만 그녀는 고개를 치켜들고 말했다.
“당신 얘기를 해줘요.”
“좋소.”
앤소니는 천천히 말하며, 가슴속에서 퍼져나가는 희미하고 불편한 느낌을 무시하려 애썼다. 차라리 동생들 얘기를 하는 게 더 쉬우련만.
“부친 얘기를 해주세요.”
그는 멈칫했다.
“내 아버님?”
케이트는 미소를 지었지만 앤소니는 놀란 나머지 그녀가 이젠 미소짓고 있다는 것에까지 신경을 쓸 겨를이 없었다.
“당신에게도 아버님은 있었을 거 아니에요.”
그녀가 말했다.
앤소니는 갑자기 목이 꽉 죄어드는 것을 느꼈다. 그는 원래 아버지 이야기를 지주 하는 편이 아니었다. 심지어 가족들과조차도 너무 오래된 일이어서 그런 것일까. 하긴 아버지가 돌아가신 지도 벌써 10년이 넘었으니까 하지만 진실은, 아버지 이야기를 하는 것이 아직도 괴롭기 때문이었다.
낫지 않는 상처라는 것이 있다. 10년이란 세월이 지났다 하더라도.
“아버님은……아버님은 훌륭한 남성이었소.”
그가 부드럽게 말했다.
“훌륭한 아버지였고 난 아버님을 몹시 사랑했소.”
케이트는 몸을 돌려 앤소니를 바라보았다. 몇 분 전 그가 손가락으로 턱을 치켜올린 이래 처음으로 그의 눈을 들여다보았다.
“모친께서도 그분 말씀을 하실 때는 굉장한 애정을 담아 말씀하시더군요. 제가 선친 이야기를 물은 것도 그 때문이에요.”
“우리는 모두 아버님을 사랑했소.”
앤소니는 그렇게 말한 뒤 고개를 돌려 방 저편을 바라보았다. 그의 눈은 의자 다리에 고정되어 있었지만 아무것도 눈에 들어오지 않았다. 지금 그의 눈에 보이는 것은 머리 속에 남은 추억뿐이다.
“남자아이들이 꿈속에서나 바랄 수 있는 최고의 아버지였소.”
“언제 돌아가셨지요?”
“11년 전 여름. 내가 열여덟 살 때, 막 옥스퍼드로 가려던 참이었소.”
“가장 힘든 시기에 아버님을 여의셨군요.”
케이트가 중얼거렸다.
그는 날카롭게 그녀를 돌아보았다.
“언제 돌아가셔도 힘들기는 마찬가지요.”
“물론이지요.”
그녀가 얼른 동의했다.
“하지만 평소보다 더 힘들 때가 있다고 생각해요. 아마 아들과 딸은 다르겠지요. 제 아버님은 5년 전에 돌아가셨어요. 아직도 아버님이 무척이나 그립지만 저와는 또 많이 다르겠지요.”
굳이 질문할 필요도 없었다. 그의 눈에 고스란히 떠올라 있었으니까.
“제 아버님도 좋은 아버지였어요.”
케이트가 설명했다. 추억을 떠올리는 그녀의 눈매가 따스해졌다.
“온화하고 부드러운 성품이었지만 꼭 필요한 때는 엄하셨지요. 하지만 남자에게 있어서 아버지란……아들이 ‘남자’ 가 될 수 있게 가르치는 것은 아버지의 몫이니까요. 그런데 열여덟에 아버님을 여의셨다면 그때가 바로 ‘남자’ 란 것이 무엇인지 배워 가는 때가 아닌가요…….”
그녀는 길게 한숨을 내쉬었다.
“저는 남자가 아니니까 남자에게 있어서 그게 얼마나 커다란 상실감을 주는 일일지 상상하는 것조차 주제넘는 짓이겠지만 그래도…….”
그녀는 말을 멈추고 입술을 꼭 다문 뒤 적당한 단어를 골랐다.
“무척이나 힘드셨겠구나 하는 것 정도밖엔 알 수가 없지요.”
“내 남동생들은 열 여섯, 열둘, 그리고 두 살이었소.”
앤소니가 부드럽게 말했다. 케이트는 맞장구쳤다.
“동생분들도 많이 힘드셨을 거예요. 하지만 아마 제일 어린 동생분은 아예 기억조차 못하실 테지요.”
앤소니는 고개를 끄덕였다.
케이트는 쓸쓸한 미소를 지었다.
“저 역시 제 어머니를 기억하지 못한답니다. 딱한 일이지요.”
“언제 돌아가셨소?”
“제 세 번째 생일날이었대요. 아버님은 몇 달 후 메리와 결혼하셨어요. 별로 오래 애도 기간을 보내신 게 아니라서 주위 사림들이 놀라긴 했지만 아버님은 체면을 차리는 것보단 제게 어머니가 더 절실하다고 생각하셨대요.”
처음으로 앤소니는 만일 젊은 나이에 돌아가신 것이 어머니였다면, 갓난아기와 어린 아이들까지 끼여 있던 일곱 아이를 아버지께 남기고 돌아가셨다면 어떻게 되었을까 생각해 봤다. 아버지는 아마 심하게 고생 하셨을 것이다. 모두들 무척이나 힘들었을 테지.
물론, 그렇다고 살아남은 쪽이 어머님이라 더 편했다는 뜻은 아니다.
하지만 적어도 바이올렛에겐 필요한 때면 어린 동생들에게 비슷하게나마 아버지 노픗을 해줄 수 있는 앤소니가 있었다. 만일 먼저 죽은 것이 바이올렛이었다면, 브리저튼 가족에게 엄마노릇을 할 사람은 아무도 없었을 것이다. 장녀인 다프네조차 에드먼드가 죽었을 때 겨우 열 살에 지나지 않았으니까. 아버지는 절대 재혼을 하지 않았을 것이다.
아무리 자직들에게 엄마가 필요하다 할지라도 그는 다른 여성을 아내로 맞을 수 없었을 것이다.
“모친께서는 어떻게 돌아가셨소?”
앤소니가 물었다. 자신이 이토록 호기심을 나타낸다는 것 자체가 놀랬다.
“인플루엔자요. 적어도 다들 그렇게 생각하고 있어요. 혹은 무슨 폐병이었을지도 모르지요.”
그녀는 손으로 턱을 괴였다.
“순식간의 일이었다고 들었어요. 아버님 말씀으론 저도 그리 위독했던 것은 아니지만 앓아 누웠었다고 하더군요.”
앤소니는 자신이 낳게 될 아이를
떠올렸다. 자신이 결혼하고자 결심한 바로 그 이유인 아이. 그가 속삭였다.
“기억도 하지 못하는 어머님을 그리워할 때도 있소?”
케이트는 잠시 그 질문을 곱씹어 보았다. 앤소니의 쉰 듯한 목소리에는 뭔가 절박함이 배어 있었다. 왜인지는 전혀 알 수 없지만 그녀의 어린 시절이 마음 속의 무엇인가를 건드리는 모양이었다.
“네.”
그녀가 마침내 대답했다.
“하지만 자작님께서 생각하시는 그런 식은 아니에요. 어머님을 모르니까. 진심으로 어머님을 그리워할 순 없지요. 하지만 인생에 구멍이 있답니다-커다랗게 뻥 뚫린 공허한 곳이요. 누가 그 자리를 채워야 하는 지도 아는데, 기억을 못하니까 어머님이 어떤 분이셨는지 모르니까 어머님이 살아 계셨더라면 그 구멍을 어떻게 메워 주셨을지도 모르는 거지요.”
그녀의 입술이 서글픈 미소를 띠었다.
“제 말이 이해가 가세요?”
앤소니는 고개를 끄덕였다.
“충분히.”
“자라면서 사랑하게 된 부모님을 잃는 게 훨씬 더 힘들다고 생각해요.”
케이트가 덧불였다.
“전 아버님과 어머님올 모두 잃어 봐서 알아요.”
“유감이오.”
그가 나직하게 말했다. 케이트가 대꾸했다.
“괜찮아요. 옛말에도 있잖아요-시간은 모든 상처를 낫게 한다고 그 말은 사실인 것 같아요.”
앤소니는 강렬한 시선으로 그녀를 응시했다. 그의 표정은 그녀의 말에 동의할 수 없다고 말하고 있었다.
“나이가 들면 더 힘든 것 같아요. 부모님을 알게 될 기회가 있었다는 점에선 축복이지만 상실의 아픔도 훨씬 더 클 테니까요.”
“한 팔을 잃은 것 같은 느낌이었소.”
앤소니가 속삭였다.
그녀는 진지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왠지 앤소니가 다른 사람들에게 자신의 고통을 이야기하지 않으리란 것을 알 수 있었다. 그녀는 갑자기 초조한 듯 바짝 말라 버린 입술을 핥았다. 우스운 일이다. 바깥에는 비가 마구 쏟아지는데, 입술은 바짝 타들어가니.
그렇게 따지면 전 오히려 다행이었을지도 모르지요
케이트가 부드럽게 말했다.
“아주 어릴 때 어머니가 돌아가신 게 말이에요. 메리는 훌륭한 어머니였어요. 절 딸처럼 사랑하셨지요. 사실…….”
케이트는 갑자기 눈가가 촉촉하게 젖어드는 것에 놀라 말을 멈췄다.
다시 입을 열었을 때 흘러나온 소리는 감정에 북받친 속삭임이었다.
“사실 메리는 단 한 번도 저와 에드위나를 차별하시지 않았어요. 저……. 저 역시 친어머니라고 해도 메리보다 더 사랑했을 것 같지도 않고요.”
앤소니의 눈동자가 이글거렸다.
“그 말을 들으니 다행이오.”
낮고도 강렬한 목소리였다.
케이트는 침을 꿀꺽 삼켰다.
“메리도 가끔 우스울 때가 있어요. 제 어머님 무덤으로 가서 제가 어떻게 지내는지 이야기하곤 하죠. 정말 다정하시지 뭐예요. 어렸을 땐 저도 따라가서 어머님께 메리가 어떻게 지내시는지 얘기하곤 했어요.”
앤소니는 미소를 지었다.
“당신 보고는 좋은 내용들이었소?.”
“항상이오.”
두 사람은 잠시 조용히 앉아만 있었다. 촛불을 바라보며 촛농이 초를 타고 흐르는 것을 지켜보았다. 네 번째 촛농이 초를 따라 흘러내리다가 식어서 굳어질 때, 케이트는 앤
소니를 보며 말했다.
이렇게 말하면 너무 낙천적으로 들릴지도 모르겠지만 저는 이 세상 모든 것이 조물주가 계획하신 대로 돌아간다고 생각해요
그는 그녀를 돌아보며 눈썹을 치켜올렸다.
“모든 것이 결국 끝에는 잘 되잖아요.”
그녀가 설명했다.
“난 어머님을 잃었지만 메리를 얻었지요. 게다가 무척이나 사랑하는 동생까지. 그리고…….”
번개가 번쩍 방안을 밝혔다. 케이트는 입술을 깨물고 코로 천천히, 고르게 숨을 쉬려고 애썼다. 곧 천둥소리가 들릴 것이다. 그녀는 마음의 준비를 하고 기다렸다. 그리고는…….
요란한 굉음이 방안을 뒤흔들었다. 그녀는 눈을 똑바로 뜨고 버텼다.
케이트는 길게 숨을 내쉰 뒤 뿌듯한 미소를 지었다. 그렇게 어렵지 않았다. 즐거운 건 아니었지만 불가능한 일도 아니었다. 앤소니가 자신을 지켜 주듯 옆에 있어 줘서일지도 모르고, 폭풍이 이젠 멀어지고 있어서 일지도 모른다. 어쨌거나 그녀는 무사히 이 고비를 넘긴 것이다.
“괜찮소?”
앤소니가 물었다.
그를 바라보았다. 근심스런 그의 표정에, 그녀는 마음 속 한구석이 녹아 내리는 것을 느꼈다. 과거에 그가 무슨 짓을 했던, 예전에 두 사람이 얼마나 티격태격 싸웠던, 지금 이 순간만큼은 그가 진심으로 그녀를 걱정해 주고 있는 것이다.
“네.”
그렇게 하려고 한 것이 아니었음에도 불구하고 그녀는 자신의 목소리에 놀라움이 배어 있다는 것을 깨달았다.
“네, 괜찮은 것 같아요.”
그는 그녀의 손을 꼭 쥐었다.
“얼마 동안 이랬던 거요?”
“오늘 밤 말이에요? 아니
면 여태까지 살면서?”
“둘 다.”
“오늘밤은 천둥이 처음으로 치기 시작한 순간부터였어요. 전 비가 오기 시작하면 불안해져요. 하지만 천둥 번개만 치지 않으면 괜찮아요. 절 괴롭히는 건 비가 아니라, 비만으론 그치지 않을지도 모른다는 두려움이지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