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he cries of the black clothed swordsman RAW novel - Chapter 9
9. 흑설혈풍(黑雪血風).
1.
밤바람이 귀신의 울부짖음처럼 산을 찢어발겼다.
이미 겨울을 품었던 바람은 자정을 넘기자 눈보라로 변했다.
눈은 바람을 타고 미친 듯이 날려 불타는 호보촌을 덮었다.
“훅.”
호흡을 끊어 마시며 현산은 호약산의 바위등성 위를 달렸다.
눈바람은 몸을 날려 버릴듯 거셌다.
겨울이 닥쳤다. 하지만 사천에선 보기 힘든 눈이다. 그 눈이 억수같이 쏟아진다. 하늘을 감출 듯이, 흑천으로 만들며, 흑설로 쏟아져 내린다.
능선을 향해 산을 달려 올라가던 현산은 멈춰 서서 산 아래를 돌아봤다.
횃불을 든 병사들이 추적해 오는 것이 보인다.
역시 생각대로다. 산에서는 기마병들도 쓸모가 없다.
언진은 그것을 말한 것이다.
산으로 가라는 말의 의미다.
현산이 지금보다 배는 강해져도 기마병들을 상대로 평지에서 이기긴 어렵다.
하지만 산에서는 다르다.
말에서 내린 기마병들은 그저 병사다. 그리고 현산은 산을 안다.
‘올라와라.’
다가오는 횃불들을 무섭게 노려보던 현산은 방향을 틀어 우측의 고사목지대로 나아갔다.
* * *
“괜찮은 것이냐?”
지현 하량호는 아들 하재규의 상태를 걱정하며 물었다.
어깨를 검에 찔렸으니 죽지야 않겠지만 간단치 않은 것이다.
“걱정 마세요. 이대로 산으로 올라가도 되지만 남은 겁니다.”
“쯧, 그 도적놈들의 발악이 너를 이 지경으로 만들었구나. 이는 또한 아비로부터 비롯한 일이니 내가 마음이 아프다.”
“그런 말씀마세요. 아버지의 일을 아들이 돕는 것은 당연한 일이 아니겠습니까? 이런 때 힘쓰라고 제가 벽파검문에 든 것이 아닙니까? 소자는 할 도리를 한 것뿐입니다.”
“그래그래, 장하다 내 아들.”
대견스레 아들을 보던 하량호는 호약산을 올려다보며 걱정을 했다.
“저놈을 놓치지는 않겠지?”
“잡을 겁니다. 유백호의 지시로 병사들이 궁시(弓矢)를 비롯해 대호를 잡는데 쓰는 호명망(虎命網)까지 가져가지 않았습니까? 놈이 날고뛰는 재주가 있다 해도 잡힐 겁니다.”
* * *
백호 유가휘는 심기가 매우 언짢았다.
예상치 못한 상황으로 수하들을 많이 잃었다. 쉰 명을 데리고 왔는데 열다섯이 죽었다.
‘남은 숫자는 모두 몇이지? 나하고 벽파검문 놈들까지 합하면······’
계산이 복잡할 것이 없다.
‘지현 놈 대가리까지 다 합해도 마흔 하나로구나. 벽파검문 놈들 중 하나가 뒈졌고 지현 놈과 그 아들놈은 산 아래 남았으니 산에 오른 숫자는 총 서른아홉이군.’
유가휘는 벽파검문 제자들을 노려보며 이를 물었다.
‘지현 놈도 그렇지만 저놈들도 재수 없군. 청성을 등에 업은 속가문파 놈들이 뭐 대단하다고 유세인가? 청성이란 이름을 빼면 남는 게 없는 것들.’
시건방진 눈빛과 표정의 위산산을 노려보며 산을 오르던 유가휘는 그 순간 우측에서 들려오는 소리를 들었다.
분명 나뭇가지들이 부러지는 소리였다. 뭔가 다급한 소리.
“놈이다! 전개해라! 화살부터 먼저 쏴라!”
우측 고사목지대로 병사들이 이동하며 화살을 발사했다.
고사목지대 중앙에서 뭔가 검은 물체가 요동치는 것이 보였다.
그것을 향해 무차별로 화살이 날아갔다.
“멈춰!”
화살을 날리던 병사들은 조심스럽게 검은 물체를 향해 다가갔다.
유가휘도 벽파검문 제자들도 눈에 힘을 주고 바라봤다.
횃불 빛이 다가가자 그것의 정체가 드러났다.
“멧돼지입니다!”
병사가 소리쳐 보고했다.
유가휘와 위산산을 비롯한 벽파검문 제자들도 그것을 봤다.
화살에 고슴도치가 된 멧돼지였다. 발이 나무뿌리에 얽혀 발버둥 치던 놈이다.
“가자!”
유가휘외 명령하자 병사들은 다시 산길을 오르기 시작했다.
* * *
병사들이 산으로 올라가고 난 뒤, 버려진 멧돼지의 옆쪽, 고사목 밑동의 구멍에서 현산이 빠져나왔다.
사람 하나가 들어갈 만한 구멍이었지만 겉으로 봐선 구분이 안 된다.
현산은 멧돼지와 주변 고사목들에 박힌 화살을 뽑았다.
멧돼지 굴을 알고 있었기에 발을 얽어놓는 것은 손바닥 뒤집기보다 쉬운 일이다.
눈보라는 모든 소리를 감춰줬다.
한 움큼의 화살대를 챙긴 현산은 철봉을 넣는 배갑의 빈곳에 쑤셔 넣었다. 그리곤 어둠속으로 이동해 병사들의 뒤를 쫓았다.
* * *
유가휘는 이상한 기분이 들었다.
뭔가 뒤로 달라붙은 듯한 느낌, 개운치 않은 느낌이 들었다.
하지만 기분 탓이려니 생각하고 계속 산을 탔다.
눈보라가 점점 거세지고 있는 것이 마음에 걸렸지만 이건 도망치는 놈에게도 악재다.
‘이런 상태로는 산을 넘지 못해. 호약산 북쪽은 기암절벽, 그 아래로는 가릉강의 칠살협, 네놈은 독안에 든 쥐야.’
미소 짓던 유가휘는 때마침 눈을 돌린 위산산을 보고 미간을 찌푸렸다.
하지만 그 순간 그가 고개 돌린 이유를 알았다.
“놈이다!”
위산산이 소리치는 방향, 눈보라 속에서 병사 하나가 쓰러졌다.
그 등에 달라붙은 다른 그림자가 보였다.
그림자는 떨어져 나가 눈보라 속으로 사라지고 병사는 쓰러졌다.
“이런 제길!”
이를 악문 유가휘는 느낌의 정체를 이제 알았다.
놈이 뒤로 달라붙었던 것이다. 그리고 이렇게 수하를 해치운 것이다.
“인원을 점검해라!”
* * *
단도는 병사의 등을 두부처럼 파고들어갔다.
천귀산에서 주운 단도다.
이런 쇠붙이들을 줍기 위해 갔다가 관청에 잡혀갔다.
거기서 맞은 매로 친구 아우와 왕칠이 죽었다.
재범이가 떠나는 날 이 단도를 현산 자신에게 줬다.
병사들에게 맞으면서도 억새 속에 쑤셔 박아뒀다는 단도, 이것을 주며 작별했다.
그 친구가 얘기 했다. 꼭 다시 돌아오라고.
입을 틀어막은 병사의 몸을 밀어버리고 현산은 그 손에서 활을 잡았다.
눈보라 속으로 몸을 감추는데 소리가 울렸다.
“놈이다!”
하지만 그 소리는 들리지 않았다.
현산의 머릿속을 온통 차지한 것은 죽음에 대한 생각이다.
아버지의 죽음, 친구들과 어머니의 죽음, 소병과 귀신오 동료들의 죽음, 사부와 언진사숙의 죽음.
그 죽음들은 자신 때문인 걸까?
“아니야!”
현산은 눈보라 속에 대고 고함을 질렀다.
* * *
화살이 날아왔다. 어김없이 또 한명의 목숨을 앗아갔다.
미간을 관통당한 병사는 부들대던 몸을 축 늘어뜨렸다.
“빌어먹을!”
나무 뒤에 몸을 숨기며 유가휘는 이를 악물었다.
벌써 여섯명째다.
놈은 빼앗은 활과 화살로 눈보라와 어둠 속에서 공격을 해 왔다.
이제 남은 수하들은 스물아홉명이다.
‘악귀 같은 놈! 놈은 이산을 손바닥처럼 알아!’
유가휘는 후회를 씹었다.
놈이 산으로 도망칠 때부터 짐작했어야 했다.
포위를 좁혀가는 줄 알았건만 놈은 비웃듯이 뒤로부터 다가와 암습하고 있다.
애초부터 놈은 도망갈 생각이 아니었다. 산으로 유인해 이렇게 할 심산이었다.
‘여길 벗어나야 해! 더 이상 숫자는 무용하다! 눈보라 치는 산에선 소용없어! 저 허접하고 비루한 놈들, 벽파검문 놈들도 아무짝에도 쓸모없어!’
유가휘는 수하들에게 소리쳤다.
“하산한다! 전원 밀집대형으로 모여라!”
명이 떨어지자 병사들은 유가휘가 있는 방향으로 모였다.
빠르게 모이는 수하들의 중심에 서서 유가휘는 소리쳤다.
“흩어지지 마라! 흩어지면 죽는다!”
한 덩어리가 된 유가휘와 병사들은 달리고 미끄러지며 산을 내려가기 시작했다.
고육지책이다.
한 덩어리가 되면 쉽게 표적이 된다. 하지만 흩어져 있을 때보다 생존율이 높다.
몸 한군데 화살을 맞을 것을 각오하면 동료의 부축을 받고 내려 갈 수 있다. 그러나 흩어지면 그럴 수가 없다.
바위 뒤에서 지켜보던 현산은 지그시 이를 물고 중얼거렸다.
“부하들의 몸을 방패로 삼겠다고?”
살기어린 미소를 입가에 물고 현산은 일어섰다.
산 아래를 향해 병사들과 보조를 맞춰 달리며 화살을 발사했다.
화살에 맞은 병사들이 휘청거렸다. 하지만 동료들의 부축을 받으며 계속 산을 내려간다.
활을 던진 현산은 그야말로 질풍처럼 산을 달려 내려갔다.
눈이 쌓인 바위를 차고 나무옆구리를 차며 산귀신처럼 이동했다.
어느새 병사들을 훨씬 앞질러 내려왔다.
‘너희는 산을 못 내려간다!’
현산은 눈보라를 뚫고 산허리를 우회해 달렸다.
마침내 목적한 장소에 닿았다. 산을 내려가자면 거쳐야 하는 지점이다.
주변을 빠르게 살핀 현산은 나무를 붙잡고 힘을 썼다.
종골근에서부터 치솟은 힘은 장딴지와 허벅지를 거쳐 허리를 지나 어깨에 모여 두 팔을 통해 아름드리나무에 전해졌다.
우드득, 소리를 내며 기울기 시작한 나무가 부지직 소리를 내더니 넘어갔다.
바위를 끌며 호약산 둘레를 돌던 수련의 힘이 만든 결과다.
나무는 하산로를 덮쳐버렸다.
나무를 피해 돌아 갈수 밖에 없는 형국을 만든 현산은 아래쪽 바위 밑의 돌덩이들을 차버렸다.
산을 항상 오르던 현산이 흔들리는 바위를 고정해 받쳐 놓았던 돌들이다.
놈들은 이 바위를 밟고 지나갈 수밖에 없다.
바로 옆은 나무가 쓰러져 막았고 반대편은 가파른 비탈이다.
이 바위를 밟고 내려가 다시 우측으로 방향을 바꿔 쓰러진 나무아래의 원래 길로 내려가야 한다.
그 길 밖에는 없다.
하지만 그렇게 되진 않을 것이다.
바위를 딛는 순간 놈들은 바위와 함께 비탈길로 떨어지게 될 것이다.
그것으로 죽지는 않겠지만, 현산의 칼을 피하지는 못 할 것이다.
* * *
“이사형! 우리도 내려가야 하겠습니다!”
“그래요, 여기서 그놈을 잡긴 글렀습니다!”
사제들의 재촉이 아니더라도 위산산은 이 산을 내려가고 싶었다.
정체를 알 수 없는 그놈은 다섯째 사제를 한칼에 쪼개 죽였다. 그리곤 귀신처럼 병사들을 죽이고 있다.
‘내가 여기서 왜 이 고생을 하는 거야?’
새삼스럽게 이 일에 끌어들인 막내사제 하재규가 원망스러웠다.
하지만 지금은 그런 생각을 할 때가 아니다.
어서 산을 내려가 놈의 암습을 피하는 것이 최우선과제다.
“어서 내려가자!”
위산산과 두 명의 사제는 백호 유가휘와 병사들의 무리지어 내려가는 뒤를 쫓아서 산을 내려갔다.
눈보라 저편에서 놈이 화살을 날려 왔다.
병사들이 맞았지만 계속 내려갔다.
놈의 공격이 멎었다.
눈보라만 미친 듯이 불어댔다. 그 속을 유백호와 병사들이 죽어라 달려 내려갔다.
그런데 한순간 그들의 우르르 굴러 떨어졌다.
그건 너무나 갑작스러웠다.
“뭐야 저거?”
위산산과 두 명의 사제는 멈춰 섰다.
그들이 내려가던 아래쪽엔 비탈로 굴러 떨어지는 스물아홉명의 병사들과 백호 유가휘가 보였다.
“으헉!”
백호 유가휘는 자신도 모르게 소리를 질렀다.
수하들과 한 덩어리가 되어 산을 내려가던 도중 갑자기 발밑의 바위가 무너졌다.
서로 붙잡고 있던 병사들 모두가 굴렀다.
그건 어떻게 해볼 사이도 없는 날벼락이었다.
스물아홉명의 병사들은 산비탈을 바위들과 함께 굴렀다.
처음 무너진 바위를 따라 주변의 바위들이 무너졌고, 처음 바위와 함께 구르기 시작한 병사들을 따라 후미가 굴렀다.
유가휘도 굴렀다.
한 덩어리가 되어야 한다고 했지만 사실은 방패막이로 삼았던 수하들과 굴렀다.
구르는 몸을 바위와 돌덩이들이 때리고 할퀴었다.
그렇게 계속 굴렀다. 멈추고 싶지만 멈출 수 없는 속도로 굴렀다.
몸을 못가누고 산비탈을 굴러 내려간 유가휘는 돌밭위로 나뒹굴었다.
마침내 구르기가 멈춘 것이다.
그대가라고 하기엔 엄청난 충격이 엄습했다.
어디가 어떻게 됐는지 안 아픈 곳이 없었고 제대로 움직여지지도 않았다.
“크으.”
신음을 흘리며 몸을 가누던 유가휘는 그 순간 눈을 부릅떴다.
자신과 수하들이 굴러 내려온 산비탈을 그놈이 뛰어내려 오고 있었다.
마치 대호처럼 비탈을 달려 내려오는 놈은 완벽한 균형을 유지했다.
하지만 감탄할 일이 아니다.
놈이 일어서는 수하들을 덮쳐 칼을 휘둘렀다.
놈은 악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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흑천의 칼이 울어. 9. 흑설혈풍(黑雪血風)(2)
2.
산비탈을 질주해 내려간 현산은 단 한순간도 지체하지 않았다.
뛰어내려온 속도 그대로 내달리며 일어서는 병사 한 놈의 목을 쳤다.
놈에게서 솟구친 피가 눈보라 속에 날렸다.
‘한 놈!’
숫자를 세며 현산은 해동도를 그었다.
소병에게서 배운 삼재도법의 초식을 비탕으로, 사부 정두헌에게서 배우고 익힌 것을 펼쳤다.
초식도 없고 형식도 없는 흑설무다.
손으로 펼치면 권법이 되고 도(刀)로 펼치면 도법이 되는 무예.
완성하지 못한 사부 정두헌의 염원을 분노로 토해 냈다.
‘두 놈!’
군도를 세우는 놈의 가슴을 쪼갠 현산은 온몸으로 숨을 쉬었다.
극한으로 단련한 육체를 바탕으로 깨운 전신의 모공으로 대기를 호흡했다.
이제는 의식하지 않아도 저절로 하는 행공, 뜨거운 피와 몸이 공명했다.
‘세 놈! 네 놈!’
연거푸 병사들의 목을 날리며 현산은 돌밭을 누볐다.
제방을 쌓던 시간 동안 하루도 거르지 않고 다닌 곳이다.
눈을 감고 걸어도 몸이 아는 곳이다.
이곳에서 돌을 쪼개고 나르는 동안 흘린 땀이 얼마인지 모른다.
바로 그곳에서 지금 병사들의 피를 뽑아내고 있다.
그들로 하여금 뿌리게 하고 있다.
호보촌 마을 사람들을 도살한 놈들의 목을 날리고 있다.
이것은 응보다.
더 이상은 당하고 살지 않겠다는 현산의 선전포고다.
‘다섯! 여섯! 일곱!’
현산은 그야말로 악귀처럼 칼을 휘둘렀다.
돌밭에 굴러 떨어진 병사들은 팔다리가 부러져 몸을 못 가누는 자들도 있었지만 대부분 일어섰다.
놈들도 강골에다 강훈련을 한 결과다.
하지만 그것이 확실한 죽음이 됐다.
‘여덟! 아홉! 열! 열한 놈!’
칼귀신이 되어 병사들의 사이를 누비는 현산은 병사들이 일어서서 대응을 하기도 전에 그들의 몸통을 쪼갰다.
경공을 익힌 자 못지않게 빠른 다리와 강한 육체는 무섭게 병사들과 부딪쳤다.
칼을 맞지 않은 자는 그대로 튕겨나갔다.
‘열둘! 열셋! 열넷! 열다섯! 열여섯!’
일어선 병사들을 베는 현산을 향해서 몸을 가눈 병사 두 놈이 활을 겨눴다.
하지만 현산이 던지는 비도가 빨랐다. 줄을 타며 던지던 비도다.
수박 쪼개지는 소리가 나며 활을 겨누던 두 놈의 미간에 비도가 박혔다.
얼마나 강한 힘인지 비도는 머리를 파고 들어갔다.
쓰러지는 놈의 화살은 제 동료의 몸을 맞혔다.
“열일곱! 열여덟!”
마음속으로 세던 숫자는 현산의 입 밖으로 터져 나왔다.
그 외침만큼 분노한 현산의 칼이 도망치려는 두 놈의 등을 갈랐다.
“열아홉! 스물!”
쓰러진 놈들의 등을 밟고 선 현산은 돌밭을 돌아봤다.
더 이상 서 있는 놈은 없었다.
칼로 베어 죽인 스무 놈 외에는 모두가 주저앉아 있었다.
팔다리가 부러진 놈들이고 비탈에서 떨어지기 전에 이미 화살에 맞은 놈들이다.
휘날리는 눈보라를 맞으며 선 현산의 칼, 묵빛 도신의 해동도에서 핏방울들이 떨어졌다.
쌓이는 눈 위를 파고든 그 핏물들이 그림을 그렸다.
쉬지 않고 번지는 혈화다. 커지며 물드는 그 그림은 눈귀신의 미소 같았다.
“네놈들이 왜 죽는지는 알겠지?”
아직 살아있는 병사들을 향해 현산은 다가갔다.
그런데 느닷없이 좌측에서 칼이 쇄도했다.
쓰러져 있던 놈이다. 죽은 것처럼 바위에 등을 기대고 있던 놈이 공격을 했다.
눈귀신도 놀랄 만큼 빠른 기습의 일격이다.
현산은 왼팔을 들어 막았다.
캉, 소리가 나고 군도가 비껴나갔다.
“헛!”
놀라는 자, 죽은 척 하고 있던 공격을 한 백호 유가휘의 몸통을 향해 달려든 현산은 손을 뻗었다.
끓는 모래와 쇳물에까지 담갔던 피나는 수련의 결과, 철사장의 일격을 박아 넣었다.
적을 분쇄하는 죽음의 일격이다.
“컥!”
두 다리가 들린 유가휘는 피를 뿜으며 나가 떨어졌다.
“할 줄 아는 게 그거냐?”
유가휘의 앞에 다가 선 현산은 왼팔을 어루만졌다.
군도의 날에 갈라진 가죽비구 안쪽에 날이 두터운 비도들이 보였다.
“난 내력을 쓸 줄 모른다. 하지만 몸은 그 누구보다 강하지.”
현산은 왼손을 가볍게 흔들었다.
“너에게 먹여준 철사장은 특별히 수련했다. 웬만한 돌덩이는 부수지. 네놈의 뼈와 내장들은 다 뭉개졌을 게다.”
그 말을 증명이라도 하듯 유가휘는 토혈을 했다.
그 핏속에 내장부스러기들을 섞여 나왔다.
안에서 터진 것이다. 피할 수 없는 죽음을 말한다.
“너, 너, 아, 악귀······”
“난 악귀가 아니야. 악귀는 네놈들이지.”
현산의 눈동자에 맺힌 불덩이가 확 팽창했다.
“힘없고 가여운 사람들을 짐승처럼 도살한 네놈들이야말로 다시없을 악귀다.”
현산은 유가휘를 향해 파란 안광을 뿜으며 속삭였다.
“네놈들이 한 짓의 대가가 무엇인지 잘 보아라.”
유가휘에게서 돌아선 현산은 병사들을 벴다.
하나하나, 주저앉아 운신하지 못하는 자들을, 남은 자들을 모조리 벴다.
그 일을 하는 동안 눈은 계속 내렸고 산은 눈보라에 짐승처럼 울었다.
마치 기뻐하는 것처럼.
핏물이 떨어지는 칼을 들고 현산은 다시 유가휘에게로 돌아왔다.
수하들은 죽는 동안 핏물을 게워내고 있던 유가휘는 오줌을 지리며 떨었다.
삶의 욕구가 그를 떨게 했다.
이런 지경이 되고도 살기 위해 애원했다.
“제, 제발, 사, 살려주······”
현산은 해동도를 유가휘의 입에 박았다.
* * *
눈보라는 미친 듯이 불었다. 세상을 온통 뒤덮을 듯이 눈이 휘날렸다.
그래서인지 하얘야 할 눈이 하얗게 보이지 않았다.
오히려 하늘빛을 덮어 온통 컴컴한 흑설이었다. 언제부턴지 눈이 내리면 이런 빛이었다.
“저, 저놈이 다 죽인 것 같습니다 사형!”
“저, 저거 유백호 아닙니까? 지금 죽인 자 말입니다?”
사제들의 경직한 음성을 들으며 위산산은 눈에 힘을 줬다.
어둠과 눈보라로 인해 산비탈 아래의 상황이 정확하게 보이지는 않지만 이제 다 끝났다.
움직이는 자는 하나다.
‘저놈이 다 죽였다! 저런 놈을 상대 할 수는 없어!’
입술을 물던 위산산은 그 순간 산비탈에서 급히 물러났다.
유백호와 병사들을 죽인 그놈이 돌아봤기 때문이다.
“가자!”
위산산과 두 사제는 정신없이 산을 내려갔다.
미끄러지고 구르고 비틀대면서 미친 듯이 산을 내려갔다.
병사들을 죽인 놈이 산을 돌아오기 전에 말이 있는 곳에 닿아야 한다.
이제는 살기 위한 것만 생각해야 한다.
무정도 위산산은 지금 이 순간 수치고 승부욕이고를 다 잊었다.
무인으로서의 자존심 같은 것도 생각나지 않았다.
오로지 살아야겠단 생각. 저놈을 피해야겠단 생각뿐이다. 그리고 그건 자존심 높던 두 사제도 마찬가지였다.
“달려! 어서 이곳을 벗어나야 한다! 대사형에게 알려야 해!”
혼을 빼놓은 자들처럼 세 사람은 산 아래로 달렸다.
* * *
눈보라는 호약산을 허물어뜨릴 듯이 세차게 불었다.
산을 뒤흔드는 바람이 무시무시한 호곡소리처럼 밤하늘을 울렸다.
눈귀신이 우는 소리다. 좋아하는 소리다.
눈은 얼마나 내리는지 산이 제대로 보이지도 않는다.
“으 참, 빌어먹을 날씨로다.”
하량호는 몸을 웅크리며 연신 투덜댔다.
괜히 따라나섰다는 둥, 백호 유가휘와 병사들이 제대로 못하고 있다는 둥, 추위와 기다림으로 인한 긴장이 표정과 몸짓으로 나왔다.
그걸 비웃는 눈보라는 더욱 매섭게 불었다.
하재규는 부친 하량호에게 가죽 피풍의를 한 겹 더 씌워주었다.
“조금만 참으세요. 곧 사형들이 놈의 머릴 가지고 돌아올 겁니다.”
“그래, 그래야지 그렇지 않으면 이 고생이 무슨 소용이겠느냐? 소나무 숲에 웅크리고 앉아 눈보라를 피하는 신세라니. 내가 이런 지경에 처할 줄은 한 번도 생각 못했구나.”
“고생하신 보람이 있을 겁니다. 조금만 더 참으시면 기분 좋은 웃음을 지으면서 현청으로 돌아가시겠지요. 탕으로 속을 덥히시고 술 한 잔으로 피곤을 푸시게 될 겁니다.”
“허허, 네 말을 듣고 있자니 침이 넘어간다.”
“하하하. 조금 더 아껴두십시오.”
웃던 하재규는 웃음을 멈췄다.
눈보라 저편, 산길 입구로부터 그림자들이 달려오고 있기 때문이다.
검은 장막 같은 어둠의 눈보라에 가려진 그림자들은 곧 알아봤다.
“이사형!”
하재규가 부르는 쪽으로 삼인의 그림자가 달려왔다.
가운데로 달려오는 무정검 위산산이 하재규를 향해 소리쳤다.
“도망가야 해! 어서 말에 타!”
하재규는 꿈틀 눈썹을 뒤틀었고 쪼그려 앉아 있던 하량호는 이게 무슨 개 하품소리냐는 얼굴로 미간을 찌푸렸다.
“저 자가 지금 뭐라는 거냐? 뭐? 도망가야 한다고?”
하량호가 주춤대며 일어서던 그때였다.
하재규와 하량호 부자가 말을 묶어 놓고 서 있는 송림의 앞쪽, 유일하게 횃불이 밝혀져 있는 그곳으로 향하던 세 사람 중 하나가 쓰러졌다.
“사형!”
벽파검문의 넷째제자가 경악해 부르짖었다.
자신의 오른편에서 달리던 삼사형이 뒤통수에 비도를 맞고 쓰러졌기 때문이다.
“사제!”
대여섯 걸음 앞서 달리던 위산산이 뒤돌아 쓰러진 사제를 끌고 왔다.
경악한 얼굴의 하재규와 하량호부자 앞에서 시체를 살피니, 뒤통수에 비도가 박혀 안면까지 튀어나와 있었다.
“이, 이게 무슨 일이야?”
“사형?”
하량호와 하재규의 놀람과 의문을 무시하고 위산산은 소나무에 묶어 놓은 말 등에 올라탔다. 그리고 부자에게 외쳤다.
“놈이 다 죽였어! 유백호란 놈과 병사들 전부 죽었다고!”
그 외침을 남기고 위산산은 말머리를 돌려 달렸다.
사사제도 그 뒤를 따랐다.
멍한 얼굴로 서로의 얼굴을 쳐다보던 하재규와 하량호는 후다닥 말을 잡아타고 질주했다.
사색이 된 부자가 떠난 직후 현산이 눈보라를 뚫고 달려왔다.
숨소리 하나 거칠어진 기색이 없는 그는 도주해간 자들의 뒷모습을 노려보다가 남아있는 말 등에 올랐다.
“핫!”
현산은 검은 장막과 같은 눈보라를 뚫고 말을 달렸다.
* * *
위산산은 서남쪽 강유(江油)를 향해 달렸다. 사력을 다해 달렸다.
‘알려야 해!’
강유는 대사형이 있는 곳이다.
본래 그곳으로 벽파검문의 여섯사형제가 외유를 나왔다.
그러하던 차에 막내사제 하재규가 아비의 전갈을 받고 모두 이곳으로 온 것이다.
따지고 보면 그 전갈이 이 모든 일을 만들었다.
‘재수가 없으려니!’
이를 갈아보지만 소용없는 일이다.
전갈을 받고 즐겨보자는 심산으로 나서자 한 것이 자신이다.
하재규부자에게 점수도 따고 용돈도 받을 요량에서였다.
그런데 다 틀어졌다. 귀신을 만났다.
여기서 멈추면 죽는다.
살자면 추적해 오는 놈으로부터 벗어나 대사형에게 가야 한다.
그 방법뿐이다.
강유에 가면 대사형이 아니더라도 도움을 요청할 사람은 많다.
“하리얏!”
말배를 더욱 세게 차며 위산산은 질주했다.
하재규는 말을 달리면서 뒤를 돌아봤다.
허겁지겁 쫓아오고 있는 부친 하량호의 뒤로 놈의 모습이 보였다 사라졌다를 반복했다.
휘날리는 눈보라 때문에 분명치가 않았다.
눈보라는 흑색장막이 들이친 것만 같다.
‘저놈은 대체 뭐지? 정체가 뭐야? 저놈이 화산파의 고수인가?’
그 생각이 들었지만 그건 아닌 것 같았다.
추적해 오는 젊은 놈은 화산파의 무공을 쓰지 않았다.
한 번도 본적 없는 무공이었다.
상승의 현기는 느껴지지 않았다. 하지만 놈의 손에 다 죽었다.
저놈이 병사들을 다 죽였다 했다.
‘저놈이 보기와 다르게 엄청난 고수란 말인가?’
다시 생각해 봐도 그런 느낌은 없다.
체구가 건장하고 생김이 용맹스럽긴 했지만 내가고수의 풍모는 느껴지지 않았다.
그런데도 저놈에게 다 당했다는 건 어찌 설명해야 하나?
다 도망가는 이 상황이 왜 생겼는가?
군병들도 몰살했다.
군에서도 손꼽히는 실력을 가져야만 오를 수 있는 백호 한명과 기마정명 오십 명, 그들이 전부 저놈 손에 죽었다.
도대체 이 상황을 알 수 없다.
이건 그야말로 악몽이다.
저놈은 눈귀신인가? 민가의 전설에 나오는 귀신, 눈보라 칠 때 목숨을 앗아간다는 그 귀신?
“아버지! 힘내세요!”
부친 하량호에게 힘내라고 외치던 하재규는 눈을 치떴다.
눈보라 속에서 보였다가 안보였다가 하던 놈의 모습이 느닷없이 부친 하량호의 등 바로 뒤에서 나타났기 때문이다.
“아버!”
끝말을 하재규가 맺기도 전에 하량호의 가슴으로 칼이 튀어나왔다.
부릅뜬 눈으로 아들 하재규를 하량호가 봤다.
두 사람의 눈이 마주친 것은 찰나, 하량호는 말 아래로 굴러 떨어졌다.
눈이 거칠게 튀었고 그 위로 붉은 피도 무섭게 튀었다.
“안 돼!”
하재규는 질주하던 말을 멈추고 말머리를 돌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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흑천의 칼이 울어. 9. 흑설혈풍(黑雪血風)(3)
3.
눈 위로 구르는 지현 하량호의 돼지 같은 몸을 보면서 현산은 말을 정지시켰다. 달리던 말은 울음을 토하며 멈추려 했지만 거칠게 미끄러졌고, 제어되지 않는 그 힘을 이용하여 현산은 말 등을 차고 몸을 날렸다.
눈보라를 헤치고 비상하는 비조처럼 허공을 도약한 현산은 소용돌이가 됐다. 되돌아 달려오는 하재규의 가슴을 향해 와룡각(臥龍脚)을 차 넣었다.
파동처럼 떠오르는 심득, 몸과 마음이 일으키는 반응, 그것의 발현이다.
소림오권을 바탕으로 한 흑설무다.
이 순간 가장 적합한, 최적으로 이루어지는 심신의 포효다.
마음이 일면 몸은 저절로 형을 그린다.
소용돌이를 만든 몸이 이루는 와룡각은 하재규에게 창으로 뻗어 들어갔다.
놀란 얼굴의 하재규가 본능적으로 검을 휘둘렀다.
하지만 허사다.
현산은 소용돌이 속으로 하재규의 검을 휘감아 들였다. 살고자 하는 발악의, 화룡점정의 수법으로 뻗어 나온 검을 왼발로 찍어 누르고 오른발로 강타했다. 그것이 모두 소용돌이치는 움직임 속에서 찰나에 이뤄졌다.
보고도 믿을 수 없는 한수.
콰직, 소리가 눈 속에 터지고 하재규의 몸이 떠 뒤로 날아갔다.
“쿠에엑!”
입으로 피를 게워내며 눈 위를 뒹굴고 있는 하재규를 향해 현산은 천천히 다가갔다.
한발 한발, 눈보라를 등지고 눈 속에 도장을 찍듯이 발자국을 남기면서다.
하재규 앞에서 걸음을 멈춘 현산은 놈을 응시하다 손을 냈다. 고통스러워하는 놈의 머리채를 잡고 그 아비 하량호의 곁으로 짐승처럼 끌고 갔다.
“크흑, 아, 아버지.”
“재, 재규야.”
서로를 부르며 손을 뻗는 두 사람, 그들의 손을 현산이 칼로 내리쳤다.
손목이 순간적으로 잘려나갔다.
아버지와 아들의 손목, 하재규와 하량호의 손목이다.
두 사람은 움찔하기만 했다. 하지만 곧 비명이 터져 나왔다.
“크아아!”
“으허어!”
비명 지르는 두 사람의 입을 현산은 발로 짓뭉갰다.
금세 피범벅이 된 하씨 부자는 눈 위에 피를 흘려내며 버르적거렸다.
그런 그들의 위로 눈은 계속 해서 덮어 내렸다. 그들이 흘리는 피를 먹어치우려는 듯이다.
“네놈들을 반겨줄 거다.”
차가운 한마디를 던진 현산은 두 사람을 길옆 고목으로 끌고 가 앉혔다.
말 등에서 풀어낸 포승으로 두 사람을 고목에 묶고, 발버둥 치는 다리는 철봉을 꺼내, 세 개로 분리된 것 중 하나를 손에 잡고 내리쳤다.
또 다시 두 사람이 비명을 질렀다.
뭉개진 입으로 처절하게 고통을 호소했다.
그렇다는 건 아직도 죽음과는 거리가 있다는 방증이다.
그런 두 사람에게서 현산은 미련 없이 돌아섰다.
말에 올라탄 현산이 떠나갈 때까지만 해도 하재규와 하량호는 죽음의 공포에 떨었다.
육신의 고통보다도 그것이 더 컸다.
그런데 놈이 갔고 두 사람은 아직 죽지 않았다.
육신의 고통은 엄청났지만 숨은 붙어 있다.
그렇다, 아직은 살아 있다.
하재규는 가슴이 부서지고 하량호는 칼로 몸통을 관통 당했지만, 두 사람 다 다리가 분질러지고 손목이 잘렸지만, 입이 뭉개졌지만 살아있다.
그래서 두 사람은 살기위해 몸부림 쳤다.
그러나 그 몸부림이 얼마나 부질없는 것인지를 깨닫는 데는 오래 걸리지 않았다.
눈보라 속으로부터 하나둘씩 나타난 개들, 아니 개의 모습을 한 늑대라는 이름의 야수들, 놈들이 이빨을 드러내며 으르렁거리는 것이 현실이었다.
눈동자와 전신을 부들대는 하재규와 하량호 부자는 늑대들이 달려들어 몸뚱일 물어뜯었지만 비명을 지를 수가 없었다.
놈들이 제일먼저 물어버린 곳이 목이기 때문이다.
* * *
추적은 쉬웠다.
눈 위로 선명하게 찍힌 말발굽은 현산에게 어디로 가야 할지를 명확하게 보여준다.
하지만 시간이 많지는 않다.
계속 쌓이는 눈은 흔적을 지워버릴 것이다. 이 눈은 아군인 동시에 적군이다.
‘반각(약 7분)?’
도주하고 있는 두 놈과의 거리와 시간을 추측하고 동시에 놈들이 가는 방향을 예측했다.
이 길로 가면 강유가 나온다.
큰 성읍이다. 벽파검문의 끈도 있고 친분 있는 자들도 있을 터다.
놈들은 도움을 청하려는 것이다.
현산은 이를 악물고 살기를 뱉었다.
“네놈들 중에 살 놈은 없어!”
말머리를 좌측으로 돌린 현산은 강유로 향하는 지름길, 호보촌 마을 사람들만 아는 숨겨진 길로 달렸다. 길이 험해 통행이 없는 곳이지만 시간은 훨씬 단축될 것이다.
‘사부님.’
험한 둔덕길을 달려 올라가며 현산은 사부 정두헌을 마음속으로 불렀다.
기구하고 불행한 일생을 살다가 결국 목숨을 거둔 분이다.
자신에게 지난 오년간 심혈을 기울여 심득을 전하신 분이다.
그것이 마지막 불꽃이 됐다.
그렇다. 지금 돌이켜보면 그렇다고 밖에 말 할 수 없다.
이렇게 최후를 맞을 것을 예감하시었던가?
온 힘을 다해 현산 자신을 가르쳤다. 그 가르침을 맹목적으로 따랐다.
말은 안했지만 언진은 비웃었다.
사부 정두헌의 이론과 생각을 믿지 않았다.
하지만 시간이 지날수록 조금씩 바뀌었다.
현산이 날마다, 수련을 할수록 달라졌기 때문이다.
그렇지만 한계가 있다는 것을 무언으로 말했다.
결국 외가라 하는 것은 한계에 다다르게 마련이고 내가의 무공을 넘어 설 수 없다는 확신이다.
그리고 그건 맞는 말이다.
현산은 수련의 한계에 도달했다.
사부 정두헌도 그것을 알고 있었다.
더 이상의 방법으로는 진전이 없다는 걸 사부와 제자 모두 알았다.
엄밀히 현산의 능력을 말하라면 육체적 능력을 극대화한 이류의 외가무인 정도다.
이 한계를 벗어나야 한다.
그것을 사부 정두헌과 현산 자신 모두 고민하고 있었다.
사부의 이론은 정확한 체계가 없었다. 그렇기에 전수받은 박투술에 이름도 없었다.
그것을 현산이 흑설무라 명명했지만 한 덩어리의 미완성무예다.
여기까지 발전 할 수 있었던 것은 체공호흡 때문이다.
내력을 쌓는 것이 아닌 모공으로 대기와의 교류를 하는, 육신을 열고 단련하는 그 방법이 이만큼의 발전을 이뤘다. 그것으로 인해 육신은 강골강근이 됐다.
하지만 그조차도 미완이다.
짓다가 만 그릇과 같은 그것을 현산은 사부 정두헌과 함께 연구하고 고민하고 몸으로 부딪치며 완성해 가려고 했다. 날마다 조금씩 보완을 해 나갔다.
하지만 이젠 그럴 수가 없다.
‘개자식들!’
이가 으스러져라 악물고 현산은 말을 달렸다.
쓰러진 고목을 뛰어넘고 바닥 꺼진 개울을 건너고 가시 같은 잡목지대를 가로질러 다시 길로 나왔다. 그리고 놈들을 봤다.
무시무시한 살기를 뿜으며 현산은 눈보라를 부수고 나아갔다.
오로지 살겠다는 일념으로 미친 듯이 말을 달리던 위산산은 한순간 섬뜩한 느낌이 뒤통수에 꽂히는 걸 느꼈다.
‘저놈!’
놈이 쫓아왔다.
어디서 어떻게 나타났는지 모르지만 놈이 사사제의 뒤로 맹렬하게 달려오고 있다.
방금 전까지만 해도 보이지 않던 놈이다.
검은 장막 같은 눈보라 뒤에 분명 있다.
정말로 저놈은 악귀가 아닐까?
스스로의 터무니없는 생각에 위산산은 고개를 흔들었다.
도망치고 있는 자신의 부끄러웠다.
무정도란 별호까지 있는 자신이다.
벽파검문의 이제자하면 모르는 사람이 없다. 그런데 수치조차 잊고 도망치고 있다.
왜 이 밤에 이렇게 됐을까?
무정도, 누구나 인정해 주던 무인이 자신이다.
물론 사문이 있는 덕양(德陽) 인근에서다.
실력은 솔직히 말해 이류다.
대사형은 일류를 바라보고 있지만 자신은 그렇지 못하다.
대사형과 자신과의 차이는 굉장히 크다.
하지만 어디 가서도 큰소리 칠 수 있는 실력을 가졌다고 자부한다.
물론 사천북부지방에 한해서다.
진짜 고수들만 안 만난다면 목에 힘 줄만하다. 그런데 그것이 박살났다.
호보촌이란 벽촌에서 귀신을 만나고 말았다.
황당하고 어이없는 지경이다.
대사형을 뺀 벽파검문의 제자 다섯 명이 움직여서 둘만 남았다.
오십 명의 기마정병도 같이 움직였지만 그들도 다 죽었다.
막내 하재규는 이제 죽은 것이 분명하다.
이 일의 원인인 그 아비도 죽었을 것이다.
‘개 같은 놈! 이런 일에 우리를 끌어들이다니!’
위산산은 하재규와 하량호를 욕했다. 그들이 아니었다면 벌어지지 않았을 일이다.
그 부자 놈들 때문에 이런 일이 생겼고 이런 꼴이 되었다.
돈만 아니라면 안 봤을 놈들이다.
‘멍청한 놈들!’
하량호는 아들 하재규를 벽파검문에 입문시켰다.
그게 칠년 전이다.
지현 하량호의 돈을 우려먹을 심산이었던 사부가 그를 찾아가 몇 수 보이자 얼씨구나 자식을 맡긴 것이다.
하량호 정도의 지위와 재력이면 청성파에 직접 입문시키는 것도 가능하다.
하지만 멍청한 그놈은 백성들 골을 빼먹는 일만 능했지 다른 머리는 돌아가지 않는 놈이었다. 결국 그 멍청한 놈들 때문에 이렇게 죽게 생겼다.
‘이대로는 안 돼, 저놈을 떨어뜨려야 해, 시간을 벌어야 해!’
그렇게 판단을 내린 위산산은 뒤에서 쫓아오는 사사제를 돌아봤다.
눈보라에 얼굴을 찡그리면서도 맹렬히 달리는 사사제는 위산산과 눈을 마주쳤다.
뭐냐고 묻는 눈이다.
위산산은 속도를 조금 늦춰 사사제와 나란히 말을 달렸다.
조금 의아한 눈으로 보던 사사제는 다시 앞을 보고 달리는 데만 집중했다.
그런데 위산산이 검을 휘둘렀다.
느닷없는 일격.
검갑채로 후려친 일격에 사사제는 목과 어깨를 강타당하고 말 아래로 떨어졌다.
울부짖는 말과 눈 위로 구르는 사사제를 보며 위산산은 앞으로 달려갔다.
현산은 눈을 치떴다.
나란히 달리던 두 놈 중에 한 놈이 말에서 떨어졌기 때문이다. 그런데 그 상황이 황당했다. 한 놈이 다른 한 놈을 쳐서 떨어뜨렸기 때문이다.
‘시간을 벌겠다는 수작이구나!’
해동도를 뽑아든 현산은 질풍처럼 달려갔다.
말에서 떨어진 놈은 몸을 일으켜 위산산을 황망히 바라보다가 현산을 보고 기함했다.
놈은 즉시 길옆의 숲으로 도주했다.
현산은 놈이 도망치는 숲으로 말을 몰았다.
나무들 사이로 도망치는 놈을 쫓기가 쉽지 않다.
그렇게 판단한 순간 지체 없이 말 등을 박차고 내려 놈을 향해 달려갔다.
헉헉대는 놈의 숨소리가 들린다.
손을 뻗으면 닿을 만한 거리까지 접근했다.
바로 그 순간 놈이 뒤돌며 검을 그었다.
상체를 숙여 검을 피한 현산은 굽혔던 무릎을 펴며 폭발하듯 튀어나갔다.
그 몸이 놈의 가슴을 받았다.
펑 소리를 내며 튕겨나간 놈은 고목에 등을 부딪치고 미끄러졌다.
현산은 주먹을 내질렀다.
수없이 뻗어냈던 주먹, 바위도 부수는 주먹, 그 주먹이 주저앉는 놈의 가슴속을 파고 들어갔다.
뼈가 부서지고 내부가 뭉개지는 느낌이 선연하다.
놈의 입으로 울컥하며 피가 튀어 나왔다.
부들거리는 놈의 얼굴 앞에 얼굴을 맞대고 현산은 속삭였다.
“널 버린 놈도 죽일 거다.”
벽파검문의 사사제, 이 사형으로부터 버려진 그는 고개를 꺾었다.
마지막 그 얼굴에 드러난 것은 고통만은 아니었다.
주먹을 빼고 돌아선 현산은 저 뒤로 서 있는 말을 향해 달려가 올라탔다.
말은 울부짖음을 토하며 즉시 달렸다.
눈은 계속 내렸다.
계속되는 죽음을 감추려는 듯이 시커멓게 내리는 눈, 흑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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흑천의 칼이 울어. 10. 강유에서 만난 자들(1)