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he Constellation Returned From Hell RAW novel - Chapter (337)
337화
가르한샤는 살짝 시무룩해진 표정으로 잔을 들었다.
갑자기 어비스에 돌아다니는 옛날 이야기가 떠올랐다.
-한 뱀파이어가 어비스를 정처 없이 떠돌아다니다가 동굴에 묵게 되었는데, 밤에 자다가 목이 말라 손을 뻗었다. 그 때 해골에 담긴 신선한 피가 있어 뱀파이어는 행운에 감사하면서 마셨는데, 이럴 수가. 날이 밝고 보니 해골이 아닌 나무바가지에 담긴 물이 아니었던가!
‘그래. 모든 것이 깨달음에 따라 다른 법을… 명예로운 상대의 호의에 감사하며 마시자.’
가르한샤는 최연승을 존중했다.
존중한다면 그 호의를 무시하면 안 되는 법.
가르한샤는 토마토 주스를 들이켰다.
“…!”
그리고 그 맛에 감동했다.
‘대체?!’
어비스에서 오랫동안 살면서 온갖 호사를 다 누려 본 가르한샤도 이런 걸 마셔 본 적은 없었다.
삼일 낮, 삼일 밤을 물 한 모금 없이 타는 갈증에 괴로워하며 사막을 돌아다니다가 차가운 샘물을 벌컥벌컥 들이켰을 때 기분이 이럴까?
불로 달궈진 뜨거운 감옥에서 갇혀 있다가 간신히 빠져 나와서 마시는, 얼음 섞인 사박거리는 과일 즙이 이런 맛일까?
토마토 주스는 가르한샤의 혀를 스치고 지나가 목구멍을 강타하고 식도로 내려갔다.
‘맛있다…!’
가르한샤는 부들부들 떨었다.
이 토마토 주스에는 놀랍게도 진한 마력이 응축되어 있었다.
마력도 다 같은 마력이 아니었다.
이 토마토 주스에는 대지의 웅혼함이 깃들어 있…
“그렇게 별로였나? 그만 마셔라.”
최연승은 살짝 걱정이 되어서 잔을 뺏었다.
그냥 피를 줄 걸, 괜히 오크들이 따온 토마토 대접하겠다고 토마토 주스를 준 게 후회가 되었다.
‘여우와 두루미’도 아니고 뱀파이어한테 토마토 주스를 주는 건 안 좋은 생각 같…
“아니! 이 토마토 주스는 성좌가 만든 것 같은 훌륭함을 가지고 있군!”
“…?!”
아니 이 자식 어떻게 알았지?
“정말 고맙다. 인간. 이런 귀한 대접을 받을 줄이야.”
가르한샤는 더더욱 감동을 받은 모양이었다.
“이 가르한샤를 왜 불렀는가? 명예에 어긋나지 않다면 무엇이든지 도와주겠다.”
최연승은 광저우에 나타난 뱀파이어, 알마고리아에 대해 털어놓았다.
흥미로운 표정으로 듣고 있던 가르한샤는 알겠다는 듯이 고개를 끄덕였다.
“물론 안다. 알마고리아. 옛 뱀파이어의 이름이지. 아마 어비스의 필멸자들 대부분은 모를 거다. 아주 예전, 뱀파이어들 사이의 내전에서 패배한 자니까.”
뱀파이어들은 ‘혈족’이란 개념에 매우 집착했다.
같은 피를 나눈 가문은 철저하게 뭉쳤고, 외적이 들어오면 절대 양보하지 않고 사납게 싸웠다.
알마고리아는 이런 뱀파이어 혈족 중 하나를 이끌던 가문의 수장이자 우두머리 뱀파이어였다.
“나 같은 존재라고 할 수 있지. 하지만 알마고리아는 흉폭하고 명예를 몰랐다. 같은 동족을 몇 번이고 죽이고 피를 흡수했지.”
“과연…”
“여러 혈족들이 그 만행에 분노해서 알마고리아를 쓰러뜨렸다. 알마고리아는 간신히 도망쳤지만 대부분의 힘을 잃어버렸지. 아무리 찾아도 나오지 않길래 무슨 일인가 했는데, 몬스터로 변장해서 숨어 있었다니.”
“성격이 어떻지? 혹시 약점이 있나? 좋아하는 건?”
“알마고리아는 이 가르한샤 못지않게 강한 뱀파이어다. 힘을 되찾았다면 더 강할지도 모르지. 좋아하는 건… 놈은 작위에 집착한다. 헛된 명예를 추구하기 때문이지. 왕이라고 불러주면 좋아할 거다.”
가르한샤는 경멸 담긴 목소리로 말했다.
‘안 그래도 왕을 자처하고 있지…’
최연승은 광저우 상황을 생각하며 속으로 중얼거렸다.
“같은 뱀파이어면 협상에 도움이 될 것 같나?”
“아니다. 놈의 자존심을 생각해보면 다른 종족이 가는 게 더 나을 거다. 일단 만나면 모든 걸 칭찬해라. 옷차림부터 시작해서 싸우는 방식, 부하를 다루는 방식까지.”
‘왠지 익숙하군.’
최연승은 갑자기 데자뷰를 느꼈다.
뭐지?
‘…아. 천칭의 여신 대할 때도…’
-……
* * *
-지금 광저우에 진입하는 건 자살행위입니다. 거대한 방어막이 깔렸어요. 들어가는 순간 들킬 겁니다.
-안에 방비가 장난 아닙니다. 탈취된 군 병기는 물론이고 새로 추가된 몬스터들도 있습니다. 심지어 붙잡힌 헌터들도!
-진압은 지금 사실상 무리…
-시끄럽다!
현장에 있는 클랜들의 보고에, 정부는 화끈하게 대답해줬다.
클랜 하나 하나, 헌터 하나 하나를 생각해주는 건 중국 정부의 스타일이 아니었다.
양이 곧 질이다.
양으로 질을 제압한다.
한 명의 헌터가 쓰러져도 그 뒤에 열 명의 헌터를 보내고, 열 명의 헌터가 쓰러져도 그 뒤에 백 명의 헌터를 보낸다.
…가 바로 중국 정부의 스타일!
-현장에 있는 클랜들에게 전해라. 광저우 사태는 초반에 진압하지 못한 클랜들에게 죄가 있다. 공을 세워서 그 죄를 씻어라.
정부의 단호한 명령에 헌터들은 반성하…
지 않았다.
-뭔 썅 귀신 씻나락 까먹는 소리를?!
-내 기억이 맞다면 분명 외부에서 경고 하지 않았나? 경고 씹은 건 정부하고 기업들이잖아!? 사이신 이 새끼들이 실험하다가 문제 터진 거 아니야?
-최연승 헌터가 그렇게 경고를 했는데 씹어놓고 뭐가 어쩌고 저째?
-최연승 헌터가 경고를 했다니. 유언비어 퍼뜨리지 마라. 어느 누가 아쉬워서 그런 짓을 하나?
정부는 불만을 통제하기 위해 조작을 시도했지만, 그러기에는 워낙 본 눈들이 많았다.
-한국인들 대피시키고 드래곤 인더스트리 쪽 직원들 대피시켰는데 그게 경고가 아니면 대체 뭐가 경고냐?? 천안문에 가서 플랜카드라도 걸어야 하냐?
-나도 개인적으로 연락 받았다! 심지어 관련 클랜에 다 연락 돌렸다고! 어디서 저런 거짓말을!
-지금 떠드는 자들은 당에 충성하지 않는 외국인 스파이…
-이래도 죽고 저래도 죽을 거면 어디 한 번 해보자!
쾅!
어지간해서는 굽히고 들어가는 중국 헌터들도 지금 상황은 좀 많이 심했는지, 폭발해서 날뛰는 클랜들이 나타났다.
이래도 죽을 거면 저래도 죽을 거면 할 거 다 해보고 죽겠다!
클랜 하나는 군 부대를 공격해서 군수물자를 파괴해버린 다음 미국으로 망명을 시도했고, 다른 클랜 하나는 당 간부 한 명을 밧줄 없이 번지점프 시킨 다음 일본으로 망명을 시도했다.
흉흉한 분위기에 중국 정부는 급히 명령을 바꿨다.
-현 위치를 사수해라. 무리해서 진입할 필요 없다.
-이번 사태는 몇몇 당 간부들의 기강 해이와 도덕불감증 때문이다. 그들을 처벌했으니 헌터들은 충성하라.
“혹시 주석께서 돌아가셨나????”
“너무 친절해서 소름돋는 건 또 처음이군!”
원래 사람이 안 하던 짓을 하면 죽을 때가 된 거란 말이 있었다.
주먹만 휘두르던 중국 정부가 갑자기 당근을 내밀자 헌터들은 더 소름끼쳐했다.
“그래도 이렇게 인정한 게 어디냐. 생전 처음 보는 일이다.”
“이렇게 인정하는 거 보면 뭘 시키려고 그러는지 더 겁나는데요.”
“광저우로 망명가도 되나? 뱀파이어들이 받아주나?”
“…미친 생각이라고 하고 싶지만 그러지 못하는 스스로가 밉군. 최악의 상황에는 광저우로 튀자고. 뒤지는 것보단 뱀파이어가 낫겠지.”
* * *
대피하라고 경고했는데 대피 안 한 한국 기업들은 애가 탔다.
그들은 중국 기업들처럼 뻔뻔하게 나갈 수가 없었다.
중국 기업들은 ‘아 돈 좀 버는데 사람 좀 뒤질 수 있지 뭐가 불만이야 너희도 뒤질래?’하고 협박을 해도 됐다.
당이 나서면 있던 불만도 사라지니까.
하지만 한국에서는 그럴 수 없었다.
한국 기업이 ‘아 돈 좀 버는데 사람 좀 뒤질 수 있지’하는 순간 기업 본사 정문은 박살나고 회장은 끌려 나와서 개처맞듯 처맞는 수가 생겼다.
그러면 이제 광저우 시에 갇힌 한국 직원들을 구출해야 하는데…
“최연승 헌터한테 부탁합시다. 인도주의적인 관점에 호소해서.”
“제안을 냉정하게 무시했는데 말입니까?”
“그 때는 할당량 때문에 어쩔 수 없었다고 변명합시다! 실제로 사실이잖소! 이건 그 누구의 잘못도 아니오. 잘못이 있다면 자본주의의 잘못이겠지. 우린 모두 다 피해자 아니겠소.”
이사의 변명은 최연승의 심금을 울린 모양이었다.
감동한 최연승은 그냥 바로 한국 언론 동원해서 공격을 시작했다.
-A 기업, 대피 명령을 내렸는데도 무시하고 일해… ‘충격’!
-B 기업, 튀라고 했는데도 ‘최연승 헌터가 신이라도 되냐 직장 잘리기 싫으면 일해라’… 공포!
-광저우에 남은 기업들, 사실 중국 간부들에게 뇌물을 받았나?
“불만이 있으면 우리한테 말하지 왜 언론으로 이러는 건가?! 너무한 것 아닌가!?”
“신문도 너무하군. 평소 받은 것들은 잊어버리고 감히!?”
“그보다 중국 간부들한테 뇌물은 안 받았는데!? 이건 어떤 새끼가 만든 헛소문이야?!”
언론이 날갯짓을 하면 기업의 주가에는 폭풍이 불었다.
-저 새끼들 저럴 줄 알았다 내가. 남으라고 한 새끼들 광저우 가야 하는 거 아니야?
-하여간 양심 없는 놈들임.
-내 삼촌이 지금 저기에 갇혀 있다! 고소해야 하는 거 아닌가?
-최연승 헌터가 11번 경고했는데 씹은 놈들은 대체 뭐죠?? 혹시 뇌가 없거나 귀가 없으신가요??
어찌나 여론이 사나웠는지 기업에서는 바로 임원진들이 대책회의에 들어갔다.
물론 대책회의라고 언제나 쓸모 있는 대책이 나오진 않았다.
“…사과하고 최연승 헌터한테 부탁합시다.”
“……”
한국 기업들은 깝치는 걸 포기하고 백기를 들었다.
-앞으로 말을 무시하지 않을 테니 제발 한 번만 기회를…
그리고 그걸 본 미국 기업들은 깨달음을 얻었다.
아!
저 꼴을 당하는 것보다는 그냥 사과하는 게 좋겠구나…!
-저희가 잘못했습니다. 사과드리겠습니다.
-……
뒤늦게 미국 기업들에서 사람 보내서 사과하고 갔다는 소식을 들은 한국 기업 쪽 임원진들은 분노했다.
-우리가 곤욕 안 치렀으면 가만히 있었을 놈들이…!
* * *
“위대한 광저우의 왕, 쉬아링 황제 폐하 만세!”
“위대한 광저우의 왕, 쉬아링 황제 폐하 만세!”
“……”
공항에서 내리자마자 우렁차게 들리는 목소리.
공항 직원들이 외치는 소리였다.
최연승은 공항 직원들과 시선을 교환했다.
-저희도 이거 하고 싶어서 하는 거 아닙니다. 살려고 하는 일이죠.
-그래. 이해한다.
공항에는 벌써 이란 팜플렛이 꽂혀 있었다.
별로 궁금하진 않았지만 최연승은 열어보았다.
-쉬아링 제국은 전제군주국이다.
-쉬아링 제국의 주권은 쉬아링에게 있고, 모든 권력은 쉬아링에게서 나온다.
-쉬아링 제국의 영토는…
-…
-쉬아링 제국은 혈액의 자유를 가지지 아니한다. 매 주 피를…
-…
“성좌보다 심한 거 같군…”
원래 독재도 해본 놈이 잘한다고, 성좌가 지배한 것보다 훨씬 더 이것저것 많이 만들어 놓은 상태였다.
공항에서 나와 길거리를 봐도 크게 위화감을 느끼기 힘들 정도.
그냥 독재자가 점령하고 있는 흔한 나라로 착각할 수준이었다.
“어서 오거라!”
쉬아링은 벌써 그럴듯한 왕궁도 하나 지어서 지내고 있었다.
거기에 최연승이 도착하자 옆에 있던 헌터들이 말을 걸어왔다.
“엎드려서 절을 올리십시오.”
“…난 민주주의 국가에서 나온 사람이라 왕에게 그런 절을 하지 않는다. 내 나라에서는 왕이 사라진 지도 한참이지.”
“감히 내 앞에서 무례를…”
“폐하. 폐하를 인정하지 않는다면 제가 이 자리에 왜 있겠습니까?”
최연승은 상대가 화내기 전에 재빨리 말을 걸었다.
폐하란 소리를 들은 쉬아링은 헤벌쭉거리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말해봐라! 무슨 말을 하러 온 것이냐?”
“저는 폐하의 왕국, 아니, 제국을 인정합니다. 하지만 세상의 다른 세력들은 폐하의 제국을 인정하지 않고 방해하고 있습니다.”
“으음…! 그럴 것 같았다. 역시 미국 놈들이…”
“아닙니다. 폐하. 폐하를 방해하는 건 중국인들입니다!”
“뭐? 미국 놈들인 줄 알았는데…”
“폐하. 생각해보십시오. 미국이 어떻게 중국의 눈치를 보지 않고 행동하겠습니까? 다 중국의 압박을 받고 행동하고 있는 겁니다. 폐하께서도 배우시지 않으셨습니까?”
“하긴 그렇게 배우기는 했지.”
“……”
최연승은 말하면서도 어이가 없었다.
저게 통한다고?
‘대체 무슨 교육을 받은 거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