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he Count's Youngest Son Is a Player RAW novel - Chapter 286
제286화
“정말 많이 변해 버렸구나.”
“시간도 많이 흘렀고, 다른 세상에서 고생도 많이 했을 테니까.”
라울과 라벨은 세계수가 있는 원소 정글 중심부를 지나 동쪽으로 향하고 있었다.
저 멀리 그들을 감시하는 듯한 엘프들의 기척이 느껴졌지만, 신경 쓰지 않았다.
“과거에는 그래도 순수한 마음을 가진 이들이었거늘. 변화가 필요한 것은 맞지만, 영 좋지 않은 쪽으로 변해버린 듯하니 안타까워.”
“그러게. 저렇게 까칠하게 굴어서 좋을 건 없을 텐데 말이지.”
오크와 드워프, 그리고 이제 엘프까지 만나 본 라울은 확신했다.
이미 커넥트의 주류는 저들이 아니라 인간이라는 사실을.
오크는 머릿수가 많고 육체적인 능력이 뛰어나지만, 조직이나 사회적인 부분에서 너무 뒤떨어져 있었다.
드워프는 역시나 기술적인 부분은 훌륭했지만, 인구가 너무 부족하고 지하 생활에 너무 익숙해져 있는 상황.
그리고 엘프는.
‘인구가 가장 적고, 폐쇄적이고, 고압적이고, 유연성이 없다. 강자들이 생각보다 많기는 하지만….’
글쎄. 퍼스트 길드와 플레이어들을 총동원한다면, 과연 저들이 막을 수 있을까?
과거 대전쟁 시대라면 모를까, 인구가 억 단위를 넘어선 지금의 커넥트 왕국들을 상대로 엘프들이 끝까지 자존심을 지킬 수 있을지는 의문이었다.
‘굳이 왕국까지 갈 것도 없지. 당장 제국을 상대하는 것도 벅차하고 있으니까.’
조금 전 있었던 라벨과 엘프들의 협상 과정에서 이미 눈치챘다.
엘프들은 제국의 파상공세에 제대로 대응하지 못하고 있었다.
“그나저나 정령들의 폭주라. 원인이 뭐라고 생각해?”
라울이 묻자 라벨이 살짝 어두운 표정으로 대답했다.
“원인이야 여러 가지가 있을 수 있겠지. 금역과 게이트, 거기에 귀환한 엘프들의 마나까지 섞이며 마나의 질이 혼탁해졌다는 것. 그리고 제국 측의 마법사나 소환술사들이 손을 썼을 수도 있고. 하지만 가장 가능성이 높은 건….”
요정들이 개입했을 수도 있다는 것.
엘프들이 요정들을 찾아 헤매고 있던 이유였다.
라울이 손가락을 뻗어 라벨의 머리를 살짝 쓰다듬어 주었다.
“괜찮아. 별일 아닐 거야. 만약 정말로 그들에게 문제가 생긴 거라면, 내가 가만있지 않아.”
“고마워, 라울. 그렇게 말해줘서.”
원소 정글에 출몰하는 정령형 몬스터들은 엘프들이 귀환한 뒤, 그들에게 확실히 복종하는 듯했다.
엘프들의 친화력이 높은 이유도 있었고, 그들을 통제해 오던 타운트리와 세계수가 엘프들의 손에 넘어갔기 때문이다.
그런데 엘프와 제국 간의 전투가 시작되며 문제가 생겼다.
정글의 정령형 몬스터뿐만 아니라, 엘프들과 계약한 정령들까지 통제를 벗어나 폭주했던 것이다.
그들은 적아 구분도 제대로 하지 못한 채 공격적으로 변했고, 최후의 순간에는 자폭까지 해버렸으니.
엘프들의 전투력 중 절반 가까이를 차지하는 정령술이 봉쇄된 순간, 제국이 승기를 잡는 건 정해진 수순이었다.
덕분에 엘프들은 원소 정글의 1/3을 제국에게 내어주었고, 지금도 간신히 그들의 공격을 막아내고 있었다.
요정 여왕이라는 라벨이 직접 모습을 드러냈음에도 엘프들이 적대감을 보였던 데는 그런 이유도 있었으니.
‘뭐, 나라도 의심할 만하긴 했지. 하지만 그렇게 날을 세울 필요가 있었을까.’
결과적으로 엘프들은 라울과 라벨의 호의를 얻지 못했다.
어쩌면 현재 커넥트 대륙에서 제국 다음으로 가장 큰 영향력을 지닌 그들을 끝까지 무시한 것이다.
‘다 제 복인 거지. 나야 딱히 손해 볼 것도 없고.’
라울이 원소 정글에서 원한 것은 바로 ‘세계수의 수액’이었다.
레그나토르의 봉인을 풀기 위해 드워프 대족장 타르오가 요구한 것이다.
원래라면 드워프들처럼 그들에게 필요한 것을 챙겨줄 생각이었다.
고대 세계수의 화석.
과거 대전쟁 시대에 묘목만을 남긴 채 고사한 진짜 세계수의 잔해.
그것이 현재 제국이 차지한 타운트리 근처의 던전에 잠들어 있었다.
‘그게 있으면, 아직 제대로 성장하지 못한 세계수가 급격하게 자라날 수 있단 말이지. 하지만 이제 그건 넘겨줄 생각이 없어.’
세계수의 수액을 조금만 나눠주길 부탁한 라벨을 향해 엘프 족장 멜리쉬는 차가운 거절의 말을 꺼냈다.
“미안하지만 그 부탁은 들어줄 수 없겠네요. 아직 세계수가 너무 어려서 채취할 수 있는 수액의 양이 너무 적을뿐더러, 정령들이 문제를 일으키는 바람에 쓸데가 많아졌거든요. 정 수액이 필요하시다면, 먼저 폭주한 정령 문제를 해결해 주셨으면 좋겠네요.”
그 말을 들은 라벨은 자신의 귀를 의심할 수밖에 없었다.
적어도 그녀가 기억하는 엘프들은 거래에 있어서 담백했다.
한데.
‘고작 작은 병에 들어갈 수액을 대가로?’
세계수의 수액.
분명 귀한 물건이긴 했다.
하지만 세계수가 어떤 나무인가?
하늘을 뚫어버릴 것 같은 거대한 세계수가 아무리 어리다 한들, 거기서 채취되는 수액의 양은 결코 작은 게 아니었다.
솔직히 말해서 엘프들에게는 그냥 줘버려도 문제없을 흔한 물건.
아무리 옛 친우들에게 호의를 가졌던 라벨이라 해도 화가 나지 않을 수 없었다.
얼굴이 굳어진 그녀가 입을 열려는 순간.
「진정해. 수액 따위 없어도 그만이야. 대신 이렇게 말해주겠어?」
호흡을 가다듬은 라벨이 말했다.
“좋아. 정령들에게 무슨 일이 생긴 것인지 알아봐 주마. 대신 나와 라울이 원소 정글을 돌아다니는 걸 막지 않았으면 좋겠어. 그 정도도 양해하지 못하겠다면, 나도 더 이상 너희와 할 말은 없다.”
“그 정도야 뭐. 인간이 우리 영역을 돌아다닌다는 게 영 불편하긴 하지만, 여왕님의 얼굴을 봐서 허락해 드리지요. 대신 세계수의 근처에 접근하는 건 불허합니다. 그리고 우리 전사장 몇이 여왕님을 호위, 크흑!”
고고한 자세로 말하던 멜리쉬가 갑작스럽게 덮쳐오는 거대한 기운에 깜짝 놀라 뒷걸음질 쳤다.
휘리리링!
푸홧!
스킬도감 위에 떠오른 라벨과 어느새 그녀의 곁에 다가온 라울.
그들이 갈무리했던 기운을 아낌없이 풀어버렸다.
8서클 마스터를 넘어 9서클을 넘보던 요정 여왕의 절대적인 힘.
상급 염동술과 마스터 상급의 끝자락에 다다른 라울의 힘이 레그나토르에 의해 증폭되며 주변으로 퍼져나갔다.
“크헉, 이 무슨!”
“아, 아무리 여왕이라지만…!”
아까 정령을 물릴 때 보여줬던 힘은 그저 맛보기에 불과했다.
초인이라는 지고한 경지에서도 끝을 바라보는 절대자의 기세는 아무리 엘프들이라 해도 쉽게 감당할 수 있는 것이 아니었다.
나름 정예로 보이는 엘프 전사들 대다수가 심장을 부여잡고는 무릎을 꿇었고, 그나마 허리를 뻣뻣하게 세우고 있는 건 하이엘프 멜리쉬와 몇몇 장로들뿐이었다.
‘계산 착오다. 설마 이 정도 힘을 가지고 있을 줄이야!’
멜리쉬의 얼굴에는 당혹스런 표정이 떠올랐다.
이럴 줄 알았으면, 제국과의 전장에 나가 있는 대전사장들을 대동했어야 했다.
식은땀이 흐르는 손으로 레이피어를 뽑아 든 그녀가 흔들리는 눈동자로 라벨을 바라보고 있는 그때.
휘리릭.
“커헉.”
“쿨럭.”
언제 그랬냐는 듯, 거대한 힘은 자취를 감추고 있었다.
“감히 누구를 호위하겠다고? 멀리서 지켜보는 정도는 허락해주마. 하지만 내 일에 끼어들 생각은 하지 말거라.”
안경을 고쳐 쓰며 내뱉는 라벨의 말에 멜리쉬는 그저 고개를 끄덕일 수밖에 없었다.
라벨은 뭔가 한마디 더 해주려다 이내 몸을 돌렸다.
그리고 지금.
한참을 동쪽으로 걸어온 라울과 라벨의 눈에 거대한 호수의 끝자락이 들어왔다.
“아아…!”
라벨의 입에서 탄식이 흘러나왔다.
마침내 돌아왔다.
수천 년이 지난 지금에서야 그녀가 눈물을 흘리며 등진 고향, [다소스 숲]을 눈에 담을 수 있게 된 것이다.
다소스 숲은 눈앞의 호수 북동쪽 끝자락에 경계를 맞대고 있었다.
그리고 그곳은 현재 제국의 손에 들어가 있는 상태.
만약 몸을 피했던 동족들이 무사하다면, 지금쯤 저 숲 어딘가에 숨어 있을지도 몰랐다.
만약, 그들이 제국의 손에 들어갔다면….
‘아냐, 그럴 리 없어.’
적어도 이 숲은 요정족의 요람이었다.
이 숲이 그들을 기억하는 한, 쉽게 인간들의 눈에 띄지도, 그들에게 잡힐 리도 없었다.
“괜찮아, 라벨. 가서 직접 확인해보자.”
자신도 모르게 떨고 있던 라벨의 어깨를 감싸주며 라울이 따뜻하게 말했다.
떨림을 멈춘 라벨이 굳은 표정을 지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 * *
“흐암. 오늘은 좀 잠잠하군.”
“그러게. 며칠 동안 귀찮게 굴더니, 이제야 현실 파악을 좀 한 모양이지.”
타운트리 외곽의 목책에 올라서 있는 제국군 병사들이 한담을 나누고 있었다.
엘프와의 전투는 제국군의 우세 속에 이어지고 있었다.
모종의 방법을 통해 정령을 봉쇄한 이상, 엘프들의 전력은 급감했다.
정면충돌로는 제국의 강력한 기사단과 마병, 언데드를 이겨낼 수 없었던 엘프들이 선택한 것은 게릴라전.
그들의 또 다른 장기인 활을 통해 엘프들은 제국군을 괴롭혀왔다.
거점을 빼앗긴다 해도, 그들이 쉴 시간조차 주지 않겠다는 듯 장거리 저격을 이어왔고, 실제로 효과가 없지는 않았다.
제국군 병사들이 밤낮없이 목책 위를 지켜야만 했으니까.
“하지만 정말 멍청하군. 정말로 그런 방식으로 우리를 막을 수 있다고 생각하는 걸까?”
“그러게. 결국 뺑이 치는 건 우리 같은 말단뿐이지, 기사분들은 전혀 신경도 안 쓰잖아. 어차피 진짜 목책을 넘을 용기도 없는 겁쟁이 놈들이.”
엘프들의 저격에 재수 없는 병사 수십이 죽어 나가긴 했지만, 전력에는 전혀 영향이 없었다.
어차피 병사들은 기사들의 수발을 들고 잡일을 하기 위한 존재였으니까.
실제 전력은 기사, 마법사, 마병, 언데드 병사였다.
하지만 병사들도 딱히 불만은 없었다.
어쨌든 직접 창칼을 휘두르지 않을수록 생존율은 더 높아지는 것이었으니.
“근데 언제쯤이면 이 지긋지긋한 곳에서, 응?”
“왜 그래?”
“저기 누가 걸어오는 것 같은데?”
“에이. 이런 대낮에 귀쟁이들이 모습을 드러낼 리가…. 뭐지?”
너무나도 당당하게 걸어오는 모습에 당황한 것일까.
병사들은 라울의 모습이 명확히 보일 때까지 경계종을 울릴 생각도 하지 못했다.
“인간?”
촤라라라락!
그리고 그게 제국군 병사의 마지막 유언이 되었다.
라울의 무기 군단이 제국군의 소규모 점령지를 무자비하게 휩쓸었다.
“D급 개척지인가? 병사가 천 명도 안 되는군.”
라울이 타운 트리의 중심부에서 주변을 둘러보며 중얼거렸다.
원소 정글 초입에는 고등급 개척지만 잔뜩 깔려 있더니, 이렇게 깊은 곳에는 소규모 개척지라니.
참 아이러니한 일이었다.
‘덕분에 편하게 손에 넣기는 했지만.’
라울이 타운트리의 심장에 자신의 마나를 불어넣어 개척지의 소유권을 넘겨받았다.
“도, 도대체 무슨 생각으로 우릴 공격한 것이오? 이 근처에는 우리 제국군이 쫙 깔려 있다는 걸 모르는 모양인데….”
“쉿. 조용히. 아직 안 물어봤어.”
라울이 미소를 짓자 제국군 하급 장교 제복을 입은 이가 눈을 질끈 감고는 입을 다물었다.
그는 이 개척지에 살아남은 유일한 생존자였다.
다른 지휘관들도 상당수 포획했지만, 자살한 이도 있었고, 금제 때문에 몸이 터져 나간 이도 있었다.
‘마법사가 있었다면 제일 좋았겠지만.’
고급 병력일수록 금제가 강한 듯했다.
사로잡히는 순간 폭탄처럼 터져버렸으니까.
궁금한 게 많았던 라울로서는 하나 남은 이 장교를 잘 구슬려야 했다.
“자폭하지 않은 걸 보니, 살고 싶은 생각이 많은가 봐?”
“무, 물론입니….”
“입은 다물고 내가 말하라고 할 때만 말해. 나머지는 고갯짓으로 표현하고. 너도 저놈들처럼 터져버리면 곤란하잖아.”
라울이 눈짓한 곳에는 갈기갈기 찢어진 로브 자락과 핏물이 샘을 이루고 있었다.
“믿을지는 모르겠지만, 나는 그 금제를 풀 수 있는 방법이 있거든? 그러니까 대답만 잘하면, 살려주도록 하지.”
장교가 미친 듯이 고개를 위아래로 끄덕거렸다.
라울이 만족한 표정으로 몇 가지 기본적인 것들을 그에게 물어봤다.
딱히 거짓말하는 기색 없이 순순히 고갯짓으로 표현한 장교에게 라울이 마지막으로 물었다.
“그래서 도대체 무슨 수로 엘프들의 정령술을 무력화한 거지? 혹시 알고 있는 게 있나?”
장교의 눈동자가 사정없이 흔들렸다.
그러다 조심스럽게 그의 시선이 어딘가로 향했다.
아까 자폭한 마법사의 사체가 흩어진 근처였다.
라울이 핏물 사이를 헤집다가 무언가를 꺼내 들었다.
‘마법 주머니인가?’
나름 고급 물품이었기에 폭발의 여파를 견뎌낸 모양이었다.
라울이 조심스럽게 안에 들어 있던 물건을 꺼내는 순간.
“꺄악!”
라벨이 창백한 안색으로 비명을 지르며 정신을 잃고는 스킬도감 안으로 빨려 들어갔다.
라울은 자신도 모르게 입술을 질끈 깨물었다.
작은 병 안에는 핏물이 묻은 요정들의 날개 수십 장이 빼곡하게 담겨 있었던 것이다.
(다음 편에서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