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he Countess's Shield Protects the Kingdom RAW novel - Chapter (245)
제245화
시간은 유수와 같이 흘러간다. 따뜻한 날씨의 바닷바람이 불어오던 남해에도 이제는 제법 차가운 해풍이 일기 시작했다.
하지만 바뀐 것은 단지 날씨만이 아니었다.
“산개!”
둥! 둥! 둥!
늙수그레한 목소리의 명령이 내려지자 배 위에서 일정한 북소리가 울려 퍼진다.
촤아아아아!
일렬로 움직이던 범선들이 순식간에 부채꼴로 펼쳐지며 바다 위의 적들을 향해 흉흉한 포신을 드러냈다.
“발포!”
명에 따라 대장선의 마스트에서 붉은색 신호가 피어오르자, 곧장 범선들의 화포가 불을 뿜기 시작했다.
콰아앙! 콰앙! 콰쾅!
“크아아아악!”
“아아악! 이런, 씨발! 왕께서는 왜 자꾸 올리비아 쪽 바다를 가라고… 아악!”
쏟아지는 화탄 아래, 속수무책으로 터져 나가는 해적선들.
악다구니를 쓰는 해적들은 무표정하게 자신들의 배를 침몰시키는 병사들을 보며 두려움에 사로잡혔다.
실로 믿을 수 없는 일이었다. 남대륙 왕국들의 공포라 불리는 해적들은 왕국 해군들을 물개라 부르며 비웃는 것이 일상이었건만.
그런 그들이, 해군을 보며 두려움에 사로잡히리라고 누가 생각이나 해 보았겠느냔 말이다.
올리비아 해군.
그들의 이름은, 이미 어지간한 군도의 해적들에게는 사신이나 다름없는 이름이 되어가고 있었다.
“아쎄이! 정신 똑바로 못 차리나! 아직도 신호를 다 못 외워서 어버버거려! 해양 몬스터들 밥이라도 되고 싶은 거야!”
“아, 아닙니다!”
델로는 옆의 범선에서 신병에게 소리치는 제이슨을 보며 작게 고개를 끄덕였다.
뭘 어떻게 할지도 모르던 어린 애송이가 제법 의젓해졌지 않은가.
‘슬슬 직접 부대를 맡겨보아도 되겠군.’
올리비아의 근해. 바뀌어가는 날씨와 더불어, 어딘가 어설펐던 해군 병력은 점점 더 강군으로 거듭나고 있었다.
“어? 저게 뭐지?”
아쎄이 티를 벗어나는 병사들을 보며 흐뭇해하던 델로의 귀에 들려온 병사의 한마디.
“무슨 일이냐?”
“아, 예. 저기 웬 상선 한 척이 이리로 다가오고 있지 말입니다.”
‘상선이라….’
직감적으로 알 수 있었다.
저 배는 상선이 아니라는 사실을 말이다.
정신이 똑바로 박힌 배라면, 교전 중인 군선 근처로 다가올 리가 없었으니까.
뱃머리에는 백기를 높이 든 채 두 팔을 든 이가 하나 서 있었다.
천천히 대장선으로 다가오자, 화포들이 일제히 상선을 겨냥했다.
“멈춰라! 더 다가오면 발포하겠다.”
무수히 많은 화포들이 일제히 겨냥한 모습에 겁먹을 법도 하지만, 상선의 남자는 겁을 먹기는커녕 태연하게 말했다.
“내 이름은 텟사이.”
남자의 짧은 자기소개. 군도 해적들과 싸우는 올리비아 해군은 그 이름을 모를 수 없었다.
“텟사이?”
“그거 분명… 머메이드 해적단 부선장….”
그리고 머메이드 해적단의 선장은 다른 이름으로도 불린다.
웅성대는 해군들의 분위기 속에서, 텟사이가 태연하게 말을 이어갔다.
“남령, 마르텔 님의 전언을 가지고 왔다.”
* * *
파라라라라락!
서류철이 마치 도박장 카드 패라도 넘기듯이 순식간에 넘어간다.
영지의 수많은 안건들이 매일같이 올라오는 올리비아의 집무실이다.
대부분은 사소한 안건들이지만, 그렇다고 드웨인은 저런 건들을 대충 보는 걸 못 본 척 넘어가는 스타일이 아니었다.
작은 안건들이 모여, 큰 안건의 단서가 된다.
작은 안건들을 무시하면, 큰 안건도 무시될 거라 생각하고 영지민들은 마음을 열지 않는다.
그렇기에 평상시 드웨인의 성향이라면 저렇게 장난치듯이 서류를 넘기는 이를 가만두지 않는 것이 정상이었지만.
“…….”
놀랍게도 드웨인은 그 행동에 대해 아무런 반응도 하지 않았다.
서류철을 넘기는 여인, 제레미아가 얼마나 일을 꼼꼼히 처리하는지 이미 몇 번이나 보았기 때문이다.
“라이네 마을에 보관한 해군 화탄 재고가 다 떨어진 것 같아요. 필라도르 왕국에 연락해서 철광석을 더 요청하고… 콜마르 마을에 공사 중인 간척지는….”
훑어본 서류를 덮은 제레미아가 대충 본 게 아니라는 걸 증명하듯 집무실에서 업무 중인 행정 관료들에게 업무를 지시한다.
피식!
‘나 참, 따라갈 수가 없네.’
제레미아의 일 처리를 바라본 드웨인이 헛웃음을 흘렸다.
자존심 강한 드웨인이 그녀를 처음부터 인정한 것은 아니었다.
아니, 오히려 처음에는 황당하기 이를 데 없었다.
-왜 이렇게 비효율적으로 자원을 낭비하고 있죠? 지금 당장 인력을 돌리겠어요.
차갑다 못해 각박한 평가.
자신과 행정 관료들이 열심히 만든 체계를 확인한 제레미아가 처음으로 내뱉었던 말이었다.
그 말에 어처구니가 없어서 그럼 한번 네가 해보라며 일을 던지고 파업한 지 사흘.
그 짧디짧았던 사흘이라는 시간 만에, 드웨인은 인정할 수밖에 없었다.
왜 제롬 남작이 이 여인을 그리도 열심히 찾아다녔는지.
왜 자신이 편해질 수 있다고 얘기한 건지 말이다.
‘도대체 이런 인재를 남작님은 어떻게 알고 찾아낸 거지?’
생각해보면 첫 만남(?)이 불쾌해서 그렇지, 자신을 처음 알아봐준 사람도 제롬이었다.
그나마 자신은 왕궁에서 만나 이야기라도 나눠봤지, 이 여인은 정말 하늘에서 뜬금없이 떨어진 것처럼 찾아오지 않았나.
아무리 똑똑한 드웨인이라도, 정상적인(?) 사고를 가진 그로서는 당최 알 수가 없었다.
그뿐이 아니라 대륙의 누구도 알 수 없을 것이다. 제롬이 과거를 거슬러 돌아왔다고 예상할 미친 사람은 없었으니까.
‘나 참, 정말이지 비밀이 많은 사람이라니까.’
탁!
책상에 두툼한 서류 뭉치가 올라오자, 딴생각에 빠져 있던 드웨인의 정신이 현실로 돌아왔다.
“드웨인 님? 이 서류 빨리 결재해 주셔야 할 것 같아요. 오늘까지 부탁드릴게요. 저는 남작님을 뵈러 가야 해서 이만.”
드웨인이 대답도 하기 전에 제레미아는 겉옷을 챙긴 채 휑하니 집무실 밖으로 나가버렸다.
“…벌써 끝났어? 진짜, 내정에서는 못 당하겠구만.”
피식 웃으며 서류를 들추려는 드웨인의 눈에 눈치를 보며 슬금슬금 제레미아의 뒤를 쫓아가려는 관료들의 모습이 들어왔다.
“동작 그만.”
멈칫!
“다들 어디 가나?”
“아, 오늘 일도 끝났고 하니 저희도 그만 퇴근을… 헤헤.”
멋쩍게 웃는 관료들을 보며 드웨인이 마주 웃어주자, 그들도 함께 천천히 웃기 시작한다.
“나도 연무장에 가봐야 하는데, 다 퇴근하면 내가 결국 서류를 봐야겠군?”
“…….”
“이야, 영지에 이런 큰 변화가 있는데 명색이 수석 참모인 내가 서류 때문에 불참해야 하다니. 애석한 일이야. 안 그런가?”
“…….”
“내일 이 서류들이 다 처리되어 있으면 좋겠는데.”
“…….”
“꼭! 그랬으면 좋겠군.”
살벌한 말과 함께 드웨인이 제레미아의 뒤를 따라 나가자, 짐을 챙기던 관료들이 속으로 피눈물을 삼키며 다시 자리에 앉았다.
‘어휴, 제기랄.’
‘저 악마 누가 좀 안 잡아가나.’
‘제레미아 님, 저희 좀 구해주세요!’
예전에는 분명 안 저랬는데. 어째 점점 ‘꼰대끼’가 보이는 드웨인의 모습에 관료들이 구시렁거렸다.
* * *
올리비아의 영주성 뒤편 연무장.
왕궁에서 파견한 기술자들을 동원하여 만들어낸 넓은 연무장에는, 제롬을 포함한 올리비아의 주요 인물들이 모여 람팡을 뚫어지게 바라보고 있었다.
훈련이 거의 몸에 배어 있는 이들의 성향을 생각하면 이렇게 농땡이를 피우는 게 별일이라고 생각할 수도 있지만.
오늘만큼은 예외였다. 그만큼 중요한 일이었으니까.
그 모든 시선을 한 몸에 받고 있는 람팡의 이마에 땀이 송골송골 맺혀 있었다.
람팡의 앞에는 열 개의 거대한 알이 놓여 있었다.
얼마나 시간이 지났을까.
꿈틀!
알들이 조금씩 움직이기 시작했다.
“오! 드디어….”
“쉿!”
촐싹대려는 살라딘의 입을 틀어막고 숨을 죽인 채 계속해서 바라본다.
쩌적!
이윽고 알들의 표면에 하나둘 금이 가기 시작했다.
파각!
이윽고 세상과 단절시키던 알껍데기를 뚫고 나온 작은 생명체가 작게 울음을 터뜨렸다.
-끼에에엑!
갓 태어난 새끼임에도 불구하고 터져 나오는 울음소리는 포식자의 포효와도 같이 피식자들의 육체와 정신을 뒤흔드는 마력이 깃들어 있었다.
정작 연무장에 있던 이들은 포효 소리를 들으며 환희에 젖었지만 말이다.
“성공인가!”
“아니, 아직 몰라.”
알껍데기를 깨고 나온 생명체가 주변을 두리번거리더니, 가장 먼저 눈에 보인 람팡의 곁으로 엉금엉금 기어가 천천히 냄새를 맡았다.
-끼이익!
그러기를 잠시. 이윽고 자신의 작은 머리를 람팡의 손에 조심스럽게 비볐다.
“성공이다!”
그 모습을 숨죽이며 지켜본 이들의 입에서 마침내 참았던 긴 숨소리가 흘러나왔다.
“사저, 정말 고생 많으셨습니다. 이건 전부 사저의 공입니다.”
내 치하에 와이번 새끼의 애교를 즐기던 람팡이 땀을 닦으며 말했다.
“어, 맞아. 이건 진짜 다 내 공이지. 그러니까, 약속대로 한 마리는 내가 데려간다?”
“여부가 있나요. 아무 녀석이나 원하시는 녀석으로 고르시죠.”
“그래? 그럼 난 이 녀석으로 할게. 제일 먼저 부화해서 나한테 온 게 아주 마음에 들었어. 다른 녀석들보다 강한 것 같아.”
-끼루룩!
머리를 비비던 와이번은 마치 람팡의 말을 알아들은 것처럼 기분 좋은 울음소리를 흘렸다.
람팡뿐만이 아니라 차례로 깨어난 와이번들도 각기 다른 주인을 맞이했다.
“오, 성공인가 보군요.”
이제 막 세상을 접한 와이번들과 교감하고 있던 그때, 연무장 뒤쪽에서 익숙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고개를 돌리자 반색하며 눈빛을 빛내고 있는 드웨인과, 무언가 불만스럽다는 듯이 드웨인을 흘겨보는 제레미아의 모습이 보였다.
“분명 다 결재해 달라고 했는데. 당신, 또다시 관료들한테 일을 떠넘겼군요?”
“떠넘기다니 무슨 섭섭한 말씀을. 그깟 문서 처리보다 훨씬 더 중요한 일이 있으니 우선순위를 정한 것뿐이지요.”
“드웨인 공자, 말만 번지르르하다는 생각은 안 해봤나요?”
“이런. 제레미아 양은 내치만 담당하다 보니 이 넓은 시야가 낯선 모양이군요. 뭐, 분야가 다르니. 이해합니다. 하하하.”
쏘아붙이는 제레미아와 능글능글하게 받아치는 드웨인.
저대로 놔두면 한참을 더 저럴 것이 뻔하기에, 나는 얼른 둘 사이의 대화에 끼어들었다.
“드웨인, 다행히 계획은 성공한 것 같아. 이걸로 군도와의 전쟁에 또 다른 비수가 생긴 거겠지?”
내 질문에 제레미아와의 드잡이를 멈춘 드웨인이 대답했다.
“물론입니다. 해류의 흐름에 자유로운 움직임이 어려운 해전에서, 와이번 나이트라는 카드는 전황 자체를 바꿀 수 있는 강력한 무기니까요. 람팡 님께서 정말 큰일을 해 주셨습니다.”
그렇다.
키벨레 해적단과의 해전에서 대승한 이후, 나는 드웨인에게 자문을 구했다.
현 상황에서, 우리 측의 전력을 보강할 수 있는 방법이 무엇이 있을지에 대해서 말이다.
비록 람팡이라는 옥좌에 오른 강자, 그리고 각 지역에서 보내오는 수많은 지원 물자에 비델 크로이트라는 과거의 명제독까지 갖춰진 전력이라고 하나.
해상왕국이라고까지 불리는 군도의 전력 역시 절대로 만만하지 않았다.
옥좌에 오른 이들은 신성제국보다 적지만, 그 밑에 있는 강자들의 숫자는 제국과 비교해도 크게 모자람이 없는 수준이었으니까.
그때, 드웨인이 내게 제안했다.
-와이번의 알들을 부화시키시지요.
과거, 드래곤 산맥에서 하탄과 함께 죽음의 계곡으로 넘어가 와이번들을 처치했을 때.
나는 와이번의 둥지였던 나락의 절벽에서 알들을 챙겨왔었다.
도무지 부화시킬 방법이 없어서 아공간에 넣어둔 채 시간만 보내고 있었건만, 드웨인은 너무나 쉽게 내게 되물었다.
-람팡 님의 힘으로 와이번의 환영을 불러내면 되는 일 아닙니까?
단지 전투를 위한 힘이라고만 생각한 이종의 힘으로, 와이번의 알을 부화시킨다?
생각지도 못했던 발상의 전환이었다. 아니, 오히려 이종의 힘을 익히지 못한 드웨인이었기에 할 수 있는 유연한 사고였다.
곧장 찾아가 람팡에게 가능한지 묻자, 람팡 역시 흥미를 느끼며 적극적으로 이 계획에 동참했다.
물론, 그 대가로 와이번 한 마리를 넘기기야 했지만.
와이번 부화를 성공시킨 대가로는 얼마든지 줄 수 있었다.
“와이번을 키우는 데 그리 오랜 시간이 걸리진 않을 겁니다. 문헌에 따르면 와이번들은 부화까지가 오래 걸리지, 부화한 이후로는 먹이만 잘 주면 급속도로 성장한다고 하니까요. 하지만….”
말끝을 흐리는 드웨인.
하지만 나 역시 뒷말에 숨긴 의미를 모르지 않았다.
-와이번만으로는, 이 싸움에 결정적인 승리를 장담할 수 없다.
올리비아의 전공에 바삐 움직이리라 예상한 빅토르는 어째서인지 계속해서 꽤나 소극적인 움직임을 보였다.
최근에는 조용하다고 하지만 5국 연합은 제국을 등한시할 수 없었고, 오시리스 왕국은 청류와 탁류의 힘 싸움에 더 이상의 지원을 바랄 수는 없었다.
필라도르 왕국은 애초에 강자들이 부족한 땅이었고 말이다.
‘세이렌들이 해양 몬스터들을 지원한다 해도 지금으로선 백중세야. 뭔가… 좀 더 확실한 게 필요해.’
군도라는 흉악한 집단과 백중세인 힘을 모은 것 자체도 대단한 성과였지만.
신성제국이라는 측정 불가의 거대한 적과도 싸워야 하는 지금, 이겨도 만신창이가 될 수 있는 현 상황이 그리 달갑지만은 않았다.
뭔가.
결정적인 한 조각만 더 있다면….
바로 그때.
치직!
해적들을 물리치기 위해 나갔던 델로 영감으로부터 통신이 들어왔다.
“델로, 무슨 일이죠?”
한번 전투에 나서면 반드시 회군해서 직접 대면하여 보고하던 델로가 통신을 하다니.
뭔가 급한 일이 생긴 게 틀림없었다.
-남작님, 사신이 찾아왔습니다.
“사신이라니?”
-머메이드 해적단, 남령(南靈) 마르텔이 보낸 사자라 합니다. 어찌할까요?
델로의 물음에 통신을 함께 듣고 있던 나와 드웨인은 누가 먼저라고 할 것도 없이 서로를 쳐다보았다.
직감적으로 깨달은 것이다.
어쩌면 지금 이 순간이, 우리가 찾던 결정적인 한 조각이 될지도 모른다고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