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he cries of the black clothed swordsman RAW novel - Chapter 35
35. 달빛 가르기.
1.
소림사의 방장은 처음 맞이한 초로승처럼 인자한 미소로 맞아줬다. 향긋한 차를 내주며 숭산의 새소리가 들리는 가운데 짧은 담소를 나눈 후, 찾아온 목적이 뭔지는 끝내 묻지 않은 채 일어서서 탑림으로 안내했다.
탑림, 소림사의 조사동과 더불어 신비로움으로 강호에 알려진 곳이다. 그 초입에서 소림사 방장승은 합장례를 보이고 돌아섰고, 탑림의 안에서 또 다른 불호가 들려왔다. 현산 자신을 부르는 소리가 분명하다.
‘느낄 수 없다.’
탑림 안에서 들려온 분명한 불호, 그것을 낸 주인을 느끼지 못했다.
지금도 느껴지지 않는다.
그런데 분명히 존재함이다.
불호로서 불렀다.
‘누가······’
심중의 파문을 누르며 현산은 걸음을 냈다.
신비로운 산안개가 휘도는 탑림의 소로를 따라 이리 저리 걸어 들어갔다.
계속 귀에 들리는 불호를 좇아서다.
그런데 소리만 들릴 뿐 아직도 존재감은 인지되지 않는다.
‘과연 소림인가······!’
현산은 두려움과 비슷한 감정을 느꼈다.
처음이다.
그런데 이걸 정확히 두려움이라고 할 수는 없겠다.
그런 협의의 감정이 아니다, 그보다는 큰 것이다.
경외라고 해야 할까, 소림의 진면모를 본 충격 같은 거다.
“아미타불.”
마침내 불호의 주인을 찾았다.
탑림을 흐르는 안개품은 대기의 흐름 속에서도 종적을 찾거나 구분할 수 없던 인물, 낡은 승포의 노승이다.
합장한 손 안쪽에 대나무로 엮은 빗자루를 품고 있다. 음성이 잔잔하다.
“힘들고 먼 길을 가는 놈이로구나.”
탑을 향해 합장한 모습이던 노승은 느릿하게 돌아섰다.
수염 없이 주름만 가득한 얼굴엔 짓궂은 미소가 어려 있다.
손자를 보는 할아버지의 미소 같다.
그렇다고 순간적으로 느낀 현산은 고향집의 조부를 떠올렸다.
‘할아버지······’
한번도, 단 한 번도 자신을 향해 저런 미소를 보인 적이 없는 할아버지.
“설호귀란 이름이 좋으냐?”
노승은 천천히 다가오며 묻는다. 여전히 미소를 품은 얼굴이다.
그 걸음이 다섯 걸음 정도를 남겨두고 눈앞에 와서 멈췄을 때 현산은 대답했다.
“원해서 듣는 이름이 아닙니다.”
정중하고 당당하며 담담한 대답, 노승은 고개를 주억거리며 흥얼거리듯 말한다.
“그래, 세상 천하에 그러한 자가 어디 있겠느냐? 남들이 불러주는 것이 이름이지. 그러니 그 이름을 짊어지고 사는 인생이 고달프고 힘든 게고.”
현산은 반론을 뱉었다.
“힘든 자들만 힘이 듭니다. 그게 세상입니다.”
현산을 돌아본 노승은 의미모를 미소를 씨익 피워내며 다른 소릴 했다.
“네놈을 이리 데려다 준 방장 아이가 내게 사손이 된다.”
현산은 미간을 좁혔다.
소림사의 주장승이 사손이 된다면 눈앞의 노승은 배분으로 강호에 맞설 이가 없는 인물이다. 아니 그런 것보다도 놀라운 건 저 건재함이다.
도대체 세수가 어찌 되는 지 짐작조차 안 된다.
“귀신을 보는 것 같으냐? 네놈 눈이 그렇구나?”
어린아이가 장난을 칠 때 짓는 것 같은 미소로 노승은 이어 말했다.
“그래, 오래 살았다, 볼꼴 못 볼 꼴 다 보면서 참으로 오래 살았지. 그러니 어린놈이 세상에 대해 아는 척하면 우스운 걸 넘어 가슴이 아프다.”
노승은 현산을 측은한 눈으로 바라본다.
“제가 아는 것만으로 세상을 재단하고 평가하는 놈.”
미간에 골을 그리는 현산을 보는 눈이 다시 장난기 어린 미소로 바뀐다.
“뭐, 나도 그랬지.”
씨익 웃어버리는 노승을 응시하다 현산은 물었다.
“누구신지 알고 싶습니다.”
노승은 웃는 얼굴로 고개를 저었다.
“필요 없다.”
몸을 돌린 노승은 느릿한 걸음을 옮긴다.
산책을 나서는 것 같은 걸음, 빗자루를 지팡이 삼아 걷는다.
탑림을 도는 그 걸음을 현산은 따라갔다.
“이름하나를 또 짊어질 필요 없다. 네놈과 빈승과의 인연은 이것으로 족하다. 뭐, 나는 네놈 이름을 아니까 네놈이 손해이긴 하다만, 어쩌겠냐?”
걸음을 멈추고 현산을 돌아본 노승은 또 예의 장난기 가득한 미소를 씩 짓는다.
“그게 세상이란 걸 네놈이 누구보다 잘 알지?”
현산이 반응하기도 전에 다시 몸을 돌린 노승은 걷던 걸음을 이어내며 말한다.
“칼질하려고 소림을 찾아온 네놈이 고울 리가 없다. 그것도 잘 알지?”
현산의 반응과 표정이 어떻거나 말거나, 애초에 그런 건 안중에도 없는 노승은 계속 말했다.
“어젯밤에 별을 보고 네놈이 올 것을 알았다. 제기랄 것이, 전에는 미리미리 읽어내던 것인데, 네놈이 오는 건 하룻밤 전에야 알았단 말이지.”
또 걸음을 멈춘 노승은 현산을 돌아보며 들이대듯 물었다.
“네놈, 무당으로 가려다가 소림으로 갑자기 마음을 바꿨지?”
묵묵한 눈으로 노승을 응시하던 현산은 말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캬하, 그럼 그렇지, 내 별점이 틀렸을 리가 있나?”
좋아하던 노승은 이내 표정을 구겼다.
“빌어먹을, 무당의 늙은 귀신이 좋아하겠구나. 제 놈에게 갈 호랑이가 내게로 왔으니 좋아 죽을 것이야. 에잇, 그 빌어처먹을 도사놈 운도 좋지.”
표정과 말은 험한데 눈빛은 그게 아니다, 무당의 늙은 귀신이라고 칭한 존재에게 정을 품고 있다. 그렇다는 걸 현산은 분명하게 느끼고 있다.
“아무튼.”
자신의 말을 자르고 또 고개 돌려 현산을 보는 노승은 그렇게 말없이 바라보기만 했다. 그래서 현산이 미간을 조금씩 좁히는데 툭 말한다.
“싸우고 싶냐?”
현산의 미간에 그려진 선명한 내천자, 그 위로 풀어져 나오는 시퍼런 안광으로 노승은 답을 찾았다. 고개를 끄덕이며 진중한 미소를 풀어낸다.
“묻는 놈이 바보지.”
그렇다, 현산이 소림을 찾아온 이유는 바로 비무다.
강호무림의 태산북두, 겨뤄보고자 왔다.
다른 이유란 없다. 소림과 원한을 진 것도 없고 우열을 가리자는 것도 아니다.
그저 비무다. 흑설무의 완성을 위해서다.
“될 것 같으냐? 힘들 텐데? 애들 붙여주랴?”
다시 장난기 미소를 흘리며 말하는 노승, 현산은 진중한 눈으로 상대를 보며 생각했다.
흐름을 읽고 하나가 되는 자신이 인지하지 못한 존재, 눈앞의 노승은 추측하지 못할 고수다.
이기리란 확신이 전혀 없다.
그렇지만 이런 존재와 싸워야 진정한 길을 찾아갈 수 있다.
여태 그래왔다.
예전의 현산 자신이라면 절대로 이길 수 없는 존재들, 객관적으로 싸워선 안 되는 자들, 그런 자들과 싸우며 길을 찾았고 이겼고 강해졌다.
“호, 눈빛이 독해지는 구나? 그래, 한번 얼러보랴?”
노승은 흥미가 동한 미소로 승포 자락을 가볍게 떨치며 뒤로 물러났다.
그 모습을 보고 서 있던 현산은 정중하게 고개 숙여 인사한 후 칼을 잡았다.
우웅 하고 떠는 흑천, 그 울음을 희열로 전신에 받으며 뽑았다.
후웅, 하는 강기가 묵빛 도신을 타고 솟았다.
넉자의 검신 보다 한자가 길게 나온 도강의 형체, 그걸 보는 노승의 눈이 반짝였다.
하지만 여전히 미소 그대로다.
그렇다고 아이의 재롱을 보는 할아버지의 눈도 아니다.
“칼질 해 봐라.”
툭 내뱉는 노승의 말, 그 미소를 향해 현산은 흑설단천의 일도를 후렸다.
하늘에서 땅을 갈라 내리는 것 같은 기세, 묵빛 도강이 수직을 갈라나갔다.
그 한가운데 노승이 있었다.
그런데 깃털이 밀리듯 스르르 밀린다.
벼락같은 소리를 뒤로 내며 도강은 바위를 갈랐다.
탑림의 북쪽 끝, 숭산으로 이어진 산길의 좌우에 성문처럼 존재하는 바위, 두부처럼 갈라졌다.
“아이고, 아까워서 저걸 어쩌나?”
노승은 바위를 돌아보고 호들갑을 떤다.
“숭산을 지키는 수문장 같은 놈인데, 나보다 더 오래 살아서 귀신같은 놈인데, 하아, 이젠 오줌 갈기지 말라고 떠들진 않겠지만, 에구 안됐어라.”
현산은 노승을 보며 어금니를 악물었다.
‘분명, 흘러갔다.’
분명히 그랬다.
노승의 환영 같은 움직임은 절대로 신묘한 경공신법이나 보법이 아니었다.
소림의 전설인 연대구품을 펼친 것이 아니다.
말 그대로 그냥 흘렀다.
현산 자신의 공격을 피해, 아니 그 힘에 밀려났다.
‘흐름······!’
그것이다. 노승은 현산 자신이 가는 길, 흐름의 도를 알고 있다.
아는 정도가 아니라 저렇게 펼친다.
여전히 빗자루를 잡은 모습으로 저리 웃는다.
비웃음이 아니다. 흥겨운 거다.
그렇게 말하고 있다.
너만 아냐고.
“뭐하냐?”
노승은 짜증내듯 그렇게 물어놓고 갑자기 배를 쓰다듬는다.
“어 시장한걸, 야 이놈아, 뭐 먹고 할래?”
눈썹을 떨던 현산은 천천히 흑천을 갈무리했다.
* * *
전서를 읽어 내려간 목철강은 회심의 미소를 지었다.
‘사마경, 네가 할 일을 제대로 해주고 있구나.’
의도대로 됐다.
설호귀 현산의 종적을 쫓으며 참담한 열패감을 씹고 있을 그에게 길을 열어줬다.
혈왕지검, 그 보다 강력하고 확고한 길이 어디 있을까?
사마경은 만들어준 길로 숨어들어 혈왕지검을 훔쳐 달아났다.
‘벽파검문의 제자 사마경, 화산은 청성이 훔쳐갔다고 할 테지.’
이로서 화산과 청성에게 약속한 공평한 사후 처리는 물 건너갔다.
화산은 청성을 욕할 테고 청성은 그걸 듣고 있을 리 없다.
이미 시작했고 돌이킬 수 없는 강을 건넌 두 문파, 죽고 죽일 터다.
그래야 다 가진다.
‘둘로 나눈 태을비급 진서, 백 년 전 나눈 반쪽 비급.’
회심의 미소를 지으며 목철강은 중얼거렸다.
“그렇게만은 재미없지. 잔치는 화려하고 클수록 좋은 거니까.”
크고 화려한 잔치, 이제 시작됐다.
혈왕지총에 든 사마경에겐 천리추종향이 배어있다.
놈은 그걸 모르고 혈왕지검을 훔쳐갔지만 이제 알게 될 터다.
혈왕지검을 노리는 강호의 승냥이들, 그 이빨을 피해 달아나야 한다.
“크하하하하!”
호탕한 웃음으로 기분 좋게 가슴을 편 목철강은 이내 인상을 찌푸렸다.
팽가와의 연수도 훌륭하게 마무리 짓고 돌아온 지금 가슴을 무겁게 하는 것은 부례감 정일요다. 그의 하얀 얼굴과 붉은 입술이 어른거린다.
‘정일요······!’
그자가 위험하다. 목철강 자신의 속을 더듬고 있다.
그대로 두면 반드시 위협이 될 자다.
대사의 큰 그림을 완성하기 이전에 그를 제거해야 한다.
그렇지만 그는 짐작이 어려운 자, 그러나 그렇기 때문에 해야 한다.
‘반드시······!’
이를 무는 목철강에게 그 순간 호출이 들어왔다.
“부례감께서 보자 하십니다.”
시큰 거리게 어금니를 물었다 푼 목철강은 옷자락을 떨치며 일어섰다.
* * *
군자의 복수는 십년이 걸려도 늦지 않다고 했다.
그렇다, 설호귀 현산에게 복수하자면 십년 이십년이 걸릴 지도 모를 일이다.
그렇더라도 반드시 이뤄야 한다.
하지만 걱정은 화산과 청성이 그를 죽일까 하는 것이다.
‘그럴 일은 없어.’
단호한 마음으로 사마경은 단정을 내렸다.
전대의 화산오검과 청성칠자가 죽은 마당이다.
혈천의 근거지인 밀은사에서는 이십사수 매화검사들과 청풍검사들이 도륙 당했다.
설호귀는 그들이 죽일 수 없는 존재다.
‘사천에서 보았을 때만 해도······!’
설호귀 현산, 기억하는 그자는 이처럼 엄청난 강자가 아니었다.
화산 벽송자의 검에 죽을 고비를 겨우 넘기던 자였다.
그런데 이렇게 변했다.
과연 그에게 어떤 일이 있었던 것인지 헤아림은 이 시점에서 무용하다.
‘복수를 이루는 것, 그것만이야······!’
으득 소리가 나게 이를 악물었다 푼 사마경은 품안의 비급을 어루만졌다.
혈왕지검, 그것을 손에 넣었다.
혈천주 매진홍이 가졌던 것, 화산과 청성의 고수들조차 힘겹게 했던 것, 대성을 이루면 이길 수 있는 것이다.
‘설호귀까지!’
부르르 어깨를 떨던 사마경은 순간 살기를 감지했다.
모르는 척 반점 안의 상황을 살폈다.
청해로 가기 위해 밟은 섬서 땅 북변, 장성을 멀지 않은 곳에 이고 있는 변경, 나주(蘭州)를 남으로 둔 백은(白銀) 시가에 어인 살기일까.
‘안팎으로······!’
상황이 심각함을 사마경은 깨달았다.
반점의 안과 밖에 수십의 무림인들이 모여들었다.
생각에 잠겨 있느라 빨리 깨닫지 못한 상황, 위험하다.
무엇 때문인지 모르지만 저들은 자신은 노리고 있다. 살기가 요동친다.
“사자검 사마경.”
굵은 목소리로 호명하며 한 사내가 구석에서 일어섰다.
가죽털배자를 겹으로 입은 자, 흉악한 악귀 이빨 같은 거치도를 지닌 자다.
그가 제 자릴 벗어나 다가온다. 그 주변으로 비슷한 복장의 사내들이 에워싸 온다.
“네놈이 가진 혈왕지검을 바치면 목숨만은 살려주겠다.”
거치도 사내의 말, 이 상황이 무엇인지 사마경은 알았다.
그래서 주저하지도 지체하지도 않았다.
박차고 일어서며 검을 뽑아 섬전을 뿌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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흑천의 칼이 울어. 35. 달빛 가르기(2)
2.
탑림 안쪽에 위치한 움막은 허름하기 그지없다.
정동의 조부가 머물던 곳을 연상케 한다.
아니 그보다 더 오랜 세월이 쌓여있음을 느끼게 하는 곳이다.
노승은 이곳에서 보통사람의 일생이 넘는 시간을 보냈음이다.
“측은하다든가 뭐, 그런 생각을 하고 있지는 않겠지?”
놀랍게도 노승은 닭을 구워 내놓으면서 그렇게 묻는다. 불제자가 불살생의 계율을 어기며 육식을 하는 것도 놀랄 일이지만. 장난기와 짓궂음이 든 저 눈과 표정은 정말이지 기묘한 낭패감을 가지지 않을 수 없다.
“네놈이 지금 엉덩이를 틀고 앉은 이곳에 바로 북망암이다. 저승으로 가는 길목에 자리 잡은 암자다 이 말이지. 어서 빨리 가야 지 하는 바람으로 여기 앉았는데, 제기랄 것이 이 날이 되도록 못가고 있다 이거야.”
닭다리를 찢어 현산 앞의 나무소반에 던지듯 놓은 노승은 계속 말했다.
“빈승의 신묘영통한 법술로 따지고 계산한 영감의 확신으로서 공들여 지은 북망암이다. 그 안에 네놈이 들었구나. 난 이게 우연이 아니라 생각한다. 암 아니지. 네놈은 칼을 휘두르는 놈, 북망을 지고 있는 놈이지.”
심각하고 진중한 눈빛으로 말하는 노승, 그러나 그게 지나쳐 오히려 장난으로 확신되는 수작, 그렇다는 걸 알리듯 노승은 낄낄대고 웃는다.
“으헤헤헤헤!”
소림방장의 사조가 되는 인물이라곤 생각할 수 없게 경박한 웃음, 노승은 손에 쥔 닭다리를 뜯으며 화주까지 마신다. 술 단지를 파내 옆에 뒀다.
“어떠냐? 내 말이 맞는 것 같지? 귀에 훅 들어오지?”
현산과 마주 앉은 것이 즐거운 건지, 아니면 참으로 오랜만에 다른 이와 말을 섞고 있는 것이 좋아서 그러는 건지, 노승은 연신 웃음을 터트린다.
그러나 그 모습 속에서 현산은 노승의 진면모를 분명히 보고 있다.
“특별한 날에 왔기에 특별 손님 대접 받는 줄 알아라.”
가득하던 웃음을 거두며, 엷은 미소만을 남긴 얼굴로 노승은 투박한 나무잔을 들어 화주를 단숨에 넘겼다. 그리고 히죽 웃는 얼굴로 중얼거린다.
“특별하다면 어느 한 날 특별하지 않은 날이 있을까, 부질없는 구분이지······”
화주를 다시 채운 노승은 현산을 똑바로 응시했다. 그렇게 말없이 바라만 보다가 미간을 찌푸렸다. 그리고 또 한동안 보다가 입을 열었다.
“네놈에게 달라붙은 악귀들의 아우성이 천지를 진동하는 구나.”
표정 변화 없이 바라만 보는 현산의 눈, 묵묵하고 깊이를 가늠하기 힘든 그 시선을 바라보던 노승은 다시 피식 웃으며 혼잣말하듯 말한다.
“까짓 무슨 상관이랴. 다 돌아가는 대로 돌아가는 것을.”
다시 화주를 넘긴 노승은 현산을 다시 응시하고 말하기 시작했다.
“네놈이 무슨 짓을 하든, 무슨 마음을 품고 있든 알바 아니다. 그러지 말라고 말하는 것도 부질없고 그러라고 부추기는 것도 마찬가지다. 모든 것은 제가 결정하고 행하는 것, 그렇게 역사가 만들어 지는 것이지.”
현산은 말없이 듣기만 했다.
“세상천하가 그렇게 돌아감이다. 세상 속에 사는 이들, 무수한 그들의 삶이 모여 나라와 세상의 역사가 되는 것이다. 빈승도 그 안에 있고 네놈도 그 안에 있지. 그저 작은 점하나에 불과하다. 그러나 때론 작은 점들 중에 하나가 큰 요동을 일으키지. 그로인해 세상이 바뀌기도 하고.”
다시 입을 닫고 현산을 응시하던 노승은 느릿하게 입을 열었다.
“네놈이 세상을 바꾸는 놈이든 아니든 상관없다. 그 칼로 후려 가르며 제대로 망쳐놓을 놈이라도 마찬가지다. 그걸 따지는 것도 무용하다. 세상은 내놓아야 할 때에 내 놓기 마련이고, 지워야 할 때에 지우는 법이니까.”
흐릿한 미소를 피워낸 노승은 물음을 던지듯 말을 잇는다.
“네놈에게 했던 말, 헛소리라고 생각하지? 그래 맞다, 늙은 중놈의 헛소리지. 볼꼴 못 볼 꼴 다 보면서 오래 살았으니까, 그래서 어린놈이 세상에 대해 아는 척하면 우스운 걸 넘어 가슴이 아프다, 제가 아는 것만으로 세상을 재단하고 평가하는 놈이란 말, 죽지 못한 자의 헛소리다.”
노승의 얼굴에 미소가 사라졌다. 농기를 찾을 수 없다.
“세상을 살며 그 안에서 겪고 찾은 것을 그 누가 옳다 그르다 할까, 그럴 수 없다.”
빈 나무잔을 화주로 채운 노승은 역시 단숨에 들이켰다. 그리고 예의 얼굴로 돌아갔다. 농과 장난기가 든 얼굴, 다시 내는 말도 역시 그렇다.
“죽죽 그어라, 닥치는 대로 갈라버려. 어, 그러면 참으로 볼만하겠다.”
* * *
“헉, 헉, 헉.”
가쁜 숨을 몰아쉬며 웅크린 사마경은 주변을 빠르고 날카롭게 살폈다.
백은 시가를 빠져나와 당도한 이곳은 신둔천(新屯川), 천 하나를 끼고 관군의 둔영이 있던 곳이다. 지금은 버려져 갈대만 무성한 귀역이다.
‘죽일 놈들이······!’
도대체 어떻게 안 것일까?
사마경 자신이 혈왕지검을 가졌다는 걸 어찌 알고 개떼처럼 달려든단 말인가?
반점에서 처음 베어버린 섬서칠흉 말고도 무서운 강자들이 뒤를 쫓고 있다.
이건 마치 행로를 아는 것 같다.
‘전설의 사냥견 천구(天狗)라도 앞세운 것이냐?’
그렇지 않고선 이렇게 뒤를 쫓아 올수가 없다.
처음부터, 종적이 드러난 것 자체가 이해할 수 없는 일이지만, 피신행로를 이처럼 귀신같이 따라 붙는 것은 놀랍다.
마치 사마경 자신이 꼬리를 흔들어 알려준 것 같다.
‘도대체 뭐야?’
인상을 악귀처럼 일그러뜨린 사마경은 야음에 휩싸인 신둔천 전경을 눈에 넣으며, 혹시 모를 위험요소가 없는지 살피며 호흡을 가다듬었다.
팔에 입은 상처는 잘 동여매 지혈한 덕분에 걱정할 것 없지만 이후가 문제다.
‘청해를 목적지로 삼은 행로, 바꾸어야 하나?’
좁힌 미간으로 사마경은 고심했다.
청해가 아닌 다른 곳이라면 어디로 가야 할지 막막하다.
서북변경이라면 어디든 자신의 고향처럼 여겨지는 곳이지만, 그 밖의 중원 지방들은 낯설고 물 설은 타향처럼 여겨짐이다.
그런데 지금 그런 걸 따질 때가 아니다.
어디든 안전한 곳으로 가야 한다.
따지고 보면 초행이 아닌 곳이 어디 있을까, 일신을 숨기고 목표를 이룰 수 있는 곳으로 가야 함이다. 동북변경이든 남쪽이든 그것이면 된다.
‘혈왕지검만 대성을 이루면······!’
통증이 일도록 이를 악물던 사마경은 눈을 치떴다.
갈대밭을 헤치며 다가오는 그림자들이 보인다.
거침없는 움직임들, 이내 살기의 고성을 지른다.
“사마경! 혈왕지검을 내놓아라!”
안면을 부들거리며 일어선 사마경은 검을 움켜잡고 다시 뛰기 시작했다.
* * *
술자리의 침묵, 견디기 힘든 고문 같다.
호출해 놓고 이렇게 말없이 술잔만 넘기는 의도가 뭔지 모르겠다.
짐작은 된다.
목철강 자신의 꾸미는 일이 뭔지 알고자 함이다.
불안한 예감을 품었기에 정일요는 저러고 있다.
“팽가에 다녀온 일은 언제 말할 참인가?”
드디어 나온 정일요의 목소리, 목철강은 차분하고 담담하게 대답했다.
“보고서를 작성 중에 있었습니다만, 지금 말씀드리겠습니다.”
하얀 얼굴의 정일요는 붉은 입술을 핥으며 술잔을 입에서 뗐다.
차갑게 반짝이는 그 눈을 모르는 척 하며 목철강은 준비했던 말을 꺼냈다.
“팽가가 차지한 항주의 제반 상황을 면밀히 살핀 후 방문을 결정하였습니다. 서창의 후원을 받던 혈도방의 궤멸 후 항주는 온전히 그들 가문의 것이 된 상황, 팽가의 의지를 살피는 동시에 경고의 행보였습니다.”
“경고라······ 함부로 날뛰지 마라? 그랬다가는 동창과 서창과 대내행창은 물론 금의위 전력을 동원해서 확실하게 짓밟아 주겠다? 그랬다는 거냐?”
차가운 미소의 정일요를 응시한 목철강은 고개를 다시 숙이며 말했다.
“칼끝을 들이대는 그러한 경고에 팽가가 눈 하나 깜짝할 가문이겠습니까마는, 어찌되었든 경고성 견제가 필요하다는 판단을 했습니다. 서투른 생각으로 서투른 행동은 한다면 후환이 작지 않을 것이라는 걸 알려야했지요. 팽가가 그걸 모르겠습니까마는, 역시 하북의 호랑이다웠습니다.”
“그 말은 무슨 뜻이냐?”
“팽가의 방문에는 다른 목적도 있었습니다, 설호귀와 관련한 사안을 확인하고자 함이지요.”
“설호귀에 대한?”
“그렇습니다. 알고 계시겠지만 설호귀는 대역죄인 황병기와 동료였습니다. 화산의 추적을 피해 동북 변방으로 도주하던 때부터, 혈도방을 궤멸하는 일을 같이 했습니다. 그자들 일행이 항주에 남아 있었습니다. 그 사정을 팽가로부터 알아내려 했습니다만, 놀라운 이야기를 들었습니다.”
“놀라운 이야기? 팽가로부터?”
“그러합니다. 팽가주 팽부경의 말에 의하면 그자들, 황병기와 장운을 비롯한 왕정과 태웅호라 하는 자들은 항주를 벗어났습니다. 은밀하게 도주한 것입니다. 그것을 알았지만 팽가는 개의치 않았다 합니다. 계륵과 같은 자들, 차라리 잘되었다는 생각인 겁니다. 그러한 이유가 다름 아닌······”
“다름 아닌? 설호귀가 만들어 내는 분란과 관련한 것이다?”
단번에 핵심을 짚는 정일요를 힐긋 응시한 목철강은 계속 말했다.
“그 부분입니다. 설호귀의 행사에 그들의 존재가 더해진 사태악화에의 바람······ 팽가는 현재 강호에게 일어나 진행 중인 분쟁을 다른 시각으로 보고 있었습니다. 언제고 터져야 할 것이 터진 것이다란 시각이었습니다. 그건 막으려 해도 막을 수 없는, 민란의 불길로 번질 것이라는······”
“무슨 개소리야!”
버럭 소리치며 분노를 드러낸 정일요는 하얀 얼굴을 일그러뜨리고 으르렁 거렸다.
“민란이라니? 강호무림에서 분탕질 하는 수작을 민란으로 가져가? 씹어 먹을 팽가놈들! 제 놈들의 바람이 그렇다는 것이 아니냐! 그리되면 저희가 기회를 가질 테니까! 우리가 흔들리기를 바라는 개수작 헛소리지!”
거친 욕설을 뱉으며 흥분을 드러냈던 정일요는 이내 냉정을 찾았다.
“그래서? 그런 소리를 듣고만 있었다는 것이냐? 뜻하지 않은 놀라운 소리라고?”
목철강은 고개를 숙이며 입을 열었다.
“팽가의 시각에 상당한 개연성이 있다고 판단하고 있습니다.”
“뭐라?”
눈썹을 뒤틀어 올렸지만 다시 흥분하진 않는 정일요, 목철강은 차분히 말했다.
“각지에서 민란은 이미 일어나고 있습니다. 제대로 수습하지 않으면 진실로 큰 민란이 생겨날 것입니다. 그러한 마당에 강호무림인이라 하는 자들이 칼을 들고 피를 내며 싸운다면, 그러한 분쟁을 나라가 제대로 막고 다스리지 못한다면, 민란을 일으키는 무리도 다스릴 수 없음입니다.”
정일요는 곤두세운 눈썹 끝을 미세하게 떨었고 목철강은 계속 말했다.
“팽가가 바라는 그림이 이뤄지도록 할 수 없습니다. 그들, 내각대학사 측이 바라는 바는 오직 하나가 아니겠습니까? 그러한 마당인데 동창과 서창은 반목하고 대내행창과도 상호 견제하는 마당입니다. 이대로는 팽가가 말한 대로, 그리는 그림대로 이뤄질 것입니다. 아니 될 일입니다.”
꿈틀거리는 눈매로 목철강을 응시하던 정일요는 붉은 입술을 열었다.
“팽가에서 그런 조롱과 냉소를 받고 왔다는 말이구나. 그들이 바라는 그림이 그려지도록 내버려 두어서는 절대로 안 된다, 이제라도 전력을 기울여 제대로 대응해야 한다, 그리하자면 설호귀를 반드시 해결해야 한다······”
차가운 눈빛을 흘려내며, 혼잣말 하듯 핵심결론을 말한 정일요는 웃었다.
“크흐흐흐흐.”
소름이 돋게 만드는 기묘하고 차가운 웃음, 그 끝에 정일요는 다시 입을 열었다.
“이미 강호에 개입하기로 한 마당, 한발을 더 내미나 물리나 다를 것은 없겠지. 중요한 것은 누구의 발을 얼마만큼 내미느냐는 것인데, 더는 구경만 하고 있을 수가 없는 것이야. 그렇지? 본관이 나서야 하겠지?”
목철강에게 물음처럼 말하며 정일요는 웃었다.
소리 없는 웃음이다.
그러며 목철강을 바라보는 눈빛은 칼날처럼 차갑다, 마치 네 속에 무엇이 들었는지 다 안다는, 그렇지만 놀아준다는 것 같은, 그런 웃음과 눈이다.
정일요의 시선을 받으며 목철강은 고개 숙인 채 술잔을 들었다.
‘그래, 날 가지고 놀 수 있다고 생각하면서 놀아봐라. 네 앞에 설호귀를 데려다 주마. 그자의 칼 앞에서도 그렇게 웃을 수 있는지 지켜보겠다.’
시선 내린 목철강과 하얀 미소의 정일요는 술잔을 거듭 넘겼다.
* * *
“찾아왔으니 대접은 확실하게 해 주마.”
씩 웃으며 그렇게 말한 노승은 끄응 하는 소리로 일어섰다.
움막을 나가는 그를 따라 현산도 나섰다. 그러며 보니 탑림 저편에서 누군가 걸어오고 있다.
노승처럼 기척을 전혀 느낄 수가 없는 자, 젊은 승려다.
“아미타불.”
바람에 실어 보내듯 불호를 읊은 노승은 현산을 돌아보고 또 씩 웃는다. 짓궂음이 가득 든 얼굴과 미소, 자랑을 하듯 오는 자에 대해 말한다.
“무심(無心)이라는 법명을 준 놈이다.”
무자배라면 소림방장과 같은 항렬이다. 일반적이지 않다. 그렇다면 저 젊은 승려는 노승의 제자이거나, 소림에서 특별히 키운 인물임에 분명하다.
“내가 가진 것들을 전해 준 놈이다만, 비루한 그것들을 넘어 제가 깨우쳐 나가야 할 놈이지. 아마도 잘 해낼 것이다. 그러니까 네놈은 조심해야 한다. 왜냐고? 비루하다고 한 내 가르침이 엄청나 거니까 말이야. 알지?”
그리 말하고 커다랗게 웃은 노승은 뒤로 빠진다.
흥미진진한 눈으로 바라본다.
어디 한번 피터지게 싸워봐라, 좋은 구경하자, 그런 얼굴이다.
‘대접.’
현산은 이제 확실히 알았다.
손님대접이다. 소림은, 노승은 그걸 해주고 있다.
애초부터 이것이 목적이었다.
고맙다는 말 따위는 할 필요 없다.
걸음을 멈춘 젊은 승려를 보며 현산은 흑천을 천천히 뽑았다.
#
흑천의 칼이 울어. 35. 달빛 가르기(3)
3.
“어디로 갈 것인지 확실히 정하고 이동하는 게 좋겠습니다.”
태웅호의 단호하고 결의에 찬 음성이 일행의 지향 없는 발길을 세웠다.
이제는 그렇게 하자는 제안, 그의 얼굴을 향해 돌아선 황병기는 헐렁한 왼팔 소매를 바람에 흔들며 잠시 시선만 던졌다. 그러다 고갤 끄덕였다.
황병기의 그 반응을 신호로 일행은 관도변의 나무아래 자리 잡고 앉았다.
“화주 한 모금씩들 하시겠습니까?”
반점에서 받아온 술병을 내밀고 태웅호는 일행들의 의중을 물었다.
왕정이 제일 먼저 한 모금을 넘겼고 그다음 장운이 마셨다.
하지만 황병기는 입에 대지 않았다. 마지막으로 태웅호가 마시는 걸 보며 입을 열었다.
“설호귀 현산, 그는 우리의 동료였소. 그와 같이 역경을 헤쳐 나왔던 기억이 아직도 생생하오, 그러나 현시점에서 설호귀 현산과 우리가 같이 무언가를 해야 하는가 하는 것에는 깊은 성찰이 필요하오. 그렇소, 그에겐 우리가 필요 없소, 함께라면 필경 그에게 우리는 짐이 될 것이오.”
모두가 귀 기울여 듣고 황병기는 진중하게 목소릴 이어냈다.
“그러나 우리는 이야기했소, 언젠가 그를 다시 만날 날을 위해 준비를 해야 한다고, 그것이 무엇인지 분명하게 정하거나 찾지 못한 채로 이렇게 행보하고 있소. 그러나 다들 심중에 들어앉은 형상들이 있을 것이오.”
심중에 들어앉은 형상, 다 있지만 어느 한사람 그것이 무엇인지 명확하고 구체적으로 말하지 못하는 것, 그러나 이제는 그것을 이야기 할 때다.
“강호무림에 우리가 끼어들 자리는 없다고 봅니다.”
왕정이 툭 하고 내민 말, 이제 말들 해보라고 자리 깐 황병기의 의지에 반응하며 나온 한마디, 그것은 무용함을 버리고 유용함을 찾자는 거다.
“그렇습니다. 현협사의 행보에 짐이 될 우리가 그 뒤를 따라감은 아니 될 일입니다. 각자 남은 일생을 살자고 흩어지는 것이 아닌 바에는, 말은 안했지만 다들 흉중에 품은 것으로 이리 뭉쳐 걷고 있는 마당이니······”
거기까지 말하고 단호한 눈빛을 흘려낸 태웅호는 남은 말을 냈다.
“목숨을 걸 가치가 있는 일을 해야 합니다.”
황병기는 신중하고 깊은 눈으로 시선을 던졌고 장운은 무거운 숨을 내쉬었다.
그 속으로 왕정이 다시 목소릴 넣었다. 제 흉중에 품은 것이다.
“풍문이 돌고 있습니다. 우리가 이렇게 잠행하며 흘려들은 풍문이지요. 가벼이 바람결에 날려가는 이야기인 것으로 여겨집니다. 세상 천하게 그렇게 생각하고 있습니다. 이런 풍문이란 게 언제나 그렇듯 사람들의 염원을 담은 것이니까요. 그렇지만 확인해 볼 필요가 있다고 봅니다.”
무겁게 가라앉은 눈으로 왕정은 뒷말을 냈다.
“영왕 신호(宸濠)가 군사를 일으키려 한다는 풍문, 그곳으로 가지요.”
침묵이 내려앉았다.
견고하고 무거운 침묵, 그 속으로 찬바람이 헤집고 지나간다.
황병기의 빈 소매는 더욱 펄럭거린다.
그 펄럭임 끝에 침묵은 밀려난다.
무겁게 입술을 닫고 있던 장운, 검자루를 움켜잡고 말한다.
“목숨을 걸 일이라면 더 큰 가치가 있어야 할 것이야.”
왕정은 눈썹을 뒤틀어 올렸다.
“썩어빠진 세상을, 기울어져 가는 나라를 혁파하고 새 세상을 만드는 일이 아닙니까? 그만큼 가치가 있는 일이 어디 있습니까? 현협사가 강호무림의 썩은 몸뚱일 베어내는 일과 다를 바 없습니다. 그렇지 않습니까?”
태웅호도 거들고 나섰다.
“혁명에 동참해 이 한목숨을 바치고 싶습니다. 구차하게 목숨을 연명하려 하지 않고 당당하게 싸우겠습니다. 해야 할일을 찾는 것, 그것이 현협사가 알려준 것이 아니겠습니까? 남은 삶은 그걸 이루며 살겠습니다.”
뜨거운 숨을 몰아 내쉬는 태웅호, 역시 뜨거운 눈의 왕정, 그들을 응시하고 말이 없던 황병기가 입을 열었다. 내도록 가슴에 품고 왔던 의지다.
“그 길로 가야 한다면 나는 방향을 달리 가리키고 싶소.”
왕정과 태웅호는 미간을 좁혔고 장운은 무표정으로 듣기만 했다.
“영왕 신호, 그는 확실히 현 정세를 바꿀 수 있는 가능성의 인물이오. 그러나 그는 황족, 보좌에 오른다면 현 황제 주후조와 다를 것이 없소.”
좁힌 미간을 꿈틀하는 왕정과 태웅호의 시선 속에 황병기는 말을 이었다.
“그가 선정을 펼치고 태평성대를 이룬다면 더없이 좋을 일이지만, 그런 일은 일어나지 않을 것이오. 내 목을 걸고 장담하겠소, 절대로 없을 일이오.”
암울한 빛으로 바뀌는 왕정과 태웅호의 눈길을 붙잡으며 황병기는 계속 말했다.
“영왕 신호에겐 작금의 시대가 그야말로 절호의 기회가 맞을 것이오. 황음무도한 황제와 간신배들이 날뛰는 조정, 원성이 높아져 터져 오를 것 같은 민심, 이러한 환경을 그가 모를 리 없고 놓치려 하지 않을 것이오.”
황병기는 강한 눈빛으로 뒷말을 이어냈다.
“모르긴 몰라도 다른 황족들 역시 같은 생각을 품고 있을 것이오. 하지만 그렇기에 그 기회를 그들이 잡아선 안 될 일이오. 절대로 아니 될 일이오.”
황병기의 목소리는 뜨겁게 흘러나왔다.
“영왕이든 누구든 주후조의 자리를 차지해 황제가 된다면 천하는 바뀌지 않을 것이오. 백성들은 다시 도탄 속에서 신음할 뿐이오. 간신배들은 옷만을 바꿔 입을 뿐이오. 그렇게 되어선 안 되오. 이 암흑시대를 끝내야 하오.”
왕정과 태웅호의 눈동자는 본래의 결의에 새로운 깨달음을 덮어쓰고 빛났다.
“하면, 생각해 두신 길이 있습니까?”
“어디로 가야 하겠습니까?”
고요한 눈길로 두 사람을 응시하던 황병기는 장운을 한 번 돌아본 후 대답했다.
“북경.”
* * *
고요함조차도 없다. 아무것도 느껴지지 않는다.
상대방은, 무심이라는 젊은 무승은 현산 자신처럼 흐름 속에 있다.
밟고 선 대지와 이고 있는 하늘, 그 속에선 인간이 아니라 하나가 되어 있다.
그래서 기쁘다.
‘진짜 비무를 하겠구나.’
흑천을 스르르 내린 현산은 땅에 꽂았다.
그 모습을 보고 노승이 호오, 하는 반응을 내고 있지만 의식하지 않았다.
시종 저렇게 무(無)와 공(空)처럼 있는 존재, 무심이란 승려에게만 집중했다.
고요히 흘러나갔다.
흐르는 바람 속으로 발을 낸 현산은 춤을 추기 시작했다.
흑설무의 흑설무(黑雪舞)다.
흑천을 놓아버린 손은 철사장의 환영을 풀어냈고, 도약하고 휘도는 두발은 와룡각의 그림자를 터트렸다.
그 모든 게 흘러넘쳤다.
황하의 범람도 같은 그 흐름 속에 휘말린 승려 무심도 같은 흐름을 일으켰다.
연대구품을 그려내는 흐릿한 신형으로부터 대력금강수와 여래신장과 금강나한권을 풀어냈다.
장강의 요동침과 같은 무서운 흐름이다.
“좋구나.”
감탄사를 흘려내며 노승은 두 사람의 박투를, 비무를 지켜봤다.
묻어두고 수십 년을 내벼려 뒀던 술 단지를 비워 거꾸로 엎어 놓으며, 흥겨운 웃음을 짓고 감탄의 빅수를 치며 날이 저물어 밤이 지나가도록 즐거워했다.
그리고 먼 어느 곳인가의 민가에서 새벽 첫닭이 홰를 치는 시간에, 숭산의 산새들이 고개를 드는 그때에, 앉은 모습 그대로 탈각의 길로 들었다.
그때에 흘려낸 마지막 음성은 바람을 타고 멀리 멀리 흘러갔다.
“한 세상 잘 살다 간다.”
새벽은 그렇게 물러가는 가운데 설호귀 현산과 소림승 무심의 비무는 흘러넘쳤다.
* * *
“크으······!”
허벅지를 지혈하고 동여매며 사마경은 분노와 고통으로 이를 악물었다. 몸 여기저기 박힌 암기들을 뽑아내고 해독약을 복용했지만 어지럼증이 삼해진다. 승냥이 떼 같은 강호무림인들의 추적과 공격은 지독하다.
‘죽일 놈들이······!’
이를 갈아보지만 소용없는 일이다.
사마경 자신에게 혈왕지검이 있다는 걸 아는 마당, 탐욕에 눈이 뒤집힌 저 무리를 어찌할 텐가, 모조리 죽이지 않는 이상 끝나지 않을 일이다.
그런데 그럴 능력이 현재로선 없다.
‘도대체 어떻게 귀신처럼 따라붙는단 말인가?’
아무리 생각해도 모를 일이다.
정말 사마경 자신한테 냄새라도 나는 것인지, 추적하는 놈들이 천고의 후각같은 걸 가진 것인지, 추적을 끊어낼 수가 없다.
갈수록 쫓는 자들은 많아지고 도망칠 길은 좁아지고 있다.
‘개 같은! 도대체 뭐가······’
이를 갈던 사마경은 순간 미간을 확 좁혔다.
‘가만 냄새? 정말로 냄새라면? 혹, 천리추종향 같은 거라면?’
그럼 답이 명확해진다.
사마경 자신은 모르지만 강렬한 냄새를 뿌리고 있는 거라면 개떼들이 달려듦은 당연하다.
그런데 냄새를, 천리추종향 같은걸 묻힐 일이 없다.
바보가 아닌 이상 그런 짓을 할 놈이 어디 있겠나.
하지만 본의가 아닌 타의, 인지하지 못하는 가운데 생겨난 일이라면 가능하다.
그럴만한 곳이라면 혈왕지총, 바로 그곳이다.
그렇다, 그곳에 들고 난 일은 생각보다 수월했다. 목숨을 건 일이었지만 성공한 것이다.
‘만일······ 동창의 안배에 놀아난 것이라면······’
좁힌 미간을 미세하게 떨던 사마경은 와락 인상을 구겼다.
‘놀아났구나······!’
그것이다. 꼭두각시 춤을 추고 있는 거다.
혈왕지검을 품고 달리는 이 상황을, 강호무림이 뒤집혀 요동치는 꼴은, 동창 놈들이 원하는 그림이다.
왜 그런 그림을 그리는 지는 정확히 모르겠지만, 이건 그런 것이다.
“죽일······!”
격노로 치를 떨던 사마경은 고개를 들고 눈을 치떴다.
청해로 넘어가는 길목에 위치한 이곳, 버려진 화전민의 터, 움집으로 다가오는 발소리가 선명하다.
의도적인 기척, 더는 털어낼 수 없는 추적자들의 살기다.
“사마경, 이제 그만 포기하고 나오너라.”
내력이 실린 목소리, 창주제일창 여몽휘다.
허벅지에 창날을 그어댄 자, 그를 필두로 강호의 개떼들이 몰려왔다.
천리추종향 때문임을 이젠 안다.
“혈왕지검을 내놓아라!”
거칠게 겁박하는 목소리는 강남군자검 소준걸이다.
어째서 저런 놈에게 군자검이란 별호가 붙었는지 모르겠다.
물론 그래서 강호무림이겠지만.
“그래, 더 피할 도리도 없는 마당, 해 보자······!”
사마경은 움막을 나갔다.
화전민들의 터전이 있었던 곳, 사방에 개떼들이 가득하다.
그들의 앞으로 창주제일창 여몽휘와 강남군자검 소준걸이 나와 있다.
물론 나서지 않고 개떼 속에 숨어 있는 고수들도 수두룩하다.
“호, 이제 포기하려느냐?”
강남군자검 소준걸은 차가운 비웃음에 이어 조롱의 말을 던진다.
“아무렴, 그래야지, 너 따위 놈이 감히 비급의 주인이 될 수 있겠느냐? 자고로 보물이란 하늘이 주인을 내는 법, 돌궐 종자가 넘볼 것이 아니다.”
악문 이로 덮인 입술과 뺨을 부들거리는 사마경에게 창주제일창 여몽휘가 연이어 말했다.
“혈왕지검을 내놓는 다면 목숨만은 보전할 것이다. 하지만 끝내 저항한다면 성한 육신으로 죽지 못할 것이야, 냉정하고 현명하게 판단해라.”
사마경은 분노로 부들거리는 시선을 돌려 다시 한 번 개떼를, 몰려든 강호무림인들을 봤다.
하나같이 탐욕으로 번들거리는 눈, 뜨거운 숨결이다.
제 것이 되지 않을 것을 알면서도 저리 달려든 자들, 이것이 강호다.
‘내가 태어나 살아왔고 죽어 몸뚱이를 뉘일 곳.’
하늘을 올려다보고 크게 숨을 들이마신 사마경은 갑자기 치밀어 오르는 웃음을 참지 못해 키득 거렸다.
그 모습이 창주제일창 여몽휘와 강남군자검 소준걸은 물론 군웅들 전부가 미간을 찌푸리고 기묘히 봤다.
“하나만 묻자.”
웃음을 겨우 다스린 얼굴로 사마경은 뒷말을, 물음을 던졌다.
“너희 중에 누가 혈왕지검의 주인이 될 것이라고 여기느냐?”
여몽휘와 소준걸은 미간을 깊게 좁혔고 군웅들도 주변을 돌아보며 그랬다. 이곳까지 달려오며 품었던 것이지만 새삼 현실로 솟아나는 것이다.
그렇다, 과연 누가 비급의 주인이 될 것인가, 사마경의 손으로부터 비급을 거머쥔 자는 과연 온전할 것인가다. 그자가 죽는 다면 그다음은 누가 될 것인가, 누군가는 결국 주인이 될 것인가, 아니면 죽음만 이어지는가.
“강한 자가 주인이 되겠지! 가질 자격이 있는 자가 주인이 되는 것이다!”
창주제일창 여몽휘가 강하게 소리쳤다.
마치 강남군자검 소준걸이 들으라는 것 같은 소리, 군웅들 속에 숨어 있는 고수들을 향해 던지는 소리다.
누구든 실력으로 쟁취할 수 있는 자는 나서라는, 그게 끝이란 의지다.
“흥, 화산과 청성이 없다고 기고만장이군.”
강남군자검 소준걸이 냉소를 뱉었다.
모두가 그 말에 동조하고 공감했다.
호랑이 없는 굴에 여우가 왕이라더니, 화산과 청성이 있다면 감히 내지 못할 소리다.
하지만 그들은 없다. 설호귀 현산에게 무참히 당했다.
“없는 자들을 거론할 필요 없다!”
창주제일창 여몽휘는 격하게 소리치며 창대를 내리쳤다.
내력이 실린 그 진동 소리가 파동처럼 퍼져나갔고, 군웅들은 긴장으로 입을 닫았다.
그렇지만 소준걸은 그러지 않았다. 여몽휘에게 빼앗길 수 없는 일인 거다.
“대호의 탈을 쓴다고 대호가 되지는 못하는 법!”
역시 내력을 실어 외친 소준걸을 여몽휘가 싸늘히 돌아봤고, 군웅들은 침을 삼켰다.
피할 수 없는 일, 사마경을 도모하는 일에 앞서 벌어지는 대결이다.
순서만 바뀌는 것일 뿐 정해진 일이었다. 이제 피를 볼 것이다.
“잘들 하고 있구나, 그게 동창이 바라는 모습이다.”
일촉즉발의 긴장 사이로 날아간 사마경의 한마디, 모두가 눈썹을 세웠다.
여몽휘과 소준걸과 군웅둘의 시선, 모두를 받아내며 사마경은 말했다.
“혈왕지총, 동창이 꾸민 것이다. 나를 미끼로 삼아 이처럼 큰 몰이를 하고 있는 것이지. 물어보자, 너희는 날 어찌 찾아냈느냐? 누가 가르쳐주었나? 사마경이 혈왕지검을 가지고 있다고, 천리추종향이 배어 있다고 누가 말해주었느냐? 모르지? 그냥 삽시간에 퍼진 소리지? 그래, 그럴 거다.”
사마경은 고개를 깊게 끄덕이며 차가운 조소를 풀어냈다.
그건 분명너희 전부는 바보 멍청이다 하는 의미, 여몽휘와 소준걸은 이를 물며 깨달았다.
냄새가 났지만 달려온 길, 놀아나고 있다는 자각, 그리고 현실이다.
“네놈이 뭐라고 지껄여도 달라질 건 없다!”
“비급을 내놓던지 목을 내놓던지 결정해라!”
여몽휘와 소준걸은 사마경을 향해 살기를 돌렸다.
그리고 바로 그 순간 비명이 울려 퍼지기 시작했다.
군웅들의 뒤로부터, 피와 살이 휘날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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흑천의 칼이 울어. 35. 달빛 가르기(4)
4.
해가 뜨고서야 알았다.
서로의 흐름이 만들어낸 광풍이 절정에 이르러 탑림을 뒤흔들어 놓은 다음에야, 그렇게 물러서 서로를 바라보는 가운데 깨달았다.
노승의 기운이 없다는 것, 일부러 지운 게 아니라는 것이다.
소림승 무심이 먼저 합장하며 물러섰다.
그가 돌아서는 곳, 노승이 좌정한 곳으로 가서야 확실히 알고 받아들였다.
노승은 좌화, 탈각했다.
그윽한 미소가 걸린 얼굴, 헤아리지 못할 의미가 담긴 마지막 얼굴이다.
무심이라는 법명이 그러해서인가 소림승 무심은 아무런 동요를 보이지 않았다.
합장하며 불호를 암송하는 가운데 할 일을 했다.
흡사 처음부터 정해진 일이었던 것처럼, 정해진 계획처럼, 차분하고 담담히 움직였다.
화장, 노승은 불가의 법도대로 화장을 했다.
준비되었던 게 분명한 나뭇단 위로 노승의 육신이 옮겨졌고, 무심의 독경소리에 맞춰 활활 타올랐다.
하늘로 오르는 연기 속에 노승의 짓궂은 얼굴이 보이는 것 같았다.
“아미타불.”
무심이 돌아서며 눈을 맞춘다.
무심하기만 한 그 눈을 응시하고 현산은 물었다.
목소리가 아닌 눈으로, 무엇을 묻고 있는지 모를 물음이었다.
“마음 가는 대로 하십시오.”
현산의 대답을 기다리지 않고 그리 말한 무심은 노승이 거처하던 움막을 가리켰다.
“없애지 말라고 하셨습니다. 필요한 자가 있다고 하셨지요.”
담담하고 무심한 그 말을 내고 무심은 다시 돌아섰다.
활활 타오르던 불길이 잦아들고 있다.
노승의 흔적을 응시하며 다시 합장하고 경을 왼다. 그런 무심의 뒷모습을 말없이 응시하던 현산은 돌아서 움집으로 향했다.
‘마음 가는 대로······ 필요한 자가······’
노승이 남겼다는 말을 심중으로 되뇌며 현산은 움집 앞에 섰다.
느릿하게 돌아서 숭산의 하늘 위로 올라가는 연기를 봤다.
점점 옅어져 가는 연기, 하늘과 숭산과 연기, 모두를 눈에 넣다 땅에 꽂아둔 흑천을 봤다.
‘마음이 가는 대로, 필요한 자로서.’
뭔가 심중에 박히는 모호한 의미를 붙잡으며 현산은 흑천을 향해 걸어갔다.
우웅, 하는 떨림으로 주인의 손길을 반기는 칼의 울음을 음미하며 되새겼다.
이 자리에서 하룻밤을 보내며 한 비무, 무심과의 겨룸을.
‘나의 흐름은······’
흑천을 움켜잡은 현산은 그대로 석상이 되었다.
탑림을 지나는 바람이 세차게 옷자락을 흔들어도, 산새들의 울음이 귀 아프게 퍼져 와도, 화두를 잡은 선승처럼 움직임이 없었다.
그 모습은 무심이 돌아보고 합장했다.
“아미타불.”
바람에 불호가 날려가는 속에서 현산은 자신의 마음속을 흐르고 흘렀다.
* * *
경악으로 눈을 치뜬 사마경은 충격 때문에 숨을 제대로 쉬지 못했다. 군웅들의 배후로부터 느닷없는 변고로서 들이친 그림자들, 그들이 뿜어내는 뇌성벽력 같은 검공의 무서움 때문이다. 강호의 개떼들이 휘날린다.
‘저!’
영혼이 얼어붙는 것 같은 경악 속에서 사마경은 위기를 인지했다.
강남군자검 소준걸이 그야말로 벼락처럼 달려들어서다.
사마경 자신처럼 창주제일창 여몽휘처럼 눈을 부릅뜨고 얼어붙어 있던 그가 검을 뻗어온다.
‘위군자놈!’
그럴듯한 군자검이란 별호가 아니라 위군자가 맞는 놈이다.
여우처럼 약삭빠른 놈, 이 순간에도 무엇이 이득이 되는 판단인지 가장 먼저 내렸다.
무시무시한 검을 휘두르는 공격자들 보다 먼저 혈왕지검을 취함이다.
“죽어라!”
기합처럼 소리치며 검을 뻗어내는 소준걸, 그리 외치면 주문이 되어 사마경 자신이 갈라지기라도 하는 것인지, 그러나 비웃을 수 없는 것이 놈의 검이다. 인후를 노리고 섬전으로 들어오는 검극은 이미 목전에 있다.
‘자라새끼!’
분노를 이 악물며 사마경은 신형을 비틀었다.
부운약표에 이은 환환미종보를 연이어 밟았다. 청성이 자랑하는 절기, 속가인 벽파검문에는 껍데기만을 전해 준 것이지만 피땀을 흘려 고련했다.
그 결과가 화끈하다.
목과 어깨사이로 스쳐간 소준걸의 검이 목표를 잃은 것을 알고 방향을 바꾸기 전, 사마경은 검과 하나가 되어 건곤검(乾坤劍)을 펼쳤다. 청운적하검을 염원했지만 속가이기에 가질 수밖에 없는 한계이자 최고다.
흐릿한 그림자로 돌아간 사마경으로부터 검광이 사선의 횡을 가르며 터져나갔고, 백원투도(白猿投桃)의 묘리로서 검을 돌림과 같이 신형을 돌리며, 원숭이가 복숭아를 던지듯 검극을 뻗어내려던 소준걸이 경악했다.
화끈함을 넘어서 충격 같은 것이 팔을 스쳐간 후에야 소준걸은 알았다.
자신이 졌다는 것, 사마경의 검이 검잡은 팔을 갈랐다는 것을 깨달았다.
“크악!”
휘청거리며 소준걸이 물러나는 그 찰나에 사마경은 배후의 살기를 향해 돌아섰다.
창주제일창 여몽휘의 무시무시한 창날이 바늘처럼 들어온다.
사자검이란 별호답게 포효할 시간이 없는 위기, 눈만 부릅뜰 뿐이다.
섬광이 우측으로부터 비상해온 것은 그 순간이다.
푸른 벼락과도 같은 그 힘이 여몽휘의 창을 강타했다.
황당하게도 여몽휘의 강철 창대가 잘라졌다.
창날이 떨어지는 그 찰나에 여몽휘의 머리도 눈 치뜬 채 떨어진다.
“원시천존.”
도호를 읊는 자, 눈앞에 나타난 사내를 사마경은 경악으로 얼어붙은 채 봤다.
창주제일창 여몽휘의 강철창을 자른 자가 이자여서다.
그것만이 아니라 목도 잘랐다. 푸른빛을 머금은 검, 저 검으로 만들어 낸 일이다.
‘검강투월(劍罡投越)!’
그거다, 분명이 그것이다.
도깨비처럼 목전에 나타난 이 자가 그리했다.
푸른 벼락같은 것의 비상, 그것은 이자가 도강을 날린 것이다.
여몽휘의 강철창이 잘린 것은 당연하다.
더 당연하게 수급이 떨어진 것도 그렇다.
‘누구!’
경악으로 얼어붙은 사마경은 제대로 생각을 할 수 없었다.
눈앞의 사내와 같은 복장의 인물들이 군웅들을 도륙하고 있다.
개돼지처럼 죽인다.
하나같이 푸른 벼락을 뿌린다.
검강이다.
그러한 자들이 십 인이다.
‘혼!’
흑의가슴에 혼(魂)자가 있다.
이 인물들의 정체가 무엇인지 정말로 모르겠다.
그런데 눈앞의 인물이 도호를 읊었다.
이게 대체 무슨 일인가.
“그대가 사마경인가?”
여몽휘의 목을 벤 자가 물음을 던진다.
바로 그 순간 소준걸의 머리가 떨어지는 걸 사마경은 봤다.
잘린 팔을 붙들고, 주변의 도살극을 보며 공포에 밀려 휘청거리던 그가 도주를 택한 순간이다.
검강이 날아들었다.
바닥을 구르는 소준걸의 수급을 눈 부릅뜨고 보던 사마경은 떨리는 입술을 열었다.
“누구냐······?”
흑의 가슴에 혼(魂)자를 넣고 있는 인물, 서른 중반쯤의 사내가 대답한다.
“청성혼이다.”
사마경은 경악의 경직 속에서 또 다른 놀람과 충격을 받았다.
‘청성!’
분명 그렇게 들었다.
청성이라 했다.
아니 정확하게는 청성혼이라 했지만 어쨌든 청성이다.
도호를 읊은 이유다.
이들은 청성이 보낸 자들이다.
“사마경, 그대에게서 받아야 할 것이 있다.”
이어 나온 말, 청성혼이라고 존재를 밝힌, 도사인지 뭔지 신분을 특정하기 어려운, 무심하게 얼어붙은 호수 같은 기세의 인물에게서 사마경은 물러났다.
혈왕지검을 말하는 게 분명한 바, 누구에게도 내줄 수 없다.
“그게 선택인가?”
청성혼이란 자, 그의 눈동자가 빛을 내는 것과 같이 검에서도 빛이 난다.
그런데 그 눈과 검광이 다른 곳으로 돌아간다.
그곳에서 그들이 왔다.
* * *
“청성과 화산에서 은밀하지만 확고한 움직임이 있는 것으로 확인되었습니다. 설호귀 현산을 찾는 일과 혈왕지검을 훔쳐간 사마경을 추적하는 일입니다. 특이할 점은 그들의 신원을 확인하기 어렵다는 것입니다.”
마차를 향해 공손히 보고하던 목철강은 정일요의 냉소를 들었다.
그 의미가 사마경의 혈왕지검 탈취가 네가 꾸민 일이 아니겠느냐, 그따위는 따지고 싶지도 않은 수작이란 반응, 다 들여다보고 있다는 자신감이다.
“도사들을 확인한다는 것이 큰 의미가 있더냐? 화산과 청성의 골짜기에 숨어있던 도사놈들이 한둘일까? 화가 치밀어 몸부림들을 치는 것이지.”
목철강은 반응 하지 않고 고개만 숙였고 정일요는 마차 안에서 계속 말했다.
“알 수 없기에 더 무서운 자들이 그들인 것은 분명하지만, 그들이 중원천하의 주인은 아니다. 그러한 행세를 해서도 안 되고 할 수도 없음이야. 화산과 청성만이 아니라 소림과 무당, 강호무림의 그 누구도 마찬가지다.”
단호한 음성을 끊었던 정일요는 마차의 주렴을 걷으며 목철강을 응시했다.
“진정한 주인이 누구인지 그들에게 알려줘야 할 것이다.”
촤르륵 하고 다시 주렴이 내려지는 소길 들은 후 목철강은 고개를 들었다. 마차의 선두로 말배를 차고 나가 행렬을 돌아보고 강하게 소리쳤다.
“행군!”
정일요를 태운 가마를 보위하며 천무위 일천병력은 말을 달렸다.
* * *
움막 안에 깔린 거적에 노승의 체취가 배어 있다.
움막 전체에서 나는 세월의 냄새 말고 노승의 살아온 시간의 냄새다.
그 위에 앉아 현산은 눈을 감았다.
손을 뻗으면 닿을 사방벽을 느끼고 그 안의 자신을 느꼈다.
이름도 모를 노승, 무심이란 무승이 알려주지도 않는, 그럴 생각도 없는 노승의 껍질이 뭔지 알려고 할 필요 없다.
그는 이 세상에서의 허울을 벗어버리고 다른 곳으로 갔다.
마지막 얼굴엔 초월자의 미소가 있었다.
얼마나 오랜 세월을 정진하고 깨우침을 거듭해야만 그렇게 될까 궁금하다.
그렇게 되고 싶다는 마음이 든다.
평화롭고 가볍게, 짊어진 모든 것을 털어내고 떠나가고 싶다.
어린 시절 꿈에서처럼 마차를 타고 싶다.
그런데 그게 될까.
그것이 정말로 원하는 것일까.
짊어졌다고 생각하는 것들은 정말로 있는 걸까.
그렇다면 그건 누가 지워준 것인가 스스로 짊어진 것인가.
노승처럼 가는 길이 정말로 원하는 것인가.
아니, 아니다.
지금 가는 길은, 현산 자신이 선택한 길이다.
흑천과 같이 가는 길이다.
노승이 말했듯이 누가 누구의 길을 재단하고 판단 할 수 없음이다.
이 길의 끝에서 무엇을 보고 만나게 될지 알 수 없지만, 가야 할 길이다.
‘간다.’
의지를 품고 앉은 현산에게서 뭔가 산란하기 시작했다.
빛 무리인 것 같기도 하고 흐린 연기가 퍼지는 것 같기도 한 것, 기운, 서기가 퍼진다.
그 기운은 점점 강해져 움막 안을 가득 채웠고, 현산은 스르르 떠올랐다.
* * *
군웅들의 시신이 참혹하게 널린 속으로 걸음을 옮겨온 자들이 누군지 사마경은 알았다.
화산이다, 하늘빛 저 도복은 분명 그들이다.
그런데 화산도사들 같지가 않다.
하나같이 젊은 걸 떠나서 저 기세가 무섭다.
‘화산도······!’
놀람과 충격과 두려움을 사마경은 삼켰다.
느닷없이 나타나 군웅들을 도륙한 청성의 존재들, 청성혼이란 자들과 마찬가지로 화산의 저 젊은 도사들도 특별하고 비밀스러운 존재다.
화산이 내놓은 마지막 힘인 거다.
‘전설 같은 검강지기를 저렇게 마음대로 구사하는 초강자들······!’
그렇다, 청성과 화산은 숨겨왔던 최후의 힘을 이제 내놓았다.
중원천하 아무도 모르던 최후비기를 드러낸 것이다.
그것은 다시 말해 화산과 청성이 존망의 위기라고 판단했다는 것, 죽이고 살아야 한다는 결정인 것이다.
“원시천존, 화산의 도우들은 인사가 은밀하구려.”
청성혼, 이 현장의 수좌가 분명한 인물이 그리 말하고 검광 같은 눈빛을 뿜는다.
“수인사를 할 처지는 아니고, 이곳에 온 이유는 묻지 않아도 알 터.”
이어내는 음성에 밴 차갑고 스산한 살기에 사마경은 자신도 모르게 물러났다.
그 살기에 반응하며 화산의 인물들 중 일인이 도호로 입을 연다.
“원시천존, 화산이 원하는 것은 원하는 대로 이루어짐이다.”
느릿하게 검을 뽑은 화산의 인물은 차가운 미소로 뒷말을 던졌다.
“빈도들은 화산의 삼천지문을 열고 나온 매화역사들이다. 살고자 하는 자들은 오체투지하고 간청하라. 그리해야만 살 수 있음이다.”
청성혼의 수좌가 그 순간 소리쳤다.
“청성혼을 밝혀라!”
십 인의 청성혼이 검강을 뿜어대며 움직였고 역시 십 인의 화산 매화역사들이 비상했다. 그들의 무시무시한 격돌을 보며 사마경은 부들거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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흑천의 칼이 울어. 35. 달빛 가르기(5)
5.
스르르 눈을 뜬 현산은 주변을 돌아봤다.
변한 것은 없다. 움막 안은 그대로다.
변한 것이라면 시간, 밖이 어두워졌다.
얼마의 시간이 흐른 것인지 모르겠다. 하루인지 그 이상인지, 분명한 것은 깊고 깊은 좌정이었다.
‘나의 길.’
움막 안 허공을 응시하고 심중의 것을 더듬은 현산은 흑천을 쥐고 일어섰다.
출입문 노릇을 하는 거적을 젖히고 밖으로 나가니 그가 있다.
무심, 법명처럼 무심한 얼굴의 그가 무심한 눈길로 응시하다 입을 연다.
“아미타불, 사흘이 지났습니다.”
현산은 밤하늘을 올려다봤다.
총총히 빛나는 별, 숭산을 내리비추고 하남 땅을 굽어보고 천하를 품는 하늘과 별이다.
그 빛이 더없이 온유하다.
“왔으니 가야 할 곳으로 찾아가는 길이라 하셨습니다.”
무심의 얼굴로 현산은 시선을 내렸다.
“그렇게 간다고 하셨지요.”
이어 나온 말, 노승의 마지막길이다. 빈 몸뚱이로 태어난 이 세상에서의 유랑을 끝내고 가야할 곳을 찾아 간다는, 갔다는 뜻, 이제 알고 있다.
“길을 찾으신 걸로 보입니다.”
무심의 눈동자에 처음으로 무심하지 않은 빛이 어렸다. 그러나 찰나에 사라졌다. 그런 무심의 눈에 의미를 두지 않고 현산은 물음을 냈다.
“소림은 가야할 길로 가고 있습니까?”
잠시 대답 없이 눈길만 던지던 무심이 입을 연다.
“소림만이 알 일입니다.”
선문답 같은 대답, 현산은 더 묻지 않았다. 다시 밤하늘을 보고 중얼거렸다.
“내 어릴 적 하늘도 저러했고······ 흑사자단으로 피 속을 구를 때도 저러했던······ 언제까지나 저러할 하늘 아래서······ 수많은 길이 얽히는 구나.”
느릿하게 시선을 내린 현산은 무심에게 시퍼런 안광을 풀어냈다.
손은 흑천을 잡으면서다.
그 의지를 받아들인 무심은 준비한 계도를 내민다.
“아미타불.”
합장례를 기수식으로 취한 무심의 전신에서 흐름이 요동쳐 나왔다.
그 변화를 온몸과 영혼으로 받아내는 현산의 눈동자에선 시퍼런 빛이 잦아들었다.
가슴 앞에 세운 흑천의 묵빛 도광도 속으로 숨듯 가라앉았다.
무심의 눈동자에 다시 한 번 변화가 생겨났다.
그것은 분명 놀람이다.
현산의 변화를 인지하는 놀람, 그렇다는 걸 알고 있지만 예상이상의 확인을 보는 놀람이다. 그러나 역시 순간적으로 무심하게 돌아가는 눈이다.
“아미타불, 선공을 하겠습니다.”
무심은 계도와 한 덩어리가 되어 흘러나왔다.
그렇다, 한 덩어리의 흐름이다.
별빛이 흘러내리는 탑림의 대기 속으로 흐르는 움직임, 유성의 하강과도 같은 웅혼무비한 가름, 있던 곳으로부터 현산에게까지 이른다.
현산은 흘렀다.
무심의 계도가 가르고 나오는 흐름 옆으로 출렁였다.
찰나와도 같고 억겁과도 같은 시간, 그 차이와 구분이 만드는 결과, 허상이 갈라지는 그 찰나에 흘러나갔다. 무심을 향해 흑천의 출렁임을 전했다.
아무런 빛도 없는 가름의 흐름, 흑천이 이뤄내는 그 진행은 다 갈랐다.
쏟아지는 별빛을 가르고 탑립의 땅을 가르고 흐름을 이루는 대기마저도 갈랐다.
그 속에서 흐름을 갈라낸 무심도 갈랐다. 계도가 잘라 떨어진다.
현산은 흑천을 내렸다.
무심은 잘린 계도를 내렸다.
“아미타불. 무연(無緣)에 이르셨습니다.”
무연이라, 합장하며 고개 숙이는 무심의 말이 무슨 의미인지 현산은 모른다.
아는 것은 한 가지, 베어내고 가르며 가는 길에 든 자신과 칼이다.
이젠 확실히 안다. 명확하게 안다.
영혼의 칼로 달빛을 갈라야 한다.
‘달빛 가르기.’
현산은 무심을 보지 않고 걸음을 옮겼다.
탑림을 가로질러 개울로 갔다.
흐르던 물이 고여 작은 연못처럼 이뤄진 소(沼), 그 앞에 멈춰 섰다.
또 하나의 하늘, 무수한 별들이 그 안에 있다. 그리고 달이 휘영청 떠 있다.
석상처럼 소 앞에 서 있는 현산을 보던 무심은 말없이 돌아섰다.
* * *
“후우, 후우, 후우.”
숨을 고르려 애쓰며 사마경은 약재 달인 물을 몸에 발랐다.
천리추종향을 씻어내려 이미 한차례 약물을 몸에 적셨지만 완벽해야 한다.
추호라도 냄새가 남아 있다면 죽은 목숨이다.
절대로 그런 일은 없어야 한다.
“제, 제발 목숨만은······”
고개도 들지 못하고 부들거리며 탕약을 올리는 자, 이름 모를 의원을 응시하며 사마경은 어금니를 물었다. 원하는 바는 아니지만 의원을 겁박할 수밖에 없던 상황, 이제 이자를 처리해야만 완전하게 끝나는 일이다.
“나, 나리, 소인에게는 처자가 있습니다요, 부, 부디 하해와 같은 마음으로 자비를 베풀어 주시길 간청드립니다요, 사, 살려만 주신다면 무슨 짓이든······”
사마경은 의원의 손에서 약사발을 낚아챘다.
그 서슬에 의원은 흠칫하며 입을 다물었고 사마경은 탕약을 들이켰다.
지치고 다친 몸이라선지 유난이 쓰다.
그렇지만 독이라도 마셔야 한다, 살 수 있다면 해야 한다.
‘독.’
문득 사마경은 그것을 생각하며 미간에 깊은 내천자를 그렸다.
지금 마신 탕약엔 독 같은 건 들어 있지 않다.
사마경 자신이 내린 처방으로 약재를 사용해 달인 것이어서다.
그 과정을 지켜봤다. 의원은 속이질 못했다.
‘지금 필요한 건 독일지도 몰라.’
그렇다, 진정 무서운 독이 필요하다.
검강지기를 장난처럼 뿌려대는 고수들을 주저앉힐 독, 절대지독이 필요하다.
그런 게 아니면 저들을 막을 방법이 없다.
화산과 청성의 저 고수들은 허황된 존재들이기에 그렇다.
‘중년으로 보이는 자들이 없었어······’
청성혼, 매화역사, 그들 중에 나이든 자는 없었다.
하나같이 마흔을 넘기지 않은 얼굴들이었다.
수를 맞춘 것처럼 열 명씩 나타났다. 이야기에서나 들은 검강을 뿌려댔다.
그걸 보는 황당함과 충격이란 말할 수조차 없다.
그들은 화산과 청성이 은밀히 기른 힘이다.
서로를 이기기 위해, 구대문파의 수좌에 오르기 위해, 강호무림의 맹주가 되기 위해, 키워온 힘이다.
그것을 이제 풀어냈다. 그러지 않으면 죽을 것이란 걸 알아서다.
청성혼과 매화역사, 그들이 저희 문파에서 어떠한 위치인지 모른다.
그런 게 필요 없는 존재들인지도 모르겠다.
화산과 청성이라는 이름이면 되는 자들, 두 문파의 모든 것을 건 존재들, 그들이 숨통을 조여 오고 있다.
“나리, 제발······”
다시 귀를 파고든 의원의 떨리는 목소리에 사마경은 현실로 돌아왔다.
산서 땅의 변경에 있는 이름 모를 의원 집, 이자가 사마경 자신의 수중에 떨어진 것은 어떤 의미일까, 아니 이제 이자를 어찌해야 할 것인가.
‘흔적을 남기지 않아야 해.’
그래야 한다, 살기 위해서, 반드시 살아 뜻을 이루기 위해선 그래야만 한다.
청해로 가려던 방향을 틀어 반대로 도주해 산서 땅으로 넘어온 지금, 냉정하고 치밀하고 단호해야 하다.
서투른 판단은 죽음을 부를 것이다.
‘여기까지 못 올 수도 있었어.’
그랬다. 그것이 처한 현실이다. 청성혼과 화산역사, 그들이 용과 호랑이처럼 싸우지 않았다면, 그들 중의 누구하나라도 그 싸움의 균형을 깨고 사마경 자신을 쫓아왔더라면, 지금 이 자리에 앉아 있을 수 없었다.
“나리, 소인의 인생을 가엽게 여겨주십시오······ 처자를 부양해야 할······”
그 순간 사마경은 결정을 내렸다.
쥐고 있던 검의 호수구를 엄지로 밀어냈다.
달칵하는 느낌보다 빠르게 튀어나온 검자루를 잡고 뽑아 그었다.
시릿한 수평 검광이 터졌다. 그 속에서 의원의 머리가 이탈해 나갔다.
차갑게 가라앉은 눈으로 의원의 죽음을 응시하던 사마경은 밖으로 나갔다. 의원의 처자가 자고 있을 내원을 노려보고 서 있다가 걸음을 냈다.
* * *
사자수염을 가만히 쓰다듬어 내린 하웅휘는 마주 앉은 전륭의 눈을 응시했다. 그 시선의 무거움을 받아내기 힘든지 전륭은 슬그머니 피했다.
“이게 무슨 일이라고 생각하느냐?”
작게 헛기침을 한 전룡은 참귀도라는 별호와 대운표국 제일총관이란 새 직책이 무색하게 표정을 찌푸렸다. 절로 나오는 한숨은 대답 아닌 대답이다. 하지만 주군 표왕 하웅휘가 던진 물음, 한숨으로 답할 수는 없다.
“설호귀 현산이란 존재 하나가 이런 엄청난 파장을 만들어 낼 줄은 짐작도 못했습니다. 그 친구가 보통이 아니라는, 아니 특별하고 비범한 존재라는 것은 알고 있었지만 이렇게까지 강호무림에 파란을 일으킬 줄은······”
“설호귀에 관해 묻는 게 아니다.”
“예?”
“지금 돌아가는 판세가 어떠한지 물은 거다.”
“지금 돌아가는 판이라면······”
전륭은 그제야 표왕의 물음이 뭔지 깨달았다.
설호귀 현산으로 인해 터진 일이지만 그 안에 손발을 들인 자들에 대해 말함이다.
화산과 청성, 그리고 동창이다.
이 판세는 심상치가 않다.
그들만 싸울 판이 아니다.
‘혈왕지검까지 합쳐져 있는 마당······!’
아수라장이다.
강호의 승냥이들이 혈왕지검을 차지하기 위해 미친 듯이 날뛰고 있다.
그렇게 조장한 것이 동창이다.
사마경이 동창의 수중에서 혈왕지검의 비급을 손에 넣은 것부터가 수상쩍은 일, 명료한 결과다.
‘천리추종향을 풍기고 달아나는 사마경을 미끼로 만들어 놓고······’
동창이 의도하고 조장하려는 것은 혼란과 싸움이다. 피와 죽음이다.
강호무림에 개입할 명분을 만들기 위해서다.
이미 동창관리를 죽인 설호귀 현산을 추포한다던 명분으로 나섰다.
그 걸음을 키워 지금에 이름이다.
“동창이 관리하던 혈왕지검을 탈취당한 마당, 화산과 청성의 전쟁은 파국으로 치달을 것이고, 처음부터 관여했던 동창은 강력한 명분을 가지게 될 것입니다. 혼란과 분쟁만 일삼는 강호무림을 국법으로 다스린다는······”
제법 길게 생각을 이어내던 전륭의 말을 자르고 표왕 하웅휘가 한마디를 뱉어냈다.
“패권전쟁이다.”
전륭은 흠칫하며 눈썹을 세웠다.
주군 하웅휘가 던진 말, 패권이란 말에 담긴 의미를 이제 확실하게 다시 깨달아서다.
말 그대로다, 강호무림의 패권을 두고 벌이는 전쟁이 시작됐다는 말이다.
동창까지 가세했다.
“동창이 강호무림의 평정을 넘어 다른 뜻이 있다는 것입니까?”
깨닫고 읽으면서도 확인하듯 묻는 전륭에게 하웅휘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들은 자리를 옮기고자 한다.”
“그건······”
“무소불위의 권세를 구가하고 있지만 그들은 알고 있는 거다. 그 권세가 영원하지 못하리라는 것을, 사위어 가는 촛불과도 같다는 것을 알고 있음이지. 이 패악무도한 시절이, 자신들의 시대가 곧 끝나리란 것을.”
입안에 고인 뜨거운 침을 삼키며 전륭은 다시 물었다.
“그래서 그들이 강호무림을 택했다는 것입니까?”
심유하게 가라앉은 시선을 허공에 던지던 하웅휘는 사자수염을 흔들며 다시 입을 열었다.
“그들 중의 누구인지, 전부인지, 그들은 강호무림을 낙점했다. 화산과 청성의 전쟁을 부채질해 커다란 전쟁을 일으킬 것이야. 강호무림 전체가 칼을 휘두르는 전쟁이겠지. 그걸 이용해 저희의 뿌리를 내릴 것이다. 그들이면 가능하다, 교활하고 치밀하고 간악한 자들, 그들이면 가능해.”
자신도 모르게 전륭은 으르르 소름을 털었고 하웅휘는 신음처럼 뒷말을 흘려냈다.
“설호귀 현산, 그가 어디서 무얼 하는지 모르겠구나······”
표왕이 신음처럼 거론한 인물, 설호귀 현산을 왜 지금 저렇게 말하는 지 전륭은 모호한 깨달음으로 곱씹었다. 설호귀, 그가 있어야 할 전쟁이다.
* * *
수면에 뜬 달을 하염없이 바라보던 현산은 걸음을 냈다.
흐르는 듯 흐르지 않는 듯이 연못 속으로 들어갔다.
한 가운데 멈춰 서서 물을 응시했다.
자신의 움직임으로 이지러진 수면의 달, 조금씩 제 모습을 찾는다.
‘달을 가른다.’
그것 하나만 가슴에 품은 채 현산은 모든 것을 버렸다.
잊었다. 지금 이 순간을 망각했다.
어둠이 내린 시간을 망각했고 탑림을 잊었으며 소림도 잊었고 흐름도 잊었다.
오직 칼이 된 자신과 물에 뜬 달만을 품었다.
느릿하게 아주 천천히, 움직이는지 아닌지 스스로도 모르게, 현산은 흑천을 그었다.
물을 갈랐다.
그 가름은 수면에 든 둥근 달을 지나갔고, 달은 스르르 갈라졌다.
하지만 수면의 파장에 만든 허상, 달은 그대로다.
현산은 수면에서 뽑아 올린 칼을 천공의 달을 향해 겨눴다.
중심을 가르고 내려와 다시 물속에 담갔다.
그리곤 처음처럼 느리게 달을 갈랐다.
그 행동을 반복했다. 숭산이 지켜보는 가운데, 달이 두려워하는 속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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흑천의 칼이 울어. 36. 그들은 누구인가(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