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he counts gone crazy RAW novel - Chapter 98
098화
한동안 허공 너머를 주시하던 아렌이 고개를 돌리자 긴장한 모습으로 아렌의 곁을 지키던 하일이 작은 한숨을 내쉬었다.
능력이야 말할 것도 없고, 정통성마저도 충분한 주인이니 아렌에 대한 하일의 충성은 의심의 여지가 없었지만, 아렌이 마냥 편한 주인은 아니었기 때문이다.
세상만사에 흥미가 없는 냉정한 모습이기는 하지만 정이 없지는 않아서 이따금 하인들을 챙기는 모습을 보여주는 아렌이지만 너무나도 비인간적으로 느껴지는 힘과 외모를 가졌기 때문이다.
제아무리 내용물을 중시한다고는 하지만, 사람은 외형에 끌리는 법이니, 마음으로 충성을 맹세했지만, 아렌의 겉모습에 깜짝깜짝 놀라는 일이 아직도 있었다.
‘아직 멀었군.’
자신을 자책하며 하일이 아렌에게 물었다.
“신경 쓰이시는 게 있으십니까?”
하루 종일 마차에서 미동도 안 한 아렌이 갑자기 지평선 저 너머를 응시하는 모습을 보였으니, 뭔가가 있다는 생각을 한 것이다.
“손님이 오는구나.”
“······적입니까?”
자신의 감각에는 아무것도 느껴지지 않았지만, 아렌에게 되묻는 실수를 하일은 저지르지 않았다.
주인의 말을 의심하는 것보다는 향후의 방침을 듣는 것이 더욱 건설적이라는 것을 하일은 잘 알고 있었다.
그런 하일의 모습에 아렌의 눈에 이채가 떠올랐지만 이내 사라졌다.
“그건 모르겠구나. 와봐야 알겠지. 하나의 일행도 아닌 것처럼 보이니까.”
“숫자가 적지 않군요.”
아렌의 말에 심각한 표정을 지은 하일이 아렌에게 고개를 숙이더니만 이내 발걸음을 돌려 기사들을 소집했다.
느슨해졌던 분위기가 팽팽하게 조여지고, 베로아를 비롯한 비전투 인원들을 야영지 가운데에 몰아넣은 기사들이 전투를 준비하기 시작했다.
“유능한 친구지요.”
“그래 보이는군.”
어느덧 아렌의 곁으로 다가선 드웨인이 미소 지으며 말했다.
“조금만 다듬으면 쓸 만해지겠어.”
“그렇습니까?”
아렌의 중얼거림에 드웨인이 환하게 웃었다.
7기사단은 원로원 소속이니만큼 드웨인의 손을 많이 탄 기사들이다.
개개인이 제자나 다름없는 상황인데, 그 중 한 명의 자질이 고평가받으니 절로 기분이 좋아진 것이다.
거기에 높디높은 안목을 가진 아렌이 쓸 만하다는 평가를 내렸으니, 어쩌면 하일은 미래의 마스터가 될지도 모르는 인재인 것이다.
“저도 느껴지는군요.”
그렇게 싱글벙글하던 드웨인이 미소를 지우며 말했다.
아렌의 충고를 잊지 않고 심상세계를 가다듬은 드웨인은 마스터의 초입에 이르렀다.
완연한 마스터는 아니지만 그거야 시간이 해결해 줄 일이고, 최상급이었던 시절과는 차원이 다른 감각을 손에 넣은 상황이다.
아렌의 곁에 다가설 때부터 아렌이 바라보던 방향으로 감각을 집중하고 있었고, 그런 드웨인에게도 이곳으로 향하는 일행의 기척이 잡힌 것이다.
“제법 많군요. 수십 명은 되어 보이는데······. 거기에 소수의 인원을 다수가 쫓고 있는 형색이고······. 잘못하면 얼굴 붉힐 일이 있을지도 모르겠습니다.”
이쪽으로 향하는 인원의 상황을 파악한 드웨인이 중얼거리더니만 이내 하일을 불러 명령을 내렸다.
“분쟁하고 있는 두 개의 집단이다. 상황에 따라서는 우리가 얽힐지도 모르니 긴장을 유지하도록 해.”
“알겠습니다.”
드웨인의 말을 들은 하일이 표정을 굳혔다.
제국의 치안은 좋은 편이지만 그것도 어디까지나 도시와 그 주변뿐이다.
워낙에 넓은 강역을 가진 덕분에 도시와 도시 사이의 거리가 상당하고, 사통팔달로 뚫린 도로 덕분에 이동하는 데 큰 무리가 없다고는 하지만, 도시 밖에서는 무슨 일이 일어날지 모르는 일.
이동하는 상인이나 사람들을 노리고 습격해오는 도적 떼는 아무리 토벌을 한다고 해도 없어지지 않는 제국의 골칫덩이다.
어지간한 영지군과도 자웅을 겨룰 수 있을 정도로 거대화된 도적집단도 있으니, 도적이라고 마냥 무시할 수는 없었다.
그 사실을 아는 기사들이 긴장된 눈으로 가도를 주시하기를 얼마나 됐을까.
두두두두.
거친 말굽 소리와 함께 어둠에 잠긴 가도 저편에서 무엇인가가 급하게 다가왔다.
* * *
제법 문양이 장식된 마차의 모습은 범상치 않은 신분의 사람이 타고 있음을 시사해 주었지만, 상태가 그리 좋지 못했다.
이리저리 상처가 난 외관과 마차를 호위하면서 달리는 기사들의 행색은 난처한 기색이 가득했고, 얼핏 핏자국마저 보이는 것이 악전고투를 치렀음을 시사해 주었다.
그 뒤를 쫓고 있는 수십의 무리는 검은색 일색의 복장에 두건마저 뒤집어쓰고 있는 것이 전형적인 도적의 모습이었지만, 드웨인과 하일은 그렇게 생각하지 않았다.
“도적들치고는 실력이 좋아 보이는군.”
“일반적인 도적 무리는 아닌 거 같습니다.”
둘의 대화를 들은 벡스터가 고개를 끄덕였다.
도적의 복장을 하고는 있지만 통일된 무기를 패용하고 있었고, 전원이 빼어난 기마술을 선보이는 모습은 기사들을 연상케 할 정도이니 일반적인 도적은 아니라고 확신할 수 있었기 때문이다.
마차와 말의 속력 차이 때문인지 도적들에게 따라잡히기 일보 직전인 그때, 마차를 호위하던 한 기사가 말머리를 돌려 도적들에게 돌격하는 모습이 보였다.
“저런.”
“······기사의 귀감이군.”
제법 뛰어난 실력의 기사였는지 들고 있는 검에서 오러를 번뜩이며 도적들을 난도질해 버릴 기세였지만, 도적들의 검에서도 분분히 솟구쳐 오른 오러가 순식간에 기사의 목숨을 앗아가 버렸다.
안타까운 최후였지만, 덕분에 마차는 거리를 벌릴 수 있었고, 방향을 바꾸더니만 일행이 자리 잡은 곳으로 달려들었다.
“쯧.”
“결국 이렇게 되는군요.”
타인의 위기를 보고만 있어야 하는 이 상황이 정의롭다고는 할 수 없지만, 그들은 엄연히 주인을 모시는 자들이다.
원치 않는 분쟁에 휘말리게 되었으니, 자연히 인상을 구길 수밖에 없었다.
위기라고 생각하는 기사는 없었다.
7기사단에서 정예로만 구성되어 있으니 자신들의 실력에 자신이 있었고, 드웨인의 실력은 믿어 의심치 않을 수준이다.
거기에 괴물 같은 아렌이 있으니 그 어느 누구도 걱정을 하지 않았지만, 세상사가 그렇게 쉽게 흘러가지는 않는 법이다.
타인의 분쟁에는 끼어들지 않는 것이 만수무강의 지름길임을 다들 알고 있는 것이다.
차차차창.
어느덧 말의 울음소리가 들릴 정도로 가까워진 마차를 보면서 기사들이 검을 빼 들었다.
삼엄하기 짝이 없는 예기가 솟아오르는 모습에 낭패한 기색의 인물들이 속도를 줄였다.
다시금 따라붙기 시작한 도적들도 만만치 않아 보이는 일행의 기색에 주춤하는 모습을 보였을 정도.
“도움을 요청하오!”
기사들의 리더 격으로 보이는 중년의 기사가 피투성이가 된 모습으로 외쳤다.
당장이라도 뛰쳐나가서 무도한 도적 무리들을 응징해야 마땅하지만, 하일은 경거망동하지 않았다.
“소속을 밝히시오. 그 이상 다가선다면 좌시하지 않겠소.”
살기마저 내뿜는 하일의 모습에 피투성이의 기사가 흠칫하고, 다른 기사들이 원망스러운 눈빛을 쏘아 보냈지만, 이내 고개를 끄덕인 중년인이 다급한 어투로 외쳤다.
“로랑 자작가의 기사 엘버트요. 공자님을 모시고 이동 중에 습격을 당했소!”
마차를 지키던 기사 하나가 흙먼지로 엉망이 된 마차 표면을 문지르자 가문의 문장이 드러났다.
하일의 뒤편에 있던 기사 하나가 품에서 조그마한 책자를 꺼내더니 펼쳤다.
“맞습니다.”
문장을 확인한 기사의 말에 하일이 고개를 끄덕이더니 큰 소리로 외쳤다.
“본인은 그라인드 백작가의 기사인 하일이오. 요청을 수락하겠소.”
“오오!”
하일의 외침에 로랑 자작가의 일행들이 안도의 함성을 질렀다.
이대로라면 자신들은 물론이고 공녀까지 위험한 상황이었는데 딱 봐도 만만치 않아 보이는 무력집단이 자신들의 손을 들어준 것이다.
귀족은 귀족의 위험을 모른 척하지 않는 것이 오래된 관습이다.
자신의 이름을 밝힌 귀족을 돕는 것은 당연한 일이니 하일이 아렌의 허락 없이 요청을 수락할 수 있었던 것이다.
“사람 사는 곳은 다 비슷하군.”
아렌의 중얼거림에 베로아와 벡스터가 의문 서린 표정을 지었지만 아렌은 입을 열지 않았다.
그가 무림에 있던 시절에도 길을 나서면 이런저런 분쟁에 휘말리고는 했는데 이곳도 딱히 다를 것이 없다는 생각을 한 것이다.
“뒤쪽의 도적들에게 고한다! 상황이 이렇게 됐으니 오늘은 이만 물러가라! 뒤쫓지 않겠다!”
하일의 외침에 로랑 자작가의 기사들이 불만 어린 표정을 지었지만, 아렌의 수행하는 입장에서 불필요한 분쟁을 원치 않는 하일은 그들의 반응을 전혀 개의치 않았다.
어느덧 야영지를 포위한 도적들이 하일의 외침에 흠칫거리며 서로를 쳐다보던 그때, 도적들 사이로 누군가가 걸어 나왔다.
굳건해 보이는 신체와 정련된 기세에 하일은 흠칫했고, 드웨인의 눈빛이 묘해졌다.
“정말 일개 도적이 아니군.”
놀랍게도 마스터의 초입에 다다른 드웨인과 비교해 봐도 뒤지지 않을 정도의 실력자가 도적 떼에 섞여 있었던 것이다.
소드 마스터라고 한다면 제국의 어느 곳에서든 대우를 받는다.
작위와 식음은 물론이고 명예까지 남부럽지 않게 쥐어지는 것이 소드 마스터라는 경지인데, 그런 실력자가 한낮 도적일 리 없는 것이다.
거기에 전원 오러 유저로 이루어진 도적 떼라는 것은 듣도 보도 못했으니, 이들의 정체가 범상치 않은 것임을 짐작할 수 있었다.
“꽤나 귀한 분이 있으신가 보군.”
도적들 사이에서 걸어 나온 마스터의 입가에 비릿한 미소가 걸리더니만 강렬한 기세가 뿜어져 나왔다.
“으음!”
“큼!”
공간을 압도하기 시작한 마스터의 기세에 모두의 얼굴이 굳어지며 불편한 신음을 내밀었지만, 그것도 잠시.
쿵!
드웨인이 발을 한번 구르자 지면에서부터 일어난 기세가 마스터의 압력을 상쇄시켰다.
“제법이군.”
뜻밖의 기예에 마스터의 안색이 꿈틀거리는가 싶더니 이내 살벌한 미소가 피어올랐다.
“저놈은 내 거다.”
입맛까지 다시며 번들거리는 눈동자로 자신을 가리키는 적의 모습에 드웨인의 눈가가 꿈틀거렸다.
“어차피 목격자는 없어야 하니까.”
동시에 도적들 사이에서 누군가가 걸어 나왔고, 그 모습을 본 드웨인의 눈가에 경악이 떠올랐다.
“마스터가 둘?”
조금은 마른 체구의 중년인의 몸에서도 날카로운 예기가 솟아올랐고, 그 모습에 모두가 침음을 삼켰다.
평생 가도 만나기 힘들다는 소드 마스터가 셋이나 이 자리에 모인 것도 놀라운데, 그중에 둘이 적으로 나타났으니 이 자리의 위험함을 직감한 것이다.
“우리를 살려 둘 생각이 없나 보군.”
굳은 표정으로 묻는 하일의 모습에 두 번째 마스터가 비릿한 웃음을 지었다.
“입이 많으면 언젠가는 소문이 나겠지. 안됐지만 너희들 역시 이 자리에서 죽어줘야겠다.”
전혀 미안하지 않은 표정을 짓고 있는 모습에 로랑 자작가의 기사들이 절망 섞인 표정을 지었다.
원래부터도 밀리고 있던 전력인데 거기에 두 명의 마스터가 가세했다고 생각하니 빠져나갈 길이 없어 보인 것이다.
“그럼 나도 부담이 없겠군.”
그 순간 나른한 목소리와 함께 아렌이 느릿하게 걸어 나왔다.
“허어!”
“······사로잡아서 재미 좀 볼까?”
제아무리 어둑한 시야라지만 아렌의 미모는 빛을 잃지 않았고, 그 화려한 모습에 감탄사가 여기저기서 터져 나왔다.
마른 체구의 마스터가 아렌을 보며 입맛을 다시는 모습에 드웨인의 눈동자가 치켜 올랐다.
“무엄한 놈이 감히!”
당장이라도 짓쳐 들어가려는 듯 드웨인의 몸에서 오러가 불처럼 일어나던 그때.
와지직!
뼈가 우그러지는 소리와 함께 마른 체구의 마스터의 얼굴이 사라져 버렸다.
푸확!
머리를 잃은 목에서 분수처럼 피가 솟아올랐고, 갑작스런 사태에 모두가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 파악을 못 하고 멍한 표정을 지었다.
오득.
유독 커다랗게 들린 소리로 모두의 시선이 모였고, 그곳에는 아렌이 조각나 버린 쿠키를 입으로 가져가는 모습이 보였다.
“입은 만 악의 근원이지.”
태연히 중얼거리는 아렌의 모습에 방금 전 마스터의 머리를 날려버린 것이 누구인지 확인한 장내에 경악이 감돌았다.
“헛!”
“말도 안 돼!”
비명과 경악의 시선 속에 홀로 태연히 쿠키를 오물거리고 있는 아렌의 모습을 본 하일이 조심스럽게 물었다.
“······설마 쿠키로 날려버리신 겁니까?”
대답은 없었지만 가볍게 손을 흔드는 아렌의 모습에 하일은 말을 잊지 못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