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he counts gone crazy RAW novel - Chapter 94
094화
그라인드 백자가의 영지는 제국의 남동부에 있다.
영지 자체만 놓고 본다면 소출도 그럭저럭 괜찮고, 광산도 몇 개 있어서 백작이라는 작위가 가지고 있는 영지에 모자라지도 넘치지도 않는 정도.
주변에 위세 높은 귀족들이 있는 것도 아니어서 별다른 분쟁도 없었고, 그라인드 백작가 자체의 성향도 얌전한 편이었기 때문에 별다른 사건사고 없이 평화롭게 살아가는 지역이라고 할 수 있겠다.
하지만 눈에 보이는 것만이 다는 아닌 법.
그라인드 백작가는 황금의 그라인드라는 이명을 가지고 있는 8대 귀족의 일원이었고, 제국의 상계에서 차지하고 있는 영향력이 어마어마하다.
제국 각지에 퍼져있는 광산과, 거대 상단 대부분에 지분을 가지고 있었고, 거기서 나오는 수입은 상상도 하지 못할 정도이니 그라인드가 마음만 먹는다면 황금으로 성을 짓는다는 농담이 나올 정도다.
그렇지만 그라인드 백작가는 가문의 부를 외부로 과시하지도 않았고, 검박한 성향을 이어가고 있었으니, 관심이 없는 귀족은 그라인드 백작가가 8대 귀족의 일원이라는 사실도 몰랐다.
그렇게 조용하게 살아가고 있는 그라인드 백작가가 최근 들어 소란스러워진 것은 전적으로 아렌의 영향 때문이었다.
***
“소문 들었어?”
“······ 들었어. 어쩜 그럴 수가 있니? 그 순하던 도련님이 그렇게 변해버리셨다는데.”
“······ 2부인 때문에 목숨의 위협을 받아서 사람이 완전히 달라지셨대.”
“······ 그럴 수도 있겠다. 그런데 무슨 일을 겪으셨기에 도련님이 그렇게까지 변하셨을까. 안쓰럽네.”
자기들끼리 조용한 목소리로 숙덕거린다고는 하지만, 마나나 오러를 사용할 정도가 되면 전반적인 신체능력이 올라가기 마련이다.
“크흠!”
그리고 귀족가문의 집사 정도 되면 대부분 숨겨둔 한수가 있기 마련이고, 2부인을 지근거리에서 보필하는 집사역시 마찬가지였으니, 시녀들의 수군거림에 불편한 기색을 내 비친 것이다.
화들짝 놀란 시녀들이 부리나케 사라져가는 모습을 보며 훌리오는 인상을 좁혔다.
어지간한 일에는 미동도 하지 않는 훌리오가 인상을 구기는 모습이 작금의 상황이 만만치 않다는 것을 시사하고 있었다.
“······ 너무 경솔했어.”
쓴웃음과 함께 중얼거린 훌리오가 걸음을 옮겼다.
그라인드 백작가의 후계는 셋.
별다른 일이 없다면 장남이 가문을 승계 받는 것이 당연한 일이지만, 세 후계자 모두 문제가 있었다.
어렸을 때부터 신동으로 소문날 정도로 똑똑하기 그지없던 첫째는 몸이 너무도 약했다.
일생의 대부분을 침상에서 보냈을 만큼 병이 깊었으니 후계로 삼기에는 불안했다.
자연스럽게 둘째인 아렌이 후계자로 지목되었으나 아렌에게도 문제는 있었다.
첫째만큼은 아니지만 몸이 약했고, 너무도 순하고 유약한 성품은 백작가라는 거대한 가문을 이끌어가기에는 맞지 않았던 것이다.
그럼 남은 것은 셋째.
아직 어린 나이이기는 하지만 건강하게 무럭무럭 자라고 있었고 어디 모자란 부분을 보이지 않고 있으니 후계자에 지목되어도 이상하지 않지만 출생이 발목을 잡았다.
셋째 공자는 2부인의 소생이다.
정통성을 따지는 가문의 원로들은 그것만으로도 셋째 공자를 탐탁지 않게 보았으니, 그라인드 백작가는 꽤나 큰 문젯거리를 안고 있는 셈이었다.
그런 와중에 아렌의 아카데미 행이 결정되었다.
백작이라는 작위에 있으면서 당대에 아카데미에 입학한 자제가 없다는 것은 그것만으로도 가문의 명예에 흠이 갈 일이라 결정된 것이지만, 여기에 2부인과 훌리오가 간섭했다.
오늘내일 하는 첫째는 신경 쓸 것 없었고, 아렌만 없으면 셋째 공자가 후계자가 되는 상황 아니었던가.
백작가의 후계자가 너무도 단출한 인원으로 가문을 나선 것도 이들의 계략이었고, 2부인의 사람으로만 이루어져있는 2기사단이 아렌의 뒤를 따라간 것도 훌리오의 수완이었다.
2부인이 원로들과 가문의 시선을 돌리는 사이 전격적으로 이루어진 일이라 사건이 일어났을 때에는 이미 늦어있었던 상황이었고, 2부인과 훌리오는 회심의 미소를 지을 수 있었던 것이다.
아렌만 없어진다면 가문의 원로들도 결국은 셋째 공자를 후계자로 생각할 수밖에 없을 것이란 확신이 있었다.
하지만 이게 웬걸.
쫓아간 2기사단은 전멸해버렸고, 멀쩡히 살아난 아렌이 보이는 행보는 듣는 이로 하여금 아연하게 만드는 것들이었다.
사람을 찢어 죽이는 것부터 시작해서, 아카데미에서 무력으로 그 이름을 날린다는 소문이 귀족가를 강타했다.
그 와중에 엉망이 되어버린 자제들로부터 치료비 청구가 오기는 했지만, 그라인드의 원로들은 푼돈 따위는 신경 쓰지도 않았다.
가문의 힘이나 위상에 비해서 유달리 조용한 편이었던 그라인드의 명예가 대외적으로 올라가는 모습에 열광한 것이다.
그 와중에 2부인이 부렸던 수작들이 하나둘씩 수면으로 올라서고 원로들의 눈가가 가늘어지고 목소리를 내기 시작하면서 2부인이 거의 장악했던 가문의 여론이 반등하기 시작했다.
콰창!
이런 저런 생각을 하며 걸음을 옮기던 훌리오의 귀에 무엇인가가 깨지는 소리가 들렸다.
“후우.”
가볍게 한숨을 내쉰 훌리오가 옷차림을 가다듬더니 방문을 두들겼다.
“누구야!”
“훌리오입니다.”
신경질적인 외침과는 반대로 담담하기 그지없는 훌리오의 목소리에 잠시 침묵이 일더니만 조용히 문이 열렸다.
굳은 안색의 시녀를 지나쳐 방으로 훌리오가 방으로 들어섰다.
화려한 방이다.
검박한 그라인드의 성향과는 어울리지 않는 화려하기 짝이 없는 가구와 그림, 한쪽에 놓여있는 보석들은 방주인의 성품을 보여주는 것 같았지만, 훌리오는 전혀 신경 쓰지 않았다.
한쪽 구석에서 씩씩대고 있는 부인에게 훌리오가 정중하게 고개를 숙였고, 그 틈을 타 시녀들이 바닥에 떨어져 있는 도자기의 잔해들을 급히 치우는 모습이 보였다.
“아끼던 물건 아니셨습니까?”
씩씩대던 그녀의 숨이 잦아들자 훌리오가 차분한 목소리로 입을 열었고, 부인의 시선이 훌리오에게로 박혔다.
“흥! 저깟 것! 얼마든지 구할 수 있는 물건이야. 내 마음을 푸는데 도움이 되었으니 잘 쓰인 거지.”
코웃음을 치며 외치는 부인의 모습에 훌리오가 속으로 한숨을 내쉬었다.
2부인은 북부 출신이다.
그라인드 백작가는 대대로 북부의 귀족들과 혼인 관계를 맺어왔다.
척박하지만 강인한 북부의 무력과 막강한 자금력을 가진 그라인드의 결합은 꽤나 괜찮은 시너지를 뽑아내주었고, 그것이 전통이 되어서 지금까지 내려왔다.
1부인 역시 북부출신이었지만, 그녀는 두 명의 공자를 출산하고 얼마 살지 못했다.
백작가의 안주인 자리를 비워놓을 수는 없으니 후처로 들어온 것이 지금의 2부인인 것이다.
북부출신답게 강단 있는 성격에 호방한 2부인은 백작가의 원로들도 호감을 느낄 만한 여성이었고, 무리 없이 백작가에 스며들 수 있었지만, 시간이 지나서 문제가 생겼다.
검박한 북부에서 생활하다가 황금의 그라인드에 시집오게 되었으니 사치에 눈을 뜨게 된 것이다.
원래 늦바람이 무서운 법이다.
제 아무리 검박한 그라인드라고 하지만 넘쳐나는 것이 돈인데 안주인에게까지 검박하게 굴지는 않았고, 제 세상을 만난 듯 돈을 써대니 어느덧 북부의 호방한 레이디는 사치에만 신경 쓰는 귀족부인이 되어버렸다.
거기에 유난히 얌전한 성격이었던 1부인과 비교가 되니 처음 호감을 가졌던 그라인드의 가신들도 그녀를 점점 다른 시선으로 보게 되었다.
셋째공자를 출산하고 완전히 자리를 잡았다지만 가문내의 미묘한 기류를 모를 리 없었고, 결국 아렌을 치우겠다는 결단을 내려 실행에 옮겼지만 실패한 것이다.
훌리오의 눈짓에 시녀들이 자리를 비우고 방에는 2부인과 훌리오, 시녀장만이 남게 되었다.
“어떻게 생각해?”
분이 조금은 풀린 것인지 의자에 주저앉아 묻는 2부인의 말에 훌리오는 공손히 입을 열었다.
“과장된 소문이라고 생각은 합니다. 다만.”
“그렇지? 그 아렌이 그럴 리가 없지! 분명히 원로원의 늙은이들이 수작을 부린 걸 거야!”
훌리오의 말을 끊으며 화색을 띄는 2부인의 모습에 시녀장이 가볍게 한숨을 내쉬며 입을 열었다.
“아가씨. 훌리오의 이야기가 아직 끝나지 않았어요.”
“······ 그래. 이야기는 끝까지 들어봐야겠지.”
북부에서부터 자신을 따라온 시녀장은 2부인이 공손하게 대하는 몇몇 중의 하나였고, 그녀의 말에 2부인의 흥분을 가라앉혔다.
시녀장에게 눈짓으로 고마움을 표시한 훌리오가 말을 이었다.
“과장된 소문이라고 하더라도 그만한 소문이 났다면 분명히 그 이유가 있을 것입니다. 그렇다면 그 소문이 사실이라고 가정하고 방비를 하는 것이 맞습니다.”
훌리오의 말에 마음에 안 든다는 듯 얼굴을 찌푸린 2부인이지만 이내 고개를 끄덕이며 동의를 표했다.
그녀는 험난하기 짝이 없는 북부출신이고 북부에서는 여자들도 여차하면 칼을 들고 몬스터에게로 돌격한다.
적을 상대함에 있어서 최악을 가정하는 것은 그녀가 철이 들 때부터 배운 것이니 훌리오의 말에 공감을 표한 것이다.
“연락을 넣어두었습니다. 조만간 조력자들이 도착할 겁니다.”
그녀를 달래듯 말하는 훌리오의 말에 이내 2부인의 얼굴이 환해졌다.
“누가 오는지 연락이 왔나?”
“이빨 기사단이 온다고 하더군요.”
2부인의 얼굴에 미소가 떠올랐다.
“삼촌이 오는구나! 삼촌이라면 믿을 수 있지.”
크게 고개를 끄덕이는 그녀의 반응에 훌리오와 시녀장도 미소를 지었다.
북부의 기사들은 타 지역의 기사들보다 반수 위로 쳐주는 상황에서 마스터를 눈앞에 둔 기사단장을 둔 기사단의 조력은 더할 나위없는 힘이 될 것이 분명했다.
“······ 여차하면 과격한 방법을 써도 되겠어.”
비릿한 미소를 짓는 그녀의 모습에 훌리오와 시녀장의 얼굴에도 비슷한 미소가 떠올랐다.
문제가 있다면.
그들이 들은 소문은 아렌의 실력을 십분의 일도 표현하지 못했다는 것이었지만.
***
“알겠다.”
“······ 물러가겠습니다.”
강력하기 짝이 없는 완편 기사단 하나가 가문을 향해 오고 있다는 보고를 올렸는데도 변함없는 주인의 모습에 중년인은 얼굴을 일그러트리며 물러섰다.
그런 가신의 모습에 눈살을 찌푸릴 만도 하건만 사내의 표정은 전혀 변화가 없었으니, 중년인은 나직이 탄식만 할 뿐이었다.
중년인이 나간 방안에 침묵이 감돌았다.
잠시의 침묵 끝에 사내가 손을 들어 책상위에 있는 서류를 집어 들었다.
가문의 이런저런 동향과 사업장들의 상황들이 적혀있는 중요하기 짝이 없는 서류이지만 사내는 전혀 관심이 없다는 듯이 무성의하게 뒤적거렸고, 이내 찾고자 했던 서류를 찾아낼 수 있었다.
아렌에 관한 동향이 상세하게 기록되어 있는 서류를 훑어본 사내는 이내 서류를 내 던지고는 의자에 깊숙이 몸을 박았다.
“······ 믿기지가 않는군. 그 아렌이.”
사내, 현 그라인드 백작 알코르 드 그라인드는 가만히 눈을 감으며 아렌을 떠올렸다.
사랑스럽기 그지없는 아내가 남기고 간 두 아들이었지만, 그렇기에 아들들에게 정이 가지 않았다.
첫째는 언제 죽어도 이상하지 않을 정도로 약했고, 둘째도 유약하기 짝이 없어서 차라리 두 아들대신 아내가 살아있었으면 어땠을까 하는 생각이 그의 마음을 사로잡았던 것이다.
그렇기에 2부인이 가문에서 분탕을 치고 있는데도 상관하지 않았다.
1부인의 죽음과 함께 모든 의욕을 잃어버린 그저 숨 쉬는 시체.
그것이 현 그라인드 백작인 알코르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