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he cries of the black clothed swordsman RAW novel - Chapter 4
4. 제천무림맹과 마도대연합.
1.
맥적산에서 서북으로 하루거리가 떨어진 곳에 천수(天水)가 있다.
황하의 상류지역으로 예로부터 장족(藏族)과 회족(回族)과 토족(土族) 등을 비롯한 변방민족들이 모여 살던 곳이다.
그곳에 거점을 마련하기 위해 흑사자단 이군은 전진했다.
마도대연합의 반격을 대비하기 위해서다.
넓은 길을 놔두고 숲길을 헤쳐 나가는 흑사자단의 전진 속도는 아주 빨랐다.
그 속에 귀신오도 섞여 행군했다.
“오장, 저 자식들도 나서려나 본데요?”
소진이 대열의 후미로 쫓아오는 금룡단과 청운단 무사들을 흘겨보며 말하자 양대목이 대감도 손잡이를 탁 때렸다.
“흥, 개자식들! 피터지게 싸울 때는 뒤로 빠져 있던 놈들이!”
양대목의 불평이 아니더라도 기실 흑사자단이라면 모두가 품고 있는 불만이다.
흑사자단 이군이 안 왔다면 꼬리 접은 강아지 꼴로 있었을 자들이 맥적산을 탈환하자 다시 고개를 세운 것이다. 그것이 마치 자기들 공인 양.
왕방도 눈을 흘기며 투덜거렸다.
“체, 더러워서 정말. 여단주 그놈도 운이 좋았던 거지. 마도연합 놈들이 병력보충도 못 받고 지쳐있던 마당에 들이쳤으니 이긴 거잖아. 안 그랬으면 개피 봤을 게 뻔하지.”
언제나 입을 다물고 있던 정동이 불쑥 말을 뱉었다.
“그런 걸 보면 혁리세가가 세를 볼 줄 아는 거지. 이군을 편성해 놓고 여단주를 불러 출전시킨 일이 아주 빨랐어.”
소병이 그 말을 받았다.
“맞는 말이다. 흑사자단주 여위천은 머리가 없는 놈이지만 용맹하지. 그 용맹을 제대로 쓰는 자가 혁리세가주 혁리웅인거야. 그자의 심계는 구미호보다 무섭다고들 하지.”
혁리웅(赫里雄).
검군(劍君)이라고 불리는 검의 일대종사.
혁리세가의 가주이자 제천무림맹을 결성하여 맹주의 위에 오른 절세고수.
당년 오십팔세의 혁리웅은 섬서무림의 큰 축이다.
같은 지역에 있는 화산과 종남, 감숙 북쪽에 위치한 공동파만 아니라면 지배자가 됐을 것이다.
다시 말하면 구대문파의 힘과 영향력이 그만큼 크다고 할 수 있다.
어쨌거나 그 속에서 혁리웅은 그들과 어깨를 나란히 하고 있는 것이다.
‘그렇구나.’
일행들의 대화와 자신이 보고 들은 바를 생각하며 현산은 뒤처지지 않게 부지런히 발을 놀렸다.
‘전쟁은 생각 보다 복잡하다. 결코 단순하지 않아.’
나름의 생각을 정리하며 걷던 현산은 대열이 멈추는 기미를 느꼈다.
아니나 다를까 선두에서부터 모두가 멈춰 섰다.
‘도착한 건가?’
긴장하고 있는 현산에게 소병이 물었다.
“상처는 어떠냐?”
“괜찮습니다.”
왕방이 뒤이어 물었다.
“정말 괜찮으냐? 내 보니까 등이 꽤 베어졌던데.”
“예, 견딜만 합니다. 걱정하지 마십시오.”
대답하는 현산의 얼굴을 바라보던 소진은 마른 얼굴을 손바닥으로 문지르더니 침을 퉤 뱉고 이 악무는 소릴 냈다.
“그래, 가야지 별수 있어? 여기선 숨을 데도 없잖아.”
양대목은 현산의 어깨를 툭 쳤다.
“또 미친 짓 하지 말고 우리 곁에 붙어 있어야 한다. 떨어지면 안 돼.”
“알겠습니다.”
유엽도 잡은 손에 힘을 주는 현산을 보다 소병은 정동에게 시선을 던졌다.
그 눈빛을 알아들은 정동이 고갤 까닥했다.
공격 명령은 바로 떨어졌다.
흑사자단주 여위천이 앞서나가며 진격을 외치자 이군 병력들 모두가 천수를 향해 달려갔다.
* * *
도처에서 비명이 터졌다.
장족마을을 급습한 흑사자단은 집집마다 들이쳐 사내들을 벴다.
그걸 말리는 장족노인들을 베고 그 아낙들도 벴다.
참혹한 지옥도가 펼쳐졌다.
귀신오와 함께 마을 안쪽으로 들어 선 현산은 충격을 떨쳐내지 못했다.
흑사자단은 모두가 미쳐 날뛰는 악귀로 변했다.
단주 여위천을 비롯한 모두가 살인귀가 돼 버렸다.
“사, 살려주시오! 제발!”
장족의 토속 언어로 살려달라고 소리치는 사내를 현산이 퍼뜩 돌아봤다.
주저앉아서 두 손을 들어 빌고 있는 사내를 흑사자단 대원이 코웃음 치며 보다가 칼을 내리쳤다.
사내의 목이 잘려 떨어지고 죽은 자의 아낙과 아이들이 비명을 질렀다.
사내는 머리가 떨어져 나가고도 몸을 부들거리며 손을 휘저었다.
떨어진 머리의 눈꺼풀도 경련했다.
장족 사내를 죽인 대원은 그의 아낙과 두 아이들에게도 칼을 휘두르려 했다.
“저!”
현산이 달려가려는 순간 소병의 외침이 앞쪽에서 들려왔다.
“떨어지지 마라!”
멈칫한 현산이 앞서가는 소병과 귀신오 대원들을 돌아보는 순간에 칼이 떨어졌다.
아낙과 두 아이는 아비 옆에 쓰러졌다.
‘이럴 수가!’
가족을 죽인 대원은 그들의 집으로 들어가 분탕질을 했다.
미친듯한 웃음소리를 내며 돈이 될 만한 것들을 챙겼다.
살인과 노략질, 그걸 하면서도 즐거워하고 있었다.
‘왜?’
부릅뜬 눈으로 죽은 장족 가족을 보던 현산은 사방에서 들려오는 비명소리에 치를 떨었다.
흑사자단은 장족마을 사람들을 개돼지 잡아 죽이듯 참혹하게 죽여 댔다.
‘어째서 이런 짓을!’
흑사자단은 모두가 미친 것 같았다.
그들은 장족의 재물을 약탈하는 것은 물론이고 아낙들을 끌고 들어가 겁탈했다.
당하는 여인들의 울음과 비명소리가 도처에 낭자했다.
“이, 이건 말도 안 돼!”
이를 악물고 부들대는 현산의 등을 그 순간 누가 팡 소리 나게 때렸다.
아프지 않은 그 타격에 들끓던 기혈이 가라앉았다.
“냉정해져라.”
손바닥으로 등을 치고 그렇게 말한 사람은 정동이었다.
굵은 눈썹에 한 번도 본적이 없는 무거운 표정을 지은 그가 현산의 눈을 똑바로 들여다보며 무거운 음성을 던졌다.
“전쟁은 잔인하다. 자비가 없다. 이곳에선 선악도 없어.”
현산을 보는 정동의 눈빛이 더 강해지며 뒷말이 나왔다.
“여기선 네 생각을 버려야 한다. 그래야만 살 수 있다.”
현산은 정동의 말이 무슨 뜻인지 알 수 없었다.
“하지만······”
“선악과 시비는 그걸 가릴 만한 힘이 있는 자들에게나 소용되는 말이다.”
순간 현산은 머리를 돌로 얻어맞은 것 같은 느낌을 받았다.
‘힘이 있는······!’
정동의 음성은 또 때렸다.
“그걸 원한다면 네 스스로 강해지면 된다.”
현산은 소름이 등골을 타고 내려가는 것을 진저리로 털어냈다.
‘강해지면 된다?’
정동이 현산의 등을 밀었다.
“가자. 친구들과 많이 떨어졌다.”
정동의 뒤를 따라 현산도 움직였다.
주변을 보니 흑사자단은 이군병력의 거의 전부가 마을을 쓸며 앞으로 전진 했다.
뒤에 남은 것은 마을 사람들의 시체와 피뿐이었다.
느닷없는 기습이 닥쳐온 것은 그때였다.
“악귀놈들아!”
“죽여라!”
“가족들의 원수를 갚자!”
장족의 언어로 소리치며 일단의 사내들이 토담 뒤에서 뛰쳐나왔다.
그 뜻을 알 수는 없지만 사무친 원한과 분노는 알만했다.
“피해!”
정동이 소리치며 현산의 앞을 막고 나섰다.
십여 명의 장족 사내들은 그들 특유의 두껍고 도폭이 일정한 도를 들고 달려들었다.
그런데 복장을 보니 마도대연합의 것이었다.
‘변방족 마을 전부가 마도대연합의 소굴이라더니!’
십여 명의 사내들은 장족특유의 흑색의복에 명교(明敎)를 나타내는 붉은 허리띠를 둘렀다.
그들을 맞는 정동은 허리 뒤에 항상 지니던 짧은 철단봉을 손에 잡았다.
“가서 동료들에게 알려라!”
철단봉을 양손에 잡고 장족사내들의 칼을 막아낸 정동이 소리쳤다.
그 말을 듣는 즉시 현산은 달렸다.
자신이 도움이 되지 못하는 상황, 오장 등을 데려오는 것이 빨랐다.
달려가며 뒤를 돌아본 현산은 정동의 범 같은 몸놀림을 보고 감탄했다.
양손에 잡았던 철단봉을 연결하고 마지막 하나까지 연결해 긴 철봉을 만든 그가 바람을 일으켰다.
‘대단하구나!’
때마침 흑사자단 대원들이 사방에서 나타났다.
장족들의 집안을 뒤지던 자들이다.
교전소리를 들은 그들이 정동과 마도연합이 분명한 장족사내들의 교전을 보고 합세 했다.
‘다행이다!’
안도의 숨을 내쉬면서도 현산은 소병 등을 찾아 뛰었다.
정동과 합세한 흑사자단의 숫자는 네 명뿐, 어딘가에 숨어있던 다른 무리가 나타난다면 위험한 상황이 될 것이다.
‘소아저씨에게 알려야 해!’
앞서서 쓸고 간 흑사자단을 향해 현산은 미친 듯이 달렸다.
그런데 느닷없는 비명소리가 그 발을 잡았다.
‘응?’
가파르게 터진 비명소리는 우측의 장족 집안에서 터진 것이 분명했다.
다른 집에 비해 터가 더 넓고 지붕이 높은 집이다.
소리는 바로 그 집의 이층 창 안쪽에서 터졌다.
현산은 집을 바라보며 주춤거렸다.
분명 흑사자단의 누군가 여인을 겁박하고 있는 상황이 분명했다.
마음은 들어가 말리고 싶었지만 지금은 소병 등을 찾는 게 더 급했다.
발길을 돌리려는 현산의 귀에 신음 소리가 들렸다.
“손녀를······ 살려주시오······”
회색수염을 피로 물들인 장족 노인이 문 앞에 쓰러진 채 손을 부들거렸다.
칼에 맞은 등 쪽이 쩍 갈라져 배골(背骨)이 보인다.
노인이 마지막 힘을 다해 한어로 애원을 했다.
“제발······ 손녀를······”
상대가 마을 사람들을 죽이고 있는 흑사자단의 일원임을 알면서도 도와달라고 부탁을 하는가?
현산이 그리 보였는가?
마지막 그 말을 흘려낸 노인의 손이 툭 떨어졌다.
현산을 보던 고개도 바닥을 지탱하던 턱의 힘이 사라지자 옆으로 꺾였다.
그리고 그 순간 이층에서 비명이 또 터졌다.
현산은 주저하지 않고 뛰었다. 홀린 사람처럼 이 악물고 집안으로 들어갔다.
‘죽일!’
유엽도를 움켜쥐고 이층으로 달려 올라가려던 현산은 계단 난간에 앉아서 음소를 흘리고 있는 자를 봤다.
얼굴을 아는 자다.
방랍과 자신을 공격했던 두 명 중 한명이었다.
다른 한명도 보인다.
난간에 앉아있는 자의 발아래, 이층 계단의 앞쪽 바닥에 벌거벗은 여인의 배위에 엎드려 있는 자.
충혈 된 눈으로 숨을 몰아 내쉬는 그자의 몸짓에 깔린 여인의 몸이 흔들렸다.
하지만 여인은 축 늘어진 채 반응이 없었다.
그런 여인의 배위에서 사내는 부르르 몸을 떨었다.
“으허어.”
절정의 쾌감을 소름으로 털어내던 사내는 계단을 달려올라 오는 현산을 봤다.
그자와 눈이 마주친 순간 현산은 마지막 계단 네 개를 한 번에 뛰어올라가 유엽도를 내리쳤다.
“크악!”
이마를 쪼개고 안면을 긋고 내려간 충격으로 사내는 비명을 질렀다.
그 순간까지도 이층 내실의 광경을 넋 놓고 구경하며 음소를 흘리던 난간의 사내는 놀라 눈을 치떴다.
“엇, 너!”
현산은 빨랐다.
한걸음에 여인과 칼로 그은 놈을 뛰어넘어가 놀란 사내를 그대로 밀어버렸다.
난간에 걸쳤던 엉덩이를 떼고 내리려던 사내는 아래로 떨어졌다.
쿵, 소리가 나고 보니 머리가 옆으로 꺾어진 채 부들대고 있었다.
“뭐야?”
이층 내실 안에서 방랍의 목소리가 들렸다.
그 안쪽으로 들어서니 역시 그가 있었다.
벌거벗다시피 한 몸으로 손에는 단검을 들고 장족 소녀하나를 위협하고 있었다.
“어라? 너 이 새끼?”
방랍은 침상에서 몸을 일으켰다.
그 바람에 양물이 그대로 드러났다. 침상 옆에 두었던 자신의 도를 잡는다.
“그래, 잘 왔다. 오늘은 네 골을 발라내 주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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흑천의 칼이 울어. 4. 제천무림맹과 마도대연합(2)
2.
현산은 상황을 한눈에 파악했다.
방랍은 장족소녀를 붙잡고 가학행위를 하고 있던 중이다.
단검으로 소녀의 육신 여기저기를 베며 그 고통을 변태적으로 즐기던 것이다.
한손엔 도를 잡고 한 손엔 단검을 잡은 방랍이 현산에게 다가왔다.
“애새끼야, 오늘은 정말 혼자구나? 너 혼자 뭘 할 수 있지?”
현산은 유엽도를 움켜쥐고 빠르게 실내를 살펴봤다.
침상과 그 위의 장족소녀, 몇 가지 가구가 보이는 전부였다.
‘이자의 힘을 당 해 낼 수 없어. 뭔가 수를 내야 해!’
현산이 이전처럼 흥분하지 않았다. 대신 생각했다.
이 상황을 반전시킬, 방랍을 이길 방법에 집중했다.
그 생각을 빠르게 굴리는 동안 방랍은 미친 수염을 곤두세우며 다가왔다.
그 뒤에서 장족소녀가 천정을 봤다.
‘뭐지?’
장족소녀의 눈을 따라 천장을 응시한 현산은 다락으로 올라가는 계단이 천장에 매여 있는 걸 확인했다.
도르래로 올렸다 내렸다 하는 통나무계단의 줄을 소녀가 잡고 있었다.
‘그렇구나!’
소녀의 뜻을 알아챈 현산은 벽 쪽으로 뒷걸음질했다.
그 모습을 보고 겁을 먹었다고 판단한 방랍은 살기어린 괴소를 지으며 다가왔다.
“크흐흐흐. 재수 없는 애새끼야. 금방은 죽이지 않으마.”
다가서는 방랍의 눈에선 광기어린 살기가 흘러나왔다.
“아쉽지 않게, 충분히, 아주 재미나게 즐긴 후에 죽여줄 테니 기대해라.”
어느새 벽에 등이 닿은 현산은 이를 잘근 물었다.
동시에 소녀와 눈을 맞췄다.
소녀는 눈동자로 하얀 빛을 번득이더니 벽에 고정시켜 놓은 줄을 놓았다.
도르래를 이용해 가벼운 힘으로 움직이던 계단은 잡아주는 그 힘이 사라지자 무섭게 내려왔다.
두터운 그것이 방랍의 등을 강타했다.
“억!”
통나무 계단으로 등을 강타당한 방랍은 앞쪽으로 고꾸라졌다.
계단이 내려오는 순간에 현산은 옆으로 몸을 날렸다.
“크흑! 이 죽일 것들이!”
방랍은 충격에도 불구하고 몸을 일으켰다.
현산이 서 있던 자리, 물러난 벽에 부딪친 안면은 이빨이 부러지고 입술이 찢어져 피가 흘렀다.
그렇지만 분노는 더욱 커졌다. 벌게진 눈알을 번들거리며 칼을 쥐고 일어섰다.
현산은 기회를 놓치지 않았다.
돌아서는 방랍에게 달려들어 유엽도를 내리쳤다.
“크악!”
방랍의 칼 잡은 손목이 잘렸다.
빠르긴 했지만 힘이 부족해서인지 깨끗하게 잘리지 않고 팔에 붙어 덜렁거렸다.
그 충격으로 방랍은 주저앉듯 휘청거렸다.
“크어어! 너 이 애새끼!”
괴성을 지르면서도 방랍은 몸을 다시 세웠다.
그 모습을 향해 현산은 다시 유엽도를 그었다.
주저앉을 뻔 했던 다리다.
방랍의 허벅지가 갈라지고 피가 튀었다.
방랍은 완전히 주저앉았다. 그런데 단검을 던졌다.
“읏!”
단검은 현산의 귀밑을 스치고 벽에 꽂혔다.
아찔함을 느낀 현산은 유엽도를 움켜쥐고 방랍의 앞에 서서 망설였다.
최후를 결정해야 하기 때문이다.
‘이자를 여기서 죽여야 해! 죽이지 않으면 안 돼!’
현산은 바보가 아니다.
일이 이 지경에 이른 이상 방랍은 반드시 죽여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뒷감당을 할 수 없다.
다른 건 둘째 치고 방랍은 반드시 복수 할 것이다.
지금이 아니면 이런 기회는 다시없을 것이다.
‘죽여야 해! 하지만······!’
마지막 순간 이를 악물고 유엽도 잡은 손을 부들거리고 있는 현산.
그런 현산에게 방랍이 피범벅 된 얼굴로 소리쳤다.
“어서 죽여 이 새끼야!”
현산의 표정에 의혹을 품던 방랍은 조소를 물었다.
“그래, 겁나지? 죽이지 않으면 죽이네 어쩌고 하더니만 허풍이었구나?”
피투성이 얼굴로 방랍은 상처 입은 짐승처럼 으르렁 거렸다.
“너 이 새끼, 사람 죽여 본 적 없지? 이렇게 눈 마주하고 죽인 적 없지? 그래, 이런 거다, 사람을 죽인다는 건 이런 거야. 결코 아무나 하는 일이 아니란 말이다. 흥, 애새끼, 넌 날 못 죽인다. 어서 칼을 내려 놔!”
현산이 미간을 움찔하던 그 순간이었다.
장족소녀가 바람처럼 방랍에게 달려들었다. 그녀의 손에 빛나는 쇠붙이가 있었다.
“커헉!”
방랍의 심장에 단검이 박혔다. 그가 현산을 향해 던졌던 단검이다.
그것을 박아 넣은 장족소녀는 한어로 속삭였다.
“개새끼야.”
정신을 못 차리고 있는 현산의 옆에서 그 순간 괴성이 들려왔다.
“으아아!”
맨 처음 현산이 유엽도로 이마와 안면을 그어버린 자, 그가 칼을 들고 현산에게 달려왔다.
그 순간 현산은 무의식적으로 전질보를 밟으며 달려 나갔다.
휘두르는 상대의 칼 아래로 피하며 목에 유엽도를 박았다.
“컥.”
부르르 경련 하는 사내의 움직임이, 죽음을 맞는 인간의 마지막 몸부림이 도신을 타고 들어와 현산의 가슴을 흔들었다.
현산을 유엽도를 뽑았다.
사내는 쓰러졌다.
그 모습을 멍하니 바라보던 현산은 그 자리에 주저앉아 구토를 했다.
소녀는 갔다.
토악질을 하다 지쳐 눈물과 콧물이 범벅된 얼굴을 떨고 있는 현산을 말없이 바라보다, 입을 만한 걸 찾아 걸치고 계단을 내려가 사라졌다.
그때까지 현산은 움직이지 않았다. 시체 앞에서 어깨만 부들거렸다.
“여기 있었구나.”
정동의 목소리를 듣고 현산은 고개를 들었다.
일그러진 그 얼굴과 집안의 시체들을 보고 정동은 상황을 파악했다.
“방랍을······ 죽였구나.”
방랍의 시체와 현산의 옆에 널브러져 있는 또 한명의 시체를 유심히 살피던 정동은 그 답지 않게 감탄을 드러냈다.
“대단한 일을 해 냈다. 정말 대단해.”
어깨를 떨고 있던 현산은 고개를 저었다.
“제가 죽인 게 아닙니다······”
“그래, 이 집에서 도망쳐 나가는 장족 소녀를 봤다. 내부 상황을 보니 그 아이가 조력했겠구나. 하지만 그렇다고 해도 장정 셋을 해치웠다.”
정동은 이 순간 이결과를 보는, 복잡한 진심이 담긴 뒷말을 냈다.
“이건 결코 평범한 일이 아니야.”
“사람을 죽였습니다······”
떨리는 현산의 음성과 눈동자를 정동이 직시했다.
뭔가가 확 터져 나올 듯 응축했던 그의 눈동자가 다시 풀렸다.
“그래, 네가 사람을 죽였다. 그래서? 그게 어쨌다는 거냐? 너는 전쟁터에 와서 뭘 하겠다 여겼느냐? 남의 손에 죽어주기 위해서 여길 왔느냐?”
단호하고 명료한 뒷말이 현산의 가슴을 쳤다.
“아니다. 넌 죽이기 위해서 왔다.”
죽이기 위해서 왔다.
정동의 그 한마디가 현산의 가슴에 시퍼런 비수처럼 박혔다.
불에 달군 칼날처럼 파고든 그것이 가슴 속을 마구 난자했다.
그러자 숨이 턱 막히고 시야가 온통 시뻘겋게 변했다.
“일어서라. 가자.”
정동의 손에 이끌려 현산은 그 집을 나갔다.
* * *
천수침공 작전은 성공적으로 끝났다.
흑사자단 이군 중 맥적산 전투에서 살아남은 육개 백인대의 병력 육백명은 어렵지 않게 천수를 장악했다.
일방적인 도살이었다.
숨어있던 마도대연합 무사들을 베어죽인 머릿수가 오백여명에 달했다.
그들이 정말 마도연합 무사들인지는 정확하지 않다.
아무튼 장족 마을을 비롯해 천수시가를 이루던 토족과 묘족, 회족과 보안족의 마을들은 초토화 되었다.
광기에 취한 약탈과 살인방화와 겁간 등으로 낮이 지나갔고, 흑사자단주 여위천은 사로잡은 마을 원로들을 한곳에 모아놓고 취조를 했다.
그 고문 소리가 밤하늘을 흔들었다.
“제기랄, 지독하게 해 대는 구나. 카악, 퉤.”
양대목이 눈살을 찌푸리며 가래를 돋워 멀리 뱉었다.
소진과 왕방은 담 너머 회족마을의 중앙을 보면서 욕을 해 댔다.
“여단주 저거 악귀가 따로 없구만?”
“그놈만 그러냐? 금룡단과 청운단 놈들은 아예 술상을 차렸잖냐?”
소진은 마른얼굴을 습관적으로 문지르며 살기를 돋웠다.
그도 그럴 것이 흑사자단주 여위천은 행위는 도를 넘었다.
고문으로 인한 비명소리가 밤하늘을 울렸다.
회족마을의 신령한 나무가 있는 아래에 형틀을 만들어 놓고 고문을 하는 중이다.
그 짓을 보며 금룡단과 청운단은 웃고 있다.
이건 마치 짐승을 잡아먹으며 벌이는 잔치와 같다.
아무리 적이지만 이건 너무 심하지 않은가?
“신경 끊어라.”
소병이 한마디 하자 왕방은 검은 얼굴을 슥 돌렸지만, 의외로 피가 뜨거운 소진은 시선을 거두지 못하고 이를 갈았다.
“금룡단이니 청운단이니, 운 좋게 잘 태어나서 고생 않고 자란 놈들이 전쟁터에 와서도 저 지랄이구나. 놀러 왔어.”
소병이 모닥불을 키우며 혀를 찼다.
“쯧, 그렇게 욕질 해봐야 변하는 건 없다. 그만 와서 배나 채워라.”
결국은 소진도 담 앞에서 돌아와 불가에 앉았다.
비어있는 회족마을의 집을 귀신오가 차지한 것이다.
다른 오들은 외곽경비를 서고 따로 모여서 휴식을 취하고 있겠지만 소병은 백부장의 그 명령을 무시하고 독자행동을 택했다.
“늦어도 내일 동이 트기 전까지 놈들이 반격을 해 올게다.”
목숨에 관계된 일, 언제나 그랬듯이 다들 소병의 말에 귀기울였다.
“잘 먹고 쉬지 않으면 놈들 칼에 목이 떨어질게야. 게다가 지금은 저 멍청한 놈들과 함께 있는 게 더 위험하다.”
그렇게 말하고 소병은 불에 굽는 닭을 뒤집었다.
돌아다니는 마을 닭을 잡은 것은 양대목이었다.
사람머리수대로 여섯마리나 잡아 불에 구우니 그 냄새가 자못 대단했다.
“으햐, 이거 침 넘어가네. 오장, 다됐으면 먹읍시다.”
양대목이 참지 못하고 손을 뻗자 소병은 그 손을 부지깽이로 탁 쳤다.
“어, 왜 그래요?”
소병은 불가에 말없이 앉아 있는 현산을 눈으로 가리켰다.
“오늘 막내가 칼에 피를 묻혔다.”
왕방과 소진과 양대목이 눈을 크게 떴다.
“엇? 정말로?”
“어허.”
“야, 드디어 했구나.”
놀람과 감탄을 드러내는 세 사람에게 소병은 더 놀라운 소릴 던졌다.
“피를 발라준 놈은 방랍이었다.”
소진의 마른 얼굴이 경직했고 왕방은 눈을 치떴으며 양대목은 뜨거운 침을 꿀꺽 삼켰다.
입 벌려 말하지 못하고 정말이냐고 눈으로 묻는 세 사람에게 정동이 대답했다.
“사실이다. 놈의 방수 둘도 죽었다.”
왕방이 외마디를 질렀다.
“셋이나!”
소진은 입을 딱 벌렸고 양대목은 궁금해 미치겠다는 얼굴을 현산에게 디밀었다.
“야 막내야, 어떻게 된 거냐? 응? 말 좀 해 봐라. 방랍 그놈이 우리한테 한주먹거리긴 해도 다른 놈들한텐 아닌데? 그런 놈을 네가 해치웠다고?”
더 바싹 얼굴을 들이밀며 소진은 거듭 물었다.
“게다가 다른 놈들 둘까지?”
현산은 고개를 들고 입을 열었다. 하지만 대답이 잘 나오지 않았다.
“저, 저는, 그, 그냥······”
소병이 현산에게 손짓하고 자신이 대신 상황을 말했다.
“방랍 놈이 장족 소녀를 겁탈하려던 걸 막내가 발견하고 달려든 거다.”
불을 끄적이는 소병의 입가엔 희미한 미소 같은 것이 걸렸다.
“운 좋게 한 놈에게 먼저 한칼을 먹이고 다른 놈은 떠밀어서 계단 아래로 떨어뜨렸지. 그놈은 모가지가 부러져 즉사했다. 방랍 놈은 집안에서 싸우다가 기지를 발휘해 쓰러뜨렸다 한다. 그놈 가슴에 단검을 박은 건 장족소녀였단다. 하지만 그 직후에 한칼 먹였던 놈이 달려들었지.”
거기까지 말한 소병은 일행 모두의 눈을 차례로 응시하고 뒷말을 냈다.
“그걸 나에게 배운 삼재도법으로 해치운 거다.”
소병은 그 부분에서 강조를 하며 목에 힘을 줬고 바로 반발이 나왔다.
“아니 그게 겨우 오장의 삼재도법으로만 되는 일입니까? 동네 애들도 휘두르는 그 칼질로요? 아아 그건 아니올시다, 그동안 내가 가르쳐준 보법이 바탕이 됐으니까 그랬지? 자로고 무공은 보법이 근본이라니까?”
양대목도 자신의 공을 말하자 왕방이 커다란 소리로 웃었다.
“푸하하하. 야, 양가야 웃기지 마라, 막내가 너한테 보법 배운 게 한 달이냐 일 년이냐? 근데 뭐가 어쨌다고? 말이 되는 소릴 해야지, 자식이.”
“뭐? 야 임마, 그럼 내 공이 없단 말이냐?”
두 사람이 투덕대는 동안 소진은 마른 얼굴에 차가운 표정을 넣으며 현산을 가만히 바라보다가 입을 열었다.
“막내 저놈은 타고난 살귀(殺鬼)일지도 몰라.”
별안간 나온 소진의 그 말에 모두의 시선이 돌아왔다.
뜨악한 동료들의 눈길을 받으며 소진은 뒷말을 이어냈다.
“나이 열다섯에 사람을 죽이는 놈은 흔치 않지. 그것도 셋씩이나. 무엇을 봐도 자신 보다 강한 어른을 상대로 말이야. 그런데 막내는 해 냈다.”
현산을 보는 소진은 눈에선 차갑지만 적의가 없는 빛이 흘러나왔다.
“저놈은······ 뭔가 다른 거야.”
남겼던 말을 뱉은 소진은 품 안에서 술잔을 하나 꺼내 현산에게 던졌다.
“양가야, 이럴 때 술 마시지 언제 마시겠냐?”
소진의 마른 얼굴을 보고 입가를 씰룩인 양대목은 등 뒤로 숨겼던 술동이를 내놨다.
“과실주 같아. 집 안에서 찾아냈어. 자 받아라.”
양대목은 현산이 잡은 술잔에 술을 따라줬다.
소진이 던진 때 묻고 이까지 빠진 술잔엔 주황빛 술이 가득 채워졌다.
“저, 저는······”
입 벌리는 현산을 제지한 양대목은 씩 웃으며 한마디 했다.
“넌 이제 진짜 우리 귀신오의 막내다.”
양대목의 웃는 눈과 얼굴을 바라보던 현산은 시선을 돌려 왕방과 소진, 말없는 정동을 지나 소병까지 응시했다.
그들 모두의 눈동자에 든 것은 따듯한 동료애였다.
“어서 마시고 형님들에게 술 올려라.”
왕방이 재촉하자 현산은 잠시 술잔을 보다가 단번에 마셨다.
목구멍부터 속이 타들어 가는 듯한 느낌이 확 치솟았다.
하지만 이상하게 마음이, 가슴이 따듯했다.
그 따듯함이 잦아들어가던 몸에 새로운 생기를 불어넣어줬다.
“현산이 형님들에게 술을 올립니다.”
술병을 든 현산은 제일먼저 양대목에게 술잔을 건네주고 술을 따랐다. 그가 술을 비우고 현산의 등을 두드렸다.
“좋다, 좋다.”
술잔을 받아든 현산은 정동에게 술을 따랐다.
말없이 술잔을 비운 정동은 왕방에게 술잔을 넘겼다.
그의 잔에 술을 채우자 단번에 비운 그가 현산에게 엄지를 치켜세웠다.
“방랍놈, 잘 죽였다.”
푸근한 웃음을 던진 왕방은 술잔을 본래 주인인 소진에게 넘겼다.
그 앞에 선 현산이 공손히 술을 따랐다.
역시 단번에 잔을 비운 후 소진은 현산을 똑바로 쳐다보고 말했다.
“우리 집안이 신기가 좀 있지. 그래서 말하는데 말이다. 내 예감이 틀리지 않는다면 넌 정말 살귀가 될 거다. 하지만 명심해라. 만일 살귀가 되는 게 네놈이 타고난 운명이라면, 그것을 벗어던져야 정말 큰 사람이 될 거다.”
현산은 눈 하나 깜짝하지 않고 그 말을 머리에 새겼다.
뭔가 굉장히 중요하고 도움이 되는 말이라는 생각이 들어서다.
그런데 옆에서 왕방이 비웃으며 딴지를 걸었다.
“에이, 저 자식 저거 또 써먹네. 막내야 듣지 마라, 나도 저 자식 처음 봤을 때 비슷한 소리 들었다. 뭐 나더러는 칼 맞아 뒈질거라나? 그게 벌써 오년 전이다. 다 잡소리야.”
양대목은 키들거리고 웃고 소진은 왕방에게 눈을 부라렸다.
그사이 소진의 손에서 잔을 낚아 챈 소병이 손을 내밀었다.
“채워봐라.”
현산은 소병이 내민 잔에 술을 가득 채웠다. 그리고 고개를 숙였다.
“감사합니다.”
소병은 잔을 단숨에 비우고 현산을 바라봤다.
그 눈동자는 따듯함과 엄격함, 자애와 훈계의 마음으로 빛을 냈다.
“언제나 스스로를 단련해라. 너를 키우는 것은 그 누가 아닌 자신이다. 그리고 형님들에게서 배워라. 한 가지라도 배워서 살아남아라. 그리고 내가 원하는 사람이 돼라.”
현산은 입술을 깨물며 고개를 끄덕였다.
“예. 명심하겠습니다.”
현산의 앞으로 정동이 다가와 구운 닭을 내밀었다.
“넌 많이 먹어야 한다. 그래야 커.”
엷은 미소를 띤 현산은 낮의 기억을 밀어내며 닭다리를 뜯어내 씹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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흑천의 칼이 울어. 4. 제천무림맹과 마도대연합(3)
3.
은자락처럼 늘어지는 달빛을 받으며 현산은 까무룩 잠속으로 먹혀 들어갔다.
장족의 집안에서 그들이 버린 이불을 깔고 누운 현산은 마당에서 두런거리는 동료들의 목소리를 들었다. 비몽사몽의 귓속을 건드리는 목소리다.
“백부장 놈이 지금쯤 노발대발 하고 있겠구만.”
“누가 아니래, 보나마나 우리한테 척후임무를 맡겼을 거야.”
“씨부럴눔, 그런 건 제가 하지. 돈도 쥐꼬리만 하게 주면서 우리더러 가서 뒈지라는 거야? 여단주놈이나 백부장 놈들이나 다 똑같아. 아니, 혁리세가 놈들이 전부 그렇지. 퉤.”
소진과 왕방의 뒤로 양대목은 욕설을 하고 침까지 뱉었다.
하지만 조금은 뒤가 켕기는지 오장 소병에게 물었다.
“오장, 나중에 후환이 없을까요?”
마당에 피운 모닥불을 뒤적이고 있던 소병은 빙그레 웃었다.
“내가 말했지? 아침이 오기 전에 마도대연합의 반격이 있을 거다. 그들도 맥적산에 보충병력을 보내려했을 게야. 그런데 그 전에 우리가 밀고 들어왔지. 그 기세를 몰아 여기 천수까지 점령한 거야. 놈들은 화가 단단히 나 있을 거다. 이제 반격이 시작되면 흑사자단 전체가 위험해 진다.”
소진이 마른얼굴에 특유의 기색, 살기와도 비슷한 감정을 보이며 가만히 말했다.
“흑사자단이 거의 박살난다고 보면, 백부장 놈들도 대개 죽겠군요. 더러운 우리 백부장 놈도 예외는 아닐 테고요.”
소병은 대답 없이 미소만 지었고 왕방이 끼어들었다.
“정말로 여위천 그자는 생각이 없는 겁니까? 오장이 하는 짐작 정도는 그놈도 해야 되는 거 아닙니까? 저렇게 대책 없이 금룡단 청운단 놈들하고 웃기만 하고 있으니 말입니다. 작정하고 즐기고 있지 않습니까?”
담 너머에서 아직도 들려오는 고문비명 소리는 점점 잦아들어갔다.
소리 쪽으로 시선을 돌린 소병은 미간을 찌푸렸다.
“장족 늙은이들이 거짓자백을 했을 게다.”
양대목이 바로 되물었다.
“거짓자백이요?”
“그래, 천수 인근 마도대연합의 형세에 대해서 고문에 못 이겨 말했겠지.”
소병의 눈은 서늘한 빛을 냈다.
“사흘거리 이내에는 병력이 없다고 말이야. 마을 마다 숨어있던 자들이 전부라고 했을 게야.”
생사의 경험에서 우러나는 진실이 이어 나온다.
“하지만 그건 거짓이다. 저들은 절대로 고문에 굴복하지 않는다.”
“그럼, 그 거짓자백을 여단주가 믿고 있다는 겁니까?”
날카로운 소진의 눈을 응시하고 소병은 고갤 끄덕였다.
“저토록 참혹한 고문으로 얻어낸 정보인데 믿겠지. 하지만 그건 거짓정보야. 난 전쟁이전에도 이곳을 다닌 경험이 있다. 아우를 찾기 위해서였지.”
찌푸린 미간만큼이나 찌푸린 목소리로 소병은 이야기를 이어냈다.
“그땐 이들이 서로 합쳐지지 않아 마적 비적들 간에도 살육을 할 때였다.”
그때를 생각하는지 소병의 눈에 아스라함이 스친다.
“그 때에 이와 같은 일이 있었지.”
기억을 붙잡은 눈동자엔 아스라함이 사라지고 힘이 응축했다.
“마적들이 사로잡은 마교도를 고문해 정보를 얻고 안심했어. 하지만 그 밤에 마교, 스스로 명교라 칭하는 그들이 들이닥쳐 마적들을 다 죽였다.”
귀신오의 대원들은 모두가 고개를 주억거렸다.
소병의 말을 전적으로 따르지만 지금 말을 들어보니 정말 심각한 상황인 것이다.
하지만 이걸 위에 말할 수도 없다.
소병의 말이라면 쌍심지부터 세우는 자들이 들을 턱이 없다.
소병이 쫓겨나지 않는 이유는 하나, 그의 능력 때문이다.
명령은 듣지 않는 골칫덩이지만 정말로 힘든 임무를 완수해내기 때문이다.
바로 맥적산 침투로 확보와 같은 것들.
그러나 한 가지 일을 하고 나면 이렇게 숨어버린다.
생존에 관한한 소병은 짐승 같은 본능이 있다.
언제나 위험을 회피 한다.
지금처럼 앞뒤상황을 살피고 피하기도 하고, 작전 도중에도 함정을 찾아내거나 상부의 무식한 명령으로 인해 불가항력적인 상황이 되면 그냥 물러선다.
그게 귀신오의 생존이유다.
모두가 소병의 명령을 따른다.
백부장이나 흑사자단주 여위천의 명보다 오장 소병의 명이 우선이다.
거기에 각자의 능력이 뛰어나고 서로의 등을 책임져 주는 동료애가 있기에 언제나 살아났다.
“자, 이제 슬슬 불을 끄자.”
소병은 기세 좋게 타오르던 모닥불에 흙을 덮었다.
불길은 사그라지고 연기가 피어오르는 그 광경을 혼몽한 취기와 잠결로 현산은 바라봤다.
“모두들 고맙다.”
소병이 대원들에게 그렇게 말하자 양대목이 빈 술동이를 툭 건드리며 입을 열었다.
“막내 저놈 제법입니다. 하루 만에 죽지 않을까 했는데, 오히려 미친 수염 방랍 같은 놈을 해치우다니 놀랄 일입니다. 볼수록 놀라운 놈입니다.”
소진이 특유의 표정으로 차가운 눈빛을 발했다.
“오장에 데려오긴 했지만 귀찮았지요. 우리 목숨 건사하기도 힘든 전장마당에서 저런 놈까지 챙겨야 하나 했습니다. 그런데 막내 저놈은 스스로 제몫을 찾아내고 있군요. 다시 말하지만 우리집안의 신기로 봤을 때 저놈은 분명히······”
“아아, 잡소리 치우고.”
소진의 말을 자른 왕방이 눈 감은 현산을 물끄러미 바라보며 말했다.
“보통 놈이 아닌 건 확실해. 제 스스로 증명했지. 물건이 될 거야.”
왕방의 그 목소리를 들으며 현산은 잠으로 빠져 들어갔다. 마지막까지 잡고 있던 현실의 끈을 놓고 수마를 안았다. 그러나 그 순간에도 현실의 생각을 잊지 않았다.
‘그랬구나. 모두가 나를 이제야 진심으로 받아준 거구나.’
꿈속에서 현산은 고향 땅 용정현 천귀봉을 날아다녔다.
* * *
“막내, 일어나라!”
양대목의 다급한 목소리를 들으며 현산은 잠에서 깼다.
잠결이 가시지 않는 귀에 비명성과 병장기 소리들이 들렸다.
그걸 인지한 순간 잠들기 전 소병이 한 말이 떠올랐다.
‘반격!’
벌떡 일어나 유엽도를 잡은 현산은 긴장하고 있는 동료들의 등을 봤다.
낮은 흙 담에 붙어있는 소병과 왕방과 소진과 정동, 그리고 그들에게 다가가는 양대목의 긴장이 느껴졌다.
현산은 동료들의 곁으로 다가가 흙 담 너머를 바라봤다.
달빛이 비치는 어둠 저편에서 살육이 벌어지고 있었다.
마도대연합의 무사들이 들이닥쳐 흑사자단을 도륙했다.
‘정말로 오장님의 말대로 됐구나!’
뜨거운 침을 삼키는 현산의 귀에 오장 소병의 목소리가 들렸다.
“아무래도 마을 집들 곳곳에서 나온 술도 저들의 안배가 아니었나 싶다. 지금 같은 일을 치밀하게 계획했던 것은 아니었겠지만, 만일의 예상 하에 술단지들을 방치한 게야.”
소병의 말은 간단했다.
마을을 점령해 대승을 거둔 흑사자단은 노고를 달랜다는 단주 여위천의 명에 따라 노획한 술을 마셨다.
고문으로 얻은 정보를 믿고 일부의 병력만 경비를 세웠다.
나머지는 술 마시고 처 잔 것이다.
전장에 나서는 장수와 병력이라면 해선 안 될 짓을 여위천과 흑사자단은 서슴없이 했다.
그것이 참화를 불러들였다.
“상황을 보니 글렀다. 우린 후퇴한다.”
명을 내리던 소병은 갑자기 눈을 부릅떴다.
같은 순간 정동의 눈도 강한 빛을 뿜었다.
“모두 엎드려!”
낮고 강하게 외친 소병의 명에 따라 귀신오의 모두가 흙 담 아래로 몸을 숙였다.
그러자마자 머리위로 바람이 지나갔다.
“크하하하! 버러지 같은 놈들아! 다 죽여 버릴 테다!”
정확한 한어로 욕을 하는 자는 육척의 장한이었다.
흙담을 넘어 마당에 나타난 그의 뒷모습은 양대목보다 키만 조금 작을 뿐 균형 잡힌 몸이 당당했다.
마교특유의 복장인 흑의에 붉은 띠를 한 자로 목소리가 우렁차다.
“거기 숨어서 어쩌겠다는 거냐?”
마교의 장한은 느릿하게 뒤돌아섰다.
순간적으로 그의 눈동자에서 번개가 치는 것 같았다.
마주 보기도 힘든 안광을 뿜어내는 그가 귀신오의 대원들을 향해 살기를 던졌다.
“형제자매의 원수놈들, 너희들의 심장을 꺼내 씹겠다.”
마교장한은 무기도 없는 맨손으로 다가왔다.
그런데 그 한 걸음 한 걸음이 좁혀질 때마다 현산은 숨이 턱턱 막혔다.
‘저 사람은 대체 누구지?’
현산의 의문을 뒤로 한 채 소병은 공격을 명령했다.
“쳐라!”
소병의 유엽도가 시릿한 도광을 뿜으며 마교장한의 목으로 들어갔다.
같은 순간 왕방의 박도가 상대의 어깨를 내리치고, 양대목의 대감도는 장한의 왼다리를, 소진의 유엽도는 오른다리를 노렸고, 정동은 삼단봉을 연결해 뒤를 이어 공격했다. 동료들의 배후에서 치는 시간차 공격이다.
“이놈들!”
현산은 마교장한의 엄청난 소리를 들었다.
그 소리와 동시에 소병을 위시한 동료들의 칼이 장한의 몸을 치는 것도 보았다.
하지만 그것은 착각이었다.
그것은 정말로 순간적으로 이루어졌다.
마교장한의 두 손이 한순간 장영(掌影)을 뿌리고 다리가 환영처럼 움직였다.
그 손바닥에 소병과 왕방의 칼이 튕겨나가고 발에 맞아 양대목과 소진의 칼도 튕겨나갔다. 그리고 그들도 튕겨나갔다.
‘저럴 수가!’
현산은 눈을 부릅떴다.
소병과 왕방과 소진과 양대목이 격한 신음을 뿌리며 나가떨어지는 광경은 거짓 같았다.
“하리앗!”
정동의 기합성이 터졌다.
동료들의 뒤에서 들이닥친 그가 철봉을 뻗어 마교장한의 미간을 노렸다.
그 수에 놀란 것인지 흠칫한 기색을 보인 장한은 고개를 틀어 피했다.
“제법이구나!”
마교장한은 곧장 보법을 밟아 거리를 좁히며 정동의 철봉안쪽으로 파고들었다.
그가 뻗어낸 육장이 정동의 가슴을 노렸다. 하지만 미끄러지듯 물러난 정동이 장(掌)으로 맞받았다.
팡, 하고 술통이 터지는 듯한 소리가 터졌다.
정동은 술 취한 사람처럼 비틀거리며 뒤로 물러났고 마교장한은 살기어린 눈매를 곤두세우며 쫓아갔다.
“흥, 삼류잡배들이 나 홍천성(洪天成)을 당할 성 싶으냐!”
정동이 절체절명의 위기에 처한 순간.
어느새 일어선 소병이 흙을 덮은 모닥불, 그 잿무더기를 손에 가득 쥐고 달려갔다.
“이놈! 여길 봐라!”
뒤에서 기습하는 걸로 여긴 마교장한이 돌아보는 순간.
소병은 잿무더기 흙을 던졌다. 현산이 방랍에게 그랬던 것처럼.
“엇!”
피할 사이도 없이 마교장한은 잿무더기 안개 속에 빠졌다.
“이런 개도적놈들!”
이를 갈며 마교장한은 사방에다 대고 육장과 발길질을 뻗어냈다.
눈에 들어간 잿무더기 때문에 시야가 가려진 탓이다.
그런데 사방에 내지르는 손발의 위력이 대단했다.
팡, 팡 소리가 연신 나며 대기가 박살이 나는 듯 했다.
“저 새끼 죽여!”
입가로 피를 흘리며 겨우 일어선 양대목이 대감도를 잡고 소리쳤다.
왕방과 소진도 비틀거리며 겨우 일어섰다.
그런 두 사람의 눈에도 악독한 빛이 떠올라 있었다.
“죽여 버리겠다!”
거친 고함을 터트리는 마교장한은 분노에 못 이겨 마구 발광했다.
집 쪽으로 무섭게 이동해간 그의 손이 기둥을 때리자 우지끈 기둥이 부러졌다.
두터운 벽도 발길에 뚫어졌다.
“크아아! 이놈들아!”
거듭 외치며 분노를 발산하는 마교장한에게 양대목이 입가의 피를 닦으며 다가가고 소진과 왕방도 다가갔다.
“그만 둬!”
소병이 그들을 제지했다.
희뜩한 눈으로 돌아보는 세 사람에게 소병은 창백해진 얼굴로 강하고 분명하게 말했다.
“저 자는 고수다. 눈은 곧 보일 거다. 승산이 없다.”
소병은 그렇게 말하고 현산을 포함한 모두에게 명령했다.
“후퇴한다.”
양대목이 반발하듯 입을 열려는 그때, 정동이 해쓱한 얼굴로 담장 너머를 가리켰다.
“금룡단이 오고 있다.”
고수들로 구성된 금룡단 무사들이 세 명이 바람처럼 달려오고 있었다.
마교장한의 분노한 함성을 들은 것이 분명했다.
“저들에게 맡기고 우린 가자.”
소병이 움직이자 대원들은 더 이상 지체하지 않고 그 뒤를 따랐다.
그런 동료들의 뒤를 따라가던 현산은 뒤를 돌아봤다.
금룡단 무사 셋과 마교장한이 어울려 싸우고 있었다.
‘저것이 고수들의 싸움이구나!’
그야말로 범 같고 용같이 어울리는 그들의 모습은 현산에게 충격이었다.
그날, 천귀산에서 보았던 밤귀신 같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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흑천의 칼이 울어. 5. 첫 번째 겨울(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