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he counts gone crazy RAW novel - Chapter 112
112화
“여기까지가 내가 들은 내용이다.”
우아하기 짝이 없는 자세로 찻잔을 들어 올린 아렌의 모습은 감탄을 자아내기 충분했지만, 경직된 표정들은 풀릴 것 같지 않았다.
“……게하르가 그런 생각을 가지고 있었군요. 저는 거기에 놀아난 거고요.”
심각한 표정으로 이야기를 듣던 아인이 이를 갈았다.
“미친 짓을 벌이려고 하는군요. 황제나 다른 귀족이 용인할 리가 없습니다.”
에드워드의 말에 모두가 고개를 끄덕였다.
북부의 귀족들은 개척자의 후손들이다.
끊임없이 몰려 내려오는 몬스터들은 대륙의 존망을 위협할 정도의 골칫거리였고, 카일룸 제국의 기초를 마련했던 현명한 왕은 하나의 거대한 사업을 벌였다.
개척정신이 넘치는 기사들과 귀족들을 대상으로 북부의 이주를 권장했고, 몬스터와 맞서는 장벽을 만들어낸 것이다.
귀족에게 있어서 땅은 모든 것이나 마찬가지다.
제 아무리 중앙에서 관료귀족으로 떵떵거리며 온갖 이권에 관여한다고 하더라도 결국 진정한 귀족은 자신의 영지를 가지고 대대손손 물려줄 수 있는 자다.
그러한 영지를 개척만하면 아무런 조건 없이 쥐어주겠다는 왕의 칙명에 호응한 자들은 많았고, 그렇게 시간이 흘러 북부의 귀족가문들이 들어서게 된 것이다.
북부는 세금을 내지 않는다.
자체적으로 병력을 양성하고 땅을 지켜내는 데만도 전력을 쏟아부어야하는 북부에게까지 세금을 걷을 정도로 제국이 막장은 아니었고, 그 부분은 다른 지방의 귀족들도 인정하는 바였다.
거꾸로 북부는 세금을 지원받는다.
자체적인 생산 활동이 불가능에 가까운 북부를 위해서 매년 귀족들은 북부지원세를 따로 내었고, 그 세금으로 북부는 온갖 생필품들을 지원받았다.
어떻게 보면 귀족들이 열심히 벌어서 북부를 먹여 살리는 꼴이었지만, 당장 북부를 막고 있는 귀족들이 사라지면 제국의 중앙이 어떻게 될지 모를 일이니 여기에 불평을 하는 귀족은 없었다.
돈으로 목숨을 대신할 수 있다면 당연히 그렇게 해야 하는 것이다.
그렇게 많은 지원과 특혜가 주어진 북부귀족들이기에 그들은 북부를 벗어나는 것을 용납 받지 못한다.
미묘한 균형을 이루고 있는 북부에서 한 가문이라도 이탈한다면 그것은 힘의 공백을 불러일으킬 것이고 그 틈으로 쏟아 내려질 몬스터를 생각하면 당연한 것이다.
“……의외로 통할지도 모르겠습니다.”
에드워드와 드웨인이 게하르를 성토하는 사이 생각에 잠겨있던 아인이 힘겹게 입을 열었다.
“뭐?”
“……그게 가능합니까?”
수석행정관이라는 것은 영지 관료의 정점이다.
당연히 알아야 하는 것도 많았고, 그 중에는 제국 법전도 있었으니 아인은 영지뿐만이 아니라 제국을 뒤져 보아도 상위권에 들어가는 지식인이다.
그런 지식인의 입에서 나온 이야기에 모두는 바싹 긴장할 수밖에 없었다.
“가문과 가문이 합쳐지는 경우는 드물지만 없는 일은 아닙니다. 보통은 이웃한 영지끼리 그런 일이 일어나기는 합니다만……. 그라인드와 게하르는 사돈관계라는 특수한 상황이지요. 거기에 다렌 도련님이 있습니다.”
다렌의 이름에 드웨인과 에드워드가 곤혹스러운 표정을 지었다.
“문제라면 게하르가 빠져나감으로써 생기는 북부의 공백인데……. 그건 그라인드의 황금으로 감당할 수 있지요.”
아인의 이야기를 들은 에드워드가 자리를 박차고 일어섰다.
“터무니없습니다! 물론 그라인드의 황금이라면 그 공백을 감당할 수 있겠지요! 그런데 그라인드가 왜 그래야 합니까? 그 일을 성사시키기 위해서 황제와 중앙에 어떤 대가를 치러야 할지 상상하기도 힘듭니다!”
에드워드의 말에 아인과 드웨인이 고개를 저었다.
게하르의 계획대로 된다면 백작가와 자작가가 합쳐지는 것이니 주체는 그라인드가 된다.
그렇다는 것은 게하르의 책임도 그라인드가 고스란히 떠맡아야 한다는 뜻이고, 예외중의 예외인 상황이니 황제와 중앙에 대한 로비가 필요할 것이 분명했다.
기회를 잡은 황제와 중앙은 그라인드에게서 최대한 많은 것을 뜯어낼 것이고, 그라인드는 8대 귀족에서 떨어지는 것은 물론, 황금의 그라인드라는 이명마저도 잃을지도 몰랐다.
각자의 감정에 빠져 격앙되어있는 그들을 보면서 차향을 음미한 아렌이 입을 열었다.
“아인.”
“예. 도련님.”
평소와 다름없는 목소리였지만 아렌의 말에 실려 있는 힘이 이들에게 냉정을 찾게 해 주었다.
“가능성이 있다는 이야기로 들리는데 맞느냐?”
“……아예 없지는 않습니다. 이런 말씀을 드리기는 죄송하지만 백작님은 가문에 그다지 정이 없으시니까요.”
내친김에 이야기하겠다는 듯이 아인의 입에서 알코르의 이야기가 나오자 에드워드와 드웨인이 침묵했다.
영혼이 빠져나가 버린 양 수동적으로만 움직이는 알코르라면 자신 다음의 그라인드를 신경 쓰지 않을지도 몰랐다.
“그럼 어쩔 수 없군.”
아인의 이야기와 에드워드, 드웨인의 표정을 본 아렌은 결정을 내렸다.
“다 죽여 버리면 되는 것이겠지?”
“예?”
너무나도 태연한 어조의 말에 아인이 멍한 표정을 지었다.
“가능성이 있다고 하지 않았더냐. 아버님도 의욕이 없다고 하고. 그렇다면 판을 엎으면 되겠지.”
이쪽의 선수가 미덥지 못하다면 경기에 나가지 않으면 될 것이 아닌가.
아무렇지도 않게 백 명에 가까운 인물의 생사를 결정해버린 아렌의 모습에 에드워드가 멍한 표정을 지었다.
“……도련님.”
“……과연 그렇군요. 애초에 둘째부인이 나설 수 없는 환경을 조성해 버리는 것이 제일 좋겠습니다.”
아인이 납득한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였고, 드웨인이 굳은 표정을 지었다.
“기사단과 원로원을 대기시키겠습니다. 전투는 간결하게 끝내는 것이 좋겠죠.”
드웨인의 머릿속이 바쁘게 돌아가며 그라인드 내부의 실력자들을 추려내었다.
“행정관들을 다독이며 증거를 수집하겠습니다. 알게 모르게 게하르 쪽으로 흘러간 것들이 상당할 겁니다.”
아인이 말을 잊자, 에드워드도 결심을 굳혔다.
“훌리오의 증언을 확보하고 정보를 모으겠습니다. 그라인드의 결백을 증명해 보이겠습니다.”
사돈관계로 맺어진 가문의 기사단 하나를 날려버리려는 계획이다.
제 아무리 결과가 좋아도 구설수에 오를 수밖에 없으니 그때를 대비해서 철저히 준비하겠다는 모습에 아렌이 흡족한 미소를 띠웠다.
“그럼 결정됐구나.”
아렌의 말에 모두가 굳은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미소를 띠며 자리에서 일어나 방을 벗어나려는 아렌이 멈칫하더니 입을 열었다.
“아. 그리고.”
고개를 돌린 아렌의 얼굴에 떠오른 미소가 조금 더 짙어진 것 같다는 느낌을 받는 가신들을 향해 아렌의 목소리가 이어졌다.
“시간과 장소가 결정되면 잉그리드와 다렌을 그 자리에 꼭 불러라.”
아예 희망을 뺏어가겠다는 잔인한 말에 가신들의 표정이 창백해졌다.
* * *
“음.”
정확히 해가 떠오르려는 시간, 아렌은 눈을 떴다.
낯설면서도 낯설지 않은 천장이 눈에 들어왔고, 꼬마 아렌의 기억과 조금 더 동화된 것을 느끼며 자리에서 일어섰다.
“일어나셨습니까.”
그 순간만을 기다리고 있었다는 듯이 문 밖에서 베로아의 목소리가 들렸고, 아렌은 예의 무감정한 목소리로 답했다.
“들어와라.”
소리 없이 문이 열리고, 베로아를 선두로 두 명의 시녀가 각자 무엇인가를 들고 아렌의 방으로 들어섰다.
“실례하겠습니다.”
한 눈에 봐도 긴장한 기색이 역력한 두 시녀와 다르게 단정한 표정의 베로아가 고개를 숙였고, 아렌은 침대 옆 의자에 앉아 베로아와 시녀들의 시중을 들었다.
세안할 물이 대령되었고, 베로아가 옷장에서 아렌의 옷을 꺼내 정성스럽게 대령했다.
흐트러진 머리가 조심스레 빗겨지고, 복장을 점검하니 그림 같은 귀공자의 모습이 나타났다.
“백작님과 둘째부인은 식사를 따로 하신다는 연락을 받았습니다.”
베로아의 말에 아렌이 잠시 생각하더니 답했다.
“여기서 먹는 것으로 하지.”
“준비하겠습니다.”
시녀들이 공손한 몸가짐으로 물러나고 홀로 남게 된 방안에서 아렌은 창밖을 바라보았다.
유피테르에 있는 별장에는 못 미치지만 수려한 경광을 자랑하는 후원을 보면서 아렌은 숨을 들이마셨다.
하인들의 시중이 전혀 어색하지 않았고, 잠자리가 편했음을 기억하며 아렌은 그라인드라는 이름에 대한 소유욕이 강해지는 것을 느꼈다.
자연스럽게 올라오는 탐욕을 아렌은 거부하지 않았다.
저 멀리서 희미하게 풍겨오는 맛있는 냄새에 미소 지으며 아렌은 오늘의 일정을 생각하기 시작했다.
* * *
“도련님을 뵙습니다.”
“수고가 많구나.”
식사를 마친 아렌이 향한 곳은 로렌의 방이었다.
아렌의 얼굴을 기억하는 기사를 치하한 후, 조심스레 로렌의 방으로 들어선 아렌의 눈이 무심히 사방을 훑었고, 로렌을 돌보던 시녀들이 일어나 공손히 허리를 숙였다.
‘에드워드가 일을 잘했군.’
어제와는 다른 시녀들임을 확인한 아렌이 내심 흡족해하며 로렌이 누워 있는 침상으로 향했다.
여전히 비쩍 마른 체구에 숨 쉬는 것조차 어려워 보이는 몰골이었지만, 최소한 어제처럼 당장이라도 죽을 모습은 아니었으니 아렌은 만족했다.
“밤 동안은 평안하셨습니다.”
아렌의 눈치를 보던 시녀가 슬그머니 입을 열었고, 아렌은 고개를 끄덕였다.
“잘했다.”
얼굴이 붉어진 시녀를 일변하고 아렌은 손을 들어 로렌에게로 뻗었다.
이제는 아렌보다도 어려 보이는 로렌을 향해 손바닥을 펴자 붉은 기운이 줄줄이 흘러나왔다.
“아!”
“예뻐라.”
상서롭기까지 한 기운의 등장에 시녀들이 자기도 모르게 감탄사를 내뱉었고, 아렌의 손에서 뻗어 나온 붉은 기운은 이내 로렌의 몸 곳곳으로 스며들었다.
로렌의 몸은 균형이 심하게 어긋나 있는 상태였다.
그것만으로도 목숨을 부지할 수 없는데, 독과 주술까지 더해졌으니 실제로 로렌은 아렌이 조금만 늦었어도 명을 달리했을지도 몰랐다.
섬세하게 기운을 조절한 아렌이 조금씩 로렌의 어긋남을 맞추어 나갔고, 어느 정도의 시간이 지나자 아렌이 기운을 거둬들였다.
그리고 그 순간 로렌이 눈을 떴다.
“……아렌.”
“형.”
조금은 혈색이 돌아온 로렌의 입이 힘겹게 열렸고, 아렌의 무감정한 얼굴을 바라본 로렌이 힘겹게 말을 이었다.
“……꿈이 아니었군. 능력을 받아들였구나.”
“그래.”
대답과 함께 아렌이 시녀들을 향해 손짓했고, 그 순간 시녀들이 자리에 주저앉아 버렸다.
한 순간에 깊이 잠들어버린 시녀들의 모습을 본 다면 세상 그 누구도 놀라겠지만, 로렌은 놀라지 않았다.
“……형이라고 부르는 것을 보니 반갑긴 하구나. 그래도 물을 건 물어야겠지.”
로렌의 표정에 긴장이 떠올랐다.
“넌 아렌이 맞는 거냐?”
얼마 전의 아렌이었다면 로렌의 이 질문에 깊은 사유를 했겠지만, 지금의 아렌은 아니었다.
“난 아렌 드 그라인드야.”
깊은 눈으로 로렌과 눈을 마주치며 아렌이 말을 이었다.
“형이 알던 아렌은 아니겠지만.”
아렌의 대답을 들은 로렌이 눈을 감았다.
“……그래. 그렇겠지.”
말과 함께 눈을 뜬 로렌의 눈에 생기가 차오르는 것이 보였다.
“고맙다. 내 동생.”
희미하게 웃는 로렌을 보면서 아렌도 마주 웃었다.
“일단 쉬어. 형의 상태는 하루아침에 좋아질 수 있는 게 아니야. 시간이 좀 걸릴 거야.”
“하루하루 죽어가던 거에 비한다면 아무것도 아니야. 내 발로 일어설 수 있다면 얼마든지 기다릴 수 있어.”
짐짓 호기를 부리는 로렌의 모습을 보니 아렌의 뇌리 속에 새로운 기억들이 떠올랐다.
티내지 않고 기억을 정리한 아렌이 자리에서 일어섰다.
“이만 갈게. 주기적으로 찾아올 테니까 너무 걱정 말고.”
“그래. 알았다.”
아렌이 몸을 돌려 방을 나섰고 동시에 시녀들도 머리를 흔들며 자리에서 일어섰다.
따스한 눈으로 아렌의 뒷모습을 바라보던 로렌이 몸을 뒤척이며 고개를 돌렸다.
써늘하게 변해 버린 눈빛이 천장을 응시하더니만 이내 눈을 감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