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he counts gone crazy RAW novel - Chapter 113
113화
로렌의 방을 나서자 대기하고 있던 베로아와 벡스터가 따라붙었다.
느릿하게 복도를 걷는 아렌의 모습에 시종과 시녀들을 비롯한 사용인들이 급히 고개를 숙였다.
하루도 안 되어서 벌어진 피바다에 모두들 몸을 사리고 있었고, 아렌의 지위와 맞물려서 자연적으로 위엄이 올라간 것이다.
거기에 백작가의 중신들이 아렌에게 공손하게 대하는 모습까지 보였으니, 짧은 시간이었지만 아렌의 위상은 알코르와도 비견될 만하게 되었다.
주인의 위상은 하인의 위상과도 직결된다.
벡스터의 허리가 더욱 곧아졌고, 베로아의 입가에 은은한 미소가 감돌았다.
그런 그들의 기색을 아는지 모르는지 아렌이 입을 열었다.
“베로아.”
“예. 도련님.”
“가문의 창고에 들어갈 수 있겠느냐?”
“……창고 말씀인가요?”
아렌의 물음에 흠칫한 베로아가 신중히 말을 고르는 모습을 보였다.
아렌이 말한 창고가 단순한 물건 보관소를 말함이 아님을 안 것이다.
유서 깊은 귀족가일수록 보물을 모으기 마련이다.
허세와 허영은 귀족의 중요한 덕목 중 하나.
타인이 가지지 못하는 물건을 가지고 과시함으로서 자신의 세를 부풀리고 때로는 그러한 행동으로 협상의 유리함을 가져오기도 하니, 진귀한 물건을 모으는 것은 귀족의 취미이기도 하지만, 필요한 일이기도 하다.
그것은 그라인드 백작가도 마찬가지다.
황금의 그라인드라는 이명이 붙을 만큼 재력이 빵빵하니 더욱 적극적으로 보물을 모았고, 그라인드 백작가의 깊은 곳에는 인세에서 찾아보기 힘든 보물이 수두룩하다는 이야기가 돌 정도였다.
“단순히 관람만 하신다면 가능하시겠지만……. 물건을 반출하는 것은 힘들 거라고 생각됩니다.”
“그렇군.”
송구스럽다는 표정으로 답하는 베로아였지만, 아렌은 이미 짐작하고 있었다는 듯 크게 개의치 않는 모습이었다.
로렌의 몸은 생각보다 더욱 안 좋았다.
차라리 독이나 저주 같은 신체 외적인 것이 요인이라면 손을 쓰기가 어렵지 않았겠지만, 로렌의 상태가 안 좋은 것은 신체 내부적인 요인이다.
그렇다면 장기적으로 몸을 보하고 치료해야만 한다는 것인데, 제 아무리 아렌이라도 그런 부분은 자신이 없었다.
신체에 달통하고 마나를 제어하는데 있어서는 경지에 올라있다고 자부하고 있지만, 인체를 살피는 것은 다른 이야기였다.
어디까지나 아렌은 무인이지 의사가 아니다.
무인의 방식으로 로렌을 대하기에는 로렌의 몸이 너무 약했다.
그렇기에 아렌은 전통적인 무림의 방식을 따르기로 결정했고, 여기서 필요한 것이 영약.
약효가 약한 것부터 차례대로 투입하며 로렌의 몸을 강화시키고 궁극적으로 탈태환골을 시키는 것으로 가닥을 잡은 것인데, 투입해야 하는 약의 양이 감이 잡히지 않았다.
혹시라도 가문의 창고에서 필요한 물건을 반출할 수 있으면 좋겠지만, 크게 기대는 하지 않았다.
가문이 모은 보물은 가문의 역사 그 자체다.
그리고 그러한 보물을 사용하기 위해서는 대부분 그만큼의 결정권을 가져야 하고, 아렌의 위상이 가문 내에서 수직상승했다고는 하지만, 공식적으로 아렌의 직책은 아무것도 없었으니, 당연한 일이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그렇다고 손 놓고 기다릴 수는 없는 일이다.
“창고 열람과 물건 반출을 요청해라. 아인에게 말하면 편의를 봐줄 거다.”
“알겠습니다.”
베로아가 공손하게 고개를 숙이며 답했다.
어제의 일로 인해서 아인은 아렌에게로 완전히 돌아선 상황이다.
아렌의 말을 거역하기는커녕 최우선으로 처리하려고 할 것이 분명했다.
“형의 몸을 치료하는 데 필요한 일이다.”
그라인드의 혈족을 살리는 일이니 명분도 충분했다.
“벡스터.”
“예. 도련님.”
“에드워드를 불러와라.”
“알겠습니다.”
어느덧 후원에 도달해 경치를 지켜보던 아렌이 명을 내렸고, 베로아와 벡스터는 제각기 아렌의 명을 이행하기 위해 움직였다.
* * *
그라인드 저택에서 게으름을 피우는 사람은 없다지만, 그중에서도 가장 바쁜 사람을 뽑으라면 대부분 에드워드를 말한다.
총집사라는 자리는 단순히 저택 내부를 관리하는 것이 아닌, 백작가의 내부를 관리하는 자리다.
그렇기에 에드워드는 항상 바빴고, 어지간한 일은 휘하의 집사들을 부려서 해결했지만, 아렌의 부름이라는 소리에 두말없이 자리에서 일어나 후원으로 향했다.
“부르셨습니까. 도련님.”
평소에도 바쁜 에드워드였지만, 아렌의 이야기에 따라서 게하르의 정보를 취합하고 있는 지금은 더욱 그러했다.
거기에 게하르에 관한 건은 다른 사람에게 맡기기도 힘든 민감한 내용이다 보니 에드워드는 잠도 제대로 못자서 피곤이 얼굴에 서려 있었지만, 그럼에도 아렌을 대하는 자세에는 흐트러짐이 없었다.
“바쁜데 미안하구나.”
에드워드의 상태를 눈치챈 아렌의 말에 에드워드는 환하게 웃으며 답했다.
“당치도 않으십니다. 도련님께서 부르시는데 당연히 제가 와야지요.”
기꺼운 하인의 태도에 아렌도 고개를 끄덕였다.
굳건한 충심은 신의로 보답해야 하는 법이고, 아렌은 오늘의 일을 잊지 않을 것이다.
“물어볼 것이 있다.”
“말씀하시지요.”
아렌의 시선이 저택 저 너머로 향했다.
“이곳에도 암시장이 있느냐?”
“……암시장 말씀입니까?”
전혀 예상하지 못한 아렌의 물음에 에드워드가 잠시 주춤거렸다.
“그래. 몇 가지 구해야 할 물건이 생겼다.”
차로 목을 축인 아렌이 말을 이었다.
“정보도 필요하고.”
아렌의 말에 에드워드가 고개를 주억거렸다.
빛이 있으면 그림자가 있기 마련이고, 빛이 강하면 강할수록 그림자 역시 짙어진다.
황금의 그라인드라고 불리며 막강한 재력을 소유하고 있는 그라인드 백작령에 다양한 사람들이 모이는 것은 당연한 수순이었다.
돈이 모이는 곳에 사람이 모이니, 재화가 창출되고, 그 재화를 따라서 사람이 모이는 순환이 반복되었다.
그라인드 저택이 위치해 있고, 백작령의 주도인 헤르메스는 제국에서도 다섯 손가락 안에 들어가는 거대 상업도시가 되었다.
원래부터가 유서 깊은 도시였던 이곳은 증축을 거듭하고, 워낙 많은 사람들이 오가다 보니 그만큼 백작가의 통제를 벗어나는 지역도 늘어서 거대한 슬럼과 암흑가가 존재하는 곳이 되어 버렸다.
겉으로 보이는 화려한 상업도시와 숨어 있는 암흑가가 공존하는 곳이 헤르메스다.
“제국에서도 손에 꼽힐만한 암시장이 있지요. 부끄럽지만 백작가도 일정 지분을 소유하고 있습니다.”
에드워드가 곤혹스런 표정을 지었지만 아렌은 개의치 않았다.
거대한 단체를 다스린다는 것은 올바름만으로는 되지 않는다는 것을 알고 있었고, 아렌 역시 경험이 있었기 때문이다.
“그럼 되었구나.”
고개를 주억거린 아렌이 말을 이었다.
“방법을 알려 다오.”
전혀 변함없는 아렌의 태도를 본 에드워드가 작게 한숨을 내쉬며 입을 열었다.
* * *
저택의 문이 열리고 그라인드 백작가의 문장이 박혀있는 마차가 밖으로 나서자 모두가 고개를 숙이며 길을 비켜섰다.
재물이 넉넉한 그라인드 백작가는 관대한 주인이었고, 상업에 밝은 영지민들은 그 사실을 잘 알고 있었다.
때문에 백작가의 문장에 기꺼이 예를 표하고 순종하는 모습을 보이는 것이지만 모두가 그런 것은 아니었다.
몇몇은 눈을 빛내며 마차가 향하는 방향을 살폈고, 몇몇은 살벌한 눈초리로 백작가를 노려보는 듯, 온갖 군상의 모습을 보였다.
그리고 그러한 감정의 파편들은 마차에 타고 있는 아렌에게 고스란히 전해졌다.
“사람 사는 곳은 다 똑같구나.”
나직한 중얼거림에 벡스터가 아렌을 쳐다보았지만, 이내 아렌이 혼잣말을 한 것임을 알아채고 마차 밖으로 시선을 돌렸다.
밀려드는 감정과 떠오르는 기억을 차분히 정리하고 있는 아렌과 다르게 벡스터의 신경은 곤두서 있었다.
용병에서 기사까지 올라온 벡스터에게 있어서 암시장과 암흑가라는 곳은 꽤나 친숙한 것이었고, 그런 아수라장을 아렌과 함께 거닐어야 한다는 생각을 하니 신경이 곤두설 수밖에 없었다.
물론 아렌이 어디 가서 해코지 당할 사람은 아니었지만, 호위된 자로서 본분을 다해야 할 것 아닌가.
그렇게 부리부리한 눈으로 거리를 살피던 벡스터가 마부석 쪽 벽을 몇 번 두드렸다.
로렌스가 침착하게 마차를 멈춰 세웠고, 나날이 발전해가는 솜씨는 마차 안에서 거의 진동을 느끼지 못할 정도였으니, 벡스터는 내심 감탄했다.
“도착했습니다. 도련님.”
“앞장서라.”
“예.”
상업지구 에서도 외곽 쪽에 멈춰선 백작가의 문장이 달린 마차에 모두의 시선이 집중되었다.
굳은 얼굴의 벡스터가 사방을 경계하는 모습에 백작가의 요인이 이 자리에 나타난 것을 알아챈 이들이 긴장된 표정을 지었지만, 이내 나타난 아렌의 모습에 모두들 자기도 모르게 탄성을 질렀다.
“허어.”
“그야말로 귀공자로구나.”
화려한 외모와 자연스럽게 뿜어져 나오는 위엄이 좌중을 압도했고, 허리가 자연스럽게 굽혀지며 예를 표했다.
주인을 알아보는 행동에 마음이 흡족해진 아렌이 보기 좋게 미소를 지었고, 몇몇 여인들의 얼굴에 홍조가 올라왔다.
“여기서 기다려라.”
“알겠습니다. 도련님.”
로렌스의 대답을 뒤로 하고 벡스터와 걷기 시작한 아렌의 뒤를 무수한 시선이 따라붙었지만, 아렌은 느릿하게 주변을 살피며 걸었다.
방금 전까지 역동적으로 움직이던 거리가 정지했다.
아렌의 외모와 위엄은 강렬한 마약처럼 주변을 잠식해 들었고, 모두가 경외어린 시선을 보내며 행동을 멈추니 마치 공간이 멈춘 것처럼 보이는 것이다.
“이건 무엇이냐.”
“다. 닭고기로 만든 꼬치입니다. 도련님.”
한 노점상 앞에 멈춰선 아렌의 입에서 하대가 흘러나왔지만 나이가 제법 먹은 노점상의 주인도, 그것을 지켜보는 사람들도 아렌이 무도하다고 생각하는 이는 없었다.
너무도 당연하게 아렌을 지배자라고 느끼는 자신의 상태를 아무도 이상하다고 생각하지 않았다.
“몇 개 챙겨 주거라.”
“소. 송구합니다요.”
황송해하는 노점상이 급히 손을 놀려 정성스럽게 꼬치를 포장해 내밀었고, 벡스터가 대신 받더니 이내 은화를 꺼내 내밀었다.
“괘. 괜찮습니다요. 어. 어찌.”
고개를 조아리며 사양하는 노점상의 모습에 지켜보는 모두가 고개를 끄덕였다.
지배자에게 공물을 바치는 것은 당연한 것이고, 대가를 받는다면 그것은 공물이 아니다.
하지만 아렌은 고개를 저었다.
“나를 무도한 자로 만들 셈이냐. 받아라. 그것이 내 명예를 지켜주는 일이다.”
나직하지만 위엄 있는 목소리에 모두가 감탄하는 표정을 지었고, 노점상은 황송해하며 은화를 받아들였다.
“너무 많습니다요.”
“되었다.”
짧은 답과 함께 아렌이 돌아서자 벡스터가 굳은 얼굴로 따라붙었고, 그렇게 모두의 시선을 끈 아렌이 상업지구의 깊은 곳으로 나아갔다.
얼마나 걸었을까.
화려한 거리가 점점 그 빛을 잃어가고, 사람들의 표정도 달라졌다.
아렌의 주변을 가득 채웠던 경외심과 찬탄이 엷어지고, 탐욕과 질투가 그 자리를 채워나갔다.
벡스터의 표정이 더욱 굳어졌고, 손이 검 자루에 달라붙어서 떨어질 줄 몰랐다.
방금 전까지의 활기가 거짓말인 것처럼 거리 전체에 음습한 기운이 감도는 것이 같은 도시에 있는 장소라는 것이 믿어지지가 않을 정도였다.
골목 구석구석에서 서늘한 살기가 감돌고 날카로운 기운이 아렌과 벡스터를 향해 은밀히 접근하기 시작했다.
벡스터의 얼굴에 긴장이 가득했지만, 아렌은 입 꼬리를 올렸다.
폭력과 살의가 가득 찬 공간을 느끼며 아렌은 미소 지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