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he counts gone crazy RAW novel - Chapter 95
095화
눈을 감고 생각에 빠져있던 알코르의 표정이 일그러졌다.
“빌어먹을 저주 같으니라고······!”
분노가 가득 실린 목소리로 씩씩거리던 알코르는 이내 체념한 표정을 지었다.
그라인드의 혈계능력.
일반적인 혈계능력과는 완전히 궤를 달리하는 이능이나 기적에 가까운 능력이지만, 알코르가 생각하기에 그것은 지독하기 짝이 없는 저주였다.
한참을 무기력한 표정으로 앉아 있던 알코르가 자리에서 일어섰다.
평소와 같은 감정 없는 표정을 한 그의 얼굴은 아렌의 얼굴과 비슷했지만 아렌에게서 힘과 권위가 느껴진다면, 알코르의 얼굴에는 짙은 허무가 실려 있었다.
“나오셨습니까.”
집무실의 문을 열고 나온 알코르를 보고 호위기사들이 고개를 숙였다.
“로렌에게로 가겠다.”
건조한 목소리를 들은 호위기사가 흠칫거렸지만, 이내 앞장서서 알코르를 인도했고, 그렇게 복도를 가로지른 그들은 어느덧 하나의 문 앞에 도달했다.
“가주님을 뵙습니다.”
문 앞을 지키던 두 기사가 뜻밖이라는 표정을 지은 것도 잠시, 이내 표정을 굳히며 고개를 숙였고, 알코르는 그 모습에 가볍게 손을 젓더니 이내 손잡이를 향해 손을 내밀었다.
“······오늘은 상태가 꽤 괜찮으시다고 합니다.”
그런 알코르의 모습에 문을 지키던 기사 하나가 조심스레 이야기를 꺼냈고, 손잡이를 잡아가던 알코르의 손이 멈췄다.
“그런가?”
나직하게 중얼거린 알코르의 눈동자가 멈춰 버린 자신의 손과 손잡이를 바라보았다.
손가락 하나 정도의 거리에서 멈춘 자신의 손을 바라보는 알코르의 눈동자가 흔들리더니 고뇌하는 표정을 지었다.
멈춰버린 알코르의 움직임과 고뇌하는 표정에 기사들의 얼굴에도 긴장이 떠올랐다.
당장이라도 문을 열고 방으로 들어서라고 외치고 싶었지만, 기사된 자로서 주인의 행동을 강제할 수는 없으니, 그저 침묵을 유지할 뿐이었다.
“······다행이군.”
그런 기사들의 마음을 알아주지도 못한 채, 머뭇거리던 알코르가 나직한 목소리와 함께 몸을 돌렸다.
실망이 기사들의 마음속에서 올라왔지만, 표정으로 표하는 실수를 범하지는 않은 기사들을 뒤로 하고 알코르가 몸을 돌렸다.
호위기사들과 복도 너머로 사라지는 알코르의 모습을 바라보던 기사들이 한숨을 내쉬었고, 방 안에 있는 누군가는 눈물을 흘렸다.
* * *
화창한 햇살과 선선한 날씨는 여행을 시작해야 하는 사람들을 축복하는 것 같았다.
“좋은 날이군.”
“그러네요.”
네이던의 말에 짧게 답한 레티시아는 자신의 짐을 다시 한 번 확인했다.
가문까지의 여행길은 제법 긴 편이고, 혹시라도 놓고 가는 것이 있다면 꽤나 귀찮은 일이 벌어질 것이 분명하니 다시 한번 확인하는 것이다.
“서쪽으로 간다고 했죠?”
“그래. 당분간 신세 좀 지도록 하겠다.”
레티시아의 물음에 네이던이 가볍게 고개를 숙였다.
“그런 말 말아요. 솜씨 좋은 마법사와의 동행은 우리 쪽에서 부탁하고 싶을 정도에요.”
레티시아의 너스레에 네이던의 냉막한 얼굴에도 미소가 떠올랐다.
네이던이 대단한 전투마법사인 것은 맞지만, 레티시아 역시도 실력 좋은 마법사이고, 그녀를 데려가기 위해서 파견 나온 기사들까지 생각하면 네이던은 확실히 신세를 지는 것이 맞았다.
그런 상황인데도 자신의 체면을 살려 주려는 레티시아의 태도가 네이던은 고마웠다.
이미 북부로 떠난 트리언과 마찬가지로 네이던 역시 홀로 귀향을 해야 하는 상황에서 서든 백작가의 일행들과 같이 움직일 수 있다는 것은 확실한 도움이 되는 일이다.
“도련님께 안내 드리겠습니다.”
그런 두 사람에게 다가온 베로아가 공손한 자세로 고개를 숙였고, 두 사람은 자리에서 일어나 베로아의 뒤를 따랐다.
베로아의 인도로 저택의 뒤뜰로 따라나선 그들의 눈에 숲을 바라보며 등을 지고 앉아있는 청년의 모습이 보였다.
“왔군.”
인기척을 느낀 것인지 나직한 목소리와 함께 몸을 돌리는 청년의 모습에 새삼스럽게 감탄이 세어나왔다.
햇살에 부서지는 것 같은 화려한 백금발과 조각 같은 이목구비, 앉아있음에도 확연히 눈에 들어오는 훤칠한 체구의 청년이 찻잔을 들고 있는 모습은 한편의 그림과도 같은 모습이었다.
비록 얼굴에 아무런 표정이 없어서 그 미모가 반감되었다고는 하지만, 그럼에도 세상 그 누구보다도 귀족 같은 자태의 사내.
이제는 청년의 모습이 된 아렌 드 그라인드가 두 사람을 맞이했다.
* * *
아카데미는 문을 닫았다.
차라리 외부의 관객을 들이지 않았더라면 어떻게든 묻을 수 있었겠지만, 명망 있는 관객들이 있는 가운데에서 일어난 사건은 변명의 여지가 없었던 것이다.
다른 이유도 있었다.
아렌이 충격을 완화시킨 덕분에 시설 피해는 콜로세움 정도로 끝이 났지만, 블랙박스가 가지고 있던 막대한 힘은 아카데미 전체에 깔려있는 무수한 마법진에 영향을 끼쳤다.
편리를 위해서 설치한 마법진이 오작동을 하게 되는 상황이 빈번하게 일어났으니, 아카데미 자체의 안전을 담보하지 못하는 상황이 되어 버렸고, 어지러이 얽힌 마법진과 아카데미에 숨어있는 비밀스런 시설들이 얽히더니만 어지간한 던전에 버금가는 위험성을 띄게 된 것이다.
상황도 상황이지만, 아카데미 자체가 위험성을 가진 공간으로 바뀌어 버렸으니 결정은 신속했다.
학생과 기간요원들을 비롯한 모든 인원들이 아카데미 밖으로 나왔고, 엄중하게 봉인된 아카데미에는 몇몇의 교수들만이 남아 위험요소들을 제거하는 데 전력투구하고 있었다.
엄청난 비난이 부르바스를 위시한 교수들에게 쏟아졌지만, 묵묵히 모든 비난을 감내한 부르바스를 황제가 비호했고, 비난은 줄어들었지만 부르바스의 속은 활활 타오르고 있었다.
갑작스럽게 적을 잃어버린 학생들은 대부분 귀향을 택했다.
몇몇의 학생들은 군부로 향하거나 용병으로 나서는 등, 자신의 길을 개척하기로 나선 자들도 있었지만 그 수는 많지 않았던 것이다.
어찌되었든 기본적인 실력이 출중한 학생들이니 만큼 각자의 가문에서 나름대로의 쓸모가 있었고, 짧은 시간이었지만 아카데미에서 겪은 사건사고는 이들을 성장시키기에 충분했던 것이다.
아렌의 일행이 그랬다.
아렌과 어울리면서 겪은 사건과 실전은 일행의 실력을 큰 폭으로 끌어올려 주었고, 지향하는 목표를 정할 수 있게 해 준 것이다.
막연하게 동경하는 강함과 목표가 있는 강함은 그 의미부터가 다르다.
아렌이라는 괴물의 존재는 하나의 기준으로 삼기에 충분하였으니, 일행에게는 아렌을 만난 것만으로도 이미 기연이라고 할 수 있었다.
커다란 방패를 짊어진 트리언이 먼저 떠났다.
북부는 몬스터와의 투쟁이 끊이지 않는 곳이고, 언제나 손이 부족한 곳이니만큼 트리언이 가장 먼저 움직이는 것은 당연한 일이다.
일행들에게 각자 작별을 고하고 네이던과 한참 노려보던 트리언이 발길을 돌려 걸어가는 모습은 사람의 마음을 울리는 무엇인가가 있었다.
그 다음으로 콜레트와 코린이 길을 나섰다.
나이에 비해 작은 체형과 소심한 성격이었던 콜레트는 아렌과 어울리면서 일생의 전환점을 맞았다.
여전히 작은 체형과 소심한 성격인 것은 맞지만, 워낙에 험한 꼴을 많이 보다보니 어지간한 상황에서는 꿈쩍도 않는 강심장을 보유하게 된 것이다.
거기에 밀도 높은 경험은 신관으로서의 그릇을 획기적으로 키워 놓았다.
마계의 기운과 맞서 싸운 경험은 신이 그녀를 주목하게 만들기에 충분했고, 단순한 신관이 아니라 방패와 메이스까지 휘두르며 전투에 가담한 그녀를 이단심문관들이 눈여겨 본 것이다.
어느새 성기사급의 전투능력과 신성력을 보유한 그녀를 이단심문관들이 적극적으로 스카우트했고, 코린과 동행하는 조건으로 그녀는 휘페리온으로 향했다.
자신의 몸통만한 주머니에 쿠키를 가득 담아 아렌에게 건넨 그녀는 기꺼워하는 아렌의 태도에 환하게 웃으며 씩씩하게 길을 나섰다.
도리안과 엘레나 역시 아렌의 저택에 잠시 머무르다가 길을 나섰다.
바로 가문으로 향하는 것이 아닌 다른 곳으로 향하는 것이 뭔가 목적이 있어보였지만, 아렌은 크게 신경 쓰지 않았다.
다만 엘레나에게 뭔가를 건넸고, 감격한 표정을 한 엘레나는 아렌에게 꼭 은혜를 갚겠다고 맹세하였으니, 다음의 만남이 기대가 되었다.
그리고 마지막까지 남아 있던 레티시아와 네이던이 오늘 길을 나서는 것이다.
* * *
“적응하기가 힘드네요.”
“그런가?”
그냥 있어도 감탄이 나오는 미모인데 역광까지 더해지니 사람 같지 않은 아렌의 모습에 넋을 놓았던 레티시아가 표정을 정돈하며 말했다.
아렌은 전혀 신경 쓰지 않는다는 듯이 어깨를 으쓱했지만, 그 모습에 네이던은 배알이 꼴렸다.
“······항상 행동을 조심해라. 그렇지 않아도 너는 구설수에 오르기 쉽다.”
잘생긴 것들을 향한 본능적인 질투심을 가까스로 억누른 네이던의 한 마디에 아렌은 무심한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참고하지.”
상대의 감정이 어떻든 간에 충고는 일단 새기는 것이 좋다는 것을 아렌은 잘 알고 있었다.
그런 둘의 모습에 피식 웃은 레티시아가 우아한 자세로 치마 양 끝단을 살짝 들어 올리더니 고개를 숙였다.
“그동안 고마웠어요. 아렌 공자. 비록 함께한 시간을 그리 길지 않았지만, 제 기억 속에서 영원히 잊히지 않을 것 같은 즐거운 시간이었어요.”
“나도 즐거웠다. 혹시라도 내 도움이 필요하면 언제든지 연락해라.”
네이던도 엄숙한 표정으로 인사를 건네니, 아렌이 찻잔을 내려놓고는 자리에서 일어섰다.
예에는 예로 답해야 하는 법이다.
자세를 바로 한 아렌이 엄숙한 목소리로 말했다.
“편안한 여행길을 기원하겠다.”
여상한 한 마디였지만, 아렌 정도의 초인이라면 행동 하나하나에 의미가 새겨진다.
아렌의 의념이 세상을 건드렸고, 별다른 일이 없는 한 이들의 여행길은 편안하기 그지없을 것이다.
“그럼 이별이군. 너는 어떻게 할 거지?”
웃으며 몸을 돌리려던 네이던이 문득 생각났다는 듯 아렌에게 물었고, 아렌이 답했다.
“당분간은 이곳에 머물 예정이다.”
“바로 귀향을 안 하시나요?”
레티시아도 호기심이 생겼는지 아렌에게 말을 걸었다.
아렌은 신경도 쓰지 않고 있겠지만, 현재 아렌의 행방은 전 제국의 귀족이 주목하고 있는 상황이다.
초인적인 무력과 바디체인지를 본 목격자가 하나 둘이 아니었고, 기존에 퍼져있던 흉흉한 소문과 합쳐지니 아렌의 위상이 하늘 높은 줄 모르고 솟아 오른 것이다.
마스터만 하더라도 사소한 행보에 주변이 긴장하는데, 최소한 마스터로 평가받는 아렌의 움직임에 촉각을 곤두세우지 않는다면 귀족이 아닐 것이다.
지금 이 순간에도 아렌의 저택을 수많은 인물들이 주시하고 있는 상황이니 레티시아의 의문은 당연한 것일지도 몰랐다.
“휴식도 필요하고, 볼 것도 있지.”
아렌의 대답에 레티시아와 네이던이 고개를 끄덕였다.
블랙박스의 처리 때문에 아렌이 무리를 한 것은 짐작하고 있는 상황이니, 휴식을 취하는 것은 당연한 것이고, 며칠 전 은밀하게 전해진 방대한 자료들을 생각하면 아렌의 움직임은 타당한 것이다.
“그러면 귀향은 그 다음이겠네요.”
레티시아의 중얼거림에 아렌의 얼굴에 미소가 피어올랐다.
좀처럼 보기 힘든 아렌의 미소에 둘의 눈이 커졌지만, 곧바로 둘의 표정이 굳어졌다.
“그렇지.”
싸늘한 기운이 주변을 감싸고, 여전히 미소 지은 아렌이 말을 이었다.
“꽤나 재미있을 거 같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